60. 비싼 여자
“미래는 도전하는 사람에게 아름답습니다. 오늘은 내일을 위해 존재하는 거니까. 그런 의미로 권희원 씨는 도전을 멈추면 안 됩니다.”주혁은 여전히 그녀의 미래에 집착했고.
구언은 그런 집착에 침착한 대응을 했다.
“도전의 기준이란 모호하지 않습니까? 오늘을 살아가는 것조차 위대한 도전이라고, 저는 생각하는데요.”그리고,
“사랑해.”때마다 대화에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말로 분위기를 박살 내는 사람이 여기 있다.
“……쉣.”쉣. 주혁은 도리질을 쳤고,
“……하.”구언은 탄식하며 이를 꽉 깨물었다.
틈만 나면 ‘사랑한다’는 말로, 지환은 두 사내의 미간에 깊은 내 천(川) 자를 선사했다.
“거 참, 적당히 합시다. 고막에 닭살이 끼었잖아요.”구언은 질색하는 얼굴을 하며 지환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머릿결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지 혼자 다른 세상을 살고 있다.
“아아, 미안합니다. 제가 때와 장소를 가릴 줄 아는 사람이 아니다 보니.”적의 적은 아군이라고 했지만 이 상황에 누가 더 적군인지 판별이 어려울 지경이다.
지환은 계속 떠들어보라며 두 사내를 손짓했다.
“이쪽은 신경 쓰지 말고 말씀들 나누세요. 우린 괜찮습니다.”너무나 신경 쓰이게……
“그리고 우리는 지금 일 분 일 초가 아쉬운 신혼부부니까. 더더욱 신경 쓰지 마세요.”지금 니가 만들고 있잖아!
아오, 구언은 눈꼬리를 끌어올리며 와인을 마셨다.
힐끔 주혁을 바라보니 저쪽도 터지기 일보 직전이다.
아닌 척하며 묘하게 사람 속을 긁는다.
시종일관 웃고 있는 지환의 얼굴도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결국은 승리자다 이거냐…….
“그나저나 대표님, 괜찮으세요? 와인 많이 드신 것 같은데.”희원은 지환의 손길을 슬쩍 바깥으로 밀며 주혁을 바라보았다.
그의 주량을 알 길은 없지만 마신 양이 살벌한 것은 사실이다.
“괜찮습니다. 사내들끼리 술 한 잔도 섞지 않고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지 않네요.”그는 또다시 보조개를 꺼내며 웃었다.
“특히나 이런 분위기를 맨정신으로 버티기엔 무리가 있고.”“이런 분위기라니? 어떤?”지환이 껴들며 묻자 주혁의 이마에 씰룩씰룩 실핏줄이 터진다.
본인을 겨냥한 말이라는 걸 알고도 뻔뻔하게 물어보는 저 불량한 양심. 너무나도 불쾌하다.
불쾌하다! 너무나!
“분위기를 만들고 있는 당사자가 그걸 모른다고 하면 쓰겠습니까?”“대표님께선 표현의 자유, 존중해주실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입니다.”“표현도 적당한 테두리 안에서 존중을 받는 법이죠.”“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것이 테두리를 벗어난다는 건가요? 근거 있는 말입니까?”“근거는 내 기분이 근거입니다. 다른 게 근거가 아니라.”“워워, 침착해요. 아직 사랑한다는 말은 스물여덟 번 정도 더 남았으니까.”……취한 척하고 그냥 때릴까.
주혁은 와인을 한 입 삼키며 깊게 숨을 내리 쉬었다.
마치 희원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손에 쥔 것처럼 의기양양 어깨 펴고 있는 꼴이라니, 너무나 보기 싫다.
그녀는 어째서 저런 남자와 결혼까지 하게 된 걸까.
“여기, 와인 한 병 더.”주혁이 와인을 더 시키자 지환은 조용히 와인을 마셨다.
한 놈은 그녀의 미래를 걸고 열을 올린다. 또 한 놈은 그녀의 과거에 취해 열을 올린다.
……그래봐야 소용없는 얘기란 말이다.
난, 그녀의 현재니까.
흥.
“와인 너무 많이 마신 것 같은데…….”희원이 중얼거리며 빈 병을 바라보자 주혁은 턱을 괴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보조개는 평소보다 깊게 파였다.
“더 마실 수 있습니다. 난 아직 권희원 씨에게 할 말이 남았으니까.”……후.
이윽고 주혁은 고개를 돌리며 짧게 숨을 불어 내쉬었다.
