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나한테 왜 이래
2019.03.03.
정윤은 차민규의 끄나풀임을 확신한 김복재를 따라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비어 있는 여러 자리 중 적당한 곳에 앉은 정윤은 직원이 가져다준 메뉴판
을 열었다.
저녁 시간이 되니 가게 메뉴판이 전에 보던 것과 다르다.
이 와중에도 맛있는걸 먹어보겠다고, 정윤은 꼼꼼하게 메뉴를 확인했다.
“이거랑 이거, 그리고 이거, 주세요.”
“네. 몇 분이신가요?”
“저 혼자예요.”
“아…… 메뉴 다시 한 번 확인하겠습니다. 총 세 가지 주문하신 것 맞죠?”
“네. 다 주세요.”
직원은 혼자 먹기엔 많은 양이라는 듯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사라졌
다.
뭐, 종종 겪는 일이니 정윤은 아무렇지 않게 휴대폰 꺼내 들었다.
지환에게 전화를 걸어보지만 전화를 받지 않는다.
“이건 바빠 죽겠는데 왜 전화를 안 받아.”
보면 전화해. 급한 김에 메시지를 남겼다.
김복재는 그녀와 다소 거리가 있는 자리에 앉았다.
등을 지고 앉아 있다 보니 김복재의 위치를 확인하기가 힘이 든다.
정윤은 가방을 열고 화장품을 꺼냈다.
거울을 보는 듯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던 정윤은 빠르게 김복재가 앉아 있
는 곳을 확인했다.
아. 나이스. 차민규가 있다.
그것도 일전에 이곳에서 만난 진상들이 앉아 있던, 바로 그곳에.
“저 자리 터가 안 좋나. 진상들만 꼬이네.”
이미 테이블에 술병이 있는걸 보니 차민규는 이곳에서 김복재를 기다리며
먼저 술을 마시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아. 맞다. 그때 그 직원, 있을까?
정윤은 한 집안의 가장이라던 어린 직원을 찾아봤다.
오늘은 출근 일이 아닌 건지 보이질 않는다.
뭐, 있건 없건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거울을 꺼냈으니 형식상 립스틱을 진하게 바른 정윤은 지나가는 직원을 붙
잡았다.
“저, 죄송한데 음악 소리가 너무 커서요. 약간 줄여주실 수 있을까요?”
“아아, 네. 바로 줄여드릴게요.”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으니 정윤은 직원에게 음악 소리를 줄여 달라 청했
다.
그런다고 자세히 들릴 거리는 아니었지만 특정 단어들은 간간이 들을 수
있을 것이라.
……음악 소리가 줄어든다.
정윤은 이제야 좀 살겠다는 편안한 표정을 지으며, 휴대폰 포털 사이트를
열고 들여다보는 척했다.
신경은 온통 뒤로 가 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윤은 내내 그 생각만 했다.
망할 서지환은 급해 죽겠는데 연락이 닿질 않고ㅡ
“여보세요.”
ㅡ뭐고, 이 시간에.
정윤은 활활 끓어오르는 마음을 꾹꾹 누르며 전 남편 ㅡ 남현수 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오, 듣기만 해도 단 2초 만에 혈압 오르게 하는 말투. 이 말투!
“안녕하세요, 남현수 형사님. 접니다, 차정윤 검사.”
ㅡ아, 예예. 검사님. 이 시간에 웬일이십니까.
……공적이건 사적이건 호칭만 달라질 뿐 저 망할 놈의 ‘왜 전화했느냐’는
질문은 변하질 않는다.
정윤은 전 남편의 불친절한 음성에 입술을 한껏 삐뚤게 하며 입을 열었다.
“지금 좀 만났으면 하는데요.”
ㅡ예? 지금요?
“좌표 찍어드릴게요. 지금 당장 오세요.”
ㅡ당장 오라는 말씀이십니까?
“나 지금 심 봤어. 빨리 와.”
