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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사랑하는 동안에 (62/98)

62. 사랑하는 동안에

찬 공기는 가득 올라왔다. 

발끝은, 코끝은 시렸지만 동공에 맺히는 무용수의 춤사위엔 열기가 가득해서 참을 만했다. 

그녀에게 시선을 빼앗긴 사람들은 말을 잊은 자세 그대로 멈춰 서 공연을 관람했다. 

무용수 권희원의 춤사위는 설명이 많지 않아 불친절했지만.

들려오는 자락은 익숙한 감이 없어 낯설기만 했지만.

누구나 가지고 있을 법한 정서는 있는 그대로 그녀의 움직임과 노래를 받아들이게 했다. 

단순히 ‘아름답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아름다움에도 끝없는 깊이가 있어 처량했고, 구슬펐다. 

어쩐지 가냘픈 감동마저 있었다. 

그녀의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찬 움직임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고조되던 자락은 소강하고, 그녀는 여운을 갈무리하며 움직임을 멈췄다.

조명이 꺼지며 그녀를 삼킨다. 뭐에 홀린 듯 바라보던 사람들은 일제히 박수를 쳤다. 

시작할 때와는 다른, 환호와 갈채가 하늘 위로 행진했다. 

“와, 진짜, 할 말이 없네.”“가슴이 쿵쿵하네. 대중가요와는 확실하게 뭔가 달라.”“나이 먹었나 봐. 눈물 날 뻔했어.”각자들은 평을 쏟아내기 바빴다. 

갈채가 끊이질 않고 연신 울려 퍼지는 틈을 타 희원은 무대에서 내려왔다. 

두어 명의 경호원이 그녀의 곁을 바짝 따랐다. 

여전히 사람들 틈에 끼어 와이프 자랑만 늘어놓던 지환은 목을 길게 빼서 앞을 바라보았다. 

은근 사람들은 와이프 자랑을 하던 지환을 주시하고 있었다. 

진짜 아내 맞아? 

약간 그런 의혹도 있는 것 같았다. 

“부인! 부인!”지환이 손을 하늘 위로 들며 그녀를 크게 불러보지만 소용없다. 

힐끗거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길에 의혹은 점점 커져만 갔다. 

“부인! 부이이이인!”지환이 목소리를 크게 하자 남편을 두고 공연을 보러 온 불특정 다수의 ‘부인’들만 바라본다. 

다시 한 번 소리 내어 불렀다. 애석하게도 그녀는 돌아보질 않는다. 

“아내분 맞긴 맞아요?”“…….”결국 누군가 의혹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내내 자기 와이프라고 깐죽거렸으니 이런 의혹 받아도 싸지.

지환은 차마 맞는다는 말은 하지 못한 채 한 손으로 나팔 모양을 만들고는 입가에 가져갔다. 

“권희원!”여길 봐! 내가 왔어!

“권희원! 권희원ㅡ!”내가 왔다고! 여길 좀 보라고! 

“희원아ㅡ!”희원아ㅡ.

목이 터져라 부르니 사람들이 애처롭게 바라본다. 

그녀가 돌아보며 방금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사람들 사이사이를 훑어보았다. 

지환은 손을 미친 듯이 흔들었다. 

옘병, 그녀가 돌아보니 여기저기서 손을 흔든다. 

다들 손 내려! 나만 흔들 거야, 이것들아!

“여기! 여기여기! 희원아! 나! 여기 남편 왔어!”……가지가지 불쌍하다. 

희원은 잘못 들었나? 싶은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다시 사람을 사이를 훑었다. 

그러다가 지환을 발견하고는 자리에 우뚝 멈췄다. 

지환은 더욱더 격렬하게 손을 흔들었다. 

“희원아! 나 여기! 여기!”여기 남편이 왔다아아아아아아ㅡ!

그녀가 웃는다. 언제 왔냐는 듯 표정을 짓더니, 손을 흔들어준다.

기다리라는 듯 손짓을 하고는 다시 사라졌다. 

지환은 손을 내리며 주변을 살폈다. 

오…… 시선이 달라졌다. 

내 와이프 맞다니까. 자식들이.

“아, 온다고 말을 안 하고 몰래 왔더니 이렇게 또 힘드네요.”그는 중얼거렸다. 

누구 들으라고 하는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저분 남편이세요?”“남편분이세요? 지금 무대에서 내려간 분?”사람들이 주변에 몰려든다. 

