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 우리는 함께하는 일로 (85/98)

85. 우리는 함께하는 일로

남 형사, 어머님께 전화라도 한 통 드려.

명절인데 아들도 안 내려오고, 쓸쓸하시겠어.

정윤이 형사과를 다녀가고 난 뒤 한참이나, 현수는 잡무에 시달렸다.

그러다가 조금 시간이 남아 고개를 든 현수는 가만히 생각하다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단축번호를 눌러 집에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ㅡ여보세요? 현수냐?

엄마는 무심하게 전화를 받는다.

명절의 부산함을 어디서도 느낄 수 없는, 단출하고 적적한 분위였다.

“예, 접니다. 뭐하고 계셔?”

ㅡ뭐허긴, TV 본다. 드라마 할 시간 아니냐?

“아아, 그래요. 식사는 하셨고?”

ㅡ먹었지. 니는 문나?

“예. 먹었습니다. 지금 일하는 중이고.”

현수는 말끝에 고개를 돌려 책상 위에 놓인 쇼핑백을 응시했다.

꾸역꾸역 먹었지만 양이 너무 많아 남아버린, 정윤이 가져온 명절 음식.

ㅡ그래. 나라 지키는 일에 명절이 어딨고 빨간날이 어딨노. 부지런히 일 혀라. 끊자이.

“저, 엄마.”

ㅡ와?

현수는 미간을 문질렀다.

뱉어내기 껄끄러운 말을 하려는 것처럼 잠시 망설이더니, 그는 입을 열었다.

“못 가서, 죄송합니다.”

ㅡ뭔 소리를 하노. 됐다마, 치아라. 놀면서 못 오는 것도 아닌데 야가 와 이

렇게 사람 간지럽게.

“쉴 때 갈게요.”

ㅡ그래라. 욕 봐라이. 끊자.

엄마는 뚝 전화를 끊어버렸다. 현수는 휴대폰을 내리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아들과 엄마는 투박하고 무뚝뚝한 성격마저 꼭 닮았다.

좀처럼 속을 드러내는 경우도 없고, 살갑게 마음을 어루만지는 경우도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서로가 어렵고 불편하지는 않았는데.

엄마는 상처가 많을 아들을 피했고, 아들은 그런 엄마를 피했다.

그저 가만히 두는 것.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는 방식이었다. 

“어? 이게 뭐냐?”

출출함에 배를 문지르며 어슬렁거리던 동료 형사가 귀신같은 촉을 달고 쇼핑백을 향해 돌진한다.

멍하니 넋을 놓고 있던 현수는 힐끔, 곁을 바라보았다.

“별거 아닙니다.”

“어? 별게 아닌 게 아닌데? 먹을…….”

현수는 홱, 쇼핑백을 낚아챘다.

아오, 이 형사과 형사같은 놈.

명품 의류 쇼핑백에 담겨 있는데, 내용물이 먹을 거란 걸 대체 어떻게 알았단 말이냐?!

“신경 끄십시오. 내 건데.”

“야, 이 치사한 놈아. 좀 나눠 먹자. 응? 배고파.”

“국밥이라도 시켜 드십쇼. 왜 남의 물건에 이렇게 관심을 두고.”

현수가 쇼핑백을 부스럭거리며 챙기자 허, 동료 형사는 눈을 크게 떴다. 

“야, 먹을 거 가지고 치사하게 이러기야? 좀 줘봐! 보아하니 명절 음식 같은데!”

허, 진짜 귀신 같다.

여기 있는 형사들, 너나 할 것 없이 명절 밥은 구경도 못하는 신세다보니

눈독 들일 만도 하다.

현수는 그럴수록 쇼핑백을 더욱 품에 끌어안았다.

“아, 나가요. 나갑시다. 내가 밥 살게.”

“밥 산다고? 아니, 나 그거 조금만 먹으면 되는데.”

“안 돼요! 이걸 누가 만든 건데! 나 혼자 먹을 거니까 눈독 들이지 맙시다.예?”

“하…… 치사한 놈. 남 형사, 내가 너 이렇게 키웠냐? 실망이다, 이거.”

“실망하셔도 할 수 없습니다. 나가요. 밥 산다니까?”

