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야한 남편
“인호야, 일단 급한 대로 필요한 만큼은 마련했어.”“수고했어.”차민규는 이른 아침, 푸른 동이 트기도 전에 백인호 의원의 자택을 찾았다.
막대한 자금은 돈세탁을 끝마친 뒤 5만 원 다발로 형성되었다.
“안전하게 실어놨고 지금쯤 네 비서가 확인하고 있을 거야.”“속도를 좀 내. 매번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기한 맞추지 말고.”“어…… 미안하다. 노력을 한다고 하긴 하는데.”차민규는 찬기 어린 백인호의 말을 듣고는 멋쩍어했다.
칭찬을 듣기는커녕 더 빨리 금괴를 현금으로 전환하지 못했다는 타박이나 듣고 있으니.
백인호는 불만이 차오르는 차민규의 표정을 힐끔 보다가 입술을 열었다.
“실수, 없었지.”“그럼. 실수 없었지. 내가 누군데 실수를 해. 걱정 마라, 인호야.”홍콩발 밀수 금괴는 현금으로 전환되었고, 전환된 현금은 돈세탁을 끝낸 뒤, 박스에 포장되어 우체국 택배로 접수되었다.
우체국 직원에 의해 운송장이 등록된 현금 박스는 다시금 차민규에게 회수되었고, 택배는 소액 택배 분실 건으로 처리되었다.
엉뚱한 주소와 엉뚱한 이름이 적힌 운송장 기록만 남긴 채.
회수된 현금다발 박스는 택배 기사를 위장한 차량에 실려 백인호에게 전달되었다.
외부적으로 볼 땐 어떤 문제도 야기되지 않았다.
늘 주시하는 눈이 많은 백인호 의원 자택으로 택배가 들어가도, 의심의 여지는 없었다.
또한 차민규가 백인호의 자택을 무시로 드나들어도, 금괴를 옮기고 현금을 옮겨도 수상한 낌새를 풍기지 않을 수 있었다.
집안사람들까지 속일 수 있는 완벽한 방식이었다.
“인호야, 그럼 나 이만 가볼게. 밤을 새웠더니 영 피곤해서.”“가봐.”“어, 어, 알겠어. 인호야, 오늘도 힘찬 하루 보내고. 파이팅!”“…….”아양이라도 떠는 것처럼 힘찬 응원을 보내보지만 돌아오는 대꾸가 없다.
무안한 차민규는 슬쩍 팔을 내리며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독살스럽고 쌀쌀맞은 놈 같으니라고.
아무리 내가 작은고모 아들이라지만 지보다 형인데, 이렇게 하대를 할 수 있는 건가?
차민규는 불만이 가득한 속내를 차마 드러내지 못하고 뒤를 돌았다.
“감시 풀어줄게.”“어?” 차민규는 홱, 돌아섰다.
“어어어어? 진짜? 진짜?!”“당분간만이야. 당분간.”“진짜? 지, 진심이야?!”“왜, 싫어?”백인호가 고개를 들자 차민규는 손을 격하게 휘저었다. 싫을 리가 있겠어?
“아, 아니! 싫은 게 아니라 갑자기 인호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놀라서…….”“수고비라고 생각해. 사고 치면 다시 감시 붙일 테니 알아서 하고.”“알았어. 고맙다, 고마워 인호야.”앞뒤 생각을 잘라먹고 단지 자유가 된 차민규는 싱글벙글 웃음을 보였다.
사람에 대한 감정이 손바닥 뒤집듯 쉽게 뒤집히는 인간. 백인호는 실소했다.
“그럼 나 가볼게. 인호야, 나 너 실망시키지 않을 거야. 사고 안 치고 잘 있을게, 걱정 마라.”“가. 바쁘니까.”차민규는 황급히 사라졌다.
백인호는 차민규가 떠난 자리를 응시하다가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렸다.
“멍청한 놈.”분명 차민규는 활개를 치고 다닐 것이다.
본인의 감시가 느슨해지면 느슨해질수록, 차민규를 향한 서지환의 감시는 빡빡해질 것이다.
