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쾅ㅡ!
아침, 사무실 문이 열리자마자 희원은 들이닥쳤다.
책상 정리를 하던 직원들은 경직된 표정으로 들어서는 희원을 바라보았고, 대부분은 그녀가 들이닥친 이유를 알지 못해 고개를 갸우뚱했다.
“사무장님 어디 계세요?”“예? 사무장님요? 아직 출근 전이신데…….”“……하.”희원은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전투력을 급상승시키고 들어섰는데, 출근 전이란다.
사무실 직원들은 왜 저러나 싶은 표정을 지은 채 무료한 아침 준비에 여념이 없고, 덩그러니 홀로 서서 희원은 잠시 시간을 죽였다.
어제부로 한국 무용 무대가 취소되었다는 건 아직 전달받지 못한 직원들이다.
“저, 희원 씨. 혹시 무슨 일 있으세요? 사무장님 출근 시간이 좀 뒤죽박죽인데. 아침 일찍 나오시는 일은 별로 없거든요.”“기다릴게요. 언젠간 오실 테니까요.”“그러지 말고 그럼 앉아서 기다리세요. 저쪽 탕비실…….”직원이 희원에게 앉을 자리를 권하는, 그때였다.
열리는 문틈으로 사무장이 통화를 하며 등장했다.
“예예, 예예. 알죠. 예, 백 의원님 말씀이 옳습니다. 저희도 일단 다시 공연 내용 점검해서 꽉꽉 채워보겠습니다.”상대가 눈앞에 있다는 듯 약간 굽어진 허리를 하고 있다.
온 신경이 휴대폰에 쏟아져 있는지라, 사무장은 아직 희원을 발견하지 못했다.
“예. 예, 의원님. 조금 더 괜찮은 인물들로 명단 뽑아보겠습니다. 섭외가 문제겠습니까, 예산만 넉넉하게 챙겨주신다면…….”예. 예예. 알겠습니다. 예. 의원님.
예. 예. 예. 들어가십시오. 예, 의원님. 살펴 가십시오! 의원님!
……전화가 끊긴다.
사무장은 굽실굽실하며 통화를 하다가 전화가 끊긴 것을 확인한 뒤에야 허리를 폈다.
자동반사적으로 미간에 주름이 진다.
“드럽게 참견질이네. 예산이나 얹어주고 구경이나 할 것이지 뭐 이런 것까지 참견하고 난리야. 지지율 올리려고 갖은 지랄을 다 해요, 지랄을.”덕분에 일거리가 늘었으니 반가울 리 없다.
사무장은 짜증을 토로하며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돌아서다가.
“아…… 희원 씨.”그녀를 발견했다.
사무장이 당황한 듯 놀란 음성으로 아는 척을 해오자 희원은 더욱 굳은 표정을 했다.
“아이고, 희원 씨.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어요. 바쁘실 텐데.”이내 웃는 얼굴로 표정을 바꾸며 사무장이 인사를 건네오니 희원은 마른 주먹을 쥐었다.
어제 새벽, 자신에게 전화를 주었던 관계자가 사무장의 뒤를 따라 들어서고ㅡ
그녀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리며 헛기침을 내뱉었다.
직원들은 일이 터졌음을 직감하고는 슬그머니 자리에 착석했다.
“잠깐 시간 좀 내주세요. 사무장님.”“시간요? 아이고, 희원 씨. 제가 지금 오전 일이 바빠서 글쎄요, 손님도 오실 때가 되었고 시간을…….”“그럼 여기서 말할까요? 저는 상관없는데.”이곳에 모여 있는, 그녀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만 온전하면 된다.
나만 피해 없으면 된다.
“시간 내주시죠. 없어도 만드세요, 사무장님.”그것이 가늘고 오래, 회사에 다닐 수 있는 법칙이었으니까.
“사무장님 아무리 변명하셔도 오늘 저, 못 피해요.”