“누가 만들어 준건데? 애인? 여친? 썸녀?”

현수가 급히 가죽점퍼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동료 형사는 채근하기 시작했다.

차마 과거의 장모님께서 만드셨다는 말은 떨어지질 않아, 현수는 코웃음이

나 치며 동료 형사를 끌었다. 

“야, 양도 많은 것 같던데 조금 나눠먹자. 나는 뭐 맨날 국밥이냐 먹냐?!”

“상해서 버려도 안 줍니다. 꿈 깨십쇼. 뷔페 가요, 뷔페.”

“뭐? 뷔페? 진짜?”

현수가 더는 말을 잇지 않고 앞장서자 동료 형사는 눈을 크게 떴다.

뷔페라니? 진짜로?

남 형사 저 짠돌이가?

“야! 남 형사! 너 한식 뷔페 말하는 거지! 이 앞에 생긴 5900원짜리!”

“어? 잘 아네. 빨리 오십쇼. 아니면 혼자 갑니다.”

“우씨…… 같이 가 인마!”

동료 형사는 허둥지둥 그의 뒤를 따랐다.

명절은 누구에게나 소란스럽지 않았다. 

*

“잘 있었는가? 꽤 추워 보이네만.”

희원의 할아버지 ㅡ 권 선생은 명절 당일 홀로 집을 나섰다.

잠깐 들러볼 데가 있다고 서둘러 아침 일찍부터 걸음 한 장소는, 다름 아닌

아내가 잠들어 있는 곳.

“다녀간 지 며칠이나 됐다고 또 왔냐고 괄시하는 건 아니지? 그땐 아들도

있고 며느리도 있어서 내가 자네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못 해서.”

차고 맑은 공기를 맞으며, 권 선생은 집에서 마련해온 커피 보온통을 열었다.

삐걱삐걱, 마찰음이 들린다.

“명절에 희원이가 없으니 집이 휑하구만. 아무도 없는 집 같고.”

졸졸졸졸, 보온통 뚜껑에 커피를 따랐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커피의 단내가 권 선생의 코를 간지럽힌다.

“자네가 먼저 갔을 때도 집이 이렇게 휑했나, 새삼스럽소.”

아내가 평소 즐겨 찾던 믹스 커피를 내려다보던 권 선생은 아내의 묘에 조금씩 뿌렸다.

커피가 금세 스며들자 권 선생은 혀를 찼다.

“사람, 천천히 마셔야지. 커피가 이래 반가운가? 내가 반가워야지 원.”

자그마한 뚜껑에 따랐던 커피는 금방 동이 난다.

권 선생은 다시 보온통에 들어 있는 커피를 덜어내었고, 반대편에 뿌렸다.

이윽고 상한 잔디를 뽑고, 흙이 올라온 곳을 툭툭 눌러 평평하게 했다.

그러곤 아무렇게나 주변에 앉았다.

당일에 산소를 찾아온 사람들이 이곳저곳에서 자신들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어, 권 선생은 잠시 눈길을 주었다.

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 집에서 준비한 음식을 꺼내놓고, 부산스럽게 움직인다. 

희원의 집은 항상 하던 대로 며칠 전 이곳을 다녀갔다.

“그러고 보니 명절 당일에 찾아온 것은 처음인 것 같은데.”

오늘 같은 날 혼자 있었으니 자네, 외로웠겠소.

사람들의 기척을 들으며 섭섭하기도 했겠소.

……권 선생은 조금 남은 커피를 따라 한입 삼켰다.

단내가 진동을 하는 믹스 커피, 일 년에 두어 잔이 마실까 싶은 커피의 맛

을 보며 권 선생은 미간에 힘을 주었다.

“달구만. 자네가 왜 좋아했는지 이제 알겠어. 달달, 하니 속이 따뜻해지고.

소화도 되는 것 같고.”

허허. 권 선생은 믹스 커피의 참 맛을 이제야 알았다며 소리 내어 웃었다.

금방 그치고 마는 웃음의 끝은, 다소 공허했다.

“나도, 갈 때가 됐나 보이.”

툭 뱉어낸 말은 겸허했다. 

