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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우리가 원하는 건 (77/98)

77. 우리가 원하는 건

“그럼 축제에서 한국무용 빼버린 것도, 백인호 의원이 의도적으로 그런 거

란 말이지?”

“맞아.”

빗속에서 만난 두 사람은 천천히 손을 잡고 걷다가,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

러 여러 맛의 아이스크림을 큰 통에 담아와 너 한입, 나 한입 사이좋게 나

누어 먹었다.

온종일 시끄럽고 뜨거웠던 속을 잠재우려는 듯 두 사람은 열심히 아이스크

림을 먹었다.

꽤나 많은 양의 아이스크림도 어느덧 바닥을 보인다.

“되게 열 받네. 아오, 난 그런 줄도 모르고 며칠 동안 땅굴을 판 거잖아.”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희원은 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

다.

“사실 내내 우울했거든. 한국무용 자체를 부정당한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속상한 거야.”

“…….”

“인기가 없다고, 아주 쓸모없는 장르로 취급당하는 게 너무 슬펐어. 그런데

나는 또 한마디도 할 수 없는 게 더 속상하고.”

그녀는 말했다.

내가 사랑하고 내가 평생을 일궈온 나의 꿈이 부정당하는데도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고.

왜 난 반박할 수 없었나.

혹은 저 깊은 마음 한 구석에서,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건 아닌

가.

“한주혁 대표님의 인터뷰 영상이 내려간 자존감을 끌어 올려주긴 했지만,

이 땅에서 한국무용을 이어갈 자신이 조금 사라졌거든요. 뭐, 누군가의 음

모였다니 차라리 다행이네.”

누군가가 못된 마음을 품고 의도적으로 공연을 파버렸다는 사실은 차라리

안도가 되었다.

굳이 한국무용이 아니었대도 벌어졌을 일이니까.

희원은 또다시 솟구치는 뜨거움을 식히려는 듯 아이스크림을 크게 파서 입

에 넣었다.

“그럼 강희주 씨도 피해자다. 그렇죠?”

“…….”

“아니다. 우리 서지환 씨가 제일 큰 피해자네.”

뜨거운 속으로 차가운 것을 밀어 넣는 시간 동안, 두 사람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그림자처럼 그의 이야기를 들었고.

그는 고해성사를 하듯 지나간 모든 일을 덤덤하게 털어놓았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아, 이거 언제 다 먹지 했는데 벌써 다 먹었어. 살찌는 소리가 메아리치는 것 같아.”

희원은 괜한 무안함에 아이스크림 통의 바닥을 긁었다.

지환은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그녀의 부산한 행동을 응시했

다.

긁어도 긁어도 퍼 올릴 아이스크림이 남아있질 않자 희원은 통을 내렸다.

생각의 정리를 마친 것처럼,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부터 서지환 씨와의 단독 인터뷰를 시작하겠습니다.”

들고 있던 숟가락을 마이크 삼고, 그녀는 취재 현장의 기자처럼 허리를 곧

게 폈다.

지환은 눈썹을 추켜올렸다.

“서지환 씨, 현재의 심경은 어떻습니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숟가락을 지환의 턱 끝 아래에 가져다 대며 그녀는 물었다.

장난치는 순간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진지한 면이 없지 않았다.

지환은 입을 꾹 다문 채 흠, 낮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재치 있는 기자처럼 희원은 다시 숟가락을 거둬갔다. 

“서지환 씨. 편하게 말씀 주십시오. 희원방송국에 특종을 제보해주셨는데

요. 지금 심경이 어떻습니까?”

……웃음이 터진다.

지환은 피식 웃다가 그녀의 찌그러지는 얼굴을 보고 이내 표정을 수습했

다.

어물쩍 넘어간다면 불같이 성내는 아내의 구박이 날아올 것만 같았다.

“속이 시원합니다. 아주 후련하네요.”

“오, 좋은데요?”

답변이 마음에 드는지 아내는 눈을 빛낸다.

