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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사소한 것들에 대하여 (66/98)

66. 사소한 것들에 대하여

몸은 떨어지고, 마음은 붙어버린 시간.

보이는 풍경 말고는 그 무엇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 시간.

희원은 엎드린 채 고개를 옆으로 돌려 그를 바라보았고, 지환은 비스듬히 누워 그녀를 바라보았다. 

둘 사이 중간 어디쯤 뻗어놓은 그녀 손 위로 그는 손을 포갠 뒤 꽉 쥐었다. 

……웃음이 전염된다.

“서지환 씨, 왜 웃어?”“그거야 네가 웃으니까. 그러는 당신은 왜 웃었는데.”“나는 뭐, 내가 웃으면 어쩐지 서지환 씨가 따라 웃을 것 같아서.”싱거운 말들이 오고 간다.

“이런 말, 조금 오글거릴까? 난 이제 정말 서지환 씨하고 부부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오글거린다니. 설마, 그럴 리가.”“부부, 부부 된 것 같다. 서지환 씨하고 나. 우리, 진짜 부부.”부부. 그녀는 계속해서 같은 단어를 곱씹었다. 

그 오묘하고 대단한 단어 속에 이제야 우리가 포함된 것만 같으니 경건한 마음마저 들었다. 

희원은 미뤄두었던 피곤이 몰려온다는 것처럼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모든 것이 멈춰 있다 보니 상대의 사소한 움직임도 크게 느껴진다. 

지그시 감았다가 뜨는 눈빛도, 웃을 듯 말들 살짝 올라간 입술 꼬리도.

서로 부둥켜 쥐고 있는 손끝에 실리는 힘의 강약 또한. 

“……따뜻해.”희원은 지환이 붙잡고 있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손으로 스며든 그의 온기는 심장 부근까지 흘러와 고이고, 몸집을 불려갔다. 

타인의 온기로 나를 따뜻하게 만드는 일, 상상이나 해본 적이 있었던가. 

“솔직히 말하면요. 결혼해서 이렇게 살 수 있을 거라고는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 못 했어.”희원이 고백하듯 말하자 지환은 긍정하듯 미소 지었다. 

같은 마음, 같은 생각이었으니까. 

“결혼 생활이 이렇게 따뜻할 줄이야. 진짜 몰랐어요.”“나도 몰랐어.”이런 삶과 나의 인생은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도 생각했지. 누군가를 애타게 사랑하기엔 나는 나를 너무 사랑했고, 내가 다치거나 위험한 일에 놓이는 것을 누구보다 원치 않았다. 

모험이 두려웠기에 결혼 또한 두려웠다.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이란 언제나 두려움을 동반했으니까. 

그녀의 말이 끊기자 지환은 이불을 조금 더 끌어 그녀 등을 덮어주며 중얼거렸다. 

“조금만 더 일찍 만날걸. 권희원을 조금 더 일찍 만나서 일찍 사랑하고 일찍 이렇게 살걸, 자꾸 그런 생각이 드네.”“지금도 늦진 않았잖아. 모든 경험과 시간엔 이유가 있는 거니까요.”그럴까. 그런 걸까.

긴 터널을 지나왔기에, 나는 너를 알아본 걸까. 

그런 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네가 더욱 귀하게 여겨지는 걸까. 

“그래. 당신 말대로 그럴 수도 있겠다.”……그렇다면 감사하겠다. 

지나온 모든 터널을 돌아보며, 그래도 잘 지나왔다 말할 수 있겠다. 

지환은 희원의 머리를 쓸어 넘겨주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결혼, 그리고 부부.

찾지 않아도 누군가 항시 곁에 머문다는 강제성. 절대로 혼자인 순간이 찾아올 수 없는 자유의 박탈. 

그러한 일들이 어떤 날엔 피로감을 몰고 올지 모르지만ㅡ

분명 원하고 바라던 삶은 아니더라도, 언젠간 우리의 마음도 닳고 다는 날이 올지라도. 

