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 우리 각시 (61/98)

61. 우리 각시

“후…….”조금씩 정신이 돌아오는 아침. 주혁은 긴 숨을 내쉬며 몸을 뒤척였다. 

침대가 끌어당기듯 몸은 하염없이 무거웠다. 

어지러운 기운이 아직 남아 있어, 주혁은 눈꺼풀을 무겁게 닫은 채 연거푸 긴 숨만 불어 내쉬었다. 

어제, 정말이지 지독한 과음을 했다. 

나중엔 내가 술을 마시는 건지 술이 술을 불러오는 건지, 그것조차 모르겠더라. 살며 몇 번 겪어본 적 없는 취기였다. 

묘하게 사람 속을 긁는 두 사내를 곁에 두고, 희원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상하게 침착해지질 않았다. 

무언가에 들끓었고 분노가 일었으며 답답증에 한숨만 나왔다. 

실패. 실패를 했다. 

준비한 말과 제안은 10%도 보여주지 못하고, 그녀의 남편과 쓸데없는 기싸움만 하다가 자리가 끝났다. 

괜히 따라갔다. 적당한 때를 봐서, 그녀와 독대를 했어야 했는데.

그럴 기회가 다시 오려나. 이대로는 내가 아쉬워서 끝을 낼 수가 없는데, 실패란 있을 수 없…….

당신은 날 좋아하게 될까 봐 두려운 거야. 

문득, 말도 안 되는 장면이 뇌리를 스친다. 

주혁은 감은 눈 사이로 펼쳐지는 어제의 상황을 바라보듯 숨을 끊어 내쉬었다. 

나 같은 남자와 함께 있다 보면 사랑에 빠질 테니까. 

……아니야. 말도 안 돼.

이건 지금 내가 만들어낸 허구, 허상일 뿐이다. 

사실은 내게 흔들리는 거지, 당신. 

주혁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마른침을 삼켰다.

선명하게 어제의 장면이 떠오르기는 하는데 무엇 하나 확실한 것은 없고, 지금 이 장면이 꿈인지 실화인지 그것도 잘 모르겠다. 

아니야. 이것은 허구일 뿐이다. 내가 그랬을 리 없어.

아무리 취했다고 내가 그런 말을 했을 리 없…….

원한다면 나를 줄 수 있어. 

나를 원하면 나를 줄게. 

주혁은 이를 꽉 깨물었다. 

경멸이 내려앉은 그녀의 표정과 눈빛이 그대로 재현되었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던 그녀의 차가운 표정이 리얼하게 그려지자 조금씩 현실감이 찾아온다.

주혁은 마른 주먹을 쥐었다. 

내가, 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 그런 말을? 아…… 그런…… 말을…….

주혁은 자신이 지금 어디에 누워 있는 것인가를 두고 다시 생각했다. 

낯선 향, 낯선 침대가 분명했다. 

그들 중 자신이 묶고 있는 호텔을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고, 여기가 어디건 간에 어떻게 이곳까지 왔는지도 잘 모르겠다. 

천천히 주혁은 눈을 떴다. 

낯선 인테리어, 호텔인지 아닌지도 구분이 어려운 공간.

여긴…… 어디……?

상체는 탈의했고, 바지만 간신히 입고 누워 있던 그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누군가 씻고 있는 소리가 들리고, 그는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씻는다. 이곳에서?

그럼 난 혼자 있는 게 아니었던가?

대체 누구와 함께?

주혁은 짧은 시간 오만 가지 상상을 다 하며 긴장한 눈빛을 했다. 

기억이 나지 않는 구간엔 걱정과 두려움이 대신 자리했다. 

이제 보니 자신의 옆에서 누군가 자고 일어난 흔적이 있다. 더 환장하겠다. 

“설마.”희원…… 당신이…….

그녀가 이곳, 자신의 곁에서 아침을 맞이했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알면서도 당장 떠오르는 인물이라곤 그녀밖에 없었다. 

가능해서 떠올린 게 아니라, 누군가 자신의 곁에서 잠을 청했다면 부디 그녀였길 바라서였다. 