급해 죽겠는데 오고 싶지 않은 듯 자꾸 말꼬리를 물고 늘어진다.
성격 급한 정윤이 속닥거리자 알아들었는지 태도가 바뀐다.
ㅡ좌표 찍어.
“알았어. 심도 봤고, 심지어 노다지야. 심마니가 부족하니까 빨리 와.”
ㅡ좌표나 찍어.
일어서는 소리가 들린다. 우당탕탕 급한 그의 걸음이 이어진다.
ㅡ바로 간다. 심 봤다고 혼자 뿌리를 뽑네 마네 까불지 말고 몸 사리믄서
가만히 있어라, 니. 알긋나.
“끊어. 바쁘니까.”
정윤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급하면 사투리가 튀어나오는 전 남편의 목소리를 곱씹다 보니 금세 웃음이
툭 하고 나와 버린다.
“아, 이럴 때가 아니지. 집중.”
정윤은 다시 상황에 집중해보기로 한다.
*
“작업 끝났냐?”
“어어. 끝났지. 차에 빵빵하게 실어놨다, 민규야.”
맞은편에 앉은 동창 김복재의 말을 들으며 차민규는 술을 홀짝거렸다.
김복재는 금괴를 밀수하는 과정 중 행동책을 맡고 있었다.
실제 금괴를 운반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번엔 꽤 괜찮았어. 공항 수색이 조금 느슨해졌더라고. 얼마 만인지 몰
라.”
“그래그래, 수고했어.”
김복재는 밀수된 금괴를 차민규에게 넘겼다.
넘겨받은 금괴를 다시 홍콩으로 빼돌리고 현금 세탁을 하는 일은 차민규가
전담했다.
그 중간 사이사이 많은 인력이 동원되었고, 두 사람은 그들의 관리인으로
움직이는 셈이었다.
“의원님은 잘 계시지?”
“누구, 인호?”
“어어. 백인호 의원님. 야, 그렇게 날아다니는 분을 니가 인호라고 말하는
건 아직도 어색해.”
“야, 인호 내 동생이야. 동생을 동생으로 부르는데 너 지금 뭐라는 거야, 이
새끼가.”
“아아, 미안. 미안미안.”
차민규는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사정없이 구겼다.
덩치는 차민규보다 훨씬 우람한 김복재이지만, 얽힌 관계가 그렇듯 김복재
는 차민규에게 꼼짝도 하지 못했다.
차민규는 술을 들이부으며 중얼거렸다.
“백인호, 그 새끼도 나 없으면 뭣도 아니야.”
“알지. 알지. 잘 알지, 내가.”
김복재가 자신의 술잔에 술을 따르려고 술병을 들자, 낚아채가더니 자신의
술잔에 콸콸 술을 따른다.
무안한 김복재는 손을 비비며 헛기침을 했다.
잔 멸치처럼 바싹 마른 몸에 눈빛만 형형한 차민규는 제아무리 좋은 곳에
서 좋은 술을 마셔도 초라하게만 보였다.
이곳과 영 어울리지 않는, 그는 온몸에서 풍기는 저렴한 분위기를 지우지
못했다.
“복재야, 나도 넥타이 매고 국회나 드나들면서 살아야 하는데 말이야. 이렇
게 살 인물이 아닌데, 내가. 안 그러냐?”
“어어어. 그럼. 당연하지. 우리 민규가 국회로 들어가면 나라 경제도 살고,
재선은 따 놓은 당상이지.”
“그러게 말이야. 인호 하는 거 보니까 별거 없더라고. 나도 자금 좀 모아서
도전해볼까.”
차민규는 동생 백인호를 떠올렸다.
녀석의 슈트 가슴팍에 항상 꽂혀 있는 국회의원 배지를 볼 때마다 묘한 동
경심이 생겨났다.
처음엔 동생이지만 마냥 존경스러웠고, 가다간 슬슬 부러워지기 시작했고.
