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 내가 나를 믿게 되는 순간 (68/98)

68. 내가 나를 믿게 되는 순간

2019.02.24.

“야, 서검. 갈수록 신수가 훤해진다? 혼자만 나이를 거꾸로 먹는 중이냐?”

“그러게 말이야. 일이 좀 여유로운 모양이네? 때깔이 왜 이렇게 좋아졌

지?”

지환의 사무실로 찾아온 동료 검사들은 커피를 홀짝이며 그의 얼굴을 유심

히 들여다보았다.

혼자만 번쩍번쩍 얼굴에 광이 난다.

“서검, 요즘 피부과 다니냐?”

“뭔 피부과. 그럴 시간이나 있냐?”

지환은 홀짝 커피를 삼키며 반문했다.

동료 검사들은 수상하다며 연신 의혹을 제기했다.

“근데 왜 이렇게 혼자 번쩍번쩍해? 우리 얼굴에서 광이 나는 건 있을 수 없

는 일이야. 뭔가 수상하다고.”

수상하다. 수상해.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업무의 홍수 속에서, 어떻게 퀭하지 않을 수 있지?

종이컵을 입에 물고 눈을 가늘게 뜨는 동료 검사를 바라보다가 지환은 상

체를 쭉 펴며 두 손으로 목덜미를 움켜쥐고 스트레칭했다.

그러곤 별거 아니라는 듯 중얼거렸다.

“뭐, 굳이 비결을 말하자면 신혼이라 그러나.”

“아…… 제발 그 말만은 니 입에서 안 나오길 바랐다…….”

“아니 뭐…… 그거 말고는 딱히 없으니까.”

아아, 녀석이 거들먹거리기 시작한다.

동료 검사들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지환의 거들먹거림을 진심으로 노여워

했다. 

지환이 흘끔흘끔 책상 위에 놓아둔 작은 거울을 바라보며 자신의 얼굴에

취하자 동료들은 뜨거운 커피를 원 샷 했다.

종이컵을 사정없이 일그러트렸다. 마치 녀석의 얼굴이라도 되는 것처럼.

“니들 말 듣고 거울 보니 내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 것 같기도 하다. 괜찮네.

한없이.”

“야, 보통 신혼 땐 더 퀭해지는 거 아냐? 반들반들해질 틈이 어디 있어?”

도저히 녀석의 오만함을 눈 뜨고 봐줄 수 없는 동료 검사들의 공격이 시작

된다.

“맞아. 신혼 때는 원래 더 퀭해지고 눈빛에 다크서클도 미친 듯이 생기고,

그러는 거야 서검. 보아하니 신혼 생활이 열정적이지는 않은가 봐? 응?”

지환이 움찔하자 동료 검사들은 캬캬캬캬, 웃음을 터트렸다.

“서 검사님. 신혼 생활이 적적하신 모양이에요. 마음은 있는데 체력이 안

도와주죠? 괜찮아요, 우린 다 이해하니까.”

“뭔 소리야. 넘겨짚지 마라.”

감히 신혼을 운운하며 신혼 부심을 부렸으니, 서지환은 그 죄를 받아 마땅

하지 않은가?

“야, 지환아. 나 신혼 때는 어? 잘 틈이 어디 있어? 눈만 마주치면 막, 파바

박 불꽃이 튀어가지고 내가 사무실에서 그렇게 꾸벅꾸벅 졸았어. 그런데

넌 지금 쌩쌩하잖냐. 응?”

“허, 참.”

“솔직하게 말해봐. 응? 우린 다 이해한다니까? 버겁지? 생각과 마음처럼

잘, 응? 안 되지? 그렇지? 피곤하지?”

그렇다고 해. 빨리.

어서. 당장.

동료들은 악의 기운을 풍기며 지환의 대답을 종용했다.

어서 대답해. 너도 나와 같은 인생이라고 어서 말해.

눈빛으로 모두는 그렇게 협박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환은 피식 웃으며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비아냥거림으로 응수했

다.

“벌써들 그렇게 힘들어서 어쩌냐? 보약들 한 첩씩 해먹어야 하는 거 아니

야?”