자신의 기억이 끊긴 사이 기적 같은 일이 벌어나 그녀가 자신을 선택해주었길, 본능적으로 원하고 바랐다. 

이윽고 샤워실에서 들려오던 물소리가 멈췄다. 주혁은 긴장한 눈빛을 했다. 

잠시 후 샤워실 문이 열리고, 그는 마른침을 삼켰다. 

누구냐. 누구인가. 부디 당신이길…….

“어? 일어났어요?”“아…….”주혁은 믿을 수가 없다는 듯 눈을 감았다가 떴다. 

저, 저, 건강한 상체, 숙취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깨어 있는 눈빛.

“아, 나는 아직 대표님 자는 줄 알고 대충 수건만 두르고 나왔는데. 이것도 안 둘렀으면 큰일 날뻔했네.”짧은 머리를 털어내는 가벼운 손길. 

다름 아닌 구언이다. 

주혁의 얼굴은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뭐야, 당신이 왜 여기 있어.”“허, 이건 무슨 신선한 박대입니까? 집주인에게 여기 왜 있냐고 물으면 뭐라고 답을 해야 하는지?”“뭐? 집주인? 여기 당신 집이야? 나, 어제 당신하고 있었어?”“그럼 누구랑 있었길 바라는 겁니까? 나 아닌 가능성은 대체 누구?”“…….”주혁은 입술을 꽉 다물었다. 

별 희한한 소리를 다 보겠다는 것처럼 구언은 슬리퍼를 끌며 침대 가까이로 다가왔다. 

녀석이 다가오자 주혁은 침대 구석으로 몸을 뒤로하며 슬금슬금 이불을 잡아 끌어올렸다. 

“난 왜 벗고 있는 거지? 당신이 벗겼나?”“질문의 뜻은 알겠는데 참 더럽게 말씀하시네. 내가 벗기긴 했죠. 토했다고요, 대표님. 드러워서 살 수가 있나.”“…….”“오물이 묻은 셔츠를 입고 내 침대에서 자겠다? 내가 그걸 또 어떻게 봅니까? 싫어 죽겠는데 간신히 벗겨서 재웠더니 그 눈빛은 대체 뭐요? 설마.”구언은 의심의 눈초리를 했다. 

“나를 데리고 몹쓸 상상하는 거면 당장 집어치워요. 나 그런 쪽 취미 없으니까.”“……휴.”구언의 대답에 한시름 놓았다는 듯 주혁은 긴 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그 모습을 바라본 구언은 황당하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뭘 이렇게까지 내외해요. 자면서 내내 사람 몸 더듬은 쪽은 대표님인데.”“더, 더, 더, 더듬……?”“대표님 자는 내내 엄청 힘들어했다고요. 물도 엄청 찾고. 밤새 뭔 일 날까 싶어서 옆에 있어줬더니 손버릇이 영…….”구언이 위아래로 훑는 시선을 하자 주혁은 입을 떡 벌렸다. 

내가 너를 더듬었다고? 내가, 너를?!

“가, 같이 잤어? 나하고 당신?!”“한 이불 덮긴 했죠. 다정하게.”“맙소사. 맙소사!”주혁이 머리를 부여잡으며 고함을 지르자 구언은 한심하다는 듯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게 술은 왜 그렇게 많이 마셨습니까? 이기지도 못할 거.”“아……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한동안 자책하다가 시선을 드는 주혁을 바라보며, 구언은 짧게 손을 들어 보였다. 

“뭐, 일단은 인사하죠. 아침이니까.”주혁은 이불을 가슴팍까지 끌어올렸다. 

놀라 거품 물기 일보 직전인, 대표를 놀려 먹으며 구경하는 재미란 무척이나 쏠쏠했다. 

“굿모닝, 마이 베드 프렌드.”“오우, 쉣……!”낯선 사내의 드럽게 탄탄한 상체를 본의 아니게 마주하며, 주혁은 아침을 시작했다.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지. 백인호 의원하고 마주쳤다? 그것도 여기서?”지환은 자신의 사무실에서 정윤과 마주 앉았다. 

수사 과정을 모두 알고 있는 정윤이기에 작은 사건 하나하나 모두 공유는 필수였다. 