“생각보다 오래 살았지. 자네도 없는데, 내 명줄이 이렇게 길 줄 누가 알았는가?”

권 선생은 하늘을 올려보았다.

“갈 때 까진 자식들에게 폐나 끼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뜻대로 될까 잘모르겠소.”

남은 바람이 있다면 자식들에게 짐이 되는 끝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모두가 호상이라 웃는, 그런 섭리 같은 안녕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권 선생은 고개를 내리며 아내의 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천천히 손을 내밀어 봉분을 어루만졌다.

“살아 있을 때 얼굴이나 실컷 만져볼걸. 사람이 이렇게 늙어도 미련해. 그

래도 자네는 죽어서도 이렇게 곱고 부드러우니, 좋겠구먼.”

홀로 남은 남편은 떠난 아내가 그리웠다.

붙은 숨을 어쩌지 못해 살아내고는 있지만, 미련은 없었다.

“금방 갈게. 오랜만에 만나면 커피나 한잔 합시다. 그때는 많이 마셔도 뭐라 안 할 테니.”

손녀의 결혼도 보았고, 행복한 모습도 보았고, 안심도 하였다.

권 선생은 홀가분하다는 눈빛으로 아내의 봉분을 쓰다듬다가, 이번엔 어깨

를 두드리듯 툭툭 두드렸다.

“자네도 새해엔 비도 좀 덜 맞고 눈도 좀 덜 맞고, 잘 계시게. 춥거나 덥지말고.”

혼자 살아온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했던 아내를 항해, 남편은 새해

인사를 건넸다.

점심의 해가 오르기 전의 일이었다.

*

“희원이 출발하려면 아직 멀었겠지? 언제쯤 출발하려나?”

그녀의 아버지는 시계를 힐끔 거리며 거실을 서성거렸다.

종가의 명절을 치르러 딸아이가 내려갔으니, 염려가 되는 것은 어쩔 수가없었다. 

“때 되면 오겠지요. 그 댁도 차례 지내고 상 치우고 하려면 시간이 꽤 걸릴

텐데. 천천히 기다려요.”

그녀의 어머니는 초조한 기색이 역력한 남편에게 덤덤히 말했다.

딸아이 없이 보내는 첫 명절.

이루 말할 수 없이 휑하고 적막했다.

“음식은 다 한 거야? 내가 뭐 도와줄 건 없어?”

“다 했어. 지환이 좋아하는 찜도 해놓고 희원이 좋아하는 생선 조림도 해놓고. 다 했지.”

명절 전날 전을 부치는 엄마 옆에 앉아 맨손으로 후후 불며 전을 집어먹던,

딸아이의 모습이 선연하다.

곁에 앉아 할아버지와 막걸리 한잔 나누어 마시며 바둑을 두던, 딸아이의

소란스러운 웃음이 증발해버렸다.

지나칠 정도로 조용했던 명절 전날을 어찌어찌 보낸 희원의 부모님은 당일

에나 올라오게 될 딸과 사위를 눈 빠지게 기다렸다.

아버지는 조급했고, 어머니는 표현하지 않았다.

“전화나 한 통 해볼까, 언제 출발하냐고?”

“아이고, 됐어요. 애들 마음 불편하게. 어련히 알아서 출발할까.”

“아니, 너무 늦잖아. 설마 안 자고 가는 건 아니겠지?”

“아휴. 왜 이래 이 양반이? 못 자고 가면 할 수 없는 거지. 찍소리도 말고 가만히 있어요.”

아버지가 극에 달한 초조함에 휴대폰을 들었다가 놨다가, 출발했는지 안

했는지의 궁금함에 잠시도 소파에 앉아있지 못할 그 때.

띡, 띡, 띡, 띡.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님 오셨나 보네.”

그녀의 어머니 ㅡ 임정순 여사는 들려오는 기계음에 고개를 들었다.

들러볼 곳이 있으시다하며 이른 아침부터 밖을 나가실 때, 점심 전엔 돌아

오시겠다고 하셨으니 아버님께서 돌아오셨을 것이라.

그런데, 어쩐지 현관 앞이 소란스럽다.

“어머, 얘들 왔나 봐.”

임 여사는 두런두런 들리는 목소리가 예사롭지 않은 까닭에 눈을 동그랗게떴다.

