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일촉즉발
2019.02.27.
“위에서 한국무용을 통으로 빼라니까 할 수 없었지 뭐. 사무장님도 만났는
데 딱히 뭐라고 할 말이 없더라고요.”
희원은 무대에 설 수 없게 되어버린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지환은 묵묵히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가 입술을 열었다.
“갑자기 이렇게 일방적으로 계약 해지를 해도 되는 건가? 계약서 가지고
있어?”
“가지고 있지. 살펴보니까 조항이 있긴 있더라고. 대신 뭐 보상이 있다고는
하는데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내가 좀 봐도 될까?”
“물론이죠. 여기 있어.”
지환의 무릎에 누워 있던 희원은 팔을 뻗어 소파 테이블 아래 서랍에 들어
있는 계약서를 꺼냈다.
지환은 그녀 공연 계약서를 꼼꼼하게 훑으며 입을 열었다.
“앞으로 계약할 때 계약서 정도는 나하고 공유해. 대강 살펴도 불공정한 조
항들이 좀 있는데.”
“와, 진짜? 봐줄 거야? 검사님께서 내 계약서를 직접?”
다시 제 무릎에 누우며 희원이 생글생글 웃자 지환은 계약서에서 눈을 떼
며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 계약서라는 것이, 언뜻 보면 그게 그거겠거니 하는 말들이 꽤 많지만 자
세히 뜻을 알고 들여다보면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닌 경우들이 있다.
이를테면 단어의 선별. 애매모호한 상황에 대한 두루뭉술한 방침.
지환은 희원에게 특정 조항을 보여주었다.
“봐봐. 이건 아, 다르고 어, 다른 말인데 이런 식으로 표기하면 나중에 계약
서상의 효력을 입증할 수가 없어. 그래서 지금 같은 일이 생겨도 어쩔 수
없는 거야.”
“뭐 나야 볼 줄 아나.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다, 하고 계약하지. 이런 일은 드
물고요.”
“무슨 소리. 그 드문 일을 위해 존재하는 게 계약서야. 드물게 발생하는 일
에 대해 명백한 과실을 가리려고.”
계약서를 보니 엉망이다.
지환은 문제가 많은 계약서를 훑다가 답이 없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별수 없다. 이미 도장을 찍은 일이고, 그래서 그녀는 갑작스러운 해고 통보
에도 어쩔 수 없는 입장이 되어버렸고.
“검사 남편 이럴 때 써먹지 언제 써먹나? 앞으론 공유합시다.”
“네네. 검사님. 든든하네요.”
희원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지환은 한쪽 팔을 내려 그녀 머리를 쓸어
넘겼다.
누워서 아삭아삭, 사과를 잘도 먹는다.
“체해. 일어나서 먹어.”
“체해도 돼. 아플 시간도 많은데 뭐. 나 어차피 백수야, 서지환 씨.”
“……아깐 오빠라더니?”
“아. 맞다. 오빠.”
잘게 먹던 사과를 마저 입에 넣으며 희원이 화통하게 웃는다.
입안의 사과가 그대로 보일 지경으로 시원하게 웃으니 지환은 고개를 절레
절레 저으며 따라 웃었다.
TV를 틀어놓았지만 누구 하나 화면으로 눈길 주는 사람 없는 부부의 시간.
“다시 해봐. 오, 빠.”
“시키면 더 하기 싫어지는 인간의 마음을 알고 계십니까, 모르고 계십니
까?”
“그게 그렇게 어려워? 다른 남자들한테는 잘도 하더니?”
“난 뭔가 서지환 씨, 이렇게 부르는 게 좋은데. 세상에 오빠는 많지만 서지
환 씨는 하나뿐이잖아?”
“그 많고 흔한 호칭이 저는 듣고 싶은데요. 권희원 씨.”
“아 뭐, 불러줄게요. 그게 뭐 그렇게 어렵나? 오빠아.”
희원이 포크를 뻗으며 사과를 하나 더 콕 집는다.
