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 안아주고 싶어 (82/98)

82. 안아주고 싶어

“배 안 부르나?”

“나? 나는 뭐, 아직 괜찮은데?”

북적이던 사람들도 하나둘 떠나가는 시간.

아직 그 고깃집, 그 자리에 앉아 정윤은 젓가락을 움직였다.

쉴 새 없이 젓가락을 움직이고 있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ㅡ

반찬으로 딸려 나온 콩나물무침의 콩나물 한 줄기, 소복하게 담긴 김치 사

이사이에 묻어 있는 부추 한 가닥,

동치미 국물 한입. 묵무침 위로 뿌려놓은 양념장의 작은 당근 조각 골라 먹기.

다 식어버린 된장찌개 속 두부를 조각으로 내어 눈곱만큼 파먹기.

……누가 봐도 그녀는 배가 부른 거다.

현수는 그런 그녀의 의미 없는 젓가락질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술이나 홀짝거리며, 그도 시간의 어디쯤을 헤매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머님……은 잘 지내셔?”

“누구, 우리 엄마?”

“…….”

정윤은 다시금 동치미 국물을 헤집었다.

현수는 그녀의 손을 바라보다가 입술을 열었다.

“똑같지 뭐 있나. 잘 있다.”

“농사는 아직도 지으셔? 허리 아프셨잖아. 접으셨지?”

“접긴, 아직도 한다. 예전만치는 못하지만.”

“아, 아직도 농사지으신다고?”

정윤은 젓가락을 내리며 현수를 바라보았다.

그는 홀짝, 술잔을 기울였다.

“어머님 말려야 하는 거 아냐? 그러다가 통증이 더 심해지면 어쩌려고.”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숱하게 싸웠다. 말려도 안 듣는다.”

“허…….”

정윤은 낮게 탄식했다.

현수는 퍽퍽한 시골 살림을 홀로 꾸려나가는, 억척스러운 엄마를 떠올렸다.

“시간이, 안 간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어머니는 더욱 농사에 매달렸다.

“엄마가 나한테 ‘현수야, 내 참말로 시간이 안 간다. 이거라도 안 하믄 하루

가 너무 긴데 우짜노.’ 하시는데 할 말이 없어가.”

“아…….”

아…… 정윤은 의미심장한 탄식을 터트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시간이 멈춘 느낌.

세상이 나만 빼고 흘러가는 느낌.

1분 1초가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만 같은ㅡ

“그럼 할 수 없네. 뭐, 조금씩 움직이시는 것도 나쁘진 않아. 무리하지 않으

시게 잘 살펴드려.”

나도 알고 있는,

너도 알아버린ㅡ

“그래. 알았다.”

시간이, 멈춘 느낌.

……다시 말이 끊긴다.

현수는 몇 번이고 입술을 움직이다가, 말고, 움직이다가, 말았다.

그런 그의 얼굴을 힐끔 훔쳐본 정윤은 먼저 입술을 열었다. 

“우리 부모님 잘 지내셔. 건강하시고, 여전히 고집스럽고.”

“아아. 그래.”

……맞나. 현수는 자신의 질문을 눈치채고 먼저 답해준 정윤의 말끝에 중얼거렸다.

정윤은 어깨를 으쓱 올려 보였다.

“자주 찾아뵙진 않아. 시간도 없고, 서로 뭐, 무소식이 희소식이다 하고 있어.”

“니가 그러면 쓰나. 자주 찾아뵙고 해야지.”

현수의 타박에 정윤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나 같은 딸 뭐가 이쁘겠어.”

“틀렸다. 니 얼마나 아끼시는데.”

“…….”

술김일까. 그의 말은 어딘가 모르게 슬펐다.

한때는, 가족이라 불렸던 사람들.

어머님, 장인어른, 장모님. 

“에이, 술맛 떨어진다. 괜히 집 이야기 꺼냈네. 미안, 남 형사.”

마음보다 먼저 배운 호칭.

부르는 호칭만큼 가까워지지 못했던, 남으로 시작한 가족.

정윤은 턱을 괴며 먼발치를 바라보았다.

둘만 남은 시간이 오래되었지만, 어쩐지 둘 중 누구도 이만 일어나자는 말

은 떨어지지 않는다.

불판은 이미 식어버렸는데.

시간은 이미, 이슥해져버렸는데.

“남 형사. 우리 그때, 진짜 어렸다. 그렇지?”

“지금도 어리다. 철이 없고.”