“뭐라도 걸려라.” 뭐라도 걸려들어. 그러라고 풀어주는 거니까.
서지환의 감시망에 붙잡혀 작은 일이라도 크게 부풀어져야 한다.
그래야 서지환을 끌어내릴 수 있다.
준비는 되었고,
“지금 나가니까 차량 준비해.”ㅡ네. 알겠습니다. 의원님.기다리면 되는 것이었다.
“아? 벌써 나가시는 거예요? 아침은…….”“…….”서재를 빠져나와 현관으로 나서던 백인호는 말을 걸어오는 아내 희주를 차갑게 외면했다.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 사람처럼 그녀의 존재 자체를 무시한 백인호는 그대로 현관을 빠져나갔다.
희주는 오늘따라 서둘러 나가는 남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뭐지.”그녀는 이른 아침부터 차민규가 다녀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한참 생각하던 희주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서재 쪽으로 향했다.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이고ㅡ 차 검사님 아니십니까?”“양 형사님!”정윤은 경찰서 형사과 부근을 걸어가다가 말을 걸어오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친분이 있는 형사님이다.
“양 형사님, 잘 지내셨어요? 오랜만이에요. 아이들은 잘 크죠?”“예예. 잘 큽니다. 매일 못 봐서 그렇지, 애들은 잘 있습니다.”“매일 집에 못 들어가셔서 힘드시겠어요.”“어쩔 수 없죠, 뭐. 그나저나 차 검사님께서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아.
양 형사는 정윤이 이른 시간 경찰서를 찾아온 이유를 알았다는 것처럼 말꼬리를 흐렸다.
“일단 들어가시죠. 다들 밤을 새워서 지금 거지꼴이긴 하지만.”남 형사! 남 형사!
양 형사는 형사과로 들어가자마자 소리쳐 남 형사 ㅡ 정윤의 전 남편을 불러댔다.
정윤은 당황했는지 양 형사의 팔을 잡았다.
“부르지 마세요. 남 형사 보러 온 거 아닌데.”“예? 현수 보러 오신 거 아닙니까?”“아…… 뭐…….”아…… 이걸 뭐라고 한담. 아니라고 하자니 속 보이고.
그렇다고 하자니 민망하고.
“일단 이거 받으세요.”“예? 이게 뭡니까?”정윤은 일단 손에 든 쇼핑백을 양 형사에게 건넸다.
“김밥이에요. 식전이실 것 같아서.”“캬아, 이렇게나 많이 사 오셨어요? 아이고, 마침 출출해서 컵라면이나 하나 먹으려고 했는데.”잘 먹겠습니다! 양 형사는 반갑게 쇼핑백을 받아 들었다.
형사과에 있던 형사들은 하나둘 일어나 그녀에게 인사했다.
……남 형사는 보이지 않는다.
“아, 조금 전까지 자리에 있었는데 어딜…… 아, 저기 오네요.”양 형사는 초조하게 현수를 기다리다가 손을 뻗었다.
정윤이 호흡을 고르게 하며 고개를 돌려보니 목에 수건 하나 두르고, 손엔 칫솔 하나 쥐고 터덜터덜 걸어오고 있다.
“남 형사! 어이, 남 형사!”양 형사가 부르자 고개를 든다. 피곤함이 묻어 있던 눈빛이 싹 변하며 번쩍, 하는 빛이 인다.
정윤은 낮은 탄식을 터트렸다.
어후, 저 거지꼴. 하여간 변함이 없어요.
“어서 와! 어서 와 짜식이 왜 그러고 서 있어!”양 형사가 급히 부르자 터덜터덜 걸어온다.
“야야, 차 검사님이 손수 김밥 사 오셨어. 인사해.”“……왔냐?”“그래. 왔다.”떨떠름한 인사를 건네오니 정윤도 떨떠름한 인사를 건넸다.
으휴, 내가 이 화상을 보려고 새벽같이 일어나 집에서 20킬로미터나 떨어진 김밥집에 가서 김밥을 사 왔네.
