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3. 올가미 (73/98)

73. 올가미

“형이 자살할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 못 했어요. 맨날 사고만 치는 사람이

었지만 자기 목숨 자기가 거둘 만큼 용감한 사람은 아니었거든요.”

“네, 그랬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희주는 자살한 전 매니저 ㅡ 임광호의 동생을 만났다.

최빈국으로 봉사활동 떠나 그땐 찾아뵙지 못했다며, 그녀는 심심한 위로를

전했다.

동생은 많이 침착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순간순간 욱하며 뜨거운 것이 올라올 땐 곁에 둔 찬물을 벌컥벌컥마셨다.

벌써, 여러 잔째다.

희주는 가만히 앉아 동생의 푸념을 들어주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저, 동생분께 여쭐 말이 있습니다.”

“네. 질문하셔도 됩니다.”

동생이 질문해도 된다며 상체를 앞으로 구부리자 희주는 그가 비워낸 물컵

을 응시하다가 입술을 열었다.

“매니저 오빠, 아니, 임광호 씨가 죽기 전에 특이사항은 없었나요? 혹은 수

사 과정에 의문점이 있었다거나.”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임광호 씨에게 평소와 다른 점이 있었다거나, 아니면.”

“…….”

“너무 빨리 자살로 판명이 났다거나…… 하는…….”

남편의 힘이 임광호의 죽음에 뻗었다면, 그게 무엇이건 의혹은 있으리라.

권력 없이는 함부로 캐어낼 수 없는, 수사과정의 미심쩍음 또한 있을 수 있

다. 

적어도 유가족에게는.

“아…… 그러고 보니…….”

동생은 경황이 없어 잊고 지냈다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희주는 긴장감에 마른 주먹을 쥐었다.

“형이 며칠 전. 그러니까 죽기 며칠 전에 빚을 다 갚을 수 있게 됐다고 했어

요. 그러고 새 사업을 시작할 건데 엄청난 부지를 매입할 수 있게 됐다고.”

“땅……이요?”

“맞아요. 땅. 네. 땅을 매입할 수 있게 됐다고 하면서 부자 되는 건 순식간

이라고. 그랬네요, 생각해보니까.”

……땅.

“뭐라 했지? 뭐가 연내 착공될 거고 혁신도시가 들어설 거라 땅값이 미친

듯이 치솟을 거라며, 그 노른자 땅을 얻게 됐다나 뭐라나.”

“기억나는 대로 말씀해보세요. 되도록 자세히.”

동생은 희주의 요청에 미간을 찌푸리며 기억을 되돌려 보려 했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형이 술을 마시고 전화를 한 거라 또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했어요. 워낙

이것저것 헛소리를 잘하는 사람이라 듣는 둥 마는 둥 했죠. 기억이 잘 안

나네요.”

“아…… 네.”

“그런데 빚을 다 갚게 됐다고. 그러면서 그다음 날인가? 저한테 돈 천만 원

을 보내왔더라고요. 저한테 빌린 돈이 좀 있었는데 그거 먼저 갚는다면서.”

전 매니저에게 여유자금이 생겼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알기 힘든.

“혹시 임광호 씨가 계좌이체를 했던가요?”

“아뇨. 그냥 현금 입금이었습니다. 계좌에 있던 돈을 송금해준 건 아니고,

어디서 현금다발이 생……겼는지…….”

동생은 점점 말꼬리를 흐렸다.

희주의 질문이 무언가를 강력하게 노리는 것도 같고, 수사 과정에 문제가

있었을 거란 확신이 조금씩 스며들었다.

더군다나, 눈앞의 강희주는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한 눈빛을 했다. 

“형사들이 수사 과정에서 그 돈의 출처를 묻던가요?”

“아뇨. 묻지 않았습니다. 그쪽으로는 아예 수사도 되지 않았고. 형사들도

제게 간단한 질의만 했을 뿐 따로 조사가 들어가진 않았어요.”

……생각 이상으로 허술한 수사. 유서 한 장으로 판명된 자살 종결.

동생은 내리깐 눈빛으로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중얼거렸다.

“생각해보니 좀 이상하긴 하네요. 형이 죽기 전에 제게 거액을 줬는데. 형

이 또 누구에게 돈을 줬는지, 그 돈은 어디서 났는지, 그런 걸 수사에 올려

두지 않고 자살로 빠르게 정리됐거든요.”