대부분의 날은 서로가 곁에 있음으로 따뜻하리라. 

그 순간, 그녀와 그는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아, 이제 열두 시 지났다.”“응, 열두 시? 열두 시는 왜?”“생일 축하해.”생일 축하해. 시계가 열두 시를 가리키자마자 그의 입술 밖으로 기다렸다는 듯 축하의 말이 튀어나왔다. 

……사람을 살아가게 만드는 건 언제나 사소한 것이다. 

사소한 것. 그렇게나 소소하고 소박한 것.

나눈 말, 받아낸 눈빛, 

내 어깨가 시릴까, 목 끝까지 올려준 이불 끝의 온기 같은ㅡ 

“축하해. 진심으로.”희원은 듣고 또 들어도 나쁘지 않다는 것처럼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태어나줘서, 고맙습니다. 부인.”

덜컥, 나는 네게 간다. 

‘차 검, 오늘 끝나고 뭐 하냐? 저녁 같이 먹을래?’‘됐어. 오늘은 생각 없어.’동료 검사가 퇴근 시간 즈음 찾아와 저녁을 함께 먹자 청했지만 정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이 끝나자마자 집으로 돌아온 정윤은 도어록 비밀번호를 꾹꾹 눌렀다. 

‘야, 차검 네가 웬일이냐? 저녁을 다 마다하고? 약속 있어?’‘아냐. 그건 아닌데, 그냥 오늘은 입맛이 좀 없다.’‘뭐, 뭐라? 입맛이 없다고? 네가?’딱히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니라면서 식사 자리를 거절하는 정윤이 이상했는지 동료 검사는 의심 많은 눈초리를 했다. 

‘서검은 오늘 와이프 생일이라고 바쁘다던데. 생일 밥을 차려야 한다나 어쩐다나.’‘……아아, 그렇구나.’‘차검 오늘 진짜 이상하네. 무슨 일 있어?’그러고 보니 오늘따라 기운도 없어 보이고. 

평소의 그녀처럼 씩씩한 목소리도 사라지고.

‘나 먼저 퇴근할게. 수고!’동료 검사에게 의혹만 남긴 채 정윤은 퇴근길을 재촉했다. 

잠금장치가 풀리고 현관문이 열린다. 정윤은 깜깜한 어둠에 휩싸인 집 안으로 한걸음 들어섰다. 

쿵, 문이 닫히고 적막한 공간 속 혼자 우두커니 섰다. 

보일러를 켜두지 않은 집 안 공기는 차가웠고, 어디에도 온기가 없어 이곳이 집인지 밖인지 구분도 되질 않았다. 

천천히 신발을 벗고 정윤은 집 안으로 들어섰다. 

버릇처럼 불을 켜고 가방을 내린 그녀는 곧장 주방으로 들어가 냉수를 꺼냈다. 

벌컥벌컥 물을 가득 삼키고 나서야 휴, 긴 숨을 불어 내쉬었다. 

그녀의 이토록 기분이 좋지 않은 건ㅡ

점심때쯤 휴대폰으로 도착한 메시지 한 통이 화근이었다. 

[두 분의 결혼기념일을 축하드립니다. 결혼반지 및 예물 관련 디자인 변경이 가능……]

몇 년 전, 

오늘 나는 결혼을 했다. 

[……므로 언제든지 방문 주시면 저렴한 비용과 최상의 서비스로 정성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XX 주얼리]

아마도 그 당시 예물을 맞췄던 곳에서 결혼기념일을 맞이하는 부부들에게 홍보용 메시지를 발송한 것 같았다. 

점심으로 뜨끈한 칼국수를 먹다가. 

후후 불며 먹기 좋은 만큼의 양을 들어 입안으로 직행하다가. 

무심결에 확인한 문자 메시지 한 통에, 모든 것을 멈췄다. 

“휴, 이게 뭐라고 또 이렇게까지.”정윤은 빈 유리컵을 쥐고 중얼거렸다. 