어떻게든 사업적인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그는 지금까지 예열의 시간을 보냈다.
주당인 두 사내의 틈에 껴서 한두 잔 의식 없이 마시다 보니 꽤나 많은 양의 와인을 마시고 말았다.
흐트러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순간순간 아찔함이 다녀갔다.
“잠깐 실례 좀 할게요.”희원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세 사내의 눈에 번쩍, 하고 불꽃이 튄다.
둥근 테이블에 각을 잡고 앉아 멀어지는 희원의 뒷모습만 바라보던 세 사내는 척, 고개를 돌리며 서로를 째진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구언은 적당히 좀 하라며 지환에게 눈빛으로 타박했고 흥, 몰라, 지환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외면했다.
주혁은 깍지 낀 손을 테이블 위에 올리며 목소리를 낮췄다.
“서지환 씨,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아뇨. 빙빙 돌려 물어봐 주세요. 저는 못 알아듣는 걸 좋아합니다.”“…….”저걸…… 죽여 살려…….
주혁은 이미 많이 먹은 와인을 벌컥벌컥 삼키며 화를 참았다.
자꾸 열이 받는데, 구체적으로 왜 열이 받는지는 잘 모르겠다.
후, 주혁은 짧게 숨을 쉬었고.
“권희원 씨에게 해외 진출에 대한 제안을 했습니다. 그런데 거절을 당했죠.”“너무 단도직입적인데. 더 빙빙 돌려 말할 순 없겠습니까?”“서지환 씨, 장난 사절입니다. 난 진지하니까.”“누군 장난처럼 보입니까?”지환은 홀짝, 와인을 비웠다.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내 말뜻을 이해 못 하고 있는 건 대표님인 것 같은데요.”“아내의 미래가 엉망이 되어도 괜찮다는 말입니까?”……빈 잔을 돌려보다가, 지환은 헛웃음을 토했다.
그러곤 시선을 들었다.
“권희원의 미래가 왜 당신의 손에서 완성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당신 아니면 엉망인가?”“당연하지. 나니까.”주혁은 깍지 낀 손에 힘을 주며 나직하게 답했다.
“당신 와이프는 당신의 아내로만 살기 너무 아까운 인재라는 말입니다. 나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는 사람이고.”“……그것참 대단하군요.”“그런 대단한 사람에게 잠시 맡겨줄 순 없겠습니까? 최고가 될 수 있단 말입니다, 당신의 아내는.”“당신의 아내, 라는 표현 말고 무용수 권희원으로 표현할 순 없겠습니까? 그녀는 내 소유물이 아닌데 말입니다.”“당신이 당신의 아내로만 머물길 바라잖아. 권희원이라는 대단한 무용수가.”어느덧 말이 짧아진 주혁에 눈빛에 취기가 보인다.
저걸 들이받아? 말아? 지환은 잠시 고민하다가 와인을 따르며 입술을 열었다.
“그 대단한 무용수가 내 곁에서 살겠다는데 난들 존중 안 할 이유가 있겠나?”들이받을 필요 없이, 그냥 같이 말 놓으면 되는 거다.
“게다가 사랑하는데.”“하, 사랑? 사랑이 밥 먹여주나? 성공을 이뤄주나? 날개를 달아줘?”“밥 먹여주고, 성공 이뤄주고 날개, 달아줘.”“…….”“당신은 잘 모르겠지만.”“어리석긴.”“뭐, 보다시피 내가 좀 철이 없어서.”지환이 피식 웃으며 답하자 주혁은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그녀만큼 말이 통하지 않는 답답한 인물이다.
그녀가 성공하면 남편인 본인도 함께 인생이 바뀔 수도 있는 일인데, 왜 저러고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건지 모르겠다.
“취한 것 같은데 자리 파하죠. 더 있다간 서로 웃으며 헤어지지 못할 것 같은데.”구언이 자리 정리에 나서자 주혁은 가득 따른 와인을 다시금 한껏 비워냈다.
술김인가, 이토록 감정 조절이 되지 않는 것도 처음이다.
그러곤 휘청휘청하는 손을 들어 지환을 가리켰다.
삿대질이다.
“똑바로 들어. 나는 당신 와이프를 반드시 데리고 갈 거야.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걸 보여줄 거야. 당신 와이프를 내가, 세계 최고의 무용수로 만…….”쿵, 지환은 거칠게 와인병을 내렸다.
주혁은 천천히 말꼬리를 흐렸고, 그제야 지환은 사납게 주혁을 바라보다가 입술을 열었다.