“……놔봐. 내가 오늘 이 자식을 없애고 천당을 가야겠다. 놔보라니까?”

“윤검. 아무도 널 붙잡지 않았어. 어서 서검을 없애줘.”

동료 검사들은 묘하게 기분 나쁜 지환의 대꾸에 분개했다.

선을 그어놓고 ‘나는 너희와 달라’를 시전하고 계시니 남자의 자존심이 용

서치 않는다.

녀석을 괴롭히고 싶지만 지금 이 순간 녀석을 이길 만한 적당한 말들이 떠

오르질 않는다.

아. 분하다.

“야, 서지환. 너 때문에 열 받았으니까 점심 사.”

“오늘 말고 내일 살게. 하지만 백반 이상 안 된다. 갚을 빚이 많아.”

오오오. 녀석이 순순히 밥을 사겠다고 하자 비로소 동료들의 얼굴에 화색

이 돈다.

“서검, 그런데 오늘은 왜 안 돼? 점심에 약속 있냐?”

“아아. 내가 오늘은 도시락을 싸 왔지 뭐냐. 장모님 표 도시락.”

……죽여야겠다.

도시락을 역사책 폭탄으로만 접했다며, 동료들은 분함을 감추지 못하고 한

동안 들끓었다. 

동료들은 묘하게 약이 오르고, 묘하게 열 받지만 장모님과 아내 사랑 듬뿍

받고 자라나는 지환의 신혼 생활이, 솔직하게는 싫지 않았다.

옛날 옛적 자신들의 신혼생활이 언뜻 스쳐 간다고나 할까?

“맞다. 서검, 와이프가 요번에 큰 공연한다고 하지 않았어?”

“아아, 그렇지. 세계무용축제.”

지환은 달력을 힐끔 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 초청 안 해주냐? 공연 보고 싶은데.”

“그러게. 언제 또 이런 문화생활 해봐? 제수씨 언제 공연이야, 이번 기회에

다 같이 가서 문화생활 좀 즐기자.”

“그래? 일단 기다려봐. 우리 각시가 아무나 초청하지는 않으니까 한번 물

어볼게.”

아, 아무나라니.

말을 해도 꼭…… 그렇게…… 섭섭하게 해야겠냐……?

동료들이 다시 쌍심지를 켜고 바라보자 지환은 모른 척 휴대폰을 들었다. 

틈만 나면 오만해지고, 틈만 나면 내 자랑하기 바쁜 회사 동료 관계.

지환은 한껏 목에 철심을 박고 희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휴대폰을 보고 있었는지 그녀가 빠르게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나야.”

어인 일로 그녀 주변이 조용하다.

지환은 별다른 생각은 하지 못하고 빙그레 미소 지었다.

“연습실 나갔어?”

ㅡ아니. 나 집이야.

“아아, 집. 아직 안 갔구나. 오늘은 늦게 나가네.”

웬일로 그녀가 아직 집이라고 하자 지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료들은 어서 본론으로 들어가라고, 미간에 주름을 잡은 채 손짓했다.

“다름이 아니라 당신 요번에 그, 축제 때 말이야.”

ㅡ아? 축제?

“어어. 사무실 동료들이 당신 공연 보러 가고 싶다는데 별다른 절차가 있나

해서. 그냥 가면 되나? 다들 가고 싶다고 사정사정 읍소를 하네.”

ㅡ아…….

……아?

지환은 희원의 낮은 탄식이 이어지자 고개를 들었다.

동료들은 숨을 숙인 채 일동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잠시 희원의 침묵이 이어지자 지환은 다시 말을 이었다.

“아, 인간들이 문화생활을 도통 안 해서, 당신 이번 공연 때 제대로 된 문화

생활을 하고 싶다고. 또 언제 그렇게 좋은 공연을 보겠냐며 졸라대서.”

“제수씨! 안녕하세요! 공연 보러 가고 싶습니다!”

“제수씨! 허락해주십시오! 저희 얌전히 공연만 보고 오겠습니다!”