내가 미쳤지. 내가 미쳤어.
“여긴 왜?”“볼일이 있어서.”“아아, 볼일. 봐라, 그럼. 볼일.”현수가 자리로 향한다. 놀란 양 형사는 그를 붙잡았다.
“현수야, 김밥 먹자, 김밥.”“생각 없습니다. 저 눈 좀 붙일게요.”“그 눈 김밥 먹고 붙여. 인마. 김밥 먹자.”양 형사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현수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검사님이 너 먹으라고 사 왔는데, 니가 없으면 우리가 이걸 어떻게 먹어?
지금 나하고 장난해? 응? 장난해?
“하, 그냥 먹지 뭘. 알았어요.”현수는 양 형사의 눈빛에서 많은 것을 읽고 정윤을 힐끔 바라보았다.
턱을 한껏 들고 딴청 부리고 있다.
“따라온나.”“갈 테니 앞장서.”앞장서라니 현수가 돌아선다.
양 형사는 다른 형사들을 불러오겠다며 사라지고ㅡ
“대체 그 남방은 유니폼이니? 아니면 몸에 새겼어? 몇 년째 그거 말고 다른 옷은 안 입는 거야?”이혼 전에도 질리게 보았던 남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정윤이 말하자 현수는 안 들린다는 것처럼 묵묵히 걸음만 옮겼다.
“옷 없어? 좀 버려라, 버려. 낡아도 한참 낡았잖아. 해진 것 좀 봐.”“벗고 안 다니면 됐지 구멍도 안 난 옷이 무슨 죄라고 버려?”하…… 말이 안 통해…….
정윤은 예전 일들이 생각났다는 듯 으으으, 몸서리를 쳤다.
현수가 돌아본다.
“나 뭐 입고 다니는지 궁금해서 왔냐?”“됐거든? 그냥 꼬락서니가 하도 한심해서 하는 말이거든?”아침부터 꽃단장을 마친 정윤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더니, 현수가 입을 연다.
“그러는 너는 귀에다 뭘 달고 다니는 거야. 신종 무기냐?”“시, 신경 꺼! 이게 얼마짜린데!”정윤은 놀라 목청을 높였다. 딴에는 예쁜 거 끼고 온다고, 블링블링하게 늘어지는 귀걸이를 일부러 찾아 했는데.
“남들이 욕한다. 검사가 그러고 다니면.”“허, 검사실 갈 때는 안 하거든? 빼고 다니거든?”“참…… 인생 피곤하게 산다…….”“시, 신경 꺼! 피곤해도 내 인생이야!”역시나 씨알도 안 먹히는 거지.
정윤은 조용히 혀를 끌끌 차며 귀걸이를 바라보는 현수의 눈길에 낯이 뜨거워져 고개를 홱 돌렸다.
김밥 괜히 사 왔어.
아, 진짜,
“열 받아. 아오.”아! 열 받아!
어느덧 김밥을 중심에 두고 형사 너덧이 모여 조촐한 아침 식사가 시작되었다.
정윤은 허겁지겁 김밥을 먹는 형사들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업무 특성상 밤을 새는 일이 수두룩한 형사들의 아침이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캬, 김밥 진짜 맛있네요. 검사님, 이거 왜 이렇게 맛있습니까?”“많이 드세요. 이 집이 김밥을 잘해요.”“김밥 재료들이 범상치 않은데요. 야, 이거 뭐, 이 정도면 요리 아닙니까?”감탄을 늘어놓는 형사들을 보다가 정윤은 짧은 미소를 지었다.
육즙을 가득 품은 한우를 크게 넣고 말아 김밥을 해주는, 특별한 곳.
“이 번쩍번쩍하는 건 뭡니까?”양 형사는 김밥을 들고 물었고, 현수는 묵묵히 김밥을 먹었다.
“아아, 그건 금이에요.”쿨럭. 쿨럭쿨럭. 그러다가 현수는 기침을 쏟았다.
양 형사의 입이 쩍 벌어진다.