“희원방송국을 찾아주시고, 털어놓기 힘든 심경 고백을 해주신 점을 감사

히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특종이 생긴다면 희원방송국을 찾아주실 생각이

신가요?”

아내의 질문이 이어진다.

지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특종이건 특종이 아니건 아주 작은 일도 전부 다 제보해드리겠습니다.”

“어? 지금 서지환 씨께서 대단히 중요한 공약을 하셨는데요. 희원방송국에

무엇이건 제보를 해주시겠다고 합니다. 대박 특종입니다!”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웃지 말고 침착하라며 그녀가 허벅지를 때린다.

“저기요, 인터뷰 중에 너무 크게 웃으시면 곤란해요. 이 부분은 편집.”

“아아, 네. 죄송합니다. 리포터가 너무 미인이라 제가 정신을 좀 놨네요.”

“그렇게 작업 멘트 하시면 제가 놀랄 것 같죠? 천만에. 그런 소리 많이 들

어요. 사는 게 피곤하답니다.”

“애인은 있으신가요?”

“결혼했어요.”

“아아, 아쉽네요. 제 이상형인데.”

지환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희원에게 조금 다가갔다.

“남편분이 굉장한 매력을 가지고 계신 것 같네요. 이런 미인을 얻은 걸 보

니.”

“개차반이에요. 사기 결혼 당했죠.”

개, 개차반…….

“사기 결혼이라니. 좀 더 자세히 말씀 주시죠. 제가 이래 봬도 검사입니다,

리포터님.”

“휴, 말도 마세요. 제 남편은 무슨 남자가 그렇게 사연이 많은지, 아주 눈물

없이는 볼 수가 없는 남자랍니다.”

“아아. 사연이 많은 남자라. 그거 되게 위험한데요.”

“뭐, 어쩌겠어요. 팔자려니 해야죠.”

희원이 체념했단 듯 어깨를 으쓱 올려 보이자 지환은 귀엽다는 듯 입꼬리

만 살짝 올리는 미소를 지었다.

“많이 좋아하시나 봐요. 남편분을.”

“네. 콱, 내다 버리고 싶은데 과감하고 능숙한 부분이 있어서 참기로 했

죠.”

결국 또다시 웃음이 터지고 만다.

지환은 고개를 꺾고 한참이나 웃었다.

“아뇨. 이보세요. 제가 지금 인터뷰를 하러 왔는데, 왜 저한테 질문을 하시

는 거죠? 지금은 서지환 씨를 취재하는 시간인데.”

“녹화 중지. 녹화 중지. 인터뷰 더 이상 불가합니다.”

응? 왜?

희원이 숟가락을 들고 뚱한 표정을 짓자 지환은 그녀의 손에 있는 숟가락

을 가져갔다.

그러곤 아이스크림 통에 툭, 던져버렸다.

“안 되겠다. 침실로 가자.”

“아, 왜 이래. 나 아직 할 말 안 끝났는데.”

“과감하고 능숙하기라도 해야 버림 안 당할 것 같아서. 부인이 나 버리면

어떡해.”

가자. 당장 들어가자.

지환은 벌떡 일어나더니 희원의 손을 끌었다.

기가 차다는 듯 희원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와, 뻔뻔한 것 좀 봐. 지 과거 여친 이야기하다가 이러고 싶어?”

“싹 다 잊게 해줄게. 자신 있습니다.”

“허! 누굴 바보로 아나! 내가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도 절대 못 잊지! 암! 절대! 절대로!”

지환은 성큼 다가와 그녀를 들어 올렸다.

불에 달군 듯 잔뜩 열이 오른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던 희원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봐요, 서지환 씨. 세상에 나 같은 와이프가 어딨냐? 전여친 이야기도 들

어줘, 전여친 남편이 해코지해도 참아줘, 다 이해해줘.”

“암요. 암요. 그렇게 생각합니다.”

침실 문을 열었다.