시계만 노려보던 아버지는 벌써 우다다다, 현관으로 달려나간 뒤다.

“뭐야, 엄마 전화 왜 안 받아?”

딸아이다.

“어머님 아버님! 저희 왔습니다!”

사위도 왔다.

“뭐야! 니들 왜 벌써 와? 언제 출발했어?”

놀라 뛰어나온 엄마는 눈을 크게 뜨며 아이들을 반겼다.

이 와중에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희원이 짐을 한가득 들고 들어오며 웃는다.

“우리 새벽에 차례 지내고 일찍 출발했어. 빨리빨리 친정 가서 점심 먹으라

고, 엄청 빨리 가라 하시던데?”

“그래? 이렇게 빨리 와? 그 먼데서?”

“가까이에 종친 분들이 많이 살고 계셔서 저희는 차례만 지내고 바로 출발

했습니다. 저희뿐 아니라 대부분 일찍 출발했어요.”

“어머나, 그랬구나. 어머나 세상에. 어머나, 어머나. 난 이렇게 일찍 올 줄몰랐지.”

사위의 설명에 엄마는 활짝 웃었다.

해가 넘어갈 때쯤에나 오겠다 싶었는데, 점심 전에 오다니.

“이건 다 뭐야?”

“이거? 이거 지환 씨네 댁에서 싸주신 거야. 며느리들 친정 올라갈 때 원래

이렇게 다 싸주신대.”

“세상에, 이게 다 뭐야?”

바리바리 싸들고 온 비단 보자기에 싸여있는 것들은 다름 아닌 명절 음식이다.

직접 찧어 만든 떡, 며칠 동안 바르고 말려 만든 한과, 약과, 약식 등등.

귀한 인연을 맺었다며 감사하다는 대고모님의 짤막한 손편지까지.

“허…… 어머나…… 이게, 어머나…… 어머나 세상에…….”

엄마는 말을 잇지 못했다. 맛깔스럽고 정성스럽게 포장된 음식들은 마치

백화점에서 구매한 이바지 음식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릇부터 포장까지 예사롭지 않은,

“아유…… 엄마가 말을 못 하겠다, 이게 다, 세상에…… 감사해라…….”

“엄마, 할아버지는?”

“아, 할아버지. 잠깐 어디 좀 가셨어. 이제 돌아오실 거야. 희원아, 엄마 전

화 좀 연결해줘. 잘 받았다고 인사는 드려야지.”

“알았어. 어차피 우리 도착했다고 연락도 드려야 해.”

“그래. 이게 웬일이니, 정성이 말도 못 한다. 아이고야…….”

엄마가 선물 앞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중얼거리는 때, 다시 익숙한 현관 기계음이 들렸다.

지환과 희원은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문이 열리고, 할아버지는 그 어느 때처럼 무심히 들어오셨다.

“할아버지이!”

희원이 부르자 할아버지는 현관 앞에 우뚝 멈춰 섰다. 

몇 시나 되었나, 혹시 내가 너무 늦었나 싶어 할아버지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이런. 아직 점심 전이다.

“언제 왔냐?”

“저희 방금요. 어딜 다녀오세요, 추운데.”

희원이 손을 잡으며 어서 들어오셔라 끌자, 할아버지는 못 이기는 척 신을

벗고 안으로 들어오셨다.

“할아버지, 세배 받으셔야죠. 어서 앉으세요.”

“아아. 그래. 받아야지. 암먼.”

드디어 가족의 완성체가 되고ㅡ

“세뱃돈 두둑하시죠?”

“암먼. 노인네 돈 쓸 일이 어딨냐? 탈탈 털어 줄 테니 예쁘게 해 봐라.”

웃음이 퍼졌다.

적적했던 명절의 전날을 지나,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한 명절 당일을 맞이했다. 

“오늘 자고 가나?”

“아, 그럼요. 자고 갈 겁니다. 아버님, 저하고 할아버님하고 오랜만에 약주

한잔 하셔야죠.”

“아하하하하! 좋지! 좋지! 아하! 좋지!”

이렇게 또 가족이 되어간다.