지환은 그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턱을 들어 올렸다. 

“맞습니다만?”그렇습니다만?

“어머, 저 사인 한 장만 받아다 주시면 안 될까요? 아니면 사진 한 장만.”“저도, 저도요. 저도 사진 한 장만 찍을 수 있을까요? 기다릴게요.”“실례가 안 된다면 저도. 저 지금 팬 됐어요. 사진 한 장만 찍게 해주세요.”지환의 주변을 빙 둘러싸며 사람들의 부탁이 이어진다. 

그는 굉장히 오만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작게 들어 보였다.

“자자, 한꺼번에 말씀하시면 곤란하고, 그럼 줄을 서세요. 너무 많은 분은 곤란하고 몇 분만 받겠습니다.”사람들이 휴대폰을 손에 쥐고는 줄을 서듯 정렬하자 지환은 희원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무심결에 힐끗, 그녀가 사라진 공간을 바라보다가ㅡ

“……뭐야.”천천히 휴대폰을 내렸다. 

그녀는 아직 사라지지 않고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미 다음 무대는 시작했고, 그녀 얼굴엔 웃음이 만발하고.

“여기 이렇게 줄 서 있으면 되는 거죠? 사진 찍을 수 있는 거죠?”“…….”그는 말없이 희원을 바라보았다. 

그녀 앞에 서서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는 여자, 

“제가 1번이에요. 저 먼저 사진 찍게 해주세요. 네?”“…….”희주였다.

무대를 끝낸 뒤 경호원들과 걸음을 움직이던 때.

지환을 발견한 희원은 활짝 웃었다. 

“온다면 온다고 말해주지. 내가 못 듣고 그냥 가면 어쩌려구.”희원은 중얼거리며 다시 경호원들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스태프가 가져다준 패딩을 걸치고, 급히 대기실로 향하던 때.

“희원 씨!”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다시 불렀다. 고개를 돌려보니 희주가 다가오더라.

“어? 강희주 씨!”희원은 웃음으로 맞이했다. 

지환이 이곳에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한 희주는 그녀에게 다가가며 살갑게 웃었다. 

“오셨어요? 공연 보러 오신 거예요?”“네. 초대를 받아서 공연 보려고 왔어요. 온 김에 희원 씨에게 인사하려고 잠깐 왔어요.”“아아, 그러셨구나.”“오늘도 희원 씨 공연은 너무너무 좋았어요. 감동받았어요.”“감사합니다.”두 사람은 웃음을 주고받았다. 

희원의 곁에 있던 경호원들과, 희주의 곁에 있던 경호원들은 각자 다른 곳을 바라보며 잠시 그녀들의 대화를 기다려주었다. 

“춥지 않았어요? 희원 씨 내내 추워 보이던데.”“아아, 괜찮아요. 무대에 있을 땐 정신이 없어서 추운 줄도 잘 모르거든요.”“이거 내가 쓰던 핫팩인데 가져가요. 몸 좀 녹여요.”“괜찮아요! 전 이제 들어가니까요, 이건 밖에 계신 분께서 필요한…….”희주는 희원의 손에 핫팩을 쥐여주었다. 그러곤 다른 손에 있는 핫팩을 흔들어 보였다. 

“난 하나 더 있거든요. 희원 씨도 쥐고 있어요. 손도 찬데.”“감사합니다.”아, 맞다. 희원은 핫팩을 만지작거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곤 고개를 반쯤 꺾으며 입술을 열었다. 

“여기 지금 제 남편이 와 있어요. 괜찮으시다면 소개해드리고 싶은데.”“아…… 남편…….”희주는 당황했다는 것처럼 말을 얼버무렸다. 

희원은 고개를 돌려 조금 전 지환이 있던 자리를 찾았다. 

“어? 어디 갔지? 저기 있었는데.”“어, 저, 희원 씨. 희원 씨.”네? 희원이 다시 고개를 돌리자 희주는 잔뜩 긴장한 얼굴을 해서는 간신히 웃었다.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지만 날씨가 추워서 별다른 생각은 할 수 없었다. 

“어, 저는 다음에…….”“……아, 네. 알겠습니다. 제가 괜한 오지랖을 부렸어요.”말꼬리를 흐리는 희주를 바라보다가 희원은 대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불편할 수도 있지. 괜한 일을 저지를 뻔했다. 

