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너는 다가와 내게
집을 뒤집듯이 하나부터 열까지 꺼내놓고 닦고, 치우고 버리고, 희원은 대
청소에 나섰다.
창문까지 활짝 열어놓고 묵은 먼지까지 없앤 그녀는 재활용품과 쓰레기를
버리는 것으로 오늘의 청소를 끝마쳤다.
“아우, 속이 다 시원하네.”
손을 탁탁 털며 다시 집으로 돌아오니 세상 속이 다 시원하다.
희원은 자몽을 갈아 생과일주스를 가득 마시고는 소파에 앉았다.
아, 이제 뭐 하지. 아직도 시간은 이렇게 남았는데.
“밥을 좀 할까? 오늘 제대로 한 상 차려봐?”
흐음. 희원은 자주 해 먹던 음식 말고 다른 특별한 음식이 뭐가 있을까, 휴
대폰을 들고 요리 레시피를 찾기 시작했다.
얼마 전 생일이라며 지환이 제게 해준 음식들은 하나같이 정갈했고 맛있었
다.
아직 그의 생일은 돌아오려면 멀었지만, 이럴 때 아니면 또 언제 실력 발휘
해보겠나.
바쁠 땐 바빠서 못 해주고, 힘들 땐 힘들어서 못 해준다 하지만.
“뭐, 지금은 시간도 많으니까. 그럼 장을 좀 보고 올까?”
근자엔 예쁜 신랑께서 장모님 반찬으로 도시락까지 싸 들고 다니시니, 밑
반찬을 조금 더 해 직접 싸줘야겠다.
“오, 좋았어. 그럼 빨리 움직여야겠다.”
희원은 일단 메뉴 선정을 끝마치고 다시 레시피를 뒤적거렸다.
사야 할 것들의 품목을 정리하며 열심히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그때.
“뭐야, 깜짝이야.”
구언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여어, 권희원]
“여어, 권희원? 얘는 또 웬 헛소리야.”
희원은 느닷없는 구언의 엉뚱한 메시지에 무심한 답변을 이었다.
물음표 하나 찍어 보내자 바로 답이 온다.
동영상 링크다.
[권희원. 너 아직 안 봤냐? 이거 몰라?]
“이게 뭔데. 내가 뭘 봐, 보기는.”
희원은 답 대신 중얼거리며 링크를 눌렀다. 링크를 누르는 사이, 친한 동료
에게서 연락이 온다.
[언니 대박! 대박 사건!]
“얘는 또 뭐가 대박이야.”
다들 알 수 없는 말만 하니 희원은 다시 링크를 눌렀다.
그때 다른 동료에게 메시지가 도착했다.
[와! 언니이이이이이! 대애애애바아아아악!]
그러더니 또 한 명에게서 연락이.
[ㅠㅠㅠㅠ이거 뭐예요 언니? ㅠㅠㅠ 이거 뭐예요오오오 ㅠㅠ]
희원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들 알 수 없는 말만 하며 극도의 흥분을 감추지 못하니 고개는 저절로 갸
우뚱해졌다.
“뭐야, 뭔데 다들 이 난리야. 똑바로 말을 해야 알지.”
어찌 되었든 구언이 보내준 링크와 관련이 있는 건가 싶어 그녀는 빠르게
링크를 확인했다.
드문드문 동료들에게 메시지가 오지만 일단 동영상부터 보기로 한다.
일정 광고가 끝나고, 미국 유명 토크쇼 자리에 주혁이 나온다.
헐. 희원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대표님이네?”
이 엄청난 토크쇼에 게스트로 출연하다니.
심지어 MC 제니스와 원래도 친분이 있는 사이라니.
그는 역시 대단한 사람이었다.
실제로 와닿지 않던 그의 유명세가 신랄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희원은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아 본격적으로 동영상을 시청했다.
놀라운 일이긴 하다만 이게 나한테 연락을 줄 만한 일인가?
그녀는 반신반의하며 계속 영상을 들여다보았다.
중간중간 동료들에게 연락이 오지만 일단 끝까지 시청하기로 한다.
……그러다가.
“뭐야.”
희원은 ‘한국’ 이야기가 나오며 자신을 일컫는 이야기가 나오자 입을 멍하
니 벌렸다.
주혁은 토크쇼 안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놀란 희원은 허둥거리며 휴대폰 볼륨을 크게 높였다.
ㅡ당신이 이토록 아쉬워하는 걸 보니 그녀는 정말 매력적이었겠군요.
ㅡ무척. 무척이나.