“그, 금이요? 금이요?!”“네. 금박이를 좀 넣어줘요. 그 집이 이걸로 유명하거든요.”“저…… 얼마입니까? 이거. 김밥이 아니라 금밥이네요.”“가격은 묻지 마세요. 사악하니까.”정윤이 웃으며 현수를 슬쩍 바라보자 김밥을 실없이 내려다보고 있다.
금이 들어갔다니 형사들의 젓가락질이 빨라진다. 현수는 젓가락을 내렸다.
“왜, 왜 더 안 먹고?”정윤이 묻자 현수는 입을 닦았다.
“배불러.”배, 배가 불러? 안 돼! 더 먹어!
누구 때문에 특별히 고생고생하며 사 왔는데!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드시고 오십쇼.”“들어간다고? 벌써?”“현수야, 야, 야!”그러더니 쓱 일어선다.
정윤은 잡을 타이밍을 놓쳤고, 양 형사는 애타게 녀석을 불렀다.
뒤도 안 돌아보고 자리를 떠나니 당황함에 말을 잇지 못하던 정윤이 나중에야 다시 말을 이었다.
“남현수 형사님!”……불리할 땐 치사한 게 최고다.
그녀가 부르는 공적인 호칭에 현수는 돌아보았다.
하, 저렇게 부르면 어쩔 수 없이 돌아보게 되어 있다.
정윤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깐만요. 남현수 형사님께 일적으로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남 형사님, 시간 좀 내주시죠?”“……따라 오십쇼.”현수는 짧은 대꾸와 함께 밖을 나섰다.
언제나 칼자루는, 그녀가 쥐고 있었다.
“뭐? 대표님이 출국을 했다고?”이른 아침, 외출 준비를 하던 희원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구언에게 무슨 일로 아침 댓바람부터 전화가 왔나 했더니.
“왜? 언제? 이렇게 빨리?”주혁이 출국을 했단다.
ㅡ난들 아나. 나도 들은 이야기라서. “아…… 그랬구나.”희원은 거울에 반사되는 지환을 힐끔 바라보았다.
양손을 자유롭게 쓰며 넥타이를 매고 있는 지환의 표정은 무척이나 태연했다.
속으로 개다리춤을 신랄하게 추고 있지만 그녀는 모를 일이다.
“그랬구나, 출국하셨구나.”ㅡ그러게. 엄청 급하게 준비해서 바로 떠났다고 하더라고.무엇 때문에 그렇게 급하게 출국을 감행했을까. 희원은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주혁은 이제 한국을 떠올리면 드럽게 탄탄한 상체를 자랑하던 구언을 떠올리게 되었지만.
권희원 이름 석 자보다 더욱 강렬한 유구언을 기억에 남기게 되었지만.
뭐, 알 턱이 있나.
“바쁜 분이니까 일이 있어서 출국했겠지. 뭐, 그럴 수 있는 일이니까.”ㅡ그러게 말이야. 휴. 정말로 끝난 일이 되었다. 데니스 한은 이제 영영 그녀를 찾지 않을 테니 말이다.
한편으로는 씁쓸하고.
“그래.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니까. 그런데 너, 이거 말해주려고 전화한 거야?”자신을 사랑하게 될 거라고 뻔뻔하게 자부하던 주혁의 술주정을 떠올리니 모든 상념이 날아간다.
주혁의 출국.
그녀가 원했던 결말은 아니지만, 원치 않던 결말도 아니었다.
ㅡ아, 시간이 아직 이르구나. 미안. 몰랐어. 난 지금 밖이라.“아, 그래. 너무 이른 아침이다, 구언아.”구언이 당황하자 희원은 장난스럽게 놀려대며 웃음을 터트렸다.
지환은 힐끔, 웃는 희원을 바라보았다.
ㅡ남편…… 형은 출근했냐?“아니. 옆에서 넥타이 매고 있어.”엇. 내 얘기 한다.
지환은 걸음을 옮겨 희원의 곁으로 다가왔다.