지금 하는 수사와 관련된 필요, 그 이상의 것들까지 알고 있는 그녀라서 사실은 완벽한 공유가 가능했다. 

백인호 의원과 마주했다는 것이 지환에게 어떠한 의미인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정윤은 커피를 삼키며 입술을 열었다. 

“그러니까 백인호의 요지는 서지환 검사, 수사 적당히 하고 덮어라. 그런 말을 하고 싶었던 거 아냐?”“그렇지. 요지는 그거지.”“백인호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우리 수사 과정을 다 알고 있을까?”“그건 힘들 거야. 우리가 전부 감추는 일도 한계가 있지만 그들이 전부 안다는 것도 한계가 있어.”“흠.”백인호 의원이 지나가는 지환을 붙잡고 적당히 수사해라. 조심해라. 그런 말을 우회적으로 했단다. 

“세계무용축제 관련 기대가 크다고, 그런 말도 하더라.”“……거기에 희원 씨 나온다고 하지 않았어?”“그렇지.”“뭐야, 검사 와이프 걸고 협박하는 거야 백인호가? 미친 거 아냐?!”지환은 미간을 문질렀다. 

굳이 지나치는 자신을 붙잡고 그런 말을 던진, 그의 의도를 알아내는 것이 중요했다. 

무엇인가. 속에 있는 말을 여과 없이 한 것은 아닐 거다. 

백인호에겐 숨겨놓은 수가 있을 것이고, 자신이 그대로 움직여주길 바라고 있는 거다. 

“야, 서검. 속도 내자. 기분 나빠. 뭐 이런 거지 같은 경우가 다 있어? 뭐? 기대가 커? 지가 뭘 어쩔 건데!”정윤은 열을 올렸다. 

지환에게 희원을 걸고넘어지는 것이 못마땅한 거다. 

그것도 하필이면 백인호가. 

강희주를 낚아채간, 하필이면 그 백인호가.

“서검, 우리 일단 차민규 끌어오자. 명분은 후에 만들면 될 거 아냐. 그냥 들이받…….”“백인호가 원하는 건 그런 쪽일 거야. 아마.”지환은 입을 열었고 정윤은 말을 멈췄다. 

소파 헤드에 머리를 기대며 지환은 다소 높게 시선을 올렸다. 

아마도 예측하기를,

“나를 도발하고 싶었겠지. 이를 악물고 뭔가 액션을 취해주길 기다리는 거야.”“백인호가? 너를 도발해서, 수사 속도를 내게? 무리수를 두게끔?”“그렇지. 무리수라도 두게 만들고 싶은 거지. 그래야 날 끌어내릴 수 있으니까.”그래. 그럴 것이다. 백인호의 첫 번째 수.

이를 갈게 하고 싶겠지. 분노에 눈이 멀어 무리수를 두게끔 만들고 싶었겠지. 

작은 덫을 놓고 기다리다가 강압적인 수사를 하게 유도하고, 결국엔 수사권을 빼앗고 싶은 거다. 

와이프의 신상을 두고 거들먹거렸으니, 사내라면 응당 눈이 뒤집힐 거라고.

백인호는 가볍게 예측했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수들은 전부 지나가. 당분간은 차민규 관련된 정보도 신뢰하지 마.”“……휴, 알겠어. 서검.”정윤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힘이 빠진다. 

“서검, 그럼 어떡해? 그럼 결국엔 수사 멈춰야 하는 거잖아. 믿을 만한 정보도 없고 수사도 할 수 없다면 결국엔…….”“이것도 백인호가 원하는 과정이다. 차검.”그래. 백인호의 다음 수는 이것이다. 

자신의 첫 번째 수를 읽고 지환이 예리하게 덫을 예측한다면, 결국 수사를 하지 못할 것이라는 데까지 계산한 거다. 

몸을 사리게 될 것이고 수사는 진행이 어려울 것이다. 

모든 것은 덫이라는 생각에 묶여 멈출 수밖에 없는 거다. 

결국 백인호는 자신의 어떤 수를 읽힌대도 상관없는 거다. 

움직일 수도, 멈출 수도 없을 테니까. 