허. MC 제니스의 질문에 답하는 주혁을 바라보다가 희원은 입술을 가렸다.
지구 반대편에서 자신의 이야기가 나올 줄 누가 알았겠냐고. 희원은 당황
함이 가시질 않는다는 것처럼 숨을 길게 몰아쉬었다.
혹시나 엉뚱한 이야기가 나올까 심장은 두근두근거렸다.
ㅡ한국 무용에 대한 자료를 좀 가지고 왔어요. 영상으로 틀어주면 좋겠는
데.
“대박 사건!”
희원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주혁의 요청이 끝나자 자신의 무용 동영상이 토크쇼의 커다란 화면을 가득
메웠다.
쩍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희원은 눈만 재차 깜빡거렸다.
“이,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그제야 동료들의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것처럼, 희원은 동영상을 끝
까지 시청한 뒤 조회수를 확인했다.
“헐! 대박, 일,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 천만.”
차근차근 세지 않으면 정확하게 알 수도 없는 엄청난 조회수.
“사, 삼천만 뷰?!”
전 세계에서 그녀의 영상을 보고 있는 것이다. 조회수는 눈을 깜빡일 때마
다 거침없이 올라갔다.
허, 허, 희원은 휴대폰을 꽉 쥐고 소파에 털썩 앉았다.
미친 듯이 휴대폰이 울리며 동료들에게서 연락이 쏟아진다.
[언니, 지금 언니 이름 실검에 있어. 봤어?]
희원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미쳤어 ㅠㅠ 희원 언니. 대박이야 지금!!]
[울 언니와 대표님께서 결국 일 냈군요 ㅠㅠ 언니 너무 멋있어요 ㅠㅠ]
[희원아! 나 동영상 봤다! 진짜 자랑스럽다! 최고다! 권희원!]
천천히 휴대폰으로 다시 고개를 내리며 실시간 검색어를 찾아보았다.
7위. 리얼 토크쇼 권희원 영상
3위. 권희원
한참이나 검색어 순위를 바라보던 그녀는 더 이상 눈을 뜨고 바라보기가
힘들다는 듯 꽉, 눈을 감았다.
그럴 만도 했다.
검색어 1위는ㅡ
“아아…… 미치겠다…….”
한국무용이었다.
*
정윤은 초조한 시선으로 가게 입구를 힐끔거렸다.
올 시간이 넘은 것 같은데 망할 전 남편께서 올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왜 안 와, 올 시간이 지났는데.”
미치겠다. 차가 막히나?
아니, 차가 막혀도 지금쯤이면 올 때가 됐는데?
이 자식 이거, 설마.
“내가 지금 장난치는 줄 알고 안 오는 거 아냐?”
정윤은 미간을 좁히며 눈꼬리를 올렸다.
이내 휴대폰을 집어 들며 힐끔, 뒤를 살폈다.
차민규와 김복재의 대화 내용은 갈수록 구질구질했다.
차량에 금괴를 실었다,는 정보 외엔 그다지 빼내먹을 내용이 없었다.
주로 차민규는 듣기 버거운 허세를 이어갔고, 앞에 앉은 김복재는 그런 차
민규의 비위를 맞추며 술이나 마시기 바빴다.
“쟤네가 나가기 전엔 도착해야 하는데.”
어찌 되었든 차량에 실린 금괴를 확보해야 한다. 지금은 그것만이 최선이
다.
하지만, 어떻게?
“아, 쟤네 술 거의 다 마신 것 같은데. 미치겠네.”
차민규를 잡을 명분이 지금 당장 정윤에겐 없다.
차량 속 금괴를 확보해야 차민규를 잡을 수 있을 텐데,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에효, 차라리 서지환을 부를걸 그랬다. 이 망할 남현수를 불러서 진짜 망하
게 생겼다.
“여보세요.”
정윤은 다시 현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참 만에야 전화를 받는다.
ㅡ여보세요.
“왜 안 와. 어딘데 이렇게 늦어. 뭐 하는데 코빼기도 안 보이냐고.”
ㅡ……하아.
응? 하아? 정윤은 느닷없는 현수의 한숨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누가 누구 앞에서 한숨질이란 말이냐? 한숨은 쉬어도 내가 쉬게 생겼
는데?
ㅡ내 지금 그렇게 됐다. 누군 안 가고 싶어서 안 가나.
“뭔데. 무슨 소리야, 그게.”
정윤은 현수의 말을 이해하기가 힘들다는 듯 되물었다.
그러자 엄청난 답변이 돌아온다.
ㅡ믿기 어렵겠지만 내 지금 오리를 만나가.