몇 년 전 이야기지만 왜 이렇게 아득한 걸까.

사랑에 미쳐서 결혼을 서둘렀던 지난날이 마치 전생의 이야기처럼 멀게 느껴졌다.

그때도 난 어른이라 믿었는데. 한 가정을 이루며 살기에 충분한 성인이라 믿었는데.

“저, 죄송합니다, 손님. 이제 저희 영업시간이 끝나서요.”

“아아. 죄송합니다. 이제 나갈게요.”

……시답잖은 생각은 급히 밀려난다.

다가온 직원의 이야기에 정윤은 서둘러 일어났다.

그녀가 코트를 집어 들며 가방을 들자 현수도 따라 일어섰다.

“아까 서검이 계산했던데. 그 후로 먹은 것만 계산하면 되겠다. 계산서 어디 있지?”

“남은 계산도 이미 다 했다. 그냥 나가면 된다.”

“아, 빠르네. 남 형사.”

계산서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정윤은 피식 웃고 말았다.

현수는 오래된 가죽점퍼 주머니에 손을 넣고 앞장섰다.

밖을 나서니 이미 간판 불이 꺼져 있고, 그제야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가

게에 머물렀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

함께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몰랐지. 얼굴만 봐도 웃음이 났지.

“어후, 코트에 냄새 장난 아니야. 지금 내 몸에서 고기 굽고 있는 것 같아.”

그런 때도, 있었지.

“이거, 혹시 먹나.”

현수는 손바닥을 펴며 정윤에게 내밀었다. 가게 계산대 앞에 놓인 박하사탕이다.

작은 바구니에 담겨 있던, 집어먹으며 여러 사람의 손이 닿았을 사탕.

평소의 정윤이라면 이런 걸 나더러 먹으라 가져왔냐고 질색하며 화를 내겠지만.

이미 와그작 와그작 박하사탕을 씹어 먹고 있는 전 남편을 바라보고 있자니ㅡ 

“그래, 나도 사탕 줘. 잘됐다. 입가심하고 싶었는데.”

사탕 하나 받아먹는다고 죽을 일이냐, 주면 먹으면 그만인 일이지.

하며 집어먹게 되었다.

넌 이런 거, 아무렇지 않게 먹으니까. 그런 네가 이상한 게 아니고, 우린 조

금 다를 뿐이니까.

“하, 춥다. 남 형사, 택시 부를 거지?”

“택시는 무슨 택시. 버스 탈 거다. 니는 택시 타나.”

“아, 어. 택시 탈 거야. 그럼 여기서 찢어지자.”

……조금 다를 뿐이라는걸

조금만 더 일찍 알았다면 우리,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갈게, 남 형사.”

정윤은 짧게 웃어 보이다가 먼저 걸음을 떼었다.

그가 건네준 박하사탕이 입안에서 달게 굴러다녔다.

“차검.”

“……응?”

몇 걸음을 걸어가던 정윤은 돌아보았다.

현수는 가죽점퍼 주머니에 여전히 손을 집어넣은 채.

“택시 번호 잘 보고 타라. 아는 길로 가는지 잘 보고. 가는 동안 정신 차리고 딴짓 마라이.”

“별걱정을 다.”

정윤은 피식 웃으며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잘 가, 다음에 또 봐.

이런 인사는 어울리지 않았다.

“진짜 갈게.”

그래. 우리에겐 이런 인사가 어울렸다.

다음이 없는 인사. 오늘이 영영 끝이래도 할 말 없는 인사.

“그래, 가라.”

안녕은 안녕이라는 말로 그 책임과 소명을 다 해야 했다. 

서로의 지친 발걸음이 무거워지지 않게.

*

[‘검찰’ 강희주 USB 공개... 백인호의 충격적인 두 얼굴]

[백인호 불법 정치자금 명단... 여야 침묵 속 ‘긴장’]

[윤명국 지검장 구속... 검찰청 새바람 부나]

.

.

.

백인호는 구속되었다.

검찰 측이 착실하게 모아온 증거와, 자택에서 압수한 밀수 금괴로 국민은 충격에 빠졌다. 

음모론을 제기하는 자들과 비난을 쏟아내는 자들 사이의 입씨름이 한창일

때, 검찰은 강희주의 녹음파일을 세상에 공개했다.

모든 혐의가 잊힐 만큼 충격적인 내용 앞에, 백인호에 대한 국민들의 감정

은 혐오로 바뀌었다.