뭔가 분위기가 수상한지 동료들이 껴들어 제각각 목소리를 높인다.

설마하니 오지 말라고 하겠느냐 싶었지만 여기까지는 장난 반, 진심 반이

었다.

ㅡ아…… 그게 있잖아, 서지환 씨.

그녀의 난처한 음성에 지환의 표정은 조금씩 굳어갔다.

빠르게 분위기를 읽은 동료들은 입을 꽉 다물었다.

뭔가, 상황을 불편하게 만들었구나 하는 마음에 아차 싶었다.

ㅡ내가 서지환 씨한테 말을 하려고 했는데, 어제 말을 못 한 게 있어. 하려

고 했는데 말이 안 떨어져서.

“뭔데. 괜찮아, 얘기해.”

여기까지는 전혀 예상을 못 했다.

지환은 침착하게 그녀 말을 기다려주기로 한다.

어려운 말을 꺼내려는지 그녀는 머뭇거렸다.

아마도, 그녀는 입 밖으로 말을 꺼내어 가지고 있던 상황을 현실로 만들기

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녀에게도 받아들일 시간은 필요했을 테니까.

ㅡ동료분들께 미안해서 어떡하지, 공연 못 보여드릴 것 같은데.

“아…… 그래? 괜찮아, 신경 쓰지 마. 괜찮아, 괜찮아.”

지환이 동료들을 바라보며 빠르게 고개를 휘젓자 동료들은 다시 끼어들었

다.

“제수씨!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마음으로 응원하겠습니다!”

“예예! 제수씨! 괜찮아요! 사실 초대해주셔도 못 갈 수도 있어요! 일이 많아

서!”

“들었지? 그렇대. 당신 신경 쓰지 마.”

지환이 덧붙이자 휴대폰 너머 짧은 한숨 소리가 들려온다.

ㅡ아, 그게 아니라, 있잖아.

“…….”

ㅡ나 공연 취소됐어요.

그의 표정은 더더욱 굳어만 갔다. 

*

“한국 무용이 취소됐다고요?”

희주는 한 통의 전화를 받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남편의 지역구에서 벌어지는 축제라서 이것저것 잡다한 일거리를 떠안게

되었는데, 뜻밖의 소식을 접했다.

소파에서 몸을 떼며 희주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음성으로 말했다.

“왜죠? 언제 취소가 됐다는 거예요? 대체 왜? 준비가 부족했습니까?”

ㅡ아뇨, 그건 아닙니다만.

전화를 걸어온 관계자 측은 간단한 설명을 이어갔다.

딱히 ‘당신의 남편’이 지시한 일이라는 언급은 하지 않았으나, 눈치가 있다

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설명했다. 

“그러니까, 의원님이 지시하셨다는 말씀이죠.”

ㅡ뭐, 예. 굳이 제 입으로 말씀을 드리자면 그렇습니다. 저희도 지금 다시

일정을 짜야 해서 일이 많아졌네요, 사모님.

“아…… 네. 일단 알겠습니다.”

희주는 관계자를 독려하며, 곧 찾아가겠노라 말하곤 전화를 끊었다.

취소를 시켰다. 남편이. 공연을.

그것도 한국 무대 공연만.

“뭔가 이상한데…….”

알기에 남편 백인호는 그렇게 세세한 부분까지 관여하며 손을 대는 사람이

아니다.

무리한 섭외, 무리한 일정이 될 것을 알면서도 그런 무모한 일을 저지를 사

람도 아니다.

……무용수 권희원을 전면에 내세운 공연이 취소됐다.

희주는 가만히 생각에 잠긴 눈빛을 했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힘이 실린 걸음으로 남편의 서재까지 걸어간 그녀는 똑똑, 노크를 하며 동

시에 문을 열었다. 

“뭐야!”

서재에 있던 백인호 의원은 급하게 금괴가 들어 있는 비상문을 닫고 나오

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자신의 허락이 떨어지기 전에 서재로 들어온 아내.

처음 있는 일이다.

“미쳤어? 내가 서재에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고 했지!”