말끝마다 당신 와이프,
당신 와이프.
“당신은 서지환의 와이프를 보러 이곳에 왔나? 무용수 권희원을 보러 온 게 아니고?”“…….”“그것부터 정확하게 인지하고 말해주면 좋겠군요. 서지환의 아내를 보러 온 건지, 무용수 권희원을 보러 온 건지도 모르는 사내에게 그녀의 미래를 맡길 수는 없는 거니까. 더더욱.”그녀가 저 멀리 걸어오는 것을 인지한 지환은 천천히 웃었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날 붙잡고 이런 말을 해봐야 소용없습니다. 모든 선택은 그녀가 스스로 하는 거니까.”“당신은 그럼…… 뭘 하는데.”“선택에 대한 존중. 믿으니까.”영문 모르는 그녀는 자리에 앉았다.
휴, 답답하리만치 틈이 없는 부부였다.
“왜 그렇게 대표를 도발합니까? 애도 아니고.”지환이 화장실을 찾자 구언이 따라 들어온다.
거울 앞에 지환이 서자 녀석의 타박은 시작되었다.
“뭘 그렇게까지 발끈해서 정색을 해요? 딱 봐도 그 대표 취했던데.”“걸어오는 싸움은 피하기가 힘드네. 사람을 직접 때릴 순 없으니 말로 때릴 수밖에.”그 싸움…… 본인이 먼저 걸지 않았나…….
“정식으로 초대도 받지 않은 사람이 자리에 껴서는 헛소리를 지껄이는데, 내가 정상인으로 받아줄 수가 있겠어? 심지어 내 아내와 관련된 일인데?”그러는 본인은…… 정식으로 초대받아서 온 것처럼……?
“사돈 남 말 하고 있다…….”“지금 무슨 소리 들은 것 같은데. 그거 내 얘긴가?”“아, 아녜요. 설마.”구언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것을 귀신같이 들은 지환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그러다가 힐끔, 시선을 들어보니 지환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그쪽은 괜찮나? 꽤 마시던데.”“나요? 난 괜찮죠.”“와인 잘하네.”“그러는 댁은 아닌 것처럼.”가성비가 좋지 않은 남자 둘이서 이죽거린다.
“팔은 어쩌다가 그렇게 됐습니까?”“어, 말하자면 팔을 내어주고 그녀를 얻은 전설의 사건이 있었지.”“쉽게 좀 말해요.”“계단에서 굴러떨어졌어.”죽을 뻔했지. 지환이 중얼거리며 자신의 얼굴을 요리조리 바라본다.
이제 보니 이 남자들, 의식의 흐름대로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
“거, 참 잘생겼다. 참 잘 생겼네.”“……나요?”구언은 나 말하는 거냐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지환이 질색하는 얼굴을 하고 있다.
“그건 또 무슨 헛소리? 나요, 라니?”“댁? 그, 그럼 지금 댁 말한 거요?! 본인이 본인더러 잘생겼다고?!”“무슨 질문이 그래? 둘이 있는데 그쪽 아니면 나겠지. 두개골이 쓸데없는 걸 지키고 있네.”“성격…… 진짜 최악이다…….”지 입으로…… 지 얼굴 잘생겼다고…… 말하고 싶어……?
구언은 못 믿겠다는 시선으로 지환을 훑었다.
그러자 지환이 뒤에 걸린 포스터를 턱 끝으로 가리킨다.
거울에 반사되는 곳으로 시선을 주니 어느 유명 배우의 뮤지컬 홍보 포스터가 붙어 있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가 잘생겼다고. 생사람 잡지 말고 개연성을 좀 따져줬으면 좋겠는데.”“아, 놀래라. 난 또 본인이 잘생겼다는 줄 알고 미쳤다 했는데.”“본인이라고 생각하고 ‘나요?’라고 했던 그쪽 질문도 만만치 않았어.” 지환이 자신의 머리를 손보며 중얼거리자 구언은 꿍얼거리며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나 진짜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요.”“뭔데?”그러다가, 구언은 다시 입술을 열었다.
“진짜로 사랑이 밥 먹여주고 성공시켜주고 날개 달아준다고 생각합니까?”“뭔 소리야. 내가 아무리 학창시절에 공부만 하고 반듯하게 살았다 해서 세상 물정까지 모르는 건 아니거든.”“아까 전에 그렇게 얘기했잖아요, 대표한테.”“그런데 권희원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또, 또 헛소리. 아오, 이 팔불출. 댁의 두개골은 지킬 게 없어서 편하겠네.”지킬 게 없다니. 뇌, 뇌가 없다는 뜻?