“신파야? 둘이 영화 찍니? 검사님하고 참고인으로 만나서, 하, 내가 진짜,

하.”

“네네. 염치가 없습니다.”

“너 이러려고 검사 했지. 말해 봐. 이런 큰 그림을 그려놓고 검사님 된 거

지? 그래서 공부 열심히 한 거지? 이 악물고.”

“오해입니다. 검사는 그전에 되었죠.”

침대로 걸어갔다.

발로 문을 닫고, 팔꿈치로 불을 껐다.

“하, 열 받아. 아, 열 받아. 당분간 잠도 못 자게 생겼어. 아아, 열 받아.”

“열 받을 땐 남편의 사랑을 듬뿍 받아야 열도 식고…….”

“시끄러! 너 때문에 열 받은 건데 자꾸 떠들래? 조용히 안 해?”

“넵.”

조심스럽게 그녀를 눕혔다.

수면등의 불빛만 은은하게 침대를 비추는 시간.

눈꼬리를 잔뜩 올린 채 만렙이 된 와이프를 침대에 눕혀놓고 보니 약간 위

축되는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지환은 정신승리를 하기로 한다.

그래.

나는 과감하고 능숙하다.

침착해라. 그 어느 때보다 과감하고 능숙해야 한다.

“뭐. 뭐 어쩌라고? 뭐 어쩌려고 눕혔는데?”

“불편하시면 일어나셔도 됩니다.”

아아. 안 된다.

지금의 와이프는 정말이지 너무 무섭다. 

지환이 흠칫하며 약간 뒤로 물러서는 자세를 보이자 희원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몸을 뒤척였다.

시선은, 벽에 걸어둔 결혼사진으로 향했다.

“뭔가 차츰차츰 가까워지는 것 같아. 서지환 씨하고 나.”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사진을, 그도 바라보았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연애 기간도 없었고, 서로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잖

아요.”

……그랬지.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을 뺀 채 결혼을 하게 되었지.

아는 거라곤 이름과 나이, 하는 일과 서로에게 바라는 점 정도.

“지금도 그래. 좋아하는 일과 잘 아는 일은 전혀 다른 거니까. 서지환 씨와

나는 서로 마음을 열었지만 여전히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게 많고.”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은 나의 배우자.

확신보단 추측이 많은, 배우자의 성격과 지난 삶.

……그녀는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일평생을 함께하는, 부부란 무엇인가.

“자꾸자꾸 벗자. 우리, 겹겹이 싸인 진짜 내 모습을 자꾸 보여주자고요. 한

꺼풀, 한 꺼풀.”

모든 순간을 청춘의 남녀로 서 있을 순 없겠지.

뜨거웠던, 간절했던 마음은 팔팔 끓는 세월 속에 증발해버릴지도 모른다.

“다 말해줘서 고마워, 서지환 씨. 쉬운 일 아니란 거 알아요. 이젠 정말로

편해졌으면 좋겠어.”

때마다 어깨를 내어줄래요.

다소 식어버린 내 손을 잡아줄래요.

“그리고 나한테 더 잘해. 알겠어? 서지환 씨?”

부르튼 내 입술에 온기를 불어줘요. 메마른 내 눈빛을 따뜻하게 바라봐줘

요.

“지금도 물론 잘하지만, 더 잘해. 더 열심히.”

“네. 부인. 알겠습니다.”

“좋았어. 그 대답만 믿고 살 거예요. 나는.”

그럼 나는 다시 태어나듯 깨어나 당신을 사랑할 테니.

흘러간 오늘을 떠올리며 당신의 허리를 끌어안을 테니.

……지환은 그녀의 곁에 눕고 팔을 뻗었다.

“이리 와.”

희원은 곁에 누운 지환의 품을 파고들었고, 지환은 그런 그녀를 안고 이내

입을 맞추었다.

그의 벌어진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삼킨다.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서로는 서로에게 모든 감각의 끝을 세웠다.