나중엔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언제까지 인호 뒷바라지나 하며 살 팔자는 아닌데 말이야. 하, 이게
참.”
“민규야, 그래도 나는 니가 부러워. 의원님이 대한민국 최고 실세 아니냐?
그런 분이 친척이라니. 난 정말 부럽다.”
피식, 차민규는 웃었다.
“야, 인호 내 앞에서 쩔쩔매. 그 새끼가 얼마나 내 눈치를 보는 줄 아냐? 그
게 밖에서나 큰소리치지, 나랑 둘이 있으면 아직도 중2 때 나한테 쥐어 터
지고 질질 짜던 별 볼 일 없는 새끼야.”
“야아, 민규야. 넌 정말 대단하다. 정말 대단해.”
“당연하지. 누가 나를 이겨? 내가 지금 인호 불러볼까? 전화 한 통이면 그
새끼 바로 튀어 와.”
“아, 아니야. 민규야, 아니야. 그러지 마. 난 다 아는데 뭐. 다 알지.”
“야, 넌 진짜 알지? 내가 인호한테 빌빌거리는 게 아니야. 너 알지?”
“그럼. 알지. 내 친구라서가 아니라 넌 정말 대단해. 내가 너, 자랑스럽게
여기는 거 너도 알지?”
……찌질한 놈.
김복재는 속으로 차민규를 비웃었다.
현실은 백인호 의원의 그림자도 밟지 못할 주제에 허세 부리는 꼴이라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백인호 의원이 붙여 놓은 감시에 옴짝달싹도 못 했으
면서.
김복재는 마음으로 차민규를 무시하고, 차민규는 마음으로 백인호를 무시
했다.
겉으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모습마저 닮았다.
“야, 그래도 내 술은 건드리지 마. 기분 나쁘니까.”
“아아, 어어! 미안, 미안!”
김복재는 자연스럽게 술병을 쥐다가 차민규의 일갈에 허겁지겁 술병을 내
렸다.
생고생을 다 해가며 금괴를 차에 실어주었더니, 술 한 잔도 나누어주려고
하지 않는다.
“이게 얼마짜리인데 니가 마시려고 해. 넌 가서 소주나 마셔, 인마.”
“아…… 어어, 알았다. 알았어. 내가 눈치가 좀 없었지?”
“……에이, 기분이다. 너도 한잔 받아라. 이깟 술 얼마나 한다고.”
차민규는 선심 쓰듯 술병을 움켜쥐었고 김복재는 술잔을 들었다.
한 손으로 술잔을 잡고 내미는 김복재의 팔을 가만히 내려다본 차민규는
눈썹을 추켜세웠다.
“아, 아아. 미안.”
김복재는 슬그머니 두 손으로 잔을 잡았다. 차민규는 그제야 술을 따랐다.
“우린 친구다. 알지 복재야.”
“그럼. 우린 친구지, 민규야. 건배하자! 친구야!”
……언제고 서로의 뒤통수를 칠 수 있는.
“고개 좀 옆으로 돌리고 마셔라, 새끼야. 내 앞에서 대가리 쳐들면서 술 마
시지 말고. 인호도 내 앞에서 그렇게 안 마시는데 새끼, 건방지게.”
“어! 어어! 미안해 민규야! 다음 잔부터는 돌려서 마실게!”
신용도 신뢰도 없는, 그런 관계였다.
*
정윤의 전화를 받고 용수철처럼 튕겨져 경찰서를 벗어난 현수는 정신없이
운전대를 움직였다.
급한 일이지만 꽉 막힌 서울의 도로 사정은 개개인의 사연을 전부 도와주
지 않았다.
“아, 장난 까나. 이 뭐고. 와이카는데.”
사고가 났는지 평소보다 더 막힌 도로.
밑도 끝도 없이 길게 늘어진 차량을 바라보던 현수는 핸들을 돌렸고 이내
샛길로 빠졌다.