타이를 매끈하게 매고 서서 화장대에 앉아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거울에 반사되는 그의 얼굴을, 그녀는 올려다보았다.
ㅡ출근 준비하는구나.“어…… 어, 그렇지. 출근 시간이니까.”그는 희원이 쥐고 있던 빗을 가져갔다. 그러곤 그녀가 전화를 받기 전 빗던 머리를 마저 빗겨 주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물끄러미 그의 행동을 거울로 지켜보았다.
ㅡ뭐 하는데 말이 없어?“아니, 서지환 씨가 머리 빗겨주고 있어서.”ㅡ……끊자.머리를 다 빗은 지환은 정갈하게 손으로 쓸어 한 손에 그녀 머리칼을 쥐었다.
적당한 높이로 들어 올려 쥐자 목덜미가 훤히 드러난다.
ㅡ끊자고, 희원아.“……어? 어어어. 어어.”ㅡ뭐 하는데 이렇게 또 넋이 나갔어.“아니, 서지환 씨가 머리를 묶어줘서…….”정신없이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딱히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닌 것처럼 그녀 음성엔 긴장했음이 역력했다.
ㅡ그래, 자상한 남편이네. 와이프 머리도 다 묶어주고.체념한 듯 구언의 음성이 들리지만 그녀 귓가에 고이질 않는다.
지환은 마저 통화하라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ㅡ요즘 왜 이렇게 결혼이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 나도 결혼하면 부인 머리 예쁘게 묶어줄 자신 있는데.지환은 뽀얀 그녀 목덜미에 기습적으로 입을 맞췄다.
뜨끔하니 놀란 희원이 헙, 소리를 내자 구언의 목소리가 의미심장해진다.
ㅡ방금 그 소리는 또 뭐야. 뭐야, 권희원. “눈치가 이렇게 없어? 끊어.”지환이 희원이 귓가에 대고 있는 휴대폰 가까이 입술을 대며 말하자 구언이 질색한다.
ㅡ뭐, 뭐, 뭐 하는 거예요! 통화하는데 끼어들고!“누가 이 아침부터 끼어든 건지 잘 좀 생각해줬으면 좋겠는데. 시도 때도 없는 신혼부부의 아침을 방해하는 건 대체 누구?”ㅡ출근이나 해요! 출근이나! 아침부터 이 사람이 진짜!“시끄러. 출근보다 더 중요한 게 많아. 신혼부부 아침엔.”ㅡ와, 와, 더러워. 더러워! “더러우면 끊어. 나도 생중계하고 싶지 않으니까.”끊어! 지환은 소리를 버럭 지르며 툭 전화를 끊어버렸다.
앗아가듯 휴대폰을 빼앗은 지환은 화장대에 그녀 휴대폰을 내렸다.
이윽고 다시 평온해진다. 희원은 목덜미에 뜨끈하게 남은 그의 온기에 몸을 약간 움츠렸다.
“대표 출국했대?”“아…… 어, 네.”“그거 잘됐네.”“그런데…… 지금 뭐 하는 거예요?”“뭐 하긴. 거울 보잖아. 출근하려고.”지환은 희원의 뒤에 바짝 붙어 허리를 숙였다.
그녀의 어깨에 턱을 괴듯 내리고는 거울을 들여다본다.
그런데,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다.
“내, 내 얼굴은 왜 보는 건데?”그의 상체가 너무 붙어 있다는 생각에 희원의 얼굴이 붉어진다.
지환은 빤히 그녀 얼굴을 바라보다가 입술을 열었다.
“계속 생각해왔던 건데.”“…….”“당신하고 나, 이제 좀 가족 같아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방금 뿌린 향수는 아직 날아가지 않고, 그의 몸에 깊게 스몄다.
“가족 같아져야 하는 건 어떤 건데요? 난 잘 모르겠는데?”희원이 거울 속 지환과 눈을 맞추며 묻자 그는 시원하게 웃었다.
질문이 마음에 든다는 것 같다.