“질문이 있어요.”

“허, 뭐? 질문?”

희주는 마치 당신이 이 안에서 무얼 하고 있었는지는 관심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윽박을 질러도 평소처럼 주눅 들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하니, 당황함은 백

인호의 몫이 되었다.

“방금 세계무용축제 관련자와 통화를 했는데.”

어딘가 모르게 그녀는 평소와 달랐다.

“한국 무용 부분, 공연에서 없앴다고.”

그것도 아주 많이.

“맞아요? 당신이 지시했어요?”

백인호는 책상 의자에 앉아 힘이 실린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최빈국으로 봉사활동을 다녀온 이후로 대화다운 대화를 섞어보는 일이 처

음이지만, 감흥 같은 게 있을 리 없는 시간.

“그게 너하고 무슨 상관이 있지? 왜 내가 너한테 그런 걸 설명하고, 하나하

나 답해야 하는지?”

“제가 좀 알고 싶어서요.”

“…….”

“백인호 의원님.”

백인호의 눈빛에 변화가 깃든다.

아내의 낯선 호칭에 한껏 일그러진 표정을 짓던 그는 관찰하듯 희주를 바

라보았다.

“너 지금 미쳤어? 여기가 어딘지 몰라? 내가 누군지 잊었어?”

“말씀해주세요. 취소된 이유.”

“……하.”

백인호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깍지 낀 손을 무릎으로 떨구며,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와이프를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왜 저렇게 무모한 태도를 보이는지 모를 일이다.

“까불지 마. 강희주. 너 때문인 거 알고 있잖아.”

“…….”

“니가 여기저기 설치고 다니면서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거 아냐. 안 그

래?”

정면으로 부딪쳐오니, 정면으로 받아줄 수밖에.

“그렇게 과거의 남자한테 미련이 남아서 주변 배회를 하고, 그 아내까지 들

쑤시고 다닌 건 너 아냐?”

백인호는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그 아내도 알고 있나? 니가 왜 본인한테 접근했는지. 응? 본인 남편과 그

렇고 그런 사이라는걸 그쪽도 아내도 아냐고.”

“…….”

“대단하다, 강희주. 유부남과 놀아나고 질척대면서 고고한 척, 아무것도 모

르는 척, 권희원이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떨까. 난 그게 너무 궁금한

데.”

“아무것도 모르면서 말 함부로 하지 말아요.”

“함부로 한 건 내가 아니라 너야!”

쾅ㅡ!

백인호는 책상을 소리 나게 쳤다.

“나한테 걸리지 말라고 했지. 나한테 걸리면 누구에게도 아름다운 결말은

없을 거라고.”

희주는 움츠러들지 않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안다. 지금 남편의 말은 조금도 틀린 곳이 없음을.

내가, 끼어들지 말아야 할 관계에 끼어들어 모든 일을 헝클어트렸음을.

그러니 내가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한다.

“니가 날 가지고 노는데 내가 가만히 있겠어? 권희원은 이제 끝이야. 내가

정치를 하는 동안은 절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해.”

반드시, 제자리로.

“서지환도 마찬가지야. 날 그렇게 우습게 만들었으면 대가는 치러야지.”

“…….”

“검사 옷 벗어야 할 거야. 바로 너 때문에.”

백인호 의원은 조롱하듯 말했다.

눈앞의 강희주가 무너질 법한 말들만 뱉어내며 그는 일순의 쾌락을 즐겼

다.

누구라도 제 앞에 엎드리지 않는다면 다리를 부러트릴 각오가 되어 있다.

강희주가 아니더라도 서지환를 제거해야 하지만, 그러기 위해 서지환의 아

내를 압박하는 일은 계산된 일이었지만,

지금의 강희주는 그러한 일들을 추진하기에 좋은 명분이 되어 주었다.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다.

“그럼 그렇게 해요. 당신이 원하는 대로.”

“……뭐야?”

그런데, 아내는 뜻밖의 말을 했다. 

“그 두 사람을 망가트리라고요. 당신의 모든 권세, 능력을 다 더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하라고.”