아삭아삭 시원하게 베어 물더니 반쯤 남은 사과를 위로 들어 올린다.
“오빠, 좀 먹어볼래?”
지환은 계약서 마지막 장을 덮으며 입을 벌렸다.
희원이 사과를 넣어주고 지환은 우적우적 사과를 씹었다.
“맛있지? 이번 사과는 너무 맛있다.”
“맛있어서 먹은 건 아니고 빨리 먹고 치워버리려고 먹은 건데.”
냉큼 마지막 남은 사과를 들더니 입에 쑤셔 넣듯 집어넣는다.
지환이 우적우적 사과를 씹자 희원은 시선을 위로 들어 그를 올려보았다.
다 먹었다. 지환은 깨끗하게 비운 사과 접시를 바라보다가 그녀에게 시선
을 내렸다.
“검사 동료들이 나더러 신혼생활이 너무 적적한 거 아니냐고 놀려.”
“……그게 뭔 말이야?”
“신혼인데 얼굴에서 빛이 난다나, 퀭해도 모자란 거 아니냐, 신혼 생활은
안녕한 것이냐 하며.”
“아니, 남의 남편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게 무슨 문제라고 놀려? 부러워서 그
러는 거 아녜요?”
어……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하는데…….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고…….
“뭐라고 놀려대냐면 밤잠 설친 얼굴이 맞냐, 체력이 달려서 집에 오자마자
딥 슬립 하는 얼굴이다, 등등등.”
“어머. 웬일이야. 검사님들도 별수 없네, 모이면 다 똑같구나. 그래서 서지
환 씨는 뭐라고 했는데?”
“물론 나는 건강하고 쉽게 지치지 않는다고 했지.”
“잘했어. 아주 잘했어.”
희원이 예상과는 달리 잘했다며 칭찬해주자 지환의 사기가 더더욱 오른다.
그래. 지금이 기회다.
“부인, 그런 의미로 나 좀 퀭하게 만들어주면 안 될까?”
응? 다크서클이 발아래까지 내려오도록.
이게 다크서클인지 그림자인지 구분이 안 갈 지경으로.
“좀비처럼 보여도 되는데. 누가 봐도 밤을 하얗게 지새웠구나, 느껴도 되는
데. 아니, 그러면 좋겠는데.”
“그럼 바둑 둘까? 나하고 아침까지?”
아니!
무슨 그런 섭섭한 말을 해!
“바둑도 물론 좋지. 좋은데. 나는 솔직히 그런 머리 쓰는 일 말고 몸 쓰는
일을 하고 싶…….”
지환은 매듭을 짓지 못한 말을 꾸역꾸역 삼켜가며 말꼬리를 흐렸다.
이 양반이 지금 뭐라고 중얼거리는 건가, 싶은 표정으로 그녀가 바라보고
있다.
아니, 뭐 그렇게까지 쳐다봐?
이게 그렇게 노려볼 일이야?
“내가 잠시 생각이 짧아 허언을 했구려. 부인의 심중을 헤아리지 못하고 경
거망동을 하였소. 내 진중한 사과를 건네는 바이오.”
“웃겨. 지가 다 먹어놓고 뭔 사과.”
“…….”
무릎에 누워 있던 희원이 일어선다.
으으으, 괴상한 소리를 내며 스트레칭하듯 팔을 쭉 펴고 몸을 풀더니 급기
야 걸음을 옮긴다.
“어디 가?”
지환이 뚱한 표정을 지으며 묻자 희원은 힐끔 돌아보았다.
“오늘따라 엄청 피곤하네. 이만 자야지.”
“백수가 뭘 했다고 피곤해? 일하고 들어온 사람도 있는데.”
“모르는 소리. 백수가 원래 더 할 일 많고 피곤한 법이거든?”
그래! 자라, 자!
지환은 몹시 상처받은 표정을 지으며 TV 모니터를 노려보았다.
희원은 얼굴로 기분을 말하고 있는 그를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나 이제 씻을 건데.”