“네. 잘 알겠습니다.”

희주는 더 이상 듣지 않아도 알겠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임광호 씨 유서, 사본 좀 볼 수 있을까요?”

“아아, 네. 가져오라고 하셔서 가져오긴 했는데요. 휴대폰으로 찍어놓은 거

라.”

동생은 자신의 휴대폰에 촬영되어 있는 형의 유서를 보여주었다.

희주는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휴대폰을 건네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임광호 씨의 일은 안타깝게 되었습니다. 혹시 임광호 씨가 죽기 전의 일들

중 뭐라도 더 기억이 나면 주저 없이 제게 연락 주세요.”

“저, 왜 그러시는지 물어도 됩니까? 제가 지금 기분이 너무 이상해서요.”

그녀는 따라 일어서는 동생을 바라보았다.

“사모님께서는 혹시 형이 자살이 아닐 수도 있다고, 그렇게 믿으시는 건가

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런 일이 아주 없을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아…….”

아…… 동생은 긴 탄식을 하며 입을 가렸다.

희주는 뒤를 힐끔 보다가 다시 동생을 바라보았다. 정신 바짝 차리라는 것

만 같다.

“유서, 형 필체 아니에요.”

“……네에?!”

“동생분은 잘 모르시겠지만 저는 형의 필체를 잘 알거든요.”

매니저 시절. 

수첩 하나, 볼펜 하나를 끼고 쉴 틈 없이 그녀의 스케줄을 메모하던 임광호

의 습관, 그의 필체.

“맙소사, 맙소사…… 그럼 우리 형이…….”

그녀는 기억한다.

적어도 이렇게 반듯한 모양새의 글씨는 아니었음을.

“아직은 때가 아니니 조금 기다려줘요. 알겠지만 섣불리 움직였다간 오히

려 더 일을 그르칠 수 있거든요. 절 믿고 기다려주겠어요?”

놀라 커다래진 눈을 하고, 동생은 경황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무엇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 그런데 저 사람들은 혹시 아는 분이십니까? 아까부터 자꾸 사모님 관

찰하는 것 같은데.”

희주를 간간이 주시하며 멀찍이 앉아 있는 두어 명의 사내를 빠르게 훑으

며, 동생은 물었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다는 것처럼 침착하게 말했다.

“아아, 네네. 절 감시하는 사람이죠. 누굴 만나는지, 누구와 어떤 이야기를

나누는지 끊임없이 확인하는.”

“아…… 뭔지는 잘 모르지만 괜찮으신 건지…….”

“괜찮아요. 그건 저들의 일이니까. 일하는 사람은 일을 해야죠.”

말끝에 희주는 웃었다.

동생은 차마 따라 웃지 못하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희 형을 잊지 않으시고 이렇게 도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뇨, 감사 말아요. 난 내 일을 하려는 것뿐이에요. 더는 그 어떤 희생도

원치 않으니까. 정신이 번쩍 들었거든요.”

감시를 당하고 있다는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여유로운 웃음이었다.

“또 봐요. 가볼게요.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네. 살펴 가십시오, 사모님. 연락드리겠습니다.”

*

하루 종일 실검에 이름을 올라 있던 희원은 백인호로 뒤덮이는 실시간 검

색어를 바라보곤 고개를 갸우뚱했다.

보아하니 엄청난 혐의를 둘러싸고 갑론을박이 치열했다.

“어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희원은 중얼거리며 뉴스를 살폈다.

평소 호감이 있던 정치인의 일이었고, 제게 친절하던 희주의 남편에게 벌

어진 일이었다.

“아, 그래서 기자들이 많았나? 그럼 서지환 씨도 이것 때문에…….”

……흠. 희원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온종일 지인들에게 연락이 오고, 각종 매거진의 인터뷰 요청이 쏟아지고,

심지어 TV 프로그램 섭외 의뢰까지 넘쳐났다. 

하루 사이 SNS 팔로워 신청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영상 관련 기사는 초 단위로 생성되어 지속적으로 노출되었고, 댓글의 반

응 또한 뜨거웠다.

영상을 볼수록 애국심이 치솟는다는 댓글의 표현은 그녀의 가슴을 더욱 뜨

겁게 했다.