“무슨 수작이야, 이건.”

“당신이 원하는 말은 이런 거잖아요. 아닌가요? 나를 빌미 삼아 서지환을

없애야만 하는 사람이니까, 당신은.”

……속내를 읽혔다.

올라오는 분노를 더는 못 참겠는지 백인호는 책상을 돌아 나왔다.

한 손에 잡히는 그녀의 목덜미를 거칠게 붙잡고 목을 뒤로 꺾었다.

강압적으로 시선을 마주하며, 백인호는 그녀를 찢을 듯이 노려보았다.

“도발하지 마.”

“…….”

“너라고 안전하진 않아.”

희주는 가만히 그가 하는 대로 고분고분 서 있다가 힘껏 그의 팔을 뿌리쳤

다.

처음 있는 아내의 반항에 백인호가 아연실색하자 희주는 자신의 팔을 툭툭

털며 헝클어진 머리를 반듯하게 쓸었다.

이윽고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는 것처럼 평온한 눈빛을 하며, 희주는

입술을 열었다.

“뭐든 해. 난 단 한 번도 내가 안전하길 바란 적 없으니까.”

……그녀는, 끝내 결심을 했다.

“하지만 당신도 안전하진 않을 거야.”

*

“아, 갑자기 시간이 많아지니까 당황스럽네.”

갑자기 늘어난 하루의 시간을 어떻게 소비해야 하는지 갈팡질팡하던 희원

은 평소 보고 싶었던 영화 한 편을 보고, 읽고 싶었던 책 한 권을 읽고.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 평소 연락을 잘하지 못했던 지인들과 통화를 하며

긴 수다를 떨고. 

“이제 뭐 하지, 입맛은 없는데 밥을 좀 먹을까.”

그러고도 시간이 남았다.

희원은 중얼거리며 공허한 눈빛을 들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루가 이렇게 길었나. 나에게만 유독 길게 느껴지는 오늘 하루.

툭, 하고 던져진 자유의 시간이 버겁고 무거워, 희원은 온종일 어깨를 늘어

트린 채 돌아다녔다.

뭘 해도 즐겁지가 않고, 뭘 해도 에너지가 솟질 않는다.

종일 공복이었던 까닭인가 싶어 대충 먹어보려 하지만 영, 입안이 껄끄러

워 그마저도 포기한 채.

“서지환 씨가 지금 엄청 신경 쓰이나 보다. 괜히 말했나.”

평소보다 자주 연락이 오는 그의 메시지에 답을 하던 희원은 후회가 되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오늘 퇴근하면 말해주려고 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다.

심란하겠지. 느닷없는 아내의 공연 해고 소식이 달가울 남편은 없을 테니

까. 

……졸지에 백수가 되어버린 희원은 공연 계약상의 마무리를 짓고자 걸려

온 관계자와의 통화를 끝으로, 밖을 나섰다.

찬 공기가 시원하게 느껴지는 걸 보아하니 속에서 열이 나긴 났나 보다.

“눈 오네.”

굵지 않은 미약한 눈이 내린다.

희원은 올해 들어 유달리 자주 내리는 눈을 바라보다가 손바닥을 폈다.

닿자마자 금세 녹아내리는 눈꽃을 바라보다가.

그래, 이게 뭐 대수냐.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거지.

더 잘하라는, 더 열심히 하라는 하늘의 계시인 거지. 다음 기회에 더 열심

히 하면 그만인 거지.

“맞아. 속 시끄러워봐야 내 손해지 뭐.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편

안하게 생각하자.”

피식, 희원은 웃으며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려고.

마음을, 다치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그때였다. 휴대폰이 울린다. 

“그만 좀 연락해요, 서지환 씨. 일 안 해?”

지환의 전화다.

ㅡ멀티야, 멀티. 일도 하고 사랑도 하고. 둘 다 잘하고 있지.

시답잖은 그의 농담에 특허를 내줘야겠다.

희원은 웃음을 터트렸다.

“못 말리겠다. 그렇게 멀티로 잘하면서 그동안은 왜 일할 때 전화 안 했는

데?”