“아아. 그래. 그러시겠지.”
단단히 삐쳤다.
“TV 계속 볼 거야?”
“당연하지. 보던 건 마저 봐야지. 난 시작하면 끝을 보는 성격이라.”
“아아, 그러시군요.”
귀여워. 우리 남편.
“오빠, 나랑 같이 씻을래?”
“네.”
네네네네네네네네네네.
지환은 조금의 고민도 없이 벌떡 일어섰다.
희원이 앙큼한 눈매를 하고 바라보자 지환은 누가 보면 혀를 찰 지경으로
천치 같은 웃음을 흘렸다.
저 드럽게 쓸모없어 보이는 그녀의 잠옷을 단숨에 날려버릴 생각만 잔뜩
하며, 지환은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같이 씻자는 말이 부인의 입에서 먼저 나올 줄이야.
“부인이 야해졌어. 아주 마음에 들어.”
몹시 마음에 든다며 지환이 눈썹을 추켜올리자 희원은 별거 아니라는 듯
잠옷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 내리기 시작했다.
“오빠는 내일이면 퀭해질 거야.”
이 여자, 너무 사랑스럽다.
“내가 그렇게 만들어줄게요.”
*
“요즘 이 동네 자주 오네. 정들겠어, 이러다가.”
얼마 전 차민규가 곧잘 출몰한다는 가게를 방문했던 정윤은 그 가게 근처
다른 음식점을 찾으며 걷다가 중얼거렸다.
스페인 정통 음식을 한다는 집을 발견했는데, 세계 각국 나라 음식에 익숙
한 정윤은 어디 얼마나 잘하는지 살펴보려고 결심했다.
맛집은 찾아내줘야 한다. 내가 가는 그 길이 곧 맛집이다.
정윤은 슬로건을 내걸 듯이 속으로 생각하며 씩씩하게 혼밥의 세계로 향하
고 있었다.
며칠 기운 없이 돌아다녔는데,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정신 차려야지.
기대 이상으로 씩씩해질 필요가 있다.
내가 나를 돌보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돌봐주지 않으니까.
“제발 맛있어라. 제발 맛있어라. 내 입맛에 딱 맞아라아아아.”
오로지 ‘맛집’만 생각하며 길을 걷던 정윤은 지도 한번, 간판 한번 보다가
난데없이 우뚝 멈춰 섰다.
그러곤 천천히 뒤를 돌아 조금 전 자신을 스쳐간 사내의 뒷모습을 응시했
다.
“뭐지, 기운이 이상한데.”
정윤은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가던 길을 포기하고 사내의 뒤를 따랐다.
지도에 눈이 팔려 얼굴도 자세히 보지 못한 낯선 사내였지만.
“저, 말씀 좀 여쭐게요.”
순간 스치며 무의식적으로 새긴 사내의 인상착의는 어딘가 모르게 낯익었
다.
정윤은 다짜고짜 사내를 불렀다.
그러자 사내가 돌아본다.
“뭐요.”
“아…… 제가 길을 잃어서 그러는데요.”
정윤은 활짝 웃으며 휴대폰을 들었다.
지금까지 검색했던 맛집 이름을 지우고, 차민규가 자주 드나든다던 가게
이름을 검색해서 보여주었다.
“여기를 가려고 하는데 혹시 아세요?”
“줘봐요.”
사내는 휴대폰을 가져갔다. 정윤은 빠르게 그의 손, 손목을 훑었다.
문신. 일단 문신이 있다.
“여기? 지금 가려고?”
“네? 아, 네. 사실 한 번 갔었던 가게인데 골목길이 많아서 헷갈리네요.”
십자가? 정확하진 않지만 유사하다.
예전 금괴 밀수 건으로 붙잡혀 지환에게 조사를 받았던 어느 한 가장의 진
술과 일치하는 모양새가 언뜻 보인다.
심지어 얼굴은 매우 낯이 익다.
누구지. 기억해라, 누구지.