“그렇게 관리해도 찍기 어렵던 숫자를 하루 만에 찍네. 참 나.”

국적도 알 수 없는 해외 팔로워들을 바라보던 희원은 피식 웃고 말았다.

백인호 사건은 어차피 깊게 와닿지 않고, 남편의 일과 관계가 있겠다 싶다

가도 잘 모르는 분야이다 보니 깊게 스미지 않는다.

사실 그녀는 하루 종일 들뜬 상태였다.

도시락을 싸 들고 남편의 사무실을 방문했던 것도, 뭐라도 하지 않으면 견

딜 수 없었기 때문도 있었다.

웹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지만 한국무용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

가하는 것을 바라보며 가만히 있기란 정말 힘든 일이었다.

“아, 서지환 씨도 없고 뭘 해야 시간이 갈까…….”

그녀는 중얼거리다가 주혁에게 메일을 보내기로 한다.

어찌 되었든 감사한 일이었으니까. 정말로, 감사한 일이었으니까.

당신, 자랑스럽다.

노트북을 열고 메일을 쓰려던 희원은 검찰청 앞, 지환이 제게 해줬던 이야

기를 떠올렸다.

멋있다.

당신 진짜로 멋있어.

“……헷.”

홀로 내내 꾹꾹 눌러대던 기쁨이 그의 앞에서 철철 넘쳐흘렀다.

배수진을 친 기자들도 보이질 않고, 겉옷도 걸치지 못하고 셔츠 차림으로

서 있는 그의 추위도 잊어버렸다.

얼마나 급하게 떠들어 댔는지.

하고 싶은 말이 많다 보니 앞뒤가 맞지 않고, 수시로 말이 끊기고 더해져

도, 그는 웃으며 바라만 보아주었다.

‘이제 다 말했어?’

‘어, 속이 시원해.’

‘오래 참았네. 점심때라도 찾아오지.’

‘오빠한테 진짜 말하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어.’

이제 와 생각해보니ㅡ

조용히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그 시간에도, 그는 할 일이 많았던 것 같

다.

하지만 함부로 채근하지 않고. 뒤죽박죽된 나의 이야기를 모두 다 알아듣

고 이해하며ㅡ

“권희원, 진짜 남편 하나 끝내주게 잘 만났네.”

멋있어. 누가 누구더러 멋있대?

희고 빳빳한 셔츠 차림으로 서서 코가 빨개지도록 아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는데.

누가 누구더러 멋있대? 혼자 멋짐 폭발하면서?

“아아, 빨리 메일 보내야겠다.”

희원은 집중하는 표정을 지으며 메일을 열었다.

역시나 하고 싶은 말은 많고, 덧붙이고 싶은 말도 많지만 그럴 때일수록 간

략하고 담백하게 나의 심경을 전달해야 한다.

동영상 보았다. 처음엔 놀랐고, 경황이 없어 이제야 연락을 드리게 되었다.

여전히 대표님과의 계약을 떠올린다. 가슴 한 켠에 미련이 없다면 거짓말

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난 너무나 소중한 것을 얻었고, 어쩌면 영원히 알지 못했

을 참된 행복을 알게 되었다.

“감사해요, 대표님. 멀리서나마 응원합니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살며 부딪칠 수많은 위기 앞에서, 언제나 대표님과의 일을 떠올릴 거예

요.

얼마나 소중한 기회를 밀어내고 잡은 귀한 행복인지ㅡ 상기하며 살아가겠

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내내 평안하시기를.]

*

ㅡ기자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습니다. 검찰청 앞도 경찰서 앞도 빼곡합니

다, 의원님.

“하…….”

쾅, 백인호는 지환의 검사실에 갇히듯 자리했다.

이 밖을 나서자니 이미 포진된 기자들을 뚫을 만한 ‘명분’을 찾지 못했다.

지검장을 만나러 왔다는 말은 서로에게 매우 위험했다.

허리를 굽신거리며 접대하던 지검장은 코빼기도 보이질 않고, 전화를 해도

받지 않는다. 

“변호인단 섭외해. 일단 차민규 쪽으로 붙일 수 있는 인원은 다 붙여.”

ㅡ네, 의원님.

“국내 최고 변호인들로 꾸려. 명단 있지. 순서대로 전화해서 전부 붙으

라…… 아니, 일단 내가 전화를 먼저 넣어볼 테니 기다려.”