ㅡ당신이 바쁘니까 못 했지.

“……아. 그러네요. 그 생각을 못 했네.”

ㅡ당신 한가해지니까 좋다. 통화 자주 할 수 있어서.

“꿈보다 해몽이 좋은 건 아마 서지환 씨가 대한민국 일등일 거야.”

이번엔 그가 웃는다.

희원은 흐릿하게 내리는 눈발 사이를 걸으며 그와의 통화에 집중했다.

사실은 이 순간 그가 전화를 걸어주어서, 기뻤다. 

ㅡ어디야? 밖인 것 같은데.

“아파트 주변. 몸이 안 풀린 것 같아서 좀 걷고 있었어.”

ㅡ아아, 좋네.

“응. 속이 다 시원해.”

그녀가 말갛게 웃으며 말해보지만 지환에게 대꾸가 돌아오질 않는다.

종일 속을 태웠을 아내의 마음이, 거기까지 전달된 모양이다.

“서지환 씨는 오늘 늦어? 나 먼저 저녁 먹을까?”

ㅡ아니, 안 그래도 될 것 같은데.

희원은 걸음을 걷다가 뒤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멈췄다.

ㅡ오늘 일찍 퇴근했거든.

휴대폰으로 들리던 음성은 조금씩 선명해지더니, 뒤에서 들려오기 시작했

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뒤를 돌아보았다. 이윽고 입가엔 미소가 지어졌다.

그 어느 때처럼, 한 손엔 베이커리 봉투를 들고ㅡ

한 손으론 휴대폰을 잡은 채ㅡ

“진짜, 내가 서지환 씨 때문에 못 살겠다.”

지하 주차장에서 집으로 향하다가 아파트 현관으로 부리나케 나왔을 그의

모습에 희원은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는 더 이상 가까워 오지 않은 채 휴대폰 속 음성으로 말을 건네 왔다.

ㅡ이실직고해. 밥 먹었어, 안 먹었어.

희원은 그를 바라보며 비스듬히 고개를 꺾었다.

“안 먹었어.”

ㅡ이거 봐. 이거 봐. 무슨 죽을 일이라고 곡기까지 끊어내나? 응?

이거 안 되겠구만? 지환은 그런 표정을 지으며 혀를 끌끌 찼다.

희원은 이제야 약간씩 허기가 느껴지는 것을 느끼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

다.

“서지환 씨 얼굴 보니까 이제 배가 좀 고프네.”

ㅡ이래서 남편이 일찍 퇴근한 거야. 내가 좀 맛있게 생겼지?

“……야해.”

ㅡ어, 그러고 보니까 좀 그렇긴 한데 뭐, 사실이니까. 그리고 순간 그 생각

을 한 당신이 더 야해.

“맞아. 나도 야해.”

하하, 하하하하하. 쓸데없이 그가 크게 웃는다.

희원은 덕분에 웃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눈꼬리를 둥글게 휘었다.

온종일 써본 적 없던 얼굴의 근육을 쓰고 있는 듯한 기분.

웃을 때 당겨지는 근육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온종일 무료했던 하루를 무

색하게 하는 순간.

그는 약간 모자란 사람처럼 실없이 웃다가 흔연한 미소로 갈무리했다.

희원은 그의 음성이 집중했다.

ㅡ그건 그렇고.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ㅡ

나타나준 순간만으로 당신은 위로가 된다.

ㅡ눈 온다, 희원아.

눈 온다, 희원아

귓가를 울리는 그의 다정한 음성이 너무나도 듣기 좋아ㅡ

희원은 몇 번이고 가슴속으로 그의 말을 되새겼다.

눈 온다, 희원아

그가 불러주는 제 이름이 어찌나 따뜻하고 예쁜지, 희원은 그에게 답으로

건네줄 적절한 말을 찾고 찾다가, 끝내 찾아내고야 말았다.

“응, 그러네.”

……사랑해요.

몇 번을 말해야 아쉽지 않을 수 있을까요.

“눈 온다, 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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