그의 따뜻한 손이 등으로 파고들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약간 몸을 들어 그

의 손을 편하게 받아주었다.

잠시 입술을 떼며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웃으며 중얼거린다. 

“아아,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날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잊으면 어떡해.”

……부부가 됩니다.

서로의 모난 부분은 서로가 깎아내고ㅡ

서로의 둥근 부분은 서로가 닮아가며ㅡ

“과감하고 능숙한 남편 도착했습니다.”

“오늘 제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사랑해요.

“어떡해. 나, 벌써 기억이 하나도 안 나.”

사랑, 해요.

*

이튿날.

차민규의 정식 조사일에 맞춰 검찰청 앞은 인산인해였다.

며칠째 소란스러운 경찰청 앞은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이라, 그 안에서 일

하는 사람들은 덤덤하게 대응했다.

포토라인을 갖추고.

기자들은 장비를 세우고 열을 맞춰 기다렸다.

차량이 들어서고 차민규가 낮은 자세로 등장했다.

처음 겪는 취재진의 열기에 그는 잔뜩 위축되었다.

수갑이 채워진 두 손을 헝겊으로 둘둘 말고, 그는 조금이라도 얼굴을 더 가

리려고 애를 썼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어른이 되었지만.

포토라인을 지나는 동안 감당 못 할 만큼의 두려움이 밀려와 울컥울컥 눈

물이 올라왔다.

미친 듯이 밀려드는 취재 열기를 뚫고 차민규는 안으로 들어섰다.

단 한마디도 떼지 않았다.

변호사의 지시대로, 그는 움직였다.

또다시 지환과 마주한 차민규는 눈만 들어 지환을 바라보았다.

변호사를 대동한 차민규는 지환의 옆에 수북하게 쌓인 자료 더미를 바라보

다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저만큼의 죄를 안고, 그것들을 전부 다 해명할 수 있을까.

곁에 앉은 변호사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만 같

았다.

이미 혐의 인정을 하라는 백인호의 지시가 있었고. 변호사는 자신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 아닌, 백인호의 요청대로 사건을 처리할 테니까.

……긴 조사 시간이 흐른다.

차민규는 내내 고개만 숙인 채 단 한마디도 입을 떼지 않았다.

지환과 변호사 사이에 여러 대화가 오고 가고, 날카로운 질문과 적절한 방

어의 대답이 지나갔다. 

“잠시 쉬었다 하시죠.”

차민규의 변호인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지환 역시 힐끔, 시계를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십 분만 쉬겠습니다.”

“저, 검사님. 잠깐 대화 좀 나눌 수 있겠습니까?”

……차민규가 고개를 들었다.

일어서려던 지환은 다시 의자에 앉았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왜 이러시는 거예요.”

당황한 변호사는 낮은 목소리로 다그치듯 차민규에게 말을 건넸다.

그러나, 차민규의 시선이 그곳에 없다.

“조용한 공간을 원하십니까?”

지환은 물고 늘어졌다.

차민규에게 어떤 심리적 변화가 생겼다면 반드시 도출해야 한다. 

“함께 있겠습니다. 무조건. 독대는 안 됩니다.”

변호인이 강하게 나가보지만 차민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검사님과 간단하게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습니다. 단둘이.”

“안 됩니다. 안 된다니까요? 둘이 대화를 나…….”

“잠시 자리 좀 비워주시죠.”

지환은 턱 끝을 들며 변호인을 바라보았다.

난처함을 예감한 듯 변호인은 턱을 문질렀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자리에

서 일어섰다.

뒤에 앉아 있던 다른 변호사들도 일어섰다.

“거 참, 이래도 되는 건지.”

차민규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리며 변호인이 사라지자 차민규는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다가 고개를 다시 들었다.

“저, 검사님.”

“네.”

“저는 이미 틀린 거지요?”

“판결은 법원에서 합니다. 제게는 권한이 없습니다.”

“…….”

“편하게 말씀하세요.”