*

평화로웠던 명절을 지나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연애기간을 건너뛰고 결혼으로 직행했던 두 사람은 지나가는 하루하루가

연애의 계절처럼 달콤하기만 했다.

해본 일보다 해보지 않은 일이 더 많아, 무엇을 함께 해도 처음인 일이 대부분이었다.

“여행 갈래?”

“응? 여행?”

늦은 저녁을 먹고 소파에 앉은 시간.

뜬금없는 지환의 제안에 희원은 바라보던 잡지책에서 눈을 뗐다.

“웬 여행?”

“그냥. 당신하고 나 한 번도 여행 못 갔잖아. 신혼여행도 못 가고.”

“아아, 그랬죠. 그땐 또 너무 바쁘고, 둘이 여행을 간다는 자체가 좀 부담스러웠으니까.”

결혼 당시.

둘이서 여행을 떠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어딘가를 떠난다. 당신과 함께.

이제는 상상만으로도 벅차게 설레는 순간.

“음, 난 좋은데 서지환 씨가 시간이 돼?”

“뺄 수 있어. 멀리는 못 가고, 가까운 곳 정도야 뭐.”

지환이 가능하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웃었다. 말로 뱉는 답보다 더 확실한 표현이었다.

좋아요. 떠납시다, 우리.

“그럼 여행 계획 세워야겠다. 당장 실행에 옮겨야 되겠군요?”

“당신이 잘 짜 봐. 막히면 토스하고. 일단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전부.”

잔뜩 기대에 부푼 눈빛을 바라보며 그가 웃자 희원은 흠, 하며 노트북을 들었다.

어디를 가지? 어디부터 갈까?

가보고 싶었던 그 수많은 곳 중 어디를 제일 먼저 당신과 함께해야 할까?

“당신 전화 온다.”

“아, 잠깐만. 여보세요?”

희원은 팔만 뻗어 휴대폰을 잡았다. 지환은 그녀 무릎에 누워 보고 있던 수필집의 다음 장을 넘겼고.

“아아, 그래. 수연아 언니야.”

ㅡ응. 언니. 집이야? 통화 가능해?

“가능하지. 웬일이야, 결혼 준비는 잘하고 있어?”

친한 동생의 전화에 희원은 눈꼬리를 둥글게 휘었다.

그녀의 편안한 음성이 듣기 좋은 음악과도 같아, 지환은 숨을 깊게 내리쉬었다.

“파티? 언제?”

ㅡ이번 주 주말에요. 언니 시간 될까?

“아아. 이번 주 주말. 잠깐만 나 스케줄 좀 볼게.”

희원은 달력을 보며 스케줄을 확인했다. 별다른 일정은 없다.

지환은 힐끔, 그녀의 얼굴을 올려보다가 수필집의 다음 장을 넘겼다.

“시간은 괜찮아. 그런데 무슨 파티?”

친한 동생의 요지는 이러했다.

결혼 전 파티를 하고 싶은데, 친한 동료들과 제대로 흥청망청 놀고 싶단다.

희원은 웃음을 터트렸다.

“흥청망청 놀고 싶은 건 대체 어떻게 놀고 싶은 건데?”

뭐? 흥청망청?

지환의 귀가 점점 커진다. 수필집의 글씨가 조금씩 흐려져 간다.

ㅡ언니, 언니가 알다시피 내가 뭐 놀 줄 아는 것도 아니고, 내 주변에 화끈

하게 놀 줄 아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 흥청망청이지 그냥 늦게

까지 놀아보고 싶다는 말이야.

아아, 안 들린다. 안 들려.

지환은 숨소리도 죽인 채 아내의 통화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얼마나 개미 숨소리처럼 말하는지, 통화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ㅡ생각해보니까 언니랑 나랑 밤늦게까지 놀아본 적이 한 번도 없잖아.

“아아. 그렇지. 내가 결혼 전엔 통금이 빡세서. 한 번도 없었지.”

ㅡ우리끼리 즐겁게 놀아요. 나 결혼하면 멀리 이사 가는데 또 언제 이런 시간이 있겠어.

희원은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지 코끝을 찡긋거렸다.

남편의 직장을 따라 멀리 결혼 후 멀리 이사를 가야 하는 동료의 상황이 아쉬운 까닭이었다. 