그건 말이 너무 심하잖아!
“진심인데. 권희원이라면 가능할 수 있지. 그녀니까.”“됐어요.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지환이 대수롭지 않게 답하자 구언은 미간을 사정없이 구기며 질색했다.
마음은 누그러지면서.
……그래. 그녀라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
당신의 사랑을 먹으며, 당신의 사랑 안에 날개를 달아 행복할 수 있는.
“맞아요. 희원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죠. 희원이의 꿈은 사실 본인이 유명해지는 건 아니었으니까.”“그런데 말이야, 우리 둘 다 이렇게 나와 있으면 지금 바깥 상황은 어떻다는 건지?”“……네?”구언은 지환을 바라보았다.
지환은 약간의 위기감이 서린 표정으로 화장실 문을 바라보았다.
그래. 이러고 떠들 때가 아니다.
“아, 희원이.”“가지.”두 사내는 약속이나 한 듯 빛의 속도로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테이블엔, 취한 대표와 희원만이 남아 있는 때였다.
“인정할 수 없습니다. 난 이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어머? 이 사람 취했다.
희원은 목소리가 조금씩 커지는 주혁을 바라보았다.
완전체의 얼굴을 하고는 흐트러지니 그 나름의 섹시함은 대방출되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할 때가 아니었다.
“당신의 의견을 존중한다? 하, 새빨간 거짓말이야. 당신 남편은 당신을 존중하는 게 아니라 뻔뻔하게 이용하는 거라고!”“제 의견을 존중한대요? 저 없을 때 그랬어요?”어머, 이런 괜찮은 사람.
희원이 대화의 흐름을 이상한 곳으로 가져간다.
……아니야. 이게 아니야!
주혁은 말리지 말자는 듯 연거푸 고개를 흔들더니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초점이 흐려져, 미간이 더더욱 좁아졌다.
“당신 남편이 당신을 쥐고 조종하는 겁니다. 욕심이 많아서. 당신의 성공을 두고 보고 싶지 않은 거라고.”“몰랐는데 내 남편 집착 쩌네요. 내 스타일.”“쩌네? 쩌…….”……됐고.
“사랑만 가지고 밥을 먹습니까? 날개를 단다고? 다 거짓말이야. 다 거짓말!”“제 남편이 그랬어요? 완전 로맨티시스트. 웹소설에나 나올 법한 소리를.”“웹소설? web?”……말린다.
“왜 이렇게 나와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 겁니까? 왜? 어째서? 왜?”“그야 대표님이 취했으니까요.”희원은 시선을 바로 하며 취한 주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금 나누는 이야기는 의미 없잖아요. 대표님이 취하셨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겠어요. 의미 없죠.”그나저나 이 사람들은 화장실에 가서 왜 안 오냐……
아니, 이젠 화장실도 같이 다니는 사이야……?
휴. 희원은 자꾸만 화장실 방향을 힐끔거렸다.
서로 비아냥거리며 이죽거리느라 정신없는 두 사내가 화장실에서 나올 생각을 않던 때였다.
“취한 김에 그럼 말할게.”어느덧 대표의 말이 짧아진다.
올 게 왔다는 것처럼 희원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래. 취하면 본성 나오는 법이지.
술 앞에 장사 없거든.
“당신은 날 좋아하게 될까 봐 두려운 거야.”“……하.”뭐냐…… 이 신박한 전개는……
하아…… 희원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주혁의 취한 눈에 확신이 깃든다.
“당신은 날 사랑하게 될까 봐, 그래서 두려운 거지. 나 같은 남자와 함께 있다 보면 사랑에 빠질 테니까.”웃음도 나질 않는다.
희원은 솜털만큼 남아 있던 미련도 싹 지워냈다.
한편으로는 슬퍼졌다. 이런 사내를 대표라고 믿고, 인생을 던질 뻔했으니까.
“내 눈을 똑바로 봐봐. 사실은 내게 흔들리는 거지, 당신.”“내가 흔들리는 게 아니라 대표님 몸이 흔들리는데요, 지금.”기우뚱기우뚱하면서 내일 아침 이불킥 할 말들만 잔뜩 쏟아내는 주혁을 바라보다가 희원은 씁쓸한 기분을 느꼈다.
이래서 술은 위험한 거다.