시간은 기이할 지경으로 돌아가 그때의 나를 데려다주었다. 

지환과 똑같은 곳에서 치렀던 결혼식, 견줄 바 없이 화려했던 웨딩드레스.

보석보다 빛날 거라 확신했던, 웃음과 시간들.

“……휴.”정윤은 다시 찬물을 가득 따랐다. 벌컥벌컥 삼키고는 입가를 닦았다. 

고개를 들어 찬찬히 거실을 둘러보니 ‘결혼을 했다’는 흔적을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둘러보다가, 유리컵만 매만지다가, 그녀는 피식 웃었다. 

“알기나 알까? 오늘 결혼했다는걸?”아아, 모르겠지. 그는 아마도 모를 것이다. 

내가 알고자 알아낸 것이 아니듯 그도 누군가 알려주지 않으면 결단코 알지 못하리라.

그렇지. 모르겠지. 모르고 지나가는 게 당연한 일이지. 

우리가 몇 년을 남처럼 살아왔는데. 모르겠지. 

“아, 왜 이렇게 궁상이야. 진짜. 차정윤, 마음에 안 들어.”정윤은 마치 스스로를 다그치듯 중얼거리고는 유리잔을 내렸다. 

으으. 청승떨지 말고 씻자, 씻어. 

“좋아. 오늘은 초특급 스페셜하게 아끼고 아끼던 너를 입어주겠어.”터덜터덜 옷 방으로 들어간 정윤은 도톰하고 부드러운 가운을 꺼내려고, 옷장을 열었다. 

프랑스 여행지에서 거금을 들여 사 왔지만 정작 아까워 입어보지도 못하고 걸어만 두었던 비싼 가운이다. 

그곳, 프랑스 장인이 혼을 담아 기껏해야 1년에 30장 정도 만든다는 가운은 아주 오래전에 구입했지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흡족해서 실제로 입지는 못했다.  

사실 이미 입을 가운이 많기도 했고.

그래. 드디어 오늘이다. 내가 너를 입어주마.

정윤은 어렵지 않게 가운을 찾아낸 다음 부드럽게 쓸어보았다. 벌써 촉감이 예술이다. 

“집어 들자마자 벌써 기분이 막 풀리는데? 어? 막 격렬하게 씻고 싶어지는데?”어? 이거 엄청난데? 미친 듯이 씻고 편안하게 입어주고 싶어지는데?

너란 가운, 엄청난데?

정윤은 입고 있던 재킷을 벗고 보일러를 틀었다. 

그래, 따뜻하게 지내자. 이렇게 궁상떨 일 뭐 있어? 나는 내가 사랑해주고 있는데. 

뜨신 집에서 뜨신 밥 먹고, 뜨시게 자면서 이런 멋지고 예쁜 가운이나 입고 살면 될 일이지.

“저녁엔 와인이나 한잔할까? 가운 입고? 오, 괜찮은데?”끊임없이 움직이며 혼잣말을 내뱉던 정윤은 옷걸이에서 가운을 벗겼다. 

그러자 툭, 하고 함께 걸려 있던 무언가 떨어진다. 

“…….”넥타이다. 

정윤은 발아래 떨어지는 넥타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가벼운 넥타이가 소리도 없이 부드럽게 떨어져 내리는 그 순간, 그녀가 감당하지 못할 많은 기억들이 쏟아졌다. 

너에게 주겠다고 샀던 선물. 

가운 속에 넥타이를 몰래 숨겨두고 네가 발견하기를 바랐던, 선물.

“아…… 이게 있었네…….”끝끝내 발견하지 못하고 네가 사라져버려, 주인을 잃어버린 선물.

너의 모든 것이 사라진 이 집에서, 숨죽인 채 홀로 자리를 지켜온ㅡ

“미치겠다, 이거 뭔데. 이게 왜, 갑자기 왜…….”선물. 그 철 지난 넥타이를 내려다보며 정윤은 입술을 사리 물었다. 손끝이 힘을 잃어 가운은 발아래로 떨어졌다. 