“흠, 여기 자주 출몰한단 말이지.”정윤은 요즘 들어 차민규가 자주 등장한다는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낮엔 단순한 카페로 영업을 하다가, 밤엔 최고급 와인과 위스키를 판매하는 공간으로 바뀌는 곳이었다.
야경이 끝내주는 루프탑 덕분에 요즘 핫플레이스로 등극한 가게다.
셀럽들이 모여드니 자연스럽게, 돈을 가진 자들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주문하시겠습니까?”적당한 곳에 자리 잡고 앉자 직원이 다가온다.
한눈에 보아도 앳된 얼굴, 정윤은 힐끔 직원을 바라보다가 대강 아무거나 주문하며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일인지 요즘 차민규는 봉인이 풀린 듯 이곳저곳을 누비며 방탕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고 했다.
가게 내부를 천천히 훑어보던 정윤은 주문한 커피가 나오자 홀짝, 한입 삼키며 휴대폰을 들었다.
“내부 좀 촬영해도 될까요? 인테리어가 예쁜데.”“물론입니다. SNS에 많은 홍보 부탁드립니다.”“그러죠.”정윤이 내부를 찍겠다고 하자 SNS 용으로 생각한 직원이 웃으며 반긴다.
딱 봐도 세련된 외모, 옷차림.
많은 팔로워를 보유한 나름의 유명인쯤으로, 그녀를 생각한 것이 틀림없다.
정윤은 휴대폰을 들고 내부 사진을 찍었다.
남들이 볼 땐 셀카를 찍어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녀는 가게 안 CCTV 위치를 확인하는 중이었다.
“이런 곳엔 밤에 와야 하는데 낮에 가라고 난리야. 심심하게. 구경할 것도 없고.”쳇. 정윤은 비교적 한가한 가게가 심심한지 불만스럽게 툴툴거렸다.
에효. 일이 다 그렇지 뭐. 뭘 해도 ‘일’이라고 생각하면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셔도 불만이 생기는 법이다.
대강 둘러보고 떠나야겠다. 정윤이 생각하던 그때.
“야, 인마. 이 새끼가 미쳤네. 나 몰라? 저번에 마시던 거랑 똑같은 걸로 가져오라고.”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힐끔 고개를 돌렸다.
자신에게 웃는 얼굴로 서빙을 해주던 어린 직원이, 손님 앞에 서서 쩔쩔매고 있다.
“죄송합니다, 손님. 지금은 술을 파는 시간이 아니라서요. 가게 방침이…….”“가게 방침 같은 소리 하네. 야, 내가 내 돈 내고 술 마시겠다는데 니가 뭔데 막아서. 안 가져와?”“아…… 죄송합니다, 손님. 여섯 시가 넘어야 드릴 수 있습니다. 죄송합니다.”허. 이 새끼 봐라.
직원과 대면하던 사내는 불쾌한지 넥타이를 거칠게 비틀며 끌어내렸다.
정윤히 가만히 들여다보자니 대낮부터 이미 한잔 걸친 얼굴이었고, 앞에 앉은 여성은 상황과 관계없다는 듯 셀카만 찍고 있다.
어딜 가나 진상은 포진되어 있다더니, 이 구역의 진상은 너구나.
휴. 정윤은 짧게 숨을 내쉬곤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소란스럽지만 타인의 일이니까. 타인의 일은, 타인이 알아서 하는 거니까.
그럼 난 책이나 좀 읽어볼까? 정윤은 가방에서 작고 두툼한 책을 꺼냈다.
“야, 사장 불러. 너 말고 여기 사장 오라 해.”“사장님 아직 안 나오셨는데요…….”“뭐야? 이 새끼야, 사장도 없는데 뭔 가게 방침을 따르고 지랄이야! 가져와! 술!”“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손님.”아무리 외면하고 참견하지 않으려고 해도, 슬슬 신경이 곤두선다.
정윤은 홀짝 커피를 마셨다.