정윤은 왜 자신이 이 사내를 기억하는지에 대해 머리를 굴렸다.
머릿속에 담긴 범죄자 백과사전을 빠르게 펼쳐 우르르르르, 장을 넘기듯
정보를 뒤졌다.
“따라오쇼. 나도 지금 거기 가는 길인데.”
“아? 정말요? 감사합니다!”
정윤은 사내가 휴대폰을 건네주며 따라오라 고갯짓을 하자 반갑다는 듯 웃
었다.
“이 가게 가시는 거예요? 어머나 신기해라. 저랑 같은 곳으로 가시네요?”
“말 걸고 그러지는 맙시다. 내가 지금 아가씨하고 노가리나 까며 걸을 기분
이 아니니까.”
어머나, 아가씨래.
그냥 못 본 척 놓아줄까?
“죄송해요. 말 걸어서.”
“조용히 따라나 오쇼. 조용히.”
하, 대체 누구지.
정윤은 험악한 인상으로 으르렁거리듯 말하는 사내를 따라 걸으며 연신 머
리를 굴렸다.
그러다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래. 기억났다.
이 남자는 차민규의 고등학교 동창이다.
숱한 날 들여다보고 들여다보았던, 차민규의 동창들 중 한 명.
“말 걸지 말라고 하셨는데 말 걸어서 정말 죄송한데요. 혹시 단골이세요?
거기 뭐가 맛있는지 정보 좀 얻을 수 있을까요?”
“아니, 근데 이 아줌마가. 말 걸지 말라고.”
……아줌마라니.
넌 내 손으로 반드시 잡고 만다.
“죄송해요, 제가 궁금한 건 못 참다 보니까. 또 같은 가게 간다고 하시니 반
가워서요.”
“웬만한 건 다 먹을 만하니까 그냥 주문해서 먹어요. 난 뭐 술이나 마시지
안주는 잘 모르니까.”
“아, 네네. 역시 다 맛있나 봐요. 그냥 직원의 추천을 받아야겠어요.”
사내가 약간 누그러진 표정으로 힐끔 바라보자 정윤은 무안하게 웃었다.
김복재. 차민규 동창.
전과 10범. 현재 거주지 불확실. 신용불량. 무직. 이혼.
정윤은 빠르게 정보를 기억해냈고 줄줄이 나열했다.
이 사람의 손목에 있는 문신이 십자가가 맞는다면, 일전에 어느 집 가장이
보았다던 밀수 금괴 용의자가 확실해진다.
“정말 죄송한데 지금 혹시 몇 시나…….”
“휴대폰으로 보면 될 거 아니야! 거 참 귀찮게!”
사내는 버럭 화를 내면서도 와중에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십자가 형태를 지닌 문신이 드러나고, 정윤의 눈썹은 미세하게 올라갔다.
그래. 너구나.
맞다.
“십 분 전 여덟 시. 거참 말 시키지 말라니까 더럽게 말 안 듣네.”
“네네. 죄송합니다! 이제 조용히 따라갈게요!”
찾았다.
차민규의 끄나풀.
*
[데니스 한, 너무 오랜만이에요. 이게 얼마 만이죠?]
[오랜만이죠. 이틀 전에 당신과 식사한 걸 제외하면 정말 오랜만이군요.]
[맙소사, 이틀도 내게는 너무 긴 시간이었어요. 전화를 할 줄 알고 기다렸
는데 전화가 안 와서.]
미국식 조크에 객석은 웃음바다가 된다.
주혁은 미국으로 돌아가자마자 미친 듯이 쏟아지는 일정을 소화했고, 오늘
은 미국 저명 토크쇼에 게스트로 출연했다.
그를 격렬하게 환영하며 맞이한 MC ㅡ 제니스는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하
는 진행자이며 해당 토크쇼의 오랜 터줏대감이다.
그녀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주혁과도 깊은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데니스,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당신은 어떻게 지냈나요?]
[당신 생각을 종종했죠. 매일 밤 당신의 섹시한 입술이 자꾸 떠올라서.]