“저 가볼게요. 희원 씨. 조심히 가요.”“가시는 거예요? 공연 더 안 보세요?”“가봐야 해서. 잘 가요.”갑자기 급한 일이 있는 사람처럼 굴며 희주가 사라진다. 

희원은 별생각 없이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가셔야 합니다.”경호원이 다가와 중얼거리자 희원은 정신을 차리듯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힐끔, 다시 뒤를 돌아보니 희주는 사라지고 있었다. 

느닷없는 VIP의 퇴장에 주변은 소리 없는 분주함이 시작되었다. 

얄팍한 의문은 금세 사라지고ㅡ

희원은 지환에게 곧장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는 순간부터, 얼굴엔 웃음이 가득해졌다. 

“나예요. 서지환 씨 지금 어디 있어요? 여긴 언제 온 거야?”아, 오늘 하루도 알차게 지나간다. 

그녀는 그런 생각뿐이었다. 

“아…… 너무 졸려…….”무대를 성공적으로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녹초가 되었다. 

내내 긴장했던 마음이 풀어지고, 꽝꽝 얼었던 몸이 흐물흐물 녹자 비틀거리는 것이다. 

자신의 공연 영상 몇 개를 찾아보며 감상평을 확인한 것을 끝으로, 그녀는 휴대폰을 내던졌다. 

“오늘은 무대 보신 분들이랑 사진 많이 찍은 것 같아, 평소보다.”희원은 중얼거리며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지환이 피리 부는 사내처럼 몰고 다닌 사람들과 한 명 한 명, 열과 성을 다해 사진을 찍어드렸다. 

침대에 널브러져 눈만 깜빡거리는 희원을 바라보다가, 지환은 곁에 걸터앉았다. 

“그러게. 당신이랑 사진 찍고 싶다고 부탁하는 사람이 많은데 내가 거절을 못 하겠더라고.”“잘했어요. 사진 찍어드리는 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기쁜 일이었다. 감사한 일이었고.

“서지환 씨 덕분에 반응도 좋은 것 같아. 검색해보니까 오늘 공연 반응 최고인데? SNS 팔로워도 많이 늘었어요, 오늘.”그녀가 끙, 소리를 내며 돌아눕는다. 

지환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곁으로 다가가 누웠다. 

머리를 천천히 쓸어내려주자 그녀는 깊은숨을 쉬며 눈꺼풀을 굳게 닫았다. 

“아이고…… 삭신이야…… 공연하고 나면 그날은 너무 힘들어…….”“당연히 힘들겠지. 고생 많았어.”콜록콜록, 그녀가 잔기침을 한다. 지환은 염려가 되는 눈빛으로 그녀를 살폈다. 

“감기 걸린 거 아냐? 약 먹을래?”“아까 쌍화탕 한 잔 마셨어. 괜찮아요.”다 귀찮아…… 희원이 느리게 말하며 잠이 들 것처럼 굴자 지환은 조용히 숨만 불어 내쉬었다. 

“나…… 머리 쓰다듬어줘…….”“그래.”“등도…… 토닥토닥해줘…….”“알았어.”깊은 잠에 빠져들기 위한 절차가 필요하다는 것처럼, 그녀는 그에게 따뜻한 손길을 요구했다. 

지환은 근심이 가득 내려앉은 시선을 그녀에게 고정한 채 머리를, 등을 하염없이 어루만졌다. 

“이렇게 고된 일인데도 계속하고 싶어?”“그럼요. 당연하지.”“힘들잖아. 밤마다 이렇게 끙끙 앓는데.”“나만 그러나 뭐. 일하는 사람들 다 그렇지.”“세계 무대로 보낼걸 그랬다. 이렇게 좋아하는데.”“춤은 아무 데서나 출 수 있어. 그런데 서지환 씨는 아무 데나 없잖아.”……잠꼬대처럼, 느리게 이어지는 말들.

지환은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매단 채 느리고 다정한 손길을 이어갔다. 

일정하게 깊은숨을 내쉬던 희원은 눈을 감은 채 입술을 열었다. 

“공연 끝내고 돌아와도 혼자가 아니라 서지환 씨가 있으니까, 좋네요.”……화려함으로 물든 내 인생의 이면을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

“옛날엔 혼자 끙끙 앓았거든요. 이렇게 누워서, 혼자.”모두가 내 무대를 바라보며 환희의 박수를 보낼 때ㅡ 

내가 겪을 추위가 서글퍼 차마 웃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서지환 씨 와 있는 거 알고 나니까 엄청 힘 되더라. 그냥, 막 힘이 나더라고요.”“종종 갈게. 당신 이렇게 힘들게 고생하는 줄은 미처 몰랐네.”“다 똑같아. 나만 힘든 거 아니잖아.”끙끙, 그녀는 약간씩 뒤척일 때마다 앓는 소리를 내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 바라보는 무대. 