“오빠, 나 짜증 나. 얘 뭐야? 그지같이 생겨가지고는 사람 말을 왜 이렇게 못 알아들어?”“미안해, 미안해. 아, 우리 애기 짜증 났어?”“짜증 나. 그냥 나가자. 이런 병신 같은 것들이랑 상대를 하고 있어, 오빠는? 나 그냥 갈래. 술 파는 곳이 어디 여기뿐이야?”“잠깐만. 가만히 있어봐.”사내는 짜증을 토로하는 여성을 달래듯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직원은 다음 상황을 예견했다는 듯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야, 너 나 알지. 내가 여기 VIP야, VVIP.”“죄송합니다. 잘 모릅니다.”“몰라? 몰라? 나를 몰라?”허, 얘 봐라. 사내는 불이 붙어 못 살겠다는 것처럼 후, 후, 숨을 불어 내쉬더니 다짜고짜 철썩, 직원의 뺨을 때렸다.
커피잔을 내리던 정윤의 손끝이 움찔한다.
“너네 사장보다 높은 사람이야, 내가. 말을 하면 들어 처먹어야지. 버러지 같은 게 왜 시키면 시키는 대로 듣질 않아? 미쳤어?”“죄송합니다, 손님.”“아니, 죄송은 됐고 무릎 꿇어. 이런 어린 새끼가 사람 쪽팔리게. 내가 내 여자 앞에서 지금 꼴이 우습게 됐잖아, 너 때문에.”XX, XXX, XXXX…….
입에 담지 못할 욕들이 쏟아진다. 한참 독서 삼매경에 빠졌던 정윤은 쓱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릎을 꿇으라니 별다른 반항 없이 무릎을 꿇으려던 직원의 어깨를 쓱 잡고는 돌려세웠다.
“저리 가 있어. 누나 왔잖아.”……예? 직원이 당황한 듯 정윤을 바라보자 고개를 까딱, 꺾으며 자신의 뒤편으로 보냈다.
사내와 여자는 난데없이 등장한 정윤을 바라보았다.
정윤은 팔짱을 끼며 사내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너, 넌 뭐야?”“나? 나 얘 누난데?”누나? 사내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정윤은 뒤에 선 직원을 힐끔 바라보고 다시 앞을 보았다.
“너 말야, 업주 측에서 술 파는 시간 아니라는데 왜 자꾸 술 달라고 깽판이야. 시계 볼 줄 몰라?”“뭐? 뭐? 이게 어디서 반말을…….”“그리고 너 내 동생 때렸지, 그치.”“저, 저 새끼가 싸가지 없게 굴잖아, 손님한테!”“대우받고 싶으면 곱게 말해. 사람 무시해야 대접받는 인생인 모양인데, 그렇게 불쌍하고 하찮은 허세밖에 부릴 게 없어?”“뭐, 뭐, 뭐야?!”“니가 뭔데 내 동생 무릎을 꿇어라 말아라, 대체 뭔데 너.”정윤이 사내에게 좀 더 다가서며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자 셀카만 찍어대던 여자는 눈을 치켜떴다.
“야, 너야말로 뭔데 우리 오빠한테…….”정윤은 들고 있던 책을 툭, 여자 정수리에 떨궜다.
아! 여자는 두툼한 책의 모서리에 정수리를 찍히고는 고함을 내질렀다.
“아! 아야! 아아아!”“어머나, 미안해서 어쩌나. 손이 미끄러져서. 내가 이렇게 연약해요, 손목에 힘이 없어.”“야! 이게 진짜! 너 일부러 그랬지! 경찰 부를 거야!”“불러. 니 덕분에 CCTV 구경 좀 해보자, 나도.”정윤이 소파에 앉아 있는 여성을 내려다보는 눈빛으로 말하자 여성은 자신의 남자친구를 향해 울먹거리는 소리를 냈다.
“오빠아…… 이 년이 지금 내 머리 때렸어어…….”사내는 기도 안 찬다는 듯 크케 코웃음을 치며 정윤의 이마에 삿대질을 했다.