“뭐? 누굴 만나? 유리?”
유리가 누군데.
몇 살인데.
“유리가 누군데. 나도 아는 애야?”
예쁘냐?!
ㅡ뭔 유리. 유리 말고 오리. 오리 모르나, 오리.
“오리? 오리? ……오리?”
꽥꽥. 꽥꽥.
설마, 그 오리?
그녀는 귀를 의심했다.
“Duck? Duck 말하는 거야? 오리? 꽥꽥하는 그 오리?”
ㅡ그래! 더크! 더크! 더크라고 더크! 꽥!
산삼 캐러 오다가 오리를 만났단다. 정윤은 도통 못 알아듣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분노에 찬 음성으로 ‘더크’를 외치는 전남편께선 차량 통제 중인 것 같았다.
“지, 지금 차량 통제해?”
ㅡ마, 바쁘다. 끊어라. 내 금방 갈게.
“아니, 어디서 뭐 하는 거야 도대체! 오리라니, 차량 통제는 또 뭐고!”
ㅡ내 여기서 지금 떠나면 꽥꽥이들 다 죽는다. 가족이 생으로 이별해서야
되겠나. 금방 갈 거니까 상황 잘 보고 있어라.
“여보세요! 여……!”
망할 인간. 전화를 끊어버렸다.
하, 허, 하. 정윤은 황당함에 연신 헛숨만 토해냈다.
“오리, 하, 오리? 이 인간이 진짜, 이젠 하다하다 오리 핑계를 대? 넌 죽었
어, 오기만 해봐.”
설마하니 전 남편이 도로 한복판에서 오리 떼를 만났을 거라곤 상상도 못
하는 거지.
정윤은 눈썹을 휘날리며 달려와도 시원찮을 판에 다른 볼일을 보고 있는
남현수에게 진심으로 분노했다.
가족이 생으로 이별해서야 되겠나.
“생각할수록 진짜 어이없네. 지는 나랑 죽어서 이별했어? 지도 나랑 생으
로 이별해놓고 뭔 헛소리야.”
그녀가 전남편의 실언을 곱씹으며 폭주하려던 그때,
“허, 돌겠네, 진짜.”
차민규가 김복재가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게 아닌가.
두 사람이 이곳을 떠나려고 한다. 정윤은 이를 깍 깨물고 오만상을 찌푸렸다.
아, 정말 되는 일이 없다.
“남현수, 가만 안 둬 진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
검사님. 이건 협박이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지환은 벽시계를 힐끔 바라보았다.
이건 바로, 권력이라는 겁니다.
백인호의 이런 헛소리를 들으면서도 낮은 숨만 불어 내쉴 수밖에 없는 건
ㅡ
정윤에게서 다음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뭐, 좋습니다.”
한참 만에야 지환은 입술을 열었다.
만에 하나 그쪽 일이 틀어진다면 백인호의 도발을 참고 넘길 수밖에 없겠
고.
“듣고 보니 의원님의 말씀이 맞는 것 같기는 합니다.”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는 거다.
지환이 태세를 변환하며 자리에 앉자 백인호는 표정을 굳히며 그를 바라보
았다.
생각보다 더 빨리, 더 확실하게 태도를 바꾸는 서지환을 바라보고 있자니
백인호의 머릿속도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그의 말과 행동이 진심인지 아닌지, 구분이 필요했다.
지환은 휴대폰을 테이블에 올렸다. 녹화나 녹취가 없음을 알리는 표현이기
도 했다.
“앉으시죠, 의원님. 앉아서 말씀 나누시죠. 대화가 길어질 것 같은데.”
아무것도 믿어선 안 된다.
“그러죠.”
백인호는 천천히 지환이 권하는 의자에 앉았다.
마찬가지로 휴대폰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리며, 편안하게 의자 등받이에
상체를 기댔다.
서지환은 와이프의 미래가 걸리고 나니 이제야 현실감이 드는 걸까.
아니면 강희주와의 이야기가 세상 밖으로 나올까 겁이 나는 걸까.
……백인호는 웃었다.
“오늘 검사님을 우연히 만난 건 아무래도 운명인 것 같습니다.”
그래. 어느 쪽이건 간에 상관은 없다.
목적은 서지환이 진행하고 있는 수사만 종결되면 되는 거니까.
“지검장님과 만나 오늘 서지환 검사님의 수사권 관련해서 이야기를 나눠볼
생각이었는데 말입니다. 이렇게 우연히 만나 번거로움을 덜게 되었지 뭡니까.”
백인호는 편안한 음성을 한 채 멈추지 않고 지환을 압박했다.