백인호가 면회를 오고 간 그 뒤로ㅡ

차민규는 생각이 많아졌다.

알량하게 붙잡고 있었던, 백인호를 향한 믿음이 와장창 깨져버렸다.

혼자 죽기는 싫었다.

어차피 버린 인생이라면, 나 혼자 죽을 수는 없다는 생각만이 맴돌았다.

“성실하게 조사받겠습니다.”

차민규의 느닷없는 발언에 지환의 손끝이 움찔한다.

어딘가 모르게 텅 빈, 그의 음성은 지금 상황을 체념한 것만 같았다.

“검사님, 지금 저 되게 무섭거든요? 눈앞이 캄캄하고 정말 죽고 싶은 심정

인데, 백인호 이 개새끼가 날 버렸어요.”

이를 아드득 가는 소리가 조사실을 울린다.

“내가 그런 개새끼를 지켜줘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없죠? 검사님이 대

충 생각해봐도 없죠?”

“사실에 입각한 진술만 하면 됩니다.”

“돈? 돈 준답니다. 돈 좋죠. 몇 년 감방에서 썩고 나오면 죽을 때까지 못 만

져볼 돈을 준다는데. 저 돈 좋아요. 세상에 돈 싫어하는 놈 있습니까?”

하, 차민규는 실소했다.

세상과 단절된 채 며칠을 살다 보니, 어쩐지 모든 게 시시해져버렸다.

“세상 사람들이 나더러 나쁜놈, 죽일놈 하며 손가락질하는데, 저 잘못한 거

알지만 백인호가 시키는 대로 한 죄밖에 없어요.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

데.”

……억울함이 그득 담긴 음성.

“남 좋은 일만 시키고, 평생 그 새끼 밑에서 개처럼 일했는데. 그렇게 살아

서 내가 뭐 얻은 게 하나라도 있는 줄 알아요? 없어요. 없다고.”

“…….”

“그 새끼는 잘못 생각한 거야. 나 아쉬운 거 없어요. 어차피 망한 인생, 잃

을 게 있어야 무서운 거 아니겠습니까? 그 새끼 혼자 떵떵거리고 사는 꼴을

내가 감방에서 어떻게 봅니까?”

차민규는 상체를 책상 쪽으로 기울였다.

눈에는 독기가 가득했다.

“그 새끼한테 할 수 있는 모든 벌을 다 주세요. 내가 다 불어버릴 테니까.”

“침착하세요, 차민규 씨. 보복성 진술은 신빙성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증

거를 바탕으로 이야기하죠.”

“증거? 내가 증거야. 내가 가진 게 다 증거야. 뭐부터 깔까요, 예?”

지환은 날이 서 있는 차민규의 눈을 응시하다가, 천천히 반대편의 서류를

들었다.

그러곤 서류의 다음 장을 넘겼다.

“이미 김복재 씨의 진술은 확보한 상황입니다. 이제라도 마음 돌린 것은 차

민규 씨를 위해서도 나름 긍정적 신호인 것만 알아두세요.”

“아…… 김복재 이 개새끼…… 결국…….”

이미 모든 정황을 확보했다는 지환의 말을 들은 차민규는 실성한 듯 웃었

다.

툭, 하고 마음에서 가지고 있던 모든 끈이 잘려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뭐, 그래요. 복재 그 자식이라고 다르겠습니까? 나하고 똑같은 마음이겠

지.”

“…….”

“사람은요, 검사님. 절대로 혼자 못 죽어요.”

……끝이 보인다.

“그게 사람이에요.”

*

이른 아침 운동을 마친 희원은 간단하게 몸을 풀고 스트레칭을 했다.

어제 아이스크림을 퍼먹었으니 부지런히 지방을 태워야 한다.

평소 문제가 많았던 허리 치료를 위해 한의원도 다녀오고, 모처럼 자신과

의 시간을 보내는 것에 그녀는 나름 만족했다.

그래.

이렇게 쉬어가는 때도 있어야 한다.