“야, 너 쟤 누나 아니지? 쟤 이름 뭔데. 어? 뭐냐고.”“쟤? 성호. 아니면 정호. 아니면 민호. 준호. 등등등.”“동생 아니지? 어? 동생도 아니지?”“동생 맞는데. 조금 전부터.”하, 이런 돌아이를 봤나.
사내는 여자라서 차마 때리지는 못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허허허, 실성한 듯 웃었다.
정윤은 가만히 사내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재킷을 벗었다.
“아, 갑자기 덥잖아. 너 때문에. 후, 더워.”……그녀 목에 걸린 패용증.
사내는 천천히 패용증을 내려다보더니, 눈을 크게 껌뻑껌뻑하더니.
“가, 가자. 가자.”“왜 이래, 오빠? 왜 그래! 이 여자가 나 때렸다고 지금! 경찰 부르라고!”“그래, 잘한다. 제발 경찰 좀 불러줘. 만난 김에 여기서 회식이나 하게.”“뭐라는 거야 이게 진짜!”“가자고! 시끄럽고 빨리 나와!”사내가 여자를 이끌고 허둥지둥거리자 정윤은 그 앞을 막아섰다.
어깨에 먼지가 묻었다는 듯 자상한 손길로, 사내의 어깨를 털어주었다.
“이봐요, 안팎으로 못생긴 오빠. 인생 이렇게 막살다가 나랑 또 만나는 수가 있어.”사내는 흠칫, 하며 어깨를 좁혔다.
“내가 막사는 오빠들 되게 좋아하거든. 그런 오빠들 내 방으로 초대하는 게 또 내 취미고.”……검사 사무실.
“내 방에서 단둘이 만나면 오빠 인생 참 즐거워질 거야. 난 화끈하거든. 거침없고. 자비 없고.”그리고 전과.
“내가 또 빨간 딱지를 좋아해. 남은 인생 빨갛게 놀아볼래, 나랑?”“야! 너 지금 내 남친 꼬시는 거야?! 야! 너 진짜 미쳤어?!”“너도 와. 난 둘보다 셋이 노는 게 더 좋거든. 그럼 셋이 빨갛게 놀아보자.”“뭐, 뭐 이런 변태 미친년이 다 있어 진짜!”“아, 가자고! 빨리 나와!”그녀의 말귀를 알아들은 사내가 여자가 사라지고 나서야 정윤은 다시 재킷을 입었다.
뒤에 서 있던 직원은 대체 뭘 봤길래 저러고 도망을 치는지, 알지 못해 고개만 갸우뚱했다.
힐끔, 정윤은 직원을 바라보았다.
“거기 동생, 괜찮아?”“아, 네. 감사합니다. 괜찮아요, 여기선 흔한 일이라서요.”“흔하다고 익숙해지지 마. 혼자 참고 말 일 아니고, 웃어넘길 일은 더더욱 아니고.”“……네. 감사합니다.”“다른 일도 많을 텐데 왜 이런 일에 익숙해지면서까지 여기 있어?”“월급이 좀 세요. 가끔 저런 손님들이 있어서 그렇지, 팁도 제법 나오고요.”아아. 정윤은 땅에 떨어진 책을 주워들었다.
가까이서 보니 직원은 더욱 앳된 얼굴을 하고 있다.
“저쪽에서 사과하면 동생이 받아줘야 할까 봐 그냥 보냈어. 저런 것들의 사과는 받아도 소용없으니까. 사과가 썩었거든.” “네. 신경 안 써요. 그런데 뭐 때문에 갑자기 저렇게 도망친 거예요?”“아아, 내가 호신용품을 좀 보여줬어. 꽤 효과가 좋은 용품이거든. 난 좀 비겁하고 몰상식한 편이라.”“아아…….”직원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이해를 한 건지 만 건지 모르겠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니까.
정윤은 재킷 단추를 모조리 잠그고 직원에게 다시금 시선을 주었다.
“몇 살?”“스물하나요.”“등록금 벌어보려고 나왔니?”“아뇨. 가장인데요.”정윤은 아찔했다.