이 길은 목적지까지 돌아가는 길이지만, 신호가 많지 않은 동네의 외진 길
로 막힌 도로를 피해볼 생각이다.
이리저리 곡예 운전을 하듯 골목길을 지난 현수는 길의 끝에서 우회전을
했다.
시야가 뻥 뚫린다.
“캬, 쥑이네.”
보소. 차량 한 대 지나가지 않는 이 한적하고 쾌적한 길 좀 보소.
내비게이션도 알려주지 않는, 포털사이트 지식인도 울고 갈 숨은 길이다.
뻥 뚫린 길을 바라본 현수는 만족스럽다는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아, 이제 좀 갈만하네.”
범죄자들의 도주 방지를 위해 골목길을 익히고 익혀놓은 수년간의 노하우
가 빚어낸 결과물이다.
가로수가 밀밀하게 심어져 있는 한적한 외곽의 길은 아래는 하천이요, 길
너머는 임야로 된 으슥하고 좁은 길.
“오, 좋은데.”
현수는 예상 시간을 단축할 수 있음에 쾌재를 불렀다.
소란스럽지 않은, 극강으로 낮은 그의 음성은 동굴 안에서 말하듯 차 안을
울렸다.
잠시 걸린 신호에 멈춰 선 현수는 핸들을 툭툭 치며 때를 기다리다가, 힐끔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이내 오만상이 찌푸려진다.
“아아, 내가 미친나. 이걸 또 입고.”
그때, 금으로 두른 김밥을 사들고 정윤이 형사과를 찾아왔던 때.
그때 입었던 남방을 또 입고 나왔다.
아 이런 제길. 이 남방 말고도 다른 게 있단 말이다.
차정윤이 뭔가 크게 오해를 하고 있는데, 집에 남방이 세 개 정도 더 있거
든.
“하, 또 이걸. 다른 것도 있는데.”
올겨울에 꺼내놓은 옷이라곤 남방 네 개, 바지 두 개, 점퍼 하나.
보통 이렇게 가지면 다들 겨울나지 않나? 현수는 괜한 남방만 툭툭 털었다.
“아따, 현수야 와 이랬노. 욕을 사발로 먹게 생겼다. 오늘은 다른 걸로 입었
어야지, 색다르게. 이 멍충아.”
빨래를 자주 돌리는 편은 아니다 보니 한 번 걸치면 일주일은 너끈하게 입
어서 문제지만, 어쨌든 빨아놓은 다른 셔츠가 있었는데 하필 또 이걸 입고
말았다.
가만히 있다가 킁킁, 냄새를 맡아보았다.
다행이지, 별 냄새는 없다.
대체 그 남방은 유니폼이니? 아니면 몸에 새겼어?
몇 년째 그거 말고 다른 옷은 안 입는 거야?
킁킁 냄새를 맡자니 정윤의 잔소리가 환청으로 들려온다.
옷 없어? 좀 버려라, 버려.
낡아도 한참 낡았잖아. 해진 것 좀 봐.
멍하니 현수는 넋을 놓았다가 정신을 차리듯 고개를 홱홱 돌렸다.
“뭐 어때서. 면도나 했으면 됐지.”
신호가 바뀌고, 현수는 액셀을 밟았다.
힐끔힐끔 룸미러로 자신의 옷을 눈여겨보았다.
걸레짝에도 못 쓴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셔츠를 바라보던 정윤의 미간
주름을 다시금 떠올린 현수는 못마땅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가스나, 어디가 낡았다고. 편하고 좋기만 하구만.”
안다. 알고 있다.
입고 걸치는 것에 관심이 없어도 너무 없는 자신과는 달리, 그녀는 처음부
터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의 멋쟁이였고, 그래서 패션에 관심이 많다는
것 또한.