그 수많은 눈동자를 실망시키지 않으리란 목표는 언제나 고된 일이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팔다리 어느 곳도 성하지 않은ㅡ

“나 좀 잘게요, 진짜 너무 졸려.”“그래. 어서 자.”고단한 비행에 날개를 다친 작은 새처럼 여겨졌다. 

“서지환 씨는 뭐 할 건데?”“난 당신 곁에 있지. 잠들 때까지.”“……좋네.”잘게요, 그럼……. 

희원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대로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하루를 버틸 에너지가 모두 고갈된 것처럼, 그녀는 조금의 뒤척임도 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그녀의 등을 어루만지다가, 머리를 쓸어 넘겨주고.

……얼마나 지났을까. 

거실로 나온 지환은 노트북을 켰다. 

가만히 앉아서 생각만 연거푸 거듭하던 그는 결심했다는 듯 희원의 SNS를 들어갔다. 

오늘 공연 영상이 여러 개 올라왔고, 그녀는 자신의 SNS로 링크를 가져왔다. 

빠르게 확인하던 지환은 댓글 창을 열었고.

그곳에서 수천 개의 ‘좋아요’를 확인하던 지환은 하나의 아이디에서 멈췄다. 

강희주가 분명한 아이디와 프로필 사진.

“……후.”짧은 한숨을 내쉰 지환은 그녀의 친구 목록을 살펴보며 강희주의 이름을 어렵지 않게 찾아냈다. 

처음 강희주가 그녀의 SNS를 찾아온 때까지 확인한 지환은 나머지 몇 가지를 더 확인하고 고개를 들었다. 

소파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어두운 그의 표정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손목을 천천히 돌려보세요. 괜찮으신가요?”“아, 괜찮은 것 같습니다.”“한동안 물리치료는 꾸준히 받으셔야 합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회복 속도가 정말 빠른 겁니다.”“네. 꾸준히 받겠습니다. 감사합니다.”시간은 흐르고 드디어 부러졌던 왼팔을 회복했다. 

보통의 사람들보다 빨리 아물었다는 주치의의 말을 들으며 지환은 손목을 느리게 돌리고, 손을 쥐었다가 폈다, 반복했다. 

이미 한 팔로 생활하는 것에 많은 것이 익숙해져 당장 두 팔이 생겨도 한 팔만 쓸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순간.

“축하해요. 왼팔을 획득했네요.”“당분간은 적응이 안 될 것 같네. 머리가 왼팔을 인식 못 하는 기분이야.”곁에 서 있던 희원이 축하를 건네자 지환은 무안한지 씩 웃었다. 

물리치료를 받고 병원을 나선 길.

주차장에 들어선 희원과 지환은 차량으로 다가갔다. 

“운전 내가 할게. 서지환 씨, 아직은 힘들 것 같으니까요.”“그래. 부탁해.”익숙하게 그녀가 운전대를 잡고, 지환은 보조석에 올라탔다. 

획득한 왼팔이 어색한지 그는 자꾸만 손을 의식했다. 

그런 모습이 귀여운지 희원은 웃음을 터트렸다. 

히터를 켜고, 듣기 좋은 음악을 골랐다. 

“자, 서지환 씨. 준비됐으면 이제 출발할까요?”“어디로 갈까?”“음, 어디든?”희원은 지환을 바라보았다. 

가고 싶은 곳이 있나? 하는 얼굴을 하며 묻자 지환은 비스듬히 고개를 꺾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 게 있을 리가 있겠나.

하고 싶은 건 당신과 함께하는 일뿐인데.

“깁스 풀면 제일 먼저 뭐가 하고 싶었어요?”“뭐, 딱히 그런 건 없었는데.”“치, 심심해.”그녀가 입술을 삐죽거리자 지환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입술을 열었다. 

“아, 하나 있긴 있었네.”“뭔데? 뭐가 하고 싶었는데?”“결혼반지를 끼고 싶었지.”……희원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왼손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하필 또 왼팔 부러지기 직전에 내가 그런 말을 하고 있었어. 당신 잘 모르겠지만.”

결혼반지,  

난 죽을 때까지 안 뺄 거니까. 