ㅡ알겠습니다, 의원님.

백인호는 전화를 끊으며 다급히 전화번호를 찾았다.

로펌의 으뜸, 대한민국의 기라성 같은 변호사들이 한데 모여 있는ㅡ

“아, 차 대표님. 접니다, 백인호.”

이로운 로펌의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ㅡ네. 의원님. 안녕하십니까. 차홍궐입니다.

로펌 대표는 태평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었다.

세간의 떠들썩함을 아직 접하지 못한 건지, 아니면.

“대표님께 변호 의뢰를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연락을 드렸습니다.”

알고도 이렇게 차분하게 대응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백인호는 미간을 누르며 말을 이었다.

검찰청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는 지금의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여

야 하는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서지환이 모든 시간을 계산하고 자신을 검찰청 안에 가두듯 만들었음에 분

노가 치밀었다.

구금이 불가하다는 것을 이용하여, 제 발로 묶이게 만든 것이다.

“지금 당장 변호인단을 꾸려주십시오. 사안이 사안인지라 한시가 급합니

다.”

ㅡ금괴 밀수 혐의로 입건된 사건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검찰 측에서 저와 엮을 모양인데 제 결백을 입증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더불어 제 친척인 차민규의 변호도 필요합니다.”

백인호는 무엇이건 대응할 준비를 해야 했다.

돈이라면 넌덜머리가 나도록 많으니, 대한민국의 최고 가는 변호인들은 모

조리 섭외를 할 생각이었다.

할 수 있다. 

돈 앞에 되지 않는 일은 없으니까.

“아시겠지만 제가 대권 후보입니다. 대표님. 이런 사소한 일로 무너질 제가

아닙니다.”

백인호는 잠시 뜸을 들이는 대표에게 묵직한 말을 뱉었다.

지금 나를 돕지 않으면, 향후를 책임질 수 없겠다는 협박이었다.

“잡음 정도겠지만 최고의 변호인들이 필요합니다. 대우는 섭섭하지 않게

뒤로 챙겨드리겠습니다.”

ㅡ죄송합니다, 의원님. 저희 로펌은 어렵겠습니다.

……백인호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소문은 빠를 것이고, 이로운 로펌에서 거절을 당한다면 손쉽게 다른 로펌

의 손을 잡지 못할 수도 있다.

“대표님! 지금 저와 척을 지시겠다는 겁니까!”

ㅡ아아, 그런 것은 아니고, 의원님께서 잘 모르시겠지만 이번 사건에 제 딸

이 관계가 있어서.

……딸.

백인호는 기억을 더듬듯 고개를 들었다.

딸이 관계가 있다니? 무엇과? 어떻게?

잠시 시간을 죽이고 있자 반대편에서 로펌 대표의 음성이 들려왔다.

ㅡ의원님의 친척을 현행범으로 체포한 것이 제 딸입니다. 중앙지검 검사이

고.

……차홍궐 대표.

ㅡ딸이 하는 일에 척을 질 수 있겠습니까. 죄송합니다, 의원님.

정윤의 부친이었다.

ㅡ회의 중이라, 전화 이만 끊겠습니다.

*

“시간은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경찰서로 넘어간 지환은 압수한 차민규의 휴대폰과 차량에서 발견된 USB

의 내용을 살피기로 했다.

영구 삭제한 흔적이 있어, 우선적으로 복구를 해야 했다.

복구 작업을 맡은 관계자는 흠, 한숨을 쉬었다.

“일단 디지털포렌식 복구는 당장 안 될 겁니다. 최대한 빠르게 진행해보겠

습니다.”

“수고 좀 해주십시오.”

“예, 검사님.”

관계자와 헤어진 지환은 차민규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음주운전으로 잡았으니 현행범. 현행범의 차량에서 다량의 금괴가 발견되

었으니 빼도 박도하지 못할 것이다.

금괴 일련번호 조회가 들어갔고, 그의 차량에 남아 있던 여러 서류는 좋은

증거가 되었다. 

문을 여니 겁을 잔뜩 집어먹은 차민규의 얼굴이 보인다.

쿵, 문을 닫으며 지환은 들어섰다.

아내가 정성스럽게 싸준 도시락이 차게 식어버릴 때까지 한입 먹어보지도

못한 채 바쁘게 움직이지만ㅡ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돌아선 길에 굳은 다짐을 하게 되었다.