하루하루 쏟아져 나오는 백인호의 추가 혐의.

[속보][강희주 전 매니저 ㅡ 임광호 자살 사건 재조사]

[속보][임광호 자살 아니다 ㅡ 백인호의 혐의 추가 검찰 쪽 ‘증거 확보’]

오늘은 살인교사 혐의까지 추가되었다.

죽은 임광호의 유서에서 발견된 필체가 백인호의 비서실장 필체와 일치한

다는 조사 결과로 비서실장이 긴급 체포되며 물꼬를 텄다.

아비규환이었다.

“저기! 백인호다!”

검찰청 앞으로 백인호가 들어서자 모여 있던 취재진과 구경꾼들 사이에 소란이 커져갔다. 

포승줄에 묶인 채 포토라인에 선 백인호는 며칠 사이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란 얼굴을 하고는 시선을 내렸다.

“혐의를 모두 인정하십니까! 심경은 어떠신지요!”

“오늘 추가적으로 검찰이 발표한 살인교사 혐의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누군가의 음모론이라고 악다구니를 쓰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왔다.

둘러싼 모든 혐의를 부정하기엔, 검찰 쪽인 내민 증거가 너무나도 확실했다.

“임광호 씨를 살인 교사 혐의를 인정하십니까? 그렇다면 교사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백인호는 입을 꽉 다물었다. 어서 이 잔인한 시간이 흘러가길 바랐다.

헐벗은 채 서 있는 것처럼 수치스러워, 단 한마디도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적어도 성실히 조사를 받겠다는 말 정도는 해야 하는데.

생각에나 머물 뿐,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자, 이만 들어가겠습니다.”

백인호가 입을 열 기미가 보이지 않자 동행중인 수사관이 취재진들을 향해

뒤로 물러서라 말했다.

하지만 취재 열기는 쉽게 사라지지 않고, 백인호는 수사관들과 함께 힘없는 걸음을 떼었다.

그때였다.

“야, 이 몹쓸 놈아!”

누군가 백인호에게 날계란을 던졌다.

정확하게 머리에 맞은 백인호의 이마로 깨진 계란이 범벅된다.

놀란 수사관들은 계란을 투척한 사람을 찾고자 달려갔고, 그사이 날계란이

하나 더 날아들었다.

“이 천하의 나쁜 놈아! 지옥불에나 떨어져라!”

이번엔 그의 어깨로 날아든 날계란. 수사관들은 다급히 백인호를 둘러싼

채 걸음을 조속히 움직였다.

날계란을 투척한 사람은 중년의 남성으로, 신분은 알 수 없었다. 

취재진은 현재 상황을 생생하게 담기 위해 바삐 움직였다.

경호 인력이 중년의 남성을 막아서지만 중년의 남성은 미친 듯이 소리 질렀다.

“내가 너 같은 놈을 지지했다! 이런 파렴치한 놈아! 감옥에서 썩어라, 영원히!”

“어허, 소란 피우지 마세요!”

“천벌을 받아라! 이 나쁜 새끼야! 천하의 빌어먹을 놈아아아아!”

……비릿하고 끈적거리는 날계란이 줄줄 흘러내리지만 백인호는 닦을 의

지조차 남아 있질 않았다.

사내의 외침을 뒤로하며 백인호는 수사관들과 함께 검찰청 안으로 들어섰다.

수사관이 다가와 대충 휴지로 얼굴을 닦아준다.

꽉 다문 입가가 파르르 떨렸지만, 백인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대충 닦인 것 같습니다. 가시죠.”

정성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손길로 얼굴을 대충 닦아낸 수사관이

다시 가잔다.

백인호는 감았던 눈을 뜨며 그들이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지환을 발견했다.

조금 멀리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지환을 향해 시선을 옮긴 백인호는

잠시 우뚝 멈춰 섰다.

두 사내의 시선이 엉킨다.

지환은 백인호를 조금의 동정심도 없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아오르던 어느 정치인의 이야기가 끝나는 날.

뒤로 숨긴 수많은 희생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날.

“가시죠.”

백인호는 수사관의 재촉에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다시 멈춰 선 백인호는 지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가셔야 합니다. 어서요.”

……차마 뗄 수 없는 걸음을 딛는 것처럼 백인호는 느리게, 툭 툭 떨어지는

걸음을 옮겼다.

지환은 배웅을 나선 사람처럼 먼발치에 서서 어느 정치인의 말로를 지켜보았다.