“반지 죽어도 안 뺀다고. 무슨 일이 있어도.”

빼더라도 절대 내 몸을 벗어나지는 않을 겁니다.  

새겨들으시죠, 권희원 씨.  

“혹 빼야 하는 때가 와도 내 몸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아, 그랬던 것 같아. 그랬네요. 기억나네.”“그런 말을 하다가 팔이 부러졌어. 그 말 뱉은 지 삼십 분도 안 돼서 반지를 뺐네.”그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린다. 

깁스를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반지를 뺐다. 

“결혼반지, 서지환 씨는 목걸이로 하고 다니던데…….”“그랬지. 지금도 걸려 있고.”아. 말 나온 김에 목걸이 좀 빼줄래?

지환은 넥타이를 조금 길에 내리며 셔츠 가장 처음 단추를 끌렀다. 

양손을 움직이는 게 아직은 버거운지 그의 미간에 작은 골이 파인다. 

“목걸이 좀 끌러줘. 당장 껴봐야겠어.”맞을까? 안 맞을까? 좀 클 것 같은데. 

지환은 목걸이를 끌러달라며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는 서슴없이 다가온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두 팔을 뻗었다. 

그의 목을 에둘러 감아 고리를 찾다가, 포기한 듯 입을 열었다. 

“고리를 앞으로 돌려서 빼줄게요.”잠깐만. 희원은 목걸이를 돌려 고리를 앞으로 뺐다. 

작은 고리를 여는 일에 열중인 그녀 얼굴이 무척이나 가깝다. 

지환은 그런 그녀 얼굴을 바라보다가, 그녀 손을 한 손으로 잡았다. 

“깁스 풀면 하고 싶었던 거, 또 있다.”“……아?”“있었네. 그것도 많이.”“아…… 어…… 네…….”목걸이를 잡은 그녀 손에 힘이 실리는 게 느껴진다. 

지환은 피식 웃다가, 다시 그녀 얼굴을 가깝게 들여다보았다. 

“모, 목걸이 빼줄게요.”“조금 있다가.”“반지…… 빼고 싶다며…….”“그것도 조금 있다가.”그럼…… 지금은 뭐 할 건데……?

희원이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눈으로 묻자 지환은 흔연한 미소만 걸어놓다가 다른 팔을 뻗어 그녀 목덜미를 그러쥐었다. 

목걸이를 쥐고 있는 그녀 손에 더욱 힘이 실린다. 

“목걸이 끊어지겠다.”“……아. 아! 아! 미안! 미, 미안해요!”힘 조절에 실패한 희원이 번쩍 놀라며 황급히 목걸이에서 손을 떼려 하자 이번엔 지환이 힘을 주었다. 

그녀 두 손을 꽉 붙잡고, 

목덜미를 그러쥐고 있는 다른 팔을 부드럽게 당겼다. 

……삼켜도 좋을 것만 같은 그녀의 작은 입술 사이를 헤집었다. 

잡힌 손등에서 맥이 뛰는 것 같은 착각이 일고ㅡ

그녀는 자연스럽게 감긴 눈 사이로 지금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세세히 기록하듯 가슴에 남겼다.

무대 위의 권희원은 언제나 행복했다. 

온몸으로 받아내야 하는 대중의 시선에, 웃고 울었다. 

그것만이 행복인 줄 알고 살았던 내게ㅡ 

지금껏 알고 지낸 행복과는 또 다른 종류의 행복이 찾아온다. 

“기뻐요. 당신 왼팔이 돌아와서.”“이 순간 그 말이 야하게 들리는 건 온전히 내 기분 탓인가?”“뭐, 멋대로 생각해요. 언제나 꿈보다 해몽이 좋은 사람이니까. 서지환 씨는.”“멋대로 생각하라니. 그건 더 야하게 들리잖아.”……두 사람은 잠시 떨어져 바라보다가, 다시 입술을 맞댔다. 

어느 것도 일방적인 것 없이 함께였다. 

지금 권희원은 또 다른 종류의 행복을 알았다. 

한 남자의 시선 안에 박힌 나를 바라보는 기쁨에,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설렘이 아니라 심장이 멎을 것 같은 설렘을 알았다. 

전신을 노니는 열정 말고ㅡ

손끝을 다녀가는 전율을 알았다. 

……그리고 느낄 수 있었던 또 하나. 

서지환은 권희원을 사랑했다. 완벽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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