“원한다면 나를 줄 수 있어. 당신이 원하는 건 내가 뭐든지 줄 수 있다고. 나를 원하면 나를 줄게.”“내 남편 검사라고, 혹시 얘기했나?”“……검?”“와인 마시고 눈뜨니 검사실 소파였던 경험은 나만 하기 아까운 건데, 오늘 한번 해볼래요?”히끅. 주혁은 잠시 말을 멈췄다.
더는 듣기 불쾌하다는 얼굴로 희원이 바라보자 주혁은 다시 와인잔을 들었다.
허, 이 상황에 그만 마시라고 말릴 수도 없고.
……인간들아! 왜 안 오냐고!
그때였다. 벌컥벌컥 술을 마시던 주혁이 결국 쿵, 하며 머리를 테이블에 찧었다.
“으이크!”주혁이 힘을 잃고 떨군 와인 잔의 와인이 테이블을 적시고, 희원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때마침 저기서 두 사내가 허겁지겁 달려온다.
희원은 인상을 찌푸리며 주혁을 가리켰다. 지환과 구언은 자리에 우뚝 멈췄다.
“이 사람 뻗었어.”주혁은 전대미문의 인사불성이 되었다.
“어떡해?”
“취해도 참 드럽게 취했네.”얼마나 몸이 부대끼는지 주혁은 아예 바닥으로 내려가서 잠을 자기 시작했다.
지환과 구언은 각자 팔짱을 끼고 서서 주혁을 내려다보았다.
“이 사람 집 알아?”지환이 힐끔, 구언을 바라보며 묻자 구언은 모르겠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국에 집이 있겠습니까? 호텔에 투숙 중이겠죠.”“흠, 그럼 이제 어떡하지? 일단 보내긴 보내야 할 것 같은데.”희원은 졸린 지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다.
지환은 의자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고개가 아래로 향하지 않게 손바닥으로 얼굴을 받쳤다.
구언은 그런 희원을 지그시 바라보고 지환을 한번 바라보고, 다시 고주망태가 된 주혁을 내려다보았다.
하……
답은…… 정해졌잖아…….
“일단…… 희원이 데리고 가요…….”구언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다른 손을 팔랑거렸다.
지환은 눈을 반짝거리며 크게 반겼다.
“어? 나 간다, 진짜? 호의는 거절 안 해. 진짜 가?”“가요…… 빨리…… 내 마음 변하기 전에…….”두 사람…… 어서…… 가……
내 걱정은 말고…….
“부인, 갑시다. 이 난리 통에서 어서 빠져나갑시다.”“……아? 우리 가요 이제?”그녀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물어온다.
지환은 익숙하게 그녀를 한 팔로 부축하듯 일으켜 세웠다.
몇 번 해봤다고, 이젠 한 팔로 뭐든 쉽게 할 수 있다.
“저, 손님. 이제 계산을…….”그때, 직원이 다가왔다.
지환과 구언은 긴장한 얼굴로 서로를 홱, 바라보았다.
이내 슬금슬금 두 남자의 시선이 빈 와인병으로 향한다.
얼추 계산을 해도 앞자리 숫자가 빠르게 바뀐다.
“이분이.”“이분이.”서로는 서로를 강력하게 추천했다. 그러다가 다시 홱, 서로를 바라보았다.
바닥에서 기고 있는 놈에게 술값 계산을 시킬 수는 없겠고, 결국 둘 중 하나는 해결을 해야 하는 상황.
결국은 큰 그림이었나…… 유구무언…….
지환은 잠시 희원을 앉혀놓고 지갑을 꺼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카드를 꺼내 들었다.
직원에게 쿨하게 카드를 전해주고 싶은데 도저히 쿨할 수가 없다.
“잘 먹었습니다, 형. 음식 정말 맛있었어요.”“후기 남기지 마. 형이라고 부르지도 말고.”쿨할 수 없는 마음도 몰라주고, 직원은 시원하게 카드를 긁고 다가왔다.
영수증은 차마 볼 수 없어 주머니에 대강 구겨 넣었다.
“그럼 수고해.”지환은 가보겠노라 구언을 바라보았다.
구언은 주혁을 바라보고 다시 고개를 들며 씩 웃었다.
구언이 손을 들자 지환은 가볍게 하이파이를 했다.
짝ㅡ! 가볍고 경쾌한 소리가 공간을 울린다.
갑자기 하이파이브를 하게 된 이유는 서로 몰랐다.
“간다. 수고.”“가요. 수고.”그냥, 서로 통하는 게 있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