영영 세상과 단절할 것만 같은 뒷모습을 한 채 백인호는 묵묵히 수사관들

과 함께 멀어졌다.

마지막 모습이었다.

*

“하리야! 어서 와!”

우와아아아, 하리야, 하리야아아아.

오랜만에 지환과 희원의 집으로 하리가 놀러 왔다.

“숭모, 숭모오오오오!”

“우와, 하리야. 그새 키 컸어? 하리 더 컸는데?”

희원은 신발을 벗고 들어서는 하리를 바라보며 눈을 크게 떴다.

분명 함께 살 때보다, 아이는 자란 것이 분명했다.

함께 들어선 하리의 부모님 ㅡ 그중 지환의 형은 웃으며 말했다.

“하리가 무섭게 큽니다. 어제오늘이 다른 것 같아요.”

“아주버님, 하리가 그때 봤을 때 하고 또 다른 것 같아요.”

“헤헤, 숭모, 하리는 키 컸어여. 집에서도 맹날 맹날 키를 재가지고, 어,

어, 하리 키를 엄마가 벽에다가 그려줘여.”

아침에 눈 뜨면 키를 재는 곳에 가서 서 있는 게 아이의 첫 일과란다.

자라는 몸이 아이도 신기한지, 눈을 뜨자마자 키를 재달라고 매일 졸라서

엄마는 가끔 곤욕을 치른다고.

“우아, 우리 하리 좀 안아볼까?”

지환이 하리를 안아 올리자 하리가 까륵까륵 웃음을 터트린다.

귀찮을 정도로 지환이 볼에 뽀뽀 세례를 퍼부어도, 그저 좋단다.

“잘 오셨어요, 형수님. 형도 잘 왔고.”

“그래. 초대 고맙다.”

모처럼 만난 네 사람은 따뜻한 인사를 주고받았다.

가족의 시간이었다.

*

“하리는 정말 너무 예쁜 것 같아요, 아주버님.”

조카님께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랑을 받기 위해 그 앞에서 애를 쓰는 지환

을 바라보다가, 희원은 하리에게 시선을 옮겼다.

검은 바둑알을 넣어놓은 것만 같은 동그랗고 검은 눈동자가 연신 지환을 따른다.

호기심이 잔뜩 묻어 있고, 금방이라도 웃음을 터트릴 준비가 되어 있어 보이는, 

싱그럽고 생기 있는 아이의 눈빛과 표정.

바라보고 있자니 아이가 짓고 있는 표정을 저도 모르게 따라 하게 된다.

“어쩜 저렇게 예쁘죠? 닳을까 봐 쳐다보기도 아까워요.”

희원은 입가에 미소를 걸어둔 채 중얼거렸다.

지환의 형, 희원의 아주버님 ㅡ 지석은 차를 한입 마시고는 희원을 바라보았다.

고맙게도 희원은 하리를 진심으로 예뻐했다.

“사실 하리 태어나기 전까지 아이를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었습니다. 오히

려 좀 아이가 어렵다고 해야 할까요, 그랬는데.”

“아아. 정말요?”

“네. 저보단 지환이가 더 어린아이들을 어려워했고요.”

“아? 진짜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요?”

희원은 의외라는 듯 지석을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환과 지석, 형제는 하리에게 유난히 살갑고 다정다감해서 아이를 좋아하는구나, 했다. 

게다가 지금 거실 바닥에 누워 개헤엄을 치듯 팔다리를 파닥거리며 아이

앞에서 쇼를 하고 있는 지환을 바라보고 있자니,

아이를 어려워한다?

저 사람이?

“전혀 상상이 안 되는데요. 지환 씨가 아이를 어려워하다뇨.”

말도 안 돼. 저렇게 좋아하는데?

“들으셨겠지만 어머니가 지환이를 낳다가 돌아가셔서.”

“……아.”

“아이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좀 있었죠. 우리 형제에게.”

아…….

희원은 긴 탄식을 터트렸다.

그녀의 낮고 진한 탄식은, 아이의 터진 웃음소리와 맞물려 어느 틈에 흩어진다.

지석은 편안한 시선으로 말을 이었다. 

“집안 분위기가 무거웠어요. 자랄 땐 둘 다 내성적이었고, 뭔가를 표현하거

나 부모의 사랑을 받는 게 좀 어색하다고 할까, 그랬죠.”

“그랬겠네요, 네, 그랬겠어요.”

조카의 웃음을 따라 환히 웃는 지환의 얼굴이, 아내의 시선에 서글프게 담긴다.