“아…… 가장……?”부모님이 편찮으신가. 혹은 일찍 돌아가시고 동생들이 남았나?
정윤이 말을 잇지 못하고 당황한 듯 침묵하자 어린 직원은 진상들이 떠나고 남은 테이블을 치우며 입술을 열었다.
“결혼했어요. 아이도 있고요.”“아…….”마음이 쾅쾅 울렸다.
“결혼을 일찍 했구나.”“네. 아이가 생겨서, 빨리했어요.”“……멋지네.”정윤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나오자 직원은 테이블을 치우던 손을 멈추고 정윤을 바라보았다.
“멋지네. 동생 와이프는 동생이 멋있어서 빠졌구나.”“멋지긴요. 가진 게 너무 없어서 매일 집사람 고생만 시키는데요.”앳되게만 보이던 직원의 얼굴에, 조금 전까진 느끼지 못했던 책임감이 엿보인다.
침착한 눈매에 깃든 사회와의 타협은 더욱 씁쓸하게 다가왔다.
나는 하지 못한, 내게는 없었던, 가정을 지키는 책임감.
직원은 사내가 침을 뱉은 채 구겨놓은 휴지 몇 개를 손에 뭉쳐 쥐고 허리를 펴며 정윤을 바로 보았다.
이제야, 겨우 이제야 약간 웃는 것도 같았다.
“아깐 정말 감사합니다. 이 빚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어요.”“동생이랑 내가 다음에 또 볼일이 있을지도 몰라. 빚은 그때 갚아.”“아…… 다음에요?”“혹여 우리가 만나지지 않거든 오늘 내게 진 빚은 꿀꺽하고 말아버려.”“네?”“가끔은 이런 일도 벌어져야 인생이 즐겁지. 누군가 나를 이유 없이 도와주는, 그런 일.”정윤은 책을 흔들며 직원에게 인사했다.
스물한 살, 인생을 흥청망청 깎아 먹으며 즐겨도 좋을 나이ㅡ
아내와 아이를 위해 자신의 무릎 따위, 버릴 각오가 되어 있는 어린 가장을 바라보며ㅡ
정윤은 제 안에서 휘감기는 거대한 감정을 마주했다.
“다음에도 이런 일 있으면 경찰에 무조건 신고해. 그럼 혹시 내가 또 짠, 하고 나타날지 몰라.”“네? 아, 네.”“그래요, 그럼 수고하고.”그때의 나는,
아무것도 책임지려 하지 않았다.
“갈게요. 힘내요, 가장님.”
‘그게, 그래요, 희원 씨. 툭 터놓고 얘기합시다. 우리가 무슨 힘이 있습니까? 위에서 까라면 까는 죄밖에 더 있습니까?’희원은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집에 도착했다.
‘축제 취지와 한국 무용이 맞지 않대요. 않다는 걸 우리가 뭐 어쩌겠습니까, 예산은 그쪽에서 넘어오는데, 말을 안 듣고 무슨 수로 버티냐고요.’사무장은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약 일곱 통의 전화를 받았고,
두 개의 팩스를 받았고,
홍삼 한 팩과, 비타민 여섯 알을 먹었다.
‘미안합니다, 미안한데, 날 붙잡고 이래 봐야 소용이 없어요. 나는 결재권자가 아니라니까요?’한숨도 청하지 못한 채 이곳에 걸음 했지만 사무장과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시간이 지나면 지나갈수록 전의가 상실되었다.
그녀는 서야 하는 무대를 잃었지만, 사무장에겐 그저 ‘타인의 사정’에 불과했다.
적당한 안타까움은 지니고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인지상정일 뿐.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신세 한탄을 하는 것과 별다를 바가 없는, 사무장은 그런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나도 지시받고 따르는 월급쟁이예요, 희원 씨. 여기서 희원 씨가 버텨봐야 뾰족한 수가 없어요.’결국 사무장과 만나 제대로 된 항의도 하지 못했다.
그의 상황이, 슬프게도 이해되었다.
“휴…….”희원은 긴 숨을 불어 내쉬며 멈춰 섰다.