주혁이 대답하자 MC 제니스는 카메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시청자 여러분. 현혹되지 마세요. 이 남자는 모든 여성에게 이런 말을 한
답니다.]
객석에선 다시 한 번 웃음이 터졌다.
세련된 외모의 주혁은 세트장의 분위기를 천천히 녹이며 다리를 꼬아 앉았
다.
……준비된 질문과 준비된 답변이 오고 갔다.
중간중간 흐름이 끊길 때마다, 능숙한 MC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전환하며
쉴 새 없이 주혁에게서 에피소드를 뽑아냈다.
주혁의 어릴 적 이야기가 잠시 진행되고, 어릴 때부터 도전하는 것을 좋아
했다는 주혁의 답이 끝나자 MC 제니스는 손에 쥐고 있는 카드를 넘기며 다
음 질문을 확인했다.
분위기상 흐름이 적절한 질문이 기다리고 있다.
[데니스 한, 당신은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무용수들을 발탁하죠?]
[음, 그렇죠. 새로운 것을 발견한다는 건 언제나 짜릿한 일이니까.]
[이번엔 어떤 새로운 것을 경험했나요? 어떤 나라를 방문했죠?]
주혁은 잠시 생각하는 듯 눈을 들어 올리고 숨을 쉬었다.
[아하, 이번엔 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다녀왔습니다. 그중 한국이 가장 새로
운 경험을 안겨줬죠.]
다시 떠올리자니 황당한지 주혁은 입을 가리며 웃었다.
MC 제니스는 상체를 앞으로 가까이하며 관심 있게 그를 바라보았다.
[한국을 방문했다고요? 시내에 핵폭탄은 없던가요?]
[있었어요. 그래서 내가 가져왔죠. 지금 한국은 안전해졌습니다, 내가 핵폭
탄을 미국으로 가져왔으니까.]
MC 제니스가 특유의 놀란 표정을 지으며 과장된 행동을 보이자 주혁은 웃
으며 농담이라고 말했다.
객석이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듯 소란이 내려앉자 주혁은 미간을 문지르다
가 입을 열었다.
[한국에서 아주 오만하고 어리석은 무용수를 만났죠. 그녀는 세련된 안무
솜씨를 가지고 있었는데, 한국의 전통 무용을 하고 있었어요.]
[전통 무용? 음, 한국의 전통 무용에 대해 설명해줄 수 있나요?]
[물론이죠. 한국의 전통 무용이란 몸속의 피를 타고 음악이 흐릅니다. 무용
수는 피의 흐름을 따라 움직일 뿐이고.]
[호오, 어려운데요. 그런 춤을 추는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요. 심지어
오만하고 어리석은?]
[맞아요.]
[그런데 왜 오만하고 어리석을까요? 데니스의 눈에 그렇게 비친 이유가 있
나요?]
[내 제안을 거절했으니까. 난 그녀를 세계무대로 진출시키려고 했지만 그
녀는 남편의 곁에 남겠다고 하더군요.]
[맙소사, 당신의 제안을 거절했다고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죠?
어떻게?]
[처음엔 놀랐죠. 그래서 고집을 부리기도 했는데, 결과적으로 훨씬 더 오만
하고 어리석은 쪽은 나였더군요.]
주혁이 알 듯 말 듯한 이야기를 이어가자 분위기가 고조된다.
객석은 숨을 죽였고, 시청률 올라가는 소리가 관계자들의 귓가에 고여 들
었다.
[내가 술에 취해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지 뭡니까. ‘이봐, 당신은 나를 사랑
하게 될 거야. 그래서 나와 떠나는 게 두려운 거지? 걱정 마. 날 원하면 날
줄 테니.’]
[오, 마이, 갓.]
[최초의 실수를 한국에서 저지르고 말았네요. 그다음 상황은 더욱 최악이
었지만 노코멘트하겠습니다.]
주혁이 아슬아슬하게 토크 줄타기를 하자 MC 제니스는 마음에 든다는 것
처럼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이토록 아쉬워하는 걸 보니 그녀는 정말 매력적이었겠군요.]