갑자기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한 감정들이 하나로 뭉친 듯 거대해져 밀려온다. 

이것이 그리움인지 분노인지, 사랑인지 후회인지, 

미움인지 외로움인지 구분도 되지 않는.

“뭔데…… 뭐냐고…….”우린 존재했었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끝난 결혼기념일 따위, 넥타이 하나가 기억해주고 있는 것만 같아 발끝이 저렸다.  

그날의 나는 알고 있었을까, 결국엔 우리가 헤어질 거라는걸.

알았다면 만나지 않았을 텐데. 알았다면 결혼 같은 건, 하지 않았을 텐데.

“아, 미친다. 진짜. 뭐 이런 그지 같은 일이 다 있어.”정윤은 흔들리는 지금의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격양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안 돼. 지금 하려는 모든 일들을 멈춰야 해. 

우울해선 안 되고, 슬퍼서도 안 돼. 이미 끝난 일을 기억하며 감정을 허비하는 건 절대로 안 돼. 

어른이 되는 건 싫지만, 어른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으니까. 

……휴,

정윤은 다시 가운과 넥타이를 집어 들었다. 

주인 잃은 넥타이는 버리고 나면 그만이지. 발견했다고 의미 부여를 한다거나, 감정놀음에 취해 이 밤을 망칠 수는 없는 거다. 

그동안 잘 지내왔으니까. 

하지만.

“아…… 뭐냐고, 진짜…….”그때의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똑똑하게 기억이 나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기 힘들었다. 

머리는 자꾸만 외치는데,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뭔데…… 진짜…… 진짜 뭔데…….”……사람을 무너지게 만드는 건 언제나 그따위 것이다. 

그따위 것. 그렇게나 작고 시시한 것. 

감춘 말, 밀어낸 눈빛,

만나면 추억이 쌓일까, 염려되어 다신 얽히고 싶지 않은 미련만큼ㅡ

작고, 보잘것없는, 그따위 것.

“대체…… 이게 대체 뭐라고…… 이게 뭔데…….”정윤은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깊은 웅덩이에 빠진 것처럼 기억 안에서 꼼짝없이 허우적거렸다. 

그러곤 생각했다. 

“뭔데…… 뭔데 자꾸 생각이 나…….”

왈칵, 네가 내게 쏟아진다. 

“여보세요? 현수?”ㅡ형님 뭐 하십니까?“난 집이지. 이 시간에 웬일이냐?”희원과 함께 잠자리에 들고자 했던 지환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새벽에 들어선 시간, 느닷없이 걸려온 전화 한 통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정윤의 전 남편 ㅡ 남현수 형사다. 

ㅡ일하다가 갑자기 형님 생각이 나서.“이 시간에? 갑자기? 내가?”제가요? 이 시간에요?

대체…… 왜……?

지환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뚱한 표정으로 희원을 바라보았다. 

이불 속에 폭 파고들어 얼굴만 내어놓은 희원은 동그란 눈만 감았다가 뜨며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지환은 그녀 얼굴을 어루만지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통화 좀 하고 올게. 지환이 입모양만 뻥긋거리자 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실로 나온 지환은 휴대폰을 반대편으로 옮기며 입술을 열었다. 

“이 시간에 대체 무슨 짓을 어떻게 해야 내 생각이 나냐? 전개가 옳지 않은데?”ㅡ아, 그냥 그런 줄 알면 되지 뭐가 또 이렇게 절차가 복잡합니까?“새벽에 내가 너한테 전화해서 니 생각이 났다고 하면, 너는 반갑겠냐?”ㅡ……아뇨.“그래. 내 마음이 꼭 그런 상황이야. 뭔 일 있어?”보통의 사내들이 그러하듯, 이슥한 새벽에 걸려온 상대에겐 목적이 있으리라 확신했다. 

사사로운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도 아니었고, 목적 없이 통화를 하는 사이는 더더욱 아니었고. 