“백인호 의원일까…….”사무장이 분명 통화를 하던 사람은 백인호 의원일 것이다.
예산은 시와 지역구에서 처리할 테니. 축제가 열리는 곳은 백인호 의원의 지역구이니 더더욱.
……머리가 복잡해진다.
단순히 무대에 오르지 못하는 불만이 아니라, 한국무용이 외면당하는 현실에 속이 상했다.
자신을 비롯해 착실하게 무대를 준비하던 동료들의 얼굴도 하나하나 스쳐갔다.
바닥에 들러붙은 것처럼 발길이 떨어지질 않고,
현실을 받아들이고 물러서자니 심장이 터질 것만 같던 그때ㅡ
“퇴근했어?”“아, 깜짝이야!”뒤에서 들려오는 지환의 목소리에 희원은 화들짝 놀라 돌아섰다.
뚜벅뚜벅 구두굽 소리를 내며 그가 다가온다. 희원은 납을 올려놓은 듯 무겁던 어깨를 폈다.
“거기 정지!”“……응? 정지?”희원이 손을 들며 멈추라고 하자 지환이 착하게도 멈춰 선다.
그녀는 다가오지 말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멈추긴 멈췄는데, 왜?”“잠깐 거기 있어요. 다가오지 말고.”적당한 간격 사이로, 그녀는 그를 응시했다.
……조금 전까지 떨어지지 않던 발길이 떨어진다.
어깨를 짓누르던 현실의 무거움도 잠시 달아난다.
입가엔, 많은 의미가 담긴 미소가 지어졌다.
“왜 웃어?”“그냥. 그냥요. 서지환 씨 얼굴 보니까 이제 좀 웃음이 나네.”……아.
희원은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탄식을 터트렸다.
그 언젠가 지하주차장에서 고된 표정을 짓고 있던 그가 떠올랐다.
따라 올라가 마주한 집 안의 그는 언제 그랬느냐는 것처럼 웃고 있었다.
그게, 이런 기분이었나?
“나 계속 멈춰 있어?”“……응. 잠깐 거기 있어.”왜 이러는 거지. 마음이 힘들수록 그의 앞에서 웃게 되었다.
상대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고 싶은 게 아니라, 실제도 힘듦이 잠시나마 멀어졌다.
당신도 어쩌면, 그때, 그 순간,
나의 얼굴을 마주하며 힘든 일들에서 도피했던 건 아닐까ㅡ
“왜 오지 말라는 건데. 궁금한데 말해주면 안 될까, 부인.”어쩌면 당신도 이런 마음, 이런 안도가 아니었을까 하고.
당신, 나로 인해 잠시 편안했던 건 아니었을까, 하고.
“아니. 그냥 서지환 씨 보고 있는 게 좋아서. 간격이 가까우면 얼굴 보기 힘들잖아.”“가까이서 보면 되지, 그게 뭐라고.”희원은 허탈하게 웃었다.
불현듯 지환의 상황을 체험하고 있는 것만 같아, 많은 것들이 섞여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머리끝에 고여든 눈물이 새어 나올까 봐 희원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서지환 씨가 가까이 오면 내가 못 참고 안을 것 같아서.”“안으면 되지. 그건 또 무슨 대수인가?”지환이 성큼성큼 다가온다. 희원은 가까워 오는 지환을 바라보다가, 두 팔을 뻗어 그를 안았다.
……그래. 힘든 날이 없을 수는 없겠지.
때때마다 서로가 버팀목이 되면 그만이다.
무너지지 않게, 쓰러지지 않게 함께 짊어지고 나누며 서로를 지켜주면 되는 거다.
그래요. 우리 위로합시다.
“서지환 씨.”“응? 왜.”
내일은 내일의 내가.
“나, 배고파. 오늘 한 끼도 못 먹었어.”“이 시간까지 한 끼도 못 먹었어? 일단 밥부터 먹자. 집으로 가지 말고 바로 나갑시다, 부인.”
모레는 모레의 당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