[무척. 무척이나.]
제니스는 한 번도 보거나 경험해보지 못한 무용이지만 보고 싶어졌다고도
말했다.
주혁은 소파에 상체를 기대며 제니스를 바라보았다.
[한국 무용에 대한 자료를 좀 가지고 왔어요. 영상으로 틀어주면 좋겠는
데.]
[오! 그거 좋겠어요. 그녀의 영상인가요?]
주혁은 답 대신 눈썹을 추켜올렸고, 미소로 마무리했다.
소파 뒤에 설치된 커다란 화면으로 영상이 가득 자리한다.
커다랗고 고요한 무대 한가운데, 한복의 우아한 자태가 드러났다.
음악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듯 작은 조명 하나에 의지하고 있는 무용수의
모습.
주혁은 다시금 사랑에 빠진 눈빛으로 그녀의 움직임을 기다렸다.
……그는 진심으로 사랑했다.
[저 영상 속 그녀는 데니스 한이 말한 그녀가 맞군요. 느낌이 그래요. 그렇
죠?]
[네. 맞습니다.]
그녀의 춤사위를.
*
지환은 사무실에 앉아 있다가 퇴근 시간을 확인하자마자 튕기듯 일어났다.
복도를 빠져나와 로비로 내려가는데, 때마침 한 무리의 사내들이 안으로
들어선다.
지환은 자리에 멈춰 섰다.
“여어, 서지환 검사!”
지검장.
“어딜 그렇게 빨리 가고 있어. 퇴근하나?”
“안녕하십니까, 지검장님.”
지검장 뒤를 따르는 몇몇의 검사들.
그리고.
“또 뵙네요. 서지환 검사님.”
지검장보다 두어 걸음 앞에 서서 걷던 백인호 의원.
마치 서열대로 걸어오는 듯한 한 무리를 마주한 지환은 인사를 해오는 백
인호 의원을 바라보았다.
“서지환 검사. 뭐하고 서 있어? 의원님께서 친히 먼저 인사 건네주시는데.”
“안녕하십니까.”
지환은 지검장의 날선 음성에 묵례를 건넸다. 백인호 입가에 조소가 내려
앉는다.
대단히 보수적이고, 대단히 권위적인 집단.
시대가 아무리 바뀌고 세상이 변한다 해도 쉽게 바뀌지 않을, 권세가들의
모습.
어차피 너는 내게 허리를 구부리게 되어 있다.
백인호 의원은 그러한 눈빛으로 서지환의 인사를 받았다.
“서지환 검사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제 퇴근하십니까?”
“네.”
“지검장님, 검사님들 안팎으로 너무 바쁘신 것 아닙니까? 검사님들의 업무
도 좀 살펴주십시오. 이런 다 늦은 시간에 남은 일이 있다니요.”
“저희가 하는 일이 다 그렇습니다, 의원님. 저희가 열심히 일해야 나라가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의원님께서 펼치실 정치에 누가 되지 않도록 항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지검장의 입바른 소리에 지환은 무표정을 했다.
디이이잉, 디이이잉, 휴대폰 진동을 느낀 지환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
냈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잠시 지환이 시선을 돌리자 백 의원은 고개를 돌려 지검장을 바라보았다.
“지검장님 먼저 올라가시죠. 곧 따라가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의원님.”
지검장은 검사 무리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메시지 내용을 확인한 지환이 다시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자 백인호는 한
걸음, 지환을 향해 다가갔다.
“바쁘신 줄 알지만 잠시 제게 시간 좀 내주시겠습니까, 검사님.”
지환은 예전처럼 시종일관 웃으며 말하지 않는 백인호를 바라보다가, 입술
을 열었다.
“그러죠. 시간 괜찮습니다.”
……태풍이 엄습해온다.
버틸 수 있을까 없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아직까지는.”
궁금증을 해결하려면, 직접 부딪쳐보는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