“어쩌나. 질문에 대한 답을 말로 하긴 싫은데. 뭐, 어차피 오늘 안에 알게 되겠지만.”그녀의 어깨에 턱을 괴고 있던 그의 얼굴이 움직인다.
비스듬히 각도를 바꾸자 목덜미로 그의 숨이 퍼진다.
“부인, 나 오늘 출근 좀 늦게 할까?”“…….”“그래도 되는데.”간지럼을 태우듯 목소리가 목덜미를 괴롭힌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출근해야지…….”참아보려던 노력도 부질없이, 몸이 반응한다.
희원은 간지럼을 못 참겠다는 것처럼 어깨를 올리며 팔을 들었다.
그의 손이 내려와 팔을 잡는다.
“그럼 오늘은 일찍 올게. 당신도 일찍 와야 해. 선물이 있으니까.”말끝에 입술이 목덜미로 묻힌다.
희원은 눈만 커다랗게 뜬 채 거울에 반사되는 그를 응시했다.
으아아, 정직한 오감이 널을 뛴다.
“왜, 왜 이렇게 야해졌어. 서지환 씨.”“그래서, 싫어?”“……묵비권 행사할래.”희원이 대답을 포기하자 지환은 짧은 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귀여워 웃는 줄도 모르고 희원은 지환의 공격력 상승에 순진한 반응을 이어갔다.
지환은 목덜미에 깊게 묻었던 입술을 떼며 힐끔,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녀 놀란 얼굴이 볼 만하다.
“아니, 서지환 씨. 렙업 구간도 거치지 않고 하루 사이에 이렇게 만렙을 찍으려고 하면 어떡해. 왜 이렇게 야해.”“무슨 소리 하는 거야, 니가 더 야해.”“내, 내가 뭘요!”지환은 눈이 휘둥그레진 희원을 바라보다가, 다시 귓가를 괴롭히듯 입술을 가져다 댔다.
움찔움찔하며 희원이 어깨를 움츠리자 잡고 있던 그녀 손에 힘을 주었다.
그의 시선은 얼굴로, 목선으로, 그리고 어깨로.
“가운 속에 아무것도 안 입었잖아.”조금 더 아래로.
“말해봐. 지금 누가 더 야한지.”“헐…….”어, 어떻게 알았지?!
희원은 놀란 입술을 멍하니 벌렸다.
씻고 나와 몸이 완전히 마를 때까지 가운만 입고 있는 버릇은 못 고치겠더라.
어지간하면 지환이 출근한 뒤에 씻고, 퇴근하기 전에 씻으며 자유롭게 있었는데, 오늘처럼 그녀 또한 일찍 나가야 하는 날이 문제였다.
그래서 겉으론 태가 안 나는, 무척 두툼한 가운을 구입해서 입고 다녔는데.
아, 알고 있었던 거요?!
언제부터?!
“서지환 혹시…… 투시도 하니……?”“뭐, 할 수도. 안 할 수도.”희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 으흐, 낯이 뜨거워진다.
“어…… 아…… 서지환 씨가 알고 있었구나…… 난 모르는 줄…….”“일찍 올게.”일찍 올게. 무언가 어울리지 않는 듯 어울리는 답을 내어놓는다.
그의 대답 사이에 숨어 있는 뜻을 알아들을 수밖에 없어 희원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잠시 후,
“……후, 농담 아니고 진짜 힘들다.”지환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곤 무언가 꽉 참고 누르듯 미간을 좁히며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붉어진 그녀 귓불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그는 씩 웃었다.
조금 전까지 위험하던 분위기를 모두 지워낸 천진한 웃음이다.
“일찍 올 테니 혹시 먼저 오거든 부인은 남편 기다립니다. 알겠습니까?”“아…… 어…… 으으…….”이상한 소리를 내며 희원이 질색하자 지환은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오늘, 늦지 마.”“…….”“아아, 늦어도 돼. 물론 일이 있으면 늦어도 되는데.”그는 재킷을 들었다.
“아무리 늦게 들어와도 쉽게 잠은 못 잘 거야.”아직 출근도 안 했는데, 퇴근하고 싶어지는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