“서지환입니다.”

……지지 말아야겠다.

너를 위해서라도 나는 무엇과 싸워도 지지 말아야겠다.

“홍콩발 밀수 금괴 사건을 맡은 담당 검사입니다.”

“변호사 없이는 한마디도 하지 않을 겁니다.”

지환이 말을 건네자 차민규는 이를 아득물며 답했다.

언제고 이런 일이 발생하게 된다면 묵비권을 행사하라, 차민규는 주기적인

교육을 받아왔다.

“헛수고 말라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테니까.”

“뭐, 좋을 대로.”

휴. 지환이 멋대로 하라며 재킷을 벗었다.

“말은 내가 하면 됩니다. 차민규 씨는 듣기만 해도 상관없습니다.”

소매를 닫아둔 커프스 버튼을 풀러 내렸고, 팔꿈치까지 소매를 걷어 올렸

다.

시계를 끌렀고.

“뭐, 중간중간 억울하면 대화에 참여하든지. 뭐든 좋을 대로 하십시오.”

반지는 빼려더니 다시 끼더라.

그러곤 의자에 앉으며 곁에 놓인 서류를 집어 들었다.

“어후, 술을 상당히 드셨네. 혈중 알코올 농도가 면허 취소 수준을 넘어서

는데.”

“…….”

“도망은 왜 갔습니까? 보니까 가게에 대리 기사님도 불렀던데.”

“아니…… 커피를 쏟은 여자가 예뻐서 말 몇 마디 붙였는데 알고 보니까 유

부녀잖아요,”

한마디도 하지 않겠다더니 잘도 나불거린다.

지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남편도 오고, 검사니 형사니 하고. 유부녀 꼬셨다고 할까 봐 놀라

서 도망갔습니다.”

“아아, 예쁜 건 잘 모르겠지만 검사는 맞고. 남편도 맞긴 한데 전남편이

고.”

“뭐, 뭐요? 전남편?!”

하…… 차민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실제 남편인 줄 알고 겁먹고 도망갔는데 서류상 문제없는 전남편이란다.

뭔가 심각하게 낚인 기분이 들지만 매끈하게 흘러간 개연성 앞에, 억울함

은 삼킬 수밖에 없다.

“살펴보니 네 번째 음주운전이던데 한 번도 처벌을 받지 않았단 말입니까?

지금까지? 어떻게?”

“…….”

“처벌을 막아준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습니까? 이게 꽤 큰 문제예요, 차민

규 씨.”

“…….”

차민규는 다시 입을 닫았다.

백인호와는 연락을 할 수 없고, 변호사를 선임했는지도 알 수가 없다.

혼자 감당하기엔 지금 사태가 버거운 것은 자명했다.

“그런데 지금부터 해야 할 조사 과정에서 음주운전은 빙산의 일각이라, 일

단 이건 이거대로 조사받으시고 저와는 다른 일로 대화를 좀 해봅시다.”

지환은 간단히 인적 사항을 확인하고 가방에서 서류를 꺼냈다.

상당히 많은 양이었고, 그 곁엔 그보다 더 많은 양의 자료가 들어있는 USB

도 두어 개 꺼냈다.

“내가 오늘을 기다렸거든요. 많이.”

그는 차민규를 바라보았다. 조금의 웃음기도 없었다.

“여기서 쉽게 나갈 생각이 없단 뜻입니다. 한 발자국도.”

“글쎄 한마디도 하지 않을 거라니까!”

“상관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전화 좀 하게 해줘요. 나도 변호사는 있어야 할 것 아니오!”

지환이 말없이 바라보자 차민규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흠, 지환은 조사실에 연결된 전화기를 끌어다 차민규 앞에 놓아주었다.

“하시죠. 편안하게.”

“…….”

차민규는 전화기만 노려보았다.

전화를 먼저 해도 되는 일인지 아닌 건지, 아직은 감을 잡기도 힘들었다.

세간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 알 리 없는 차민규는 백인호의 연락

만 미친 듯이 기다렸다.

인호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연락을 줄 것이다. 그가 모든 일을 해결해 줄 것

이라 믿는다.

단 한 번도 그가 빼주지 않은 적은 없었으니까.

“이 자식은 왜 연락도 없이…….”

“백인호 의원 말입니까?”