“일하는 중이라니 술 먹자고 전화한 건 아닐 거 아냐.”ㅡ뭔 술입니까, 일 없습니다. 그냥 했다니까요.“웃기시네. 뭔 일 있구만. 혹시 취조하다가 누구 때린 건 아니지? 나 지금 너 잡으러 가야 하는 거 아니지?”ㅡ아, 이 형님 진짜, 그냥 했다고요 그냥.……세상에 ‘그냥’처럼 무서운 말이 없다. 

지환은 무슨 일이 있겠거니. 녀석의 마음을 지레 짐작하며 소파에 앉았다. 

때로는 무작정, 막무가내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싶어질 때가 있는 거니까.

그만큼 복잡한 사연이 있다거나.

“그래. 그냥 했다니 할 말은 없는데 현수야, 전화 한 김에 우리 언제 보냐?”시시콜콜한 대화나 주고받으며 뜨거운 머리를 식히고 싶다거나.

그런 날도 있는 거니까.

ㅡ조만간 만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팔은요, 다 나았고?“다 나았지. 깁스도 풀고. 나야 뭐 워낙 회복력이 짐승 같으니까.”피식, 현수가 웃는다. 

지환은 소파에 머리를 기대며 녀석의 웃음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딘가 모르게 힘이 빠진 듯한 녀석의 웃음소리.

“그래. 조만간 보자. 날짜는 네가 정해서 통보해주고. 나보단 네가 바쁘니까.”ㅡ예예. 그나저나 형님은 지금 신혼인데 만나줄 시간이 있겠습니까? 저보다 더 바쁠때 아닙니까?“야, 기억 안 나? 나 너 신혼 때 너랑 살다시피 했다. 뭔 소리…….”……아아. 괜한 말을 뱉었다. 

지환은 급히 말꼬리를 흐리며 수습해보지만 이미 뱉은 말을, 현수가 듣지 못했을 리 없다. 

ㅡ이혼 사유의 절반은 형님이 가지고 있는 거 알죠. 두고 봅시다. 내가 이를 갈고 있으니까.“후회하는 것처럼 말한다? 이를 갈고 있을 만큼 이혼, 후회하냐?”ㅡ또, 또. 이 형님하고는 무슨 말을 못 하겠네. 농담은 좀 농담으로 끝냅시다. 누가 검사 아니랄까 봐 인과관계 참 따져요, 하여튼 간에.“니가 말하면 농담도 진담처럼 들려. 알면서 그래.”ㅡ하여튼 끊어요. 혹시나 해서 전화했는데 역시나 할 말이 없네요.“그래. 끊자. 나도 이 시간에 너랑 통화하는 거, 엄청 부담스럽고 버거우니까.”역시나 싱겁게 전화를 끊으려고 한다. 

지환은 결국 속내를 드러내지 못하고 전화를 끊으려 하는 현수에게 한마디 덧붙였다. 

“이 시간에 차검 안 잘걸. 야행성이라. 정 심심하면 전 와이프에게 전화나 해보든가.”ㅡ아, 진짜. 왜 이래요.“원래 인마, 전 남친, 전 남편 같은 사람들은 새벽에 전화하는 거야. 그때 아니면 할 수가 없거든.”ㅡ경험담 잘 듣고 갑니다. 다음에 형수님 만나면 형님 경험담 들려 드려야지.“이 자식이,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이질 못해.”ㅡ끊습니다. 조만간 뵙시다. 무엇이 심란한지 결국 한 마디도 해주지 않고, 녀석은 전화를 끊었다. 

끊긴 전화, 휴대폰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지환은 흠ㅡ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인가. 

알고 싶었지만 또 모르고도 싶었다. 

타인의 근심이란, 자신이 해결해줄 수 있는 부분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지환이 통화를 하고 들어오겠다며 자리를 비우자 희원은 이불 속에서 뒤척거렸다. 

내일 연습을 나가려면 이제 자야 하는데. 

왜 이렇게 잠은 오질 않고 그와 나란히 누워 살을 맞대고 싶은지 모르겠다. 