“서검, 우리 진짜 어떡하지? 당장은 내부도 신뢰할 수가 없어.” 지환은 점점 뜨거워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차가워져갔다. 

걱정을 한 다발 늘어놓는 정윤에게 천천히 시선을 옮긴 지환은 잠시 후 입술을 열었다. 

“차검, 이건 어때?”“뭔데?”지환은 답 대신 씨익 웃었다. 

커피를 삼키던 정윤은 웃는 지환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야, 서지환. 나 지금 욕 먼저 해도 돼?”“듣고 해. 성격 급하면 먼저 해도 되고.”무엇이건 결정해야 했다. 

“공연? 오후에도 공연이 있어?”슬슬 해가 기울고 저무는 시간. 희원에게 전화를 건 지환은 PC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들었다.

같이 퇴근할까 했는데, 와이프는 공연이 있다고 한다. 

“시끄러운데? 지금 어디?”ㅡ지금 야외무대 세트장 근처라서 좀 시끄러워요. “야외? 야외 공연이야? 이런 날씨에 무슨 야외 공연을 한다고?”ㅡ응. 당분간은 야외 공연도 많아요. 공연 성수기라고 해야 하나?“아…… 공연 성수기. 그거 너무 슬픈 말인데.”ㅡ슬프다니, 사람이. 기뻐해야지. 와이프가 열심히 돈 버는데.“그런 점은 아주 훌륭하게 생각해. 슬픔이 안개처럼 가신달까.”ㅡ태세 전환하는 것 좀 봐. 서지환 씨, 진짜 세속적이네요.“밥값으로 생긴 빚이 많다 보니 사람이 변하네. 이해해줘.”시시콜콜한 농담을 주고받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여전히 추운 날씨. 외투도 없이 얇은 공연복을 입고 야외 공연장에서 공연을 한다니, 지환은 속이 상한지 미간을 문지르다가 입술을 열었다. 

“당신 공연하면서 춥겠다. 어떡하지?”ㅡ괜찮아, 익숙해서. 이 정도 추위는 추위도 아니거든요. 더 추울 때도 하는데 뭐. 관객만 있다면.“아아, 그럼 관객을 다 없애야 안 하는 거지?”ㅡ……죽을래?“가상의 시나리오야. 내가 무슨 힘이 있어서 관객을 다 없애. 총도 없는…….”희원아, 거기 서 있지 말고 이쪽으로 와. 춥잖아.

웬 사내의 목소리가 들린다. 지환은 귀를 쫑긋 세웠다. 

유구무언인가 싶지만 처음 듣는 생경한 음성이다. 

ㅡ알겠고 일단 끊어요. 나 이제 바쁘니까.“지금 누구야?”ㅡ뭐가 누구야?“누가 당신 불렀잖아. 지금 당신 부르지 않았어?”희원아, 난로 앞으로 와, 빨리. 추워.

다시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지환은 사정없이 미간을 좁혔다. 

“봐봐. 누가 부르잖아, 지금.”ㅡ별걸 다, 으휴. 끊어요.“어어? 못 끊어. 안 끊어. 싫어. 누가 당신을 부르잖아 다정하게. 성 떼고 존댓말 떼고 누군데 이렇게 다정하게 당신을 찾아, 찾기를.”지환은 눈을 희번덕거렸다. 

ㅡ별꼴이야 진짜. 나 추울까 봐 동료가 난로 앞으로 오라는데 그게 그렇게 막 사람 취조하듯이 할 말이에요?“아니 그러니까 글쎄. 당신이 춥건 난로가 없건 그 댁이 왜 상관하냐고, 왜.”ㅡ서지환 씨. 지금 시비 거는 거야, 질투하는 거야?“그거야 당연히 시비……!”ㅡ…….“일 리 있겠어? 질투지. 온전한. 남자의 질투.”ㅡ다행이네. 시비 거는 거면 남은 팔도 부러트려 주려고 했는데. “시비 걸까? 그럼 지금 나한테 와주나?ㅡ끊어요!“넵.”그녀가 전화를 뚝 끊어버린다. 

휴, 결국 어느 놈인지 알아내지 못했다. 