“아버지는 아들을 얻었지만 아내를 잃었고, 뭘 아는 건지 지환이 크면서도

아버지를 어려워했어요.”

아들을 얻는 가운데 아내를 잃었다.

아내를 닮은 아들의 눈매와 입매를 바라볼수록, 아버지의 마음 한 켠은 고

통스러웠을지 모른다.

가족이 모여 웃는다는 것은 상상도 해보지 못했다.

불행한 가정은 아니었지만,

화목한 가정도 아니었다.

“저도 그렇고 지환이도 그렇고, 그래서 사실은 결혼을 해도 아이를 가져야

겠단 생각이 없었죠. 저도 아내가 절대적으로 원하지 않았다면 아마, 낳지

않았을 겁니다.”

“네…… 이해합니다…….”

“하리가 태어나면서 집안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어요. 아버지도 그렇고, 할

아버지도 그렇고, 지환이도 그렇고.”

희원은 말을 길게 잇지 못했다.

감히 이해한다고 말해도 되는 것인가, 잠시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제수씨가 식구가 되면서 더 많이 바뀌었죠. 늘 고맙게 생각합니다.”

“제가 뭘 한 게 있나요, 저는 아직…….”

희원이 당황함에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말꼬리를 흐리자 지석은 손을 내저었다.

제수씨의 존재만으로 집안의 분위기가 더욱 화목해졌다고.

“두 사람은 아직 자녀계획 없죠?”

“저희요? 아…… 네…… 저희는 아직…….”

희원은 말꼬리를 흐렸다.

쇼윈도 결혼을 택할 때 가장 서로의 합이 잘 맞았던 부분 중 하나.

자녀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었다.

그녀는 아이를 낳고 싶지 않은 이유로 경력단절을 꼽았고, 지환은 깊게 이해해주었다.

“결혼할 때 아이를 낳고 싶지 않다는 말에 서로 동의했었거든요. 저는 무용

을 더 못 하게 될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고, 그러고 보니 지환 씨는…….”

그러는 지환은 왜 아이를 갖지 않겠다고 했는지, 이유를 듣지 못했는데.

“그냥 결혼 욕심이 없듯 아이 욕심이 없구나, 했어요. 지환 씨가 아이를 원

하지 않는 이유를 듣지 못해서.”

……두려웠구나.

상처가 깊었구나.

“일종의 트라우마처럼 남았을 겁니다. 아이를 갖는 일은 생각보다 많은 용

기가 필요한 일일 테고.”

당신은, 그랬구나.

“뭐, 본인이 낳을 수 있는 일이라면 좀 덜하겠죠? 그런데 제수씨가 낳아야

하니까, 더 무서울 거예요. 저도 그랬으니까.”

“네…….”

지석은 찻잔을 내렸다.

어쩐지 어깨가 좁아진 희원을 바라보다가 지석은 상체를 앞으로 내밀며 톡

톡, 테이블을 두드렸다.

“괜찮아요, 제수씨. 둘 다 아이 생각 없으면 지금처럼 지내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녀는 생각이 많아진다.

“물론 자식이란 태어나는 순간부터 너무 많은 기쁨을 주지만 모르고 살아

도 행복하지 않은 건 아니니까. 그것과는 또 다른 행복도 많으니까.”

경력단절이 두려운 아내는,

아내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진 남편을 먹먹하게 바라보았다.

“아주버님.”

“네, 제수씨.”

“저는 지환 씨를 정말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요.”

지석은 희원을 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짧은 말이지만 자신의 동생에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너무나도 잘 느껴졌다.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서 지환 씨의 다친 마음을 낫게 해주고 싶어요.”

“제수씨하고 지환이, 지금처럼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딱, 지금처럼만.”

희원은 지석에게 시선을 옮겼다.

“언제나 감사합니다, 아주버님.”

“제가 제수씨께 드리고 싶은 인사입니다.”

남편의 형은 두 사람 잘하고 있다고, 지금처럼 살면 되는 거라고, 소리 없이 응원해주었다.

“그리고 저는 제수씨 편입니다. 언제나.”

“와, 진짜 든든한데요.”

“지환이 말 안 들으면 전화 주세요. 당장 해결해드릴 테니.”

“네. 아주버님.”

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살며 열어보지 않을 것만 같던 어떠한 문을 활짝 열어버린 느낌이 들었다.

우리가 진짜로 알아야만 하는, 부부의 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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