자는 시간도 아까워. 그냥 이렇게 누워서, 온종일 그의 얼굴만 들여다보고 싶어진다. 

“다 들린다, 다 들려.”희원은 통화 소리가 다 들리는 까닭에 웃음을 터트렸다. 

저럴 거면 뭐 하러 불편하게 나가서 통화를 하나 싶은 모양이다. 

띠링, 하며 그녀의 휴대폰이 울린다. 

몸을 뒤척여 휴대폰을 붙잡은 희원은 전화를 걸어온 상대를 확인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시간에? 왜?

“여보세요?”혹시 내 생일을 알고 전화했나?

ㅡ여보세요? 희원 씨, 정우철입니다.“네네. 안녕하세요.”희원은 시간을 확인하고는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다름 아닌 공연 관계자다. 

한 번도 통화해본 적 없는 사이, 생일이라 전화를 했구나 말고는 따로 짐작가는 일이 없었다. 

아아, 생일이 대체 뭐라고.

민망하고 무안한 까닭에 웃음부터 나왔다. 

ㅡ너무 늦은 시간인데 죄송합니다. “아녜요. 아녜요. 아직 안 자고 있었어요.”이렇게 무용수들을 안팎으로 챙겨주는 사람인지 몰랐다. 

공연 관련 사무일을 처리하는 사람이라 관계가 데면데면해서, 이름 정도나 겨우 트고 지냈는데.

뭔가 기분이 몽글몽글해진다. 그녀 목소리는 더욱 상냥해졌다. 

ㅡ지금 연락을 안 드리면 내일 아침에 걸음을 하실 것 같아서 실례를 무릅쓰고 전화를 드렸습니다.“……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하지만 기대는 빠르게 식고ㅡ

ㅡ아…… 이런 말씀을 전하게 되어서 저도 상당히 유감입니다만…….급속도로 맥이 뛰어올랐다. 

불안함을 예상한 심장은 종잡을 수 없는 관계자의 다음 이야기에 조여왔다. 

“공연 상에 무슨 일이 생겼나요?”ㅡ그게, 그러니까요. 아…… 이게…….관계자는 자꾸만 말꼬리를 흐렸다. 희원은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켜 반듯하게 앉았다. 

쿵, 쿵, 쿵, 쿵, 가슴은 뛰고 마른침은 저절로 넘어갔다. 

공연이 취소됐나? 그럴 리가? 섭외한 그 많은 해외 무용수들은 다 어떡하고?

뭐지?

ㅡ희원 씨, 내일부터 우리 쪽으로는 연습 안 나와도 될 것 같습니다. “……네?”네? 

함부로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희원은 멍한 눈빛을 들었다. 

ㅡ아…… 저도 이게, 아…… 이런 말은 정말 하고 싶지 않은데 일이 이렇게 됐습니다. 죄송합니다.“아뇨, 똑바로 말씀을 해주셔야죠. 무슨 일인데요.”급기야 그녀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밖에선 그가 친한 동생과 통화 중이고ㅡ 

ㅡ세계무용축제에서 한국무용이 통째로 빠졌어요. 희원 씨 무대도 취소됐고요.“아…… 네? 왜요? 어쩌다가? 아, 예? 뭐라고요?”질문의 순서가 뒤죽박죽이다.

희원은 이마를 짚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리가 일순 무거워져 고개를 들기가 힘든 지경까지 이르렀다. 

관계자의 목소리엔 한숨과 미안함이 가득했다. 

ㅡ죄송합니다. 갑자기 일이 이렇게 돼서.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정한 일은 아니지만 따로 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아뇨. 이렇게, 아니, 이렇게 갑자기 통보를 하시면 어떡해요. 이래도 되는 건가요?”ㅡ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윗선에서 정한 일이라…… 저는 그저 결과만 전달해드리는 겁니다.이슥한 새벽. 

생일.

그녀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ㅡ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희원 씨.공연 취소 통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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