원망이 그득그득 담긴 눈빛으로 휴대폰만 바라보던 지환은 손을 내리며 고개를 들었다. 

측은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최금호 계장과 눈이 마주친다. 

“계장님, 저 한심하죠?”“어, 뭐, 딱히 그렇다기보다.”“지금 계장님 말하고 표정하고 따로 놀잖아요.”“어…… 죄송합니다. 솔직히 조금 없어 보이긴 했습니다.”“…….”지환은 눈썹을 추켜세우며 다시 PC를 바라보았다. 

휘이이잉, 두꺼운 바람이 창문을 덜컹 흔들며 지나간다. 지환의 표정은 점점 더 흉악하게 변해갔다. 

“전용 난로를 한 대 마련해줄까…….”이런 날씨에 야외 공연이라니.

그녀가 싸우고 있을 추위가 걱정되었다. 너무나도. 

[경호 정렬, 경호 정렬, VIP께서 오셨습니다.]무대 준비를 하는 주변이 소란스러워진다. 

검은 슈트를 차려입은 사내들이 어디 숨어 있다가 나왔는지 우르르 쏟아졌다. 

꽤 넓은 공간을 가지런하게 채운 의자, 가장 앞 줄ㅡ 

정중앙에 놓인 의자로 희주가 걸어온다. 

“춥지 않으시겠습니까? 사모님?”“괜찮습니다.”서울시에서 기획, 준비한 이번 야외무대에 희주와 몇몇 인사들이 초청되었다. 

공연의 규모를 확정 짓는 건 공연자들의 명성만이 아니었다. 이곳에 어떤, 누가 방문하였는가도 무척 중요했다. 

희주는 주변에 자리한 경호원들을 바라보다가 관계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의원님께선 급한 일이 있어서 불참하셨습니다.”“예. 들었습니다. 사모님께서 자리해주신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경호 줄여주시고 공연에 집중할 수 있게 해주세요.”“알겠습니다.”희주는 자리에 앉으며 함께 걸음 한 사람들과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공연 시작은 얼마 남지 않았고, 텅 비었던 공연장엔 사람들이 들어섰다. 

순식간에 커다란 공연장은 사람들로 가득 차버렸다. 

“뭔데 이렇게 사람이 많아…….”결국 퇴근 후 희원의 공연장을 찾아온 지환은 인파에 눈을 크게 떴다. 

야외 공연이라고만 들었지, 이렇게 규모가 방대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출연진이 꽤나 대단한 모양이다. 중간에 희원의 공연이 있는데, 앞뒤로 유명 아이돌 공연도 있단다. 

완전 무장을 한 사람들 틈을 이리저리 해치며 지환은 적당한 자리에 위치했다. 

커다란 전광판 아래서 공연자들은 순서에 따라 화려한 공연을 펼쳤다. 

흠. 지환은 자신이 왔다는 걸 알 리 없는 희원에게 전화를 걸어볼까, 하다가 관두기로 한다. 

아마도 무대 뒤 그녀는 집중하고 있을 것이라.

이 많은 사람 앞에서 흔들림 없는 무대를 만들기 위해, 자신 안의 것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것이다. 

오늘은 무용수 권희원의 무대를 보기 위하여.

온전히 그것에만 집중해보기로 한다. 

……그러고 보니 처음 있는 일이 아닌가.

그 어떤 다른 이유 없이, 목적 없이, 아내의 공연을 관람하는 일.

지환은 느긋한 시선으로 축제 같은 공연을 즐겼다. 아내의 순서가 다가올수록 괜스레 긴장이 되었다. 

공연이 펼쳐질수록 야외무대 주변은 후끈 달아올랐다. 맹렬한 추위도 방해가 되진 않았다. 

“아, 나온다.”이윽고 희원의 순서가 되었고, 그녀는 무대 앞으로 나와 때를 기다렸다. 

언뜻언뜻 살이 비치는 저고리, 바람에 흔들리기 좋은 치마. 

지금 그녀가 입은 옷이라곤 그게 다였다. 

“저렇게 얇은 걸 입고…… 이 날씨에…….”지환은 희원의 입에서 입김이 흘러나오는 것을 바라보며 가슴을 졸였다. 