“여보세요?”

그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세계 무용 축제 사무실의 전화였다.

ㅡ아아, 희원 씨! 접니다! 사무장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수건으로 이마를 닦으며 희원은 소파에 앉았다.

들뜬 사무장의 목소리와는 달리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ㅡ하이고, 요즘 어떻게 지내셨어요. 네? 잘 지내셨어요?

“잘 지냈겠어요?”

ㅡ아…… 예. 하하, 그렇죠. 제가 또 괜한 인사를 건네서.

“무슨 일이세요, 사무장님께서 직접 전화를 다 주시고.”

희원은 다리를 꼬며 앉았다. 

목소리만 들어도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간절함을 쥔 채 걸음 했던 자신을 앞에 두고 비타민을 챙겨 먹던 사무장의

얼굴이 아직 눈에 선했다.

무대가 취소된 건 별수 없다는 사무장의 말은 이해했지만.

마주 앉아 있는 동안 내내 보여준, 무례했던 사무장의 태도는 이해할 수 없

었다.

ㅡ아아, 다름이 아니라요, 희원 씨. 동영상 잘 봤습니다! 국위선양 하셨더

라고요!

“아, 그거요. 네.”

ㅡ저희 쪽에 희원 씨 무대 관련 문의가 엄청 들어와요. 이게, 하루에 쳐내

기가 힘들 정도로 쏟아집니다. 알고 계십니까?

“아뇨. 몰랐는데요. 그래요?”

ㅡ예예! 아주 난리예요, 저희 사무실이 아주 그냥. 희원 씨 일 처리하는데

하루가 다 갑니다! 하하하하!

사무장이 웃으니 그녀도 따라 웃었다.

감정은 실리지 않은, 영혼 없는 웃음이었다. 

ㅡ해서 말인데요. 동영상을 보신 시장님께서 직접 저희 쪽에 전화를 다 주

셔가지고.

희원은 잠시 긴장했다.

ㅡ축제에 왜 한국무용이 빠졌냐고, 아주 노발대발하셨어요. 당장 넣으라

고. 예? 골든타임에. 한국 무용 따악!

그녀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ㅡ잘됐지 뭡니까? 제가 그날 희원 씨 보내고 아주 속이 상해서 며칠 잠도

잘 못 잤어요! 이게 이렇게 잘됐지 뭡니까, 희원 씨!

“…….”

ㅡ여보세요? 희원 씨?

“네네. 듣고 있어요.”

ㅡ이제라도 지난 일은 다 잊어주시고 무대 다시 한번 준비하는 걸로 합시

다. 저희가 예산 투입을 팍팍 쏟…….

“저기요, 사무장님.”

ㅡ예, 희원 씨!

사무장은 내내 싱글벙글이었다. 

그녀가 수화기 너머 방방 뛰며 좋아하고 있을 모습을 상상한 게 분명했다.

희원은 웃었다.

“죄송한데요, 저 그 무대 안 하려고요.”

ㅡ……예?

“안 한다고요. 공연.”

ㅡ……예에?! 아니, 아니 왜요?!

사무장의 목소리에 지진이 나고, 희원은 편안하게 소파에 등을 기댔다.

“필요 없어요.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거 질색이거든요.”

ㅡ아…… 저기, 희원 씨. 희원 씨. 제가 미안합니다. 예? 제가 생각이 짧았

어요.

“네네. 알겠고, 저는 안 합니다.”

ㅡ희원 씨! 지금 어디 계십니까! 제가 지금 그리 가겠습니다!

“오셔도 소용없고 저 이미 다른 스케줄 생겨서 못 하니까 그렇게 아세요.

저도 어쩔 수 없네요, 사무장님.”

그녀는 우아하게 앉아 커피를 마셨다.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사람이 되어버린 공연자들에 대한 인식 개선이

필요한 때였다.

“이만 끊을게요.”

ㅡ희원 씨! 여보세요! 희원 씨이이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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