“중앙지검에만 계속 계시기엔 검사님의 출중한 능력이 다소 아쉬워서, 이
런저런 다른 부서로도 검사님의 재량이 머물기를 개인적으로 바라던지라.”
“…….”
“바쁜 일도 좋지만 신혼엔 다소 여유로운 일도 도움이 되는 법입니다. 수사
권, 그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없다가도 생기는 거고, 또 있다가도 없어지는
거고.”
이쯤 말하면 알아들었을까.
네가 쥐고 있는 수사권, 그건 아무것도 아니라는걸.
나는 너의 생존권을 쥐고 있으므로.
“대화는 검사님이 이끌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더 확실할 것 같으니
말입니다.”
백인호는 칼자루를 지환에게 넘겨주는 시늉을 했다.
표정은 편안했고, 무엇이건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자세를 보여주었다.
지환은 시계를 힐끔, 바라보았다.
……연락해라, 차정윤.
“커피 한잔하시겠습니까? 의원님.”
빨리 연락해라, 차정윤.
“아, 네. 그러죠. 검사님께서 직접 타주시는 겁니까?”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정윤에게 텔레파시를 보내듯 마음으로 중얼거리며 지환은 자리에서 일어
섰다.
커피까지 타주겠다는 친절함을 보이는 지환을 바라보다가, 백인호는 깍지
낀 손을 무릎으로 떨궜다.
지환은 앞으로 걸어가다 뒤를 돌아보았다. 백인호가 고개를 뒤로 돌린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그런 백인호의 염려가 우습다는 것처럼, 지환은 씩 웃었다.
“염려 마십시오. 설마하니 검사실에 독이 있겠습니까? 총도 없는데.”
“무슨 그런 말씀을, 검사님. 농담이 과하십니다.”
……시간아, 흘러라.
“커피만 타 오겠습니다. 커피만.”
차정윤! 연락해라, 제발!
*
김복재와 차민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취기가 있는 차민규를 붙잡고, 김복재는 한잔 더 하자며 졸라댔다.
정윤은 그들의 대화를 고스란히 엿들으며 홀짝, 커피를 마셨다.
“민규야, 한잔 더 하자. 응? 나 이제 몇 잔 마셨는데.”
“야야, 비켜. 내가 무슨 사내새끼하고 술을 마셔. 비켜, 비켜. 넌 가서 차나
빼.”
차민규는 귀찮다는 듯 김복재의 팔을 뿌리쳤고, 김복재는 서둘러 가게 밖
으로 빠져나갔다.
온다.
정윤은 커피를 다시 한 모금 삼켰다.
……온다.
“아우, 씨, 취하네. 얼마나 마셨다고. 끅.”
터덜터덜 차민규의 발걸음 소리가 다가온다. 정윤은 눈을 감았다가 뜨며
온 신경을 집중했다.
커피를 더욱 삼키고 입에 가득 물었다.
아, 난 정말 이런 더럽고 수치스러운 일이랑 어울리질 않아.
하지만 온다.
온다. 하나, 둘, 셋.
“에이취!”
정윤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커피를 가득 문 채로 재채기를 했다.
“아! 뭐야 이거!”
난데없는 재채기 세례에 커피가 잔뜩 옷에 튀었다.
차민규는 눈을 부릅뜨며 자신의 옷을 살폈다.
나이스. 성공이다!
정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차민규에게 다가갔다.
“어머! 어머어머! 죄송해요! 갑자기 재채기가 나와서!”
에이치! 에이치! 정윤은 연거푸 재채기를 했다.
그러자 입안에 남아 있던 거피가 마저 차민규에게 튀긴다.
이런 드러운 여편네를 봤나! 차민규는 두어 걸음 떨어지면서 눈을 희번덕
거렸다.
“아, 미쳤어? 이게 얼마짜리 옷인데!”
“아아아, 죄송해요! 죄송해요! 어머 세상에! 옷이 세상에 다 젖었네!”
정윤은 큰 목소리로 호들갑을 떨며 차민규의 이곳저곳을 살폈다.
시선이 몰리고, 차민규는 기분이 더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별 그지 같은 게. 야, 어디다 대고 드럽게 커피를 튀……!”
말꼬리가 흐려진다.
차민규의 이곳저곳을 살피던 정윤이 천천히 고개를 들며 눈을 맞춰오자
끅, 차민규는 놀란 듯 딸꾹질을 했다.
어, 엄청난 미인이 아닌가.
“죄송해요. 괜찮으세요?”
“아, 뭐, 어, 뭐.”