무대 세팅과 조명 설명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사회자가 말을 이어가고 있는 시간.

이곳 누구도 그녀의 입김을 바라보며 추위를 생각하지 않겠지만ㅡ 

흘겨 생각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자가, 여기 있다. 

“움직여야 좀 덜 추울 텐데.”이봐, 사회자.

말 좀 그만하고 시작하라고! 

우리 각시 얼어 죽으면 그쪽이 책임지나?!

“아오.”아오. 탄식이 절로 흐른다. 

지는 털목도리에 가죽 장갑까지 끼고 시간 끌기에 여념이 없으니. 지환은 사회자를 노려보았다. 

“다음 공연 순서는 한국 무용의 꽃, 희망을 보여드릴 차례인데요. 박수로 맞이해주십시오ㅡ!”아이돌 공연이 아니다 보니 박수 소리가 시원찮다. 

지환은 일당백을 소화해내며 팔이 부러져라 박수 치고 싶지만,

“제길.”이미 부러졌어…….

별 관심이 없는지 사람들의 시선이 휴대폰으로 간다. 

음악이 시작되었고, 구슬픈 가락이 도시 위에 가득 내려앉았다. 

“오빠, 나 추워.”“조금만 참아. 이거 끝나면 너 좋아하는 가수 나와.”“언제 끝나? 추운데.”지환은 홱, 고개를 돌리며 눈썹을 씰룩거렸다.

시끄러! 난 이거 보러 왔어!

“야, 누구냐? 예쁜데?”“누구?”“지금 나온 사람. 예쁘잖아.”홱, 지환은 다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친구들끼리 왔는지, 사내 너덧이 서서 희원에게 시선을 주고 있다. 

춤사위를 보고 있다기보다,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야, 진짜 예쁜데?”“그러게. 누구지? 쩐다.”음악이 고조되고 조명이 좁아지며 그녀 자리만 비춘다. 휴대폰만 바라보던 사람들의 시선이 점점 그녀를 향한다. 

수십 명이 서도 남을 큰 무대에 홀로 서서, 그녀는 공간을 장악한다. 

하나둘 그녀의 춤사위에 빠져든다. 

보지 않는 사람은 있어도 보고 나면 눈을 뗄 수 없는, 그런 무대.

“저 여자 진짜 멋있다. 대박. 내 이상형.”“야, 넌 뭐 여자만 보면 이상형이래? 저분 이번엔 내 이상형.”“야야, 심장 뛴다. 누구지? 아니 너무 멋있는데?”“지린다. 뭔가 막 빠져드는 것 같은 느낌이야. 소름 돋았어. 사인받고 싶다.”사내들은 블랙홀처럼 희원에게 빨려 들어갔다. 

휴대폰을 보던 다른 친구가 이제야 힐끗 앞을 보고는 입을 연다. 

“아, 나 저 무용수 알아. 올림픽 개막식에 나왔잖아. 엄청 유명해.”“그래? 누군데?”“권, 권? 권 뭐드라. 잠깐만. 이름이 기억이 안 난다. 검색해봐야겠어.”“빨리 찾아봐. 내 스타일. 나 지금 반했다고.”“저분 영상 보면 말잇못이다. 대박이야.”“저, 말입니다.”저들끼리 중얼거리며 희원의 무대를 감상하던 사내들은 들려오는 낯선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슬금슬금 곁으로 다가온 건지, 웬 낯선 사내가 자신들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다. 

“네? 저희요?”“네네.”지환은 무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여전히 무용수 권희원은 사람들의 심장을 손에 쥘 듯 춤을 추고ㅡ

“저 무용수, 예쁘죠? 멋있지 않습니까?”“네? 아, 네. 그런데요?”그는 오만하게 턱을 들어 올렸다. 

“제 와이픕니다.”“……네?”“제 와이프. 저 무용수 아내라고요.”“아…….”“아…… 네…….”미안한데…… 우리 안 물어봤어……. 

사내들이 떨떠름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지만 지환은 상관없다는 듯 씩 웃었다. 

“무용수 권희원입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과 사랑 부탁드립니다.”대단한 팔불출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