잠깐의 결혼생활 동안 그녀가 제게 사다 준 옷은 셀 수 없이 많았지만 형사
과 출근룩으로 쓰기엔 터무니없이 비싸고, 불편한 것들이었다.
그래. 옷이란 무조건 편해야 한다.
언제 뒹굴고 언제 잠복해야 할지 모르는데 패션이 다 무슨 소용이냐.
“몇 시고.”
현수는 힐끔 현재 시간을 확인했다.
정윤에겐 그 뒤로 연락이 없고, 어떤 상황인지 알 길이 없다.
장난이기만 해봐라, 가만 안 둘 거다.
아무 일도 없는데 무슨 일 있는 척 불렀기만 해봐라.
혼자 밥 먹기 싫다고 앉아서 밥이나 먹고 가라고 하기만 해봐. 어디 한 번
그렇기만 해봐라.
“잠깐, 내가 지갑을 챙겨 왔던가.”
현수는 한 손으로 바지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지갑을 가져왔는지 확인했다.
만에 하나 정윤의 장난이라면.
밥 먹자고 부른 게 맞는다면 적어도 밥값은 내야 하니까.
……제길. 장난이면 가만 안 둔다고 할 땐 언제고 지갑을 찾는 꼴이라니.
이렇게 몸과 마음이 따로 놀아서야.
“으아아! 으아아아아아!”
그때였다. 현수는 시원하게 달리다가 브레이크를 꽉 밟았다.
난데없이 끼이이익, 멈춰 서며 현수는 헉, 헉, 숨을 뱉었다.
두 손으로 꽉 쥔 핸들을 놓으며 앞을 바라본 현수는 제 눈을 의심하듯 껌뻑
껌뻑거렸다.
“……뭐고!”
당황한 듯 현수는 큰 소리를 내었다. 그도 그럴 것이ㅡ
일 차선 도로 위를 아장아장 줄지어 걸어가는 오리떼를 만난 것이다.
뭐 해? 멈춰 서서 우리 지나가는 거 구경해.
라고 말하는 것만 같은 엄마 오리 뒤로.
“하…… 미친다 진짜.”
뭐 해? 멈춰 서서 우리 귀여운 것 좀 구경해.
라고 말하는 것만 같은 새끼 오리들까지.
쿵, 차 문을 닫으며 현수는 바깥으로 나왔다.
정신없이 걷지만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는 기색이 없는 오리들을 바라보다
가, 그는 이마를 짚었다.
“와, 이 뭐고. 진짜. 오늘 진짜 와이카는데.”
뒤뚱뒤뚱. 아장아장.
행렬은 띄엄띄엄, 끝이 보이질 않았다.
*
백인호와 조용한 장소로 이동한 지환은 정윤이 보낸 메시지를 확인했다.
[심 봤음]
휴대폰을 들고 있자니 백인호가 유심히 바라본다.
지환은 대수롭지 않은 메시지를 확인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노다지]
[심마니는 구함]
응? 구함?
누구를 어떻게 구함?
[넌 필요 없음]
……심지어 넌 올 필요 없단다.
지환은 일단 상황을 파악한 뒤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굳이 답장을 하지 않아도 읽었다는 표시만으로도, 정윤은 지환의 답을 이
해할 것이다.
“실례했습니다. 집에서 연락이 와서.”
“아닙니다. 집에서 오는 연락은 받아야죠.”
백인호는 ‘집’이라고 표현하자 희원을 떠올렸다.
한국무용이 공연에서 제외되었다는 이야기를 지환도 알고 있으리라.
문득 열에 들끓어 일그러지는 지환의 모습이 보고 싶어졌다.
니가 나를 도발했으니, 그러한 일이 발생하는 거라는 것 또한 알려주고 싶
었다.
“그러고 보니 부인께서는 잘 지내십니까?”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 또한, 알려주어야 한다.
네가 나를 도발하는 이상 신변엔 많은 변화가 생길 테니까.
너를 포함한 네 가족, 동료, 그게 무엇이건 간에 모조리 전부.