“…….”

“연락 오기 힘들 겁니다. 지금 의원님께서도 검찰청에 계셔서.”

“뭐, 뭐요?!”

거, 검찰청?!

차민규가 놀라 쓰러지려 하자 지환은 휴대폰으로 포털사이트를 열어 그에

게 보여주었다.

도배를 한 그의 뉴스와 백인호 관련 뉴스에, 차민규는 입술을 부들부들 떨

었다.

“헤드라인만 봐도 얼추 감이 오죠?”

“마, 말도 안 돼…….”

“차민규 씨는 아직도 사안의 심각성을 잘 모르는 것 같은데 말입니다.”

백인호가 검찰청에 있다.

왜? 잡혀 들어간 건가? 벌써?

머릿속이 바빠진다.

차민규는 마른침을 삼키며 백인호가 ‘왜’ 검찰청에 있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했다.

검사의 말대로 인호가 잡혀 들어간 거라면? 

모든 게 전부 엉망이 된 상황이라면?

“차민규 씨, 지금부터 제가 하는 이야기 잘 들으십시오.”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백인호 의원님께서는 지금 검찰청에 계시고, 차민규 씨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만한 상황은 아닙니다.”

“…….”

“곧 압수수색이 시작될 겁니다. 의원님 사무실, 자택, 차민규 씨의 자택을

비롯한 모든 곳에.”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해외에 있는 법인이라고 안심하지 마세요. 차명 계좌도 신뢰하지 마시

고.”

“인호랑 통화를 좀 해야겠습니다.”

“하시죠.”

지환은 전화기를 더 끌어 차민규의 앞에 두었다.

그러나 말과는 달리 섣불리 전화기에 손을 대지 못한다. 

“백인호 의원이 차민규 씨에게 모든 혐의를 넘기면, 차민규 씨는 어떤 변호

인단을 세우건 쉽게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

“그런데 차민규 씨가 백인호 의원보다 앞선 자백을 하면, 참작은 될 수 있

습니다.”

차민규의 동공이 빠르게 흔들린다.

아직은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입술만 꽉 깨물었다.

……안 된다. 검사 놈의 회유에 말리면 안 된다.

인호에게 지시를 받을 때까진 버텨야 한다.

“버티다가 전부 다 뒤집어쓰는 수가 있어요. 알겠지만 백인호 의원은 본인

살기에 집중할 테니까.”

지환은 노트북을 열었다.

“백인호 의원은 어떻게든 살 겁니다. 그분은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단 거 잘

아실 테고. 단 차민규 씨의 희생을 딛고 일어서야 벗어날 수 있겠죠.”

전원을 켜며, 시계를 힐끔 보았다. 

“선택하세요. 빠른 자백으로 감형을 받든지, 아니면 백인호 의원이 모든 것

을 떠밀어준 상황까지 버티다가 가중처벌을 받든지.”

……끝까지 버티다가, 결국 물러서는 사람이 진다.

물러설 거라면 시작도 하지 말아야 하는, 포기할 거라면 자백할 때를 놓치

지 말아야 하는, 상대보다 먼저 치고 빠져야 하는.

어떡해야 하지.

끝까지 상대를 믿을 것인가.

내가 입을 다물면, 상대도 입을 다물어줄 것인가.

우린 서로, 끝까지 버틸 수 있을까.

그래. 인호를 믿어야 한다. 인호를 마지막까지 믿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둘 다 살 수 있다.

“차민규 씨는 선택 잘해야 할 겁니다.”

“…….”

“설령 백인호 의원님과 아무리 두터운 신뢰를 자랑해도, 김복재 씨를 잊으

면 안 될 테니.”

“아…….”

복병이 등장한다.

차민규의 눈동자는 심하게 흔들렸다.

“아까 잠깐 들어보니 김복재 씨의 수사는 수월할 것 같던데. 무척이나. 협

조할 의사가 뚜렷한 것 같더군요.”

서로를 볼 수 없는 차민규와 백인호 사이에 눈치싸움을 부추겼다.

그러곤 김복재를 그 중간 어디쯤에 끼워 넣었다.

……지환이 좋아하는 게임 중 하나.

“누가 차민규 씨를 지켜줄 수 있을지 잘 생각해보십시오. 아마, 본인밖에

없을 테니까.”

치킨게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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