ㅡ언니랑 마시는 낮술 지겨워. 언니 시간 빼줄 수 있어?

“물론이지. 언니는 이제 옛날의 권희원이 아니란다.”

“옛날의 권희원 맞아. 옛날의 권희원이었으면 좋…….”

지환이 참지 못하고 껴들자 희원은 지환의 입을 막았다.

ㅡ언니, 옆에서 형부가 뭐라고 하는 것 같은데?

“아니야. 좋은 취지라고 좋아하네.”

내가 언제!

내 얼굴을 봐라! 좋아하는 얼굴인가!

ㅡ아아, 정말? 역시 형부, 너무 멋있어.

“맞아. 우리 신랑 너무 멋있지. 그럼 그날 즐겁게 놀아보자. 시간 장소 나오면 알려줘.”

지환은 눈꼬리를 사정없이 올렸다. 희원은 아예 손바닥으로 그의 얼굴을

가리며 남은 통화를 끝냈다.

희원이 휴대폰을 내리자 지환이 벌떡 일어선다. 

“안 돼. 가지 마.”

“얼씨구? 뭔 줄 알고 가지 말란 소리가 나와?”

그는 수필집을 닫았다.

“그런 거 아냐? 어? 막, 어? 여자들끼리 결혼 전에 모여서, 어? 막, 어?”

“말 좀 똑바로 해요. 막, 어, 그 다음은 뭔데?”

“아니! 그러니까! 결혼한 유부녀가 어? 밤늦게까지! 어? 막, 그렇게! 어?어?”

“말 좀 똑바로 하라니까? 유부녀가 뭐. 유부녀는 동료랑 결혼 전 축하 파티도 못 하냐?”

“못 하지! 하면 안 되지!”

“왜?”

“…….”

지환이 차마 머릿속에 엉켜드는 생각을 말로 뱉지 못하고 눈만 세모꼴로

뜨자 희원은 웃음을 터트렸다.

“어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수준 이하네요, 서지환 씨.”

“가서 수준 이하로 놀기만 해 봐라. 어? 권희원. 수준 이하로 놀기만 해.”

“그런 애들 아니거든? 그냥 우리끼리 시끌벅적한 곳에서 시끄럽게 놀아보자는 거거든?”

희원이 소파에서 일어서자 지환은 그녀가 움직이는 동선대로 눈길을 주었다.

뭔가 모르게 화가 나는데, 어느 지점을 집어 화를 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러니까! 결혼 전에도 놀아본 적 없는 그 시끄러운 곳을 왜 결혼하고 나서 가냐고 내 말은!”

“내가 정했니? 왜 나한테 그래? 불만 있으면 주최자한테 전화해서 컴플레인 넣든가?”

“아오…….”

물을 따라 마시는 희원을 바라보며 탄식하던 지환은 점점 더 세모꼴로 눈

꼬리를 올렸다.

“목적지! 시간! 동행자! 전부 보고해! 알았어 몰랐어!”

“알았다! 알았다고!”

“치마 안 돼! 한복입고 가!”

“아오, 진짜!”

“왜? 왜? 한복 좋다며? 좋다며? 좋다며?”

“시끄럽고 읽던 거나 마저 읽으시죠? 왜 이래 진짜 유치하게.”

“유치? 유치?”

아오…… 지환은 메롱, 하며 혀를 길게 빼는 희원을 바라보다가 이번엔 눈을 가늘게 떴다.

아아. 물가에 내어놓는 아이처럼 그녀를 밖에 내어놓는 게 너무나도 싫고 불안하다.

“서지환 씨, 나 못 믿어? 나 못 믿는 거야 지금?”

“널 못 믿는 게 아니라 나랑 같은 염색체를 못 믿지.”

“하…… 진짜…… 별 걱정을 다해. 걱정 마시라고요. 우리끼리 잘 놀다 올테니까.”

흥얼흥얼 노래까지 부르며 희원이 다른 동료들과 통화를 시작한다.

별것 아닌 것처럼 굴더니 굉장히 들떠 보인다.

지환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내를 감추지 못하며 팔짱을 끼고, 다리를 떨었다.

아.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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