“검사님과 부부 동반으로 한번 같이 뵙고 싶었는데 그게 참 힘들군요. 쉽지
않습니다.”
백인호가 웃으며 말하자 지환은 표정 없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천천
히 입술을 열었다.
“의원님.”
“네. 검사님.”
“의원님께서는 왜 이렇게 부부 동반에 집착하십니까?”
집착. 집착이라.
백인호는 지환의 단어 선별에 웃음을 터트렸다.
알고 묻는 게 뻔한 지환의 질문이 황당하다는 듯 꽤 오랫동안 큰 웃음을 이
어갔다.
그러곤 입을 열었다.
“그거야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내 가족을 포함해 형성된 그룹은
쉽게 망가지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더 안전한 법이고.”
안전하게.
“검사님, 인맥을 형성하는 방법이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이득을 나누며
쌓은 관계란 득의 종료와 동시에 관계도 깨지는 법이죠. 저는 그런 관계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서로의 가족을 인질로 두고, 맺는 관계.
“진실 된 관계를 형성하는 일 중에 가족 대면만큼 확실하고 효율적인 것이
없습니다. 나의 가면은 쉬워도, 내 가족에게 가면을 씌우는 건 어려운 일이
니 말입니다.”
“…….”
“내 가족 앞에서 가면을 쓴다는 것도 어렵긴 하죠. 이래저래 가족과 엮이면
훨씬 더 사람의 진실 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백인호는 답을 다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 쪽으로 향했다.
바깥을 지그시 바라보듯 뒷짐을 지고, 어둠 속 빛나는 서울의 야경을 응시
했다.
지환은 백인호의 뒷모습을 보다가 물었다.
“지금 제게 말씀 주신 이유, 그게 다입니까?”
“뭐, 이게 전부의 이유는 아닙니다.”
백인호는 천천히 블라인드 손잡이를 잡았다.
“개인적으로 궁금해서요. 그렇게 넷이 만났을 때, 두 사람은 과연 어떤 가
면을 고르고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지환의 손끝은 움찔하고.
“각자의 배우자에게 어떤 말로 서로를 소개하려나. 과거의 연인? 혹은 모
르는 사람?”
촤라락, 백인호는 블라인드 손잡이를 돌렸다.
야경이 비치던 블라인드가 꽉 닫히며 완벽하게 창을 가렸다.
이런 밀실이 마음에 든다는 듯 백인호는 지환을 향해 돌아섰다.
“제 아내와 검사님 사이에서 저만 우스운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
“검사님의 아내분도 사실을 아셔야죠. 그래야 공평하게 게임을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백인호는 미소를 지었다.
“제 집사람이 왜, 검사님의 부인께 접근을 했는지도 부인께선 잘 모르시겠
죠. 알고 나면 부인께서 즐겁다 하시지는 않을 겁니다.”
“백인호 의원님.”
“그뿐입니까? 둘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부인께서 알게 되면.”
“…….”
“제 집사람이 검사님을 잊지 못해 부인께 접근했음을 알게 되면, 남은 결혼
생활은 평화롭게 유지되겠습니까?”
그는 서지환이라는 검사를 시험대에 올렸다.
가족은 언제나 좋은 인질이 되었다.
형체 없는, 증거를 남길 수 없는 위협만큼 애를 태우는 것은 없을 테니까.
“공연이 취소되었음은 개인적으로도 안타깝지만, 이번이 끝은 아닐 겁니
다. 매사가 풀리지 않을 것이고, 매사에 부딪치다가 권희원이라는 무용수
는 결국 사라질 테니까.”
자신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이 많아진 눈빛을 하는 지환을 바라보자니,
백인호는 조소가 절로 흘렀다.
“아아, 놀라거나 노여워 마십시오, 검사님. 이건 협박이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서지환 검사.
그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애송이였다.
“이건 바로, 권력이라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