“데인 곳은 없으세요? 커피가 좀 뜨거웠을 텐데. 죄송해요, 커피를 마시다
말고 갑자기 재채기가 나와서.”
“아니, 뭐, 그럴 수도 있지. 있는데.”
끅. 차민규는 정윤을 바라보다 위아래로 훑었다.
오우 갓, 술에 취한 눈길로 바라보아도 보기 드문 비주얼의 여성이다.
게다가 걱정을 잔뜩 실은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며 말을 걸어오니, 차민규
는 엄청난 착각에 빠지고 만다.
“혼자 왔어? 끅.”
“네? 아, 네. 일단 좀 닦아드릴게요.”
“그래, 그럼 닦아봐.”
차민규는 두 팔을 쫙 벌리고 섰다. 정윤은 물수건으로 그의 옷을 문질렀다.
지워질 리가 있겠는가. 그럴 리가 없지.
“아, 안 되겠다. 이게 안 지워지네요.”
“열심히 해봐. 거기만 묻은 것도 아닌데 왜 거기만 닦아.”
차민규는 정윤을 바라보며 잘 닦아보라고 독려했다.
착하게도 정윤은 그의 말을 따라 꼼꼼하게 닦는 시늉을 해보지만, 염색된
커피는 그대로 자국이 남았다.
“안 되겠어요. 제가 세탁비 물어드릴게요. 연락처 좀 남겨주시겠어요?”
“연락처? 끅, 연락처는 됐고. 너 나랑 오늘 한잔할래?”
“……네?”
정윤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차민규는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혼자라며.”
“아…… 네. 그런데요?”
“나도 혼자야. 혼자인 사람들끼리 한잔하자고.”
“지금요?”
정윤은 통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다가 휴대폰을 들었다.
차민규에게 연락처를 달라고 말하며, 세탁비를 물어주겠다는 태도를 일관
했다.
“세탁비 물어드릴게요. 연락처 주세요. 아, 제 연락처도 받아 가세요. 그래
야 공평하니까.”
“아, 무슨 세탁비야, 쪽팔리게. 나 돈 많아, 이런 옷 백 개도 사.”
“…….”
“네 옷도 사줄게. 내 거 사는 김에. 너도 좀 사보자, 내가.”
“……하.”
하, 정윤은 결국 참지 못하고 실소했다.
안 돼…… 참아야 해……
참아…… 안 돼…… 참아…… 차정윤…….
시간을 벌기엔 안성맞춤인 것 같은데 성격에 지금 이 순간을 참기가 국가
고시만큼 힘이 든다.
정윤이 실소하자 끅, 차민규는 딸꾹질을 하며 눈에 힘을 주었다.
“왜, 너도 내 말이 우스워? 너도 내가 우습냐?”
“무슨 말씀이세요. 옷을 더럽혔으니 배상하겠다는데 우습냐는 말이
왜…….”
“너 내가 누군지 모르지. 응. 그치?”
얼굴을 훅, 가까이 대자 술 냄새가 끼친다.
하…… 내가 얘를 언제까지 잡아둘 수 있을까.
정윤은 인내심의 끈을 붙잡으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알면 너 나 거절 못 해. 나 엄청난 사람이야. 끅, 여기 나가서 한잔하자.
어? 나 유부남 아니야. 불륜 이런 거 안 시켜, 걱정 마.”
“저기요, 죄송한데요.”
“죄송하고 말고 없고 한 잔만 하자고! 한 잔! 죄송하다며! 죄송하면 값을 치
러야지!”
목소리가 점점 높아진다.
차민규는 정윤의 손목을 잡았다.
정윤의 눈빛이 사납게 변했지만, 취중에 그런 게 느껴질 리 없었다.
“가자. 한잔하러. 오빠 따라와. 오늘 최고로 즐겁게 해줄게.”
시선이 한데 모인 공간에서 그는 뜻 모를 쾌감과 희열을 느꼈다.
“넌 오늘 이후로 다른 남자는 못 만날 거야. 오빠가 그런 사람이거든.”
“이 손 안 놓으면 넌 오늘 이후로 다른 사람은 영영 못 만날 수도 있어. 좋
은 말로 할…….”
그때였다.
휙, 차민규의 어깨가 뒤로 돌아간다.
속절없이 어깨가 꺾인 차민규 뒤로, 징글징글한 전남편이 보였다.
정윤은 그제야 숨을 후, 하고 불어 내쉬었다.
“뭐고.”
현수는 차민규의 어깨를 붙잡고 얼굴 한번, 그리고 정윤을 한번 바라보았
다.
“니 아는 사람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