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그냥 위험해
“아, 이제 좀 살겠네요. 밖은 너무 시끄러워서 정신이 없어요.”
구언은 머플러를 끌러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이제 좀 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고막의 안전함을 위해 결국 룸으로 들어왔다.
와, 어지러워. 지환은 미친 듯이 쿵쾅거리던 바깥의 소음을 떠올리며 격한도리질을 했다.
대체 저 밖에서 아무렇지 않게 활보하며 공간을 즐기는 자들은 어떻게 그리도 태연할 수 있는 걸까.
고막을 스테인리스로 만들었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뭐 하고 서 있어요? 앉아요.”
“아직도 귀가 멍멍해.”
지환은 손바닥으로 귀를 툭툭 치며 자리에 앉았다.
구언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메뉴판을 들었다.
“일단 뭐라도 좀 시켜봅시다. 뭐 마실 거예요? 안주는 내가 고르면 되겠고.”
“…….”
“이번엔 형이 사는 거죠? 형이 불렀으니까.”
언제는 내가…… 안 샀냐……?
“이번에, 라는 단어가 되게 거슬리는데. 이번에도, 아닌가?”
“아. 그런가? 뭐, 그렇다고 치고.”
흠. 이거 좋겠네. 이거 어때요? 구언이 메뉴판을 보다가 어느 한곳에 멈추더니 보여준다.
지환은 대강 주문하라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메뉴 선정이 끝난 뒤, 한차례 테이블 세팅이 이루어지고 적당한 안주와 술이 깔렸다.
“아, 여기 오랜만인데. 형이랑 오게 될 줄은 몰랐네요.”
빈 잔에 술을 따르며 구언이 피식 웃는다.
살다살다 그녀의 남편과 단둘이 술을 마시게 될 줄이야.
“아. 희원이 어디 있나 전화해볼까요?”
“굉장히 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해. 지금 여기 있는지도 사실 잘 모르겠거든.”
아내의 묘연한 행방에 내내 심기 불편한 채로 앉아 있던 지환이 덥석 반긴다.
구언은 어서 전화해보라고 손짓하는 지환을 바라보다가 희원에게 전화를걸었다.
휴대폰을 곁에 두고 있었는지 금세 받는다.
ㅡ오! 이게 누구셔? 유구무언!
“벌써 취했냐?”
유구무언이라는 별명은 희원이 취했을 때나 들을 수 있는 건데, 오랜만에듣는다.
ㅡ아니야, 아니야! 우리 이제 막 파티 시작했어! 여기 분위기 진짜 좋아!
진짜로 신이 난 모양인지 그녀 목소리가 하이톤이다.
지환은 마치 취조실에 앉아 조사를 하는 상황처럼 잔뜩 굳은 얼굴을 하고
는 구언을 바라보았다.
정확하게는 구언과 통화를 하고 있는 희원의 상태를 주시했다.
“그래. 즐겁게 놀아. 애들한테 안부 전해주고.”
ㅡ알았어! 너 근데 무슨 일 생겨서 전화한 건 아니지?
“일은 무슨. 나도 술 한잔하려고 나왔어. 놀아라!”
ㅡ알았어! 끊어!
통화는 싱겁게 끝이 난다.
구언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입술을 열었다.
“여기 있네요. 여기 어딘가에.”
“아아. 그래.”
지환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이곳 어딘가에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마음은 위로가 되었다.
구언은 술잔을 지환에게 건네며 시선을 들었다.
“희원이 지금 어디 있는지 정확하게 알아서 알려줘요?”
“됐어. 여기 어딘가에 있으면 된 거지. 한잔하자고.”
지환은 구언에게 건네받은 술잔을 들었다.
이곳에 들어올 때보다 차분해진 지환의 모습에 구언은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다.
당장이라도 찾아서 잡아먹을 것처럼 눈에 불을 켜고 있더니.
“솔직하게 말해봐요. 주말 밤에 혼자 있기 심심해서 나 불러낸 거죠. 희원이는 핑계고.”
“무, 무슨 그런 황당한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
“나한테 관심 있어요? 나 좋아해요?”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
“강한 부정이 좀 의심스러운데? 나한테 호감 생겼어요? 만나다 보니 꽤 괜찮아요?”
“…….”
지환은 구언과 건배를 하려고 내밀던 잔을 회수하며 벌컥, 한입에 털었다.
뭔가 되게 황당한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심장은 자꾸 뜨끔, 뜨끔했다.
술잔을 내린 지환은 가볍게 입가를 닦았다.
“뭐, 언젠가 적의 적은 아군이라고 했던 말이 생각나서.”
“아하. 적의 적은 아군. 그럼 우리의 공통 적은 누구죠? 희원이?”
“……말이 그렇게 되나.”
지환이 얼버무리듯 중얼거리자 구언은 고개를 뒤로 꺾으며 웃었다.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자극이 될 만큼 행복해 보였고, 바라보는 것만으로
단맛이 나는 것 같았다.
구언은 그를 따라 술잔을 비워내며 웃음을 갈무리했다.
“지금에 와서 하는 말이지만 내가 왜 그렇게, 그때의 희원이를 싱겁게 포기
했는지 알아요?”
“글쎄.”
“희원이가 어떤 남자를 좋아하는지 알겠더라고요.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어.”
지환은 말의 의미를 모르겠다는 듯한 눈빛을 했다.
구언은 씩, 웃었다.
“엄격하게 자라서 자유로운 삶을 원한다고 말했지만, 사실 희원이는 누구
보다 정돈된 삶을 좋아하는 사람이란걸 알았어요.”
“……아.”
구언은 말했다.
그녀는 누군가 자유롭게 살아라, 놓아주어도 그러지 못할 사람이었다고.
“나는 실제로도 자유롭게 사는 사람이고, 계획이란 게 없어요. 그런 부분이
희원이에게 잘 어필될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거지.”
“…….”
“형처럼 어딘가 정돈되어 있고 안정적인 자세로 삶에 임하는 사람을, 희원
이는 원했던 거예요. 그걸 알겠더라고요.”
“몰라서 하는 말인 것 같은데 나 그렇게 안정적인 사람 아니야. 불규칙하
고, 심적으로 상당히 불안정하고.”
“미리 완벽함을 갖춘 사람보다, 서로 만나 완벽해질 수 있는 관계가 난 더
멋지다고 생각하는데. 아닌가요?”
“번지르르하긴. 사람 솔깃하게.”
“자유를 원한다고 말했지만 정작 자유로운 사람은 버거운 거야. 희원이는
누구보다 고여 사는 사람이니까.”
“자꾸 듣다 보니까 난 좀 틀에 박히고 고지식하다는 것 같은데. 내가 지금
꼬여서 그렇게 들리는 건가?”
“검사님이라 그런가, 듣기 좋게 포장해도 허를 찌르네. 부정은 못 하겠네요.”
“허를 찌른 게 아니라 뼈를 때렸잖아 지금.”
지환이 눈을 치켜뜨자 구언은 뻔뻔한 표정을 지으며 빈 잔에 술을 따랐다.
……한때는 한 여자를 두고, 신경전이 오고 가던 사이.
“쇼윈도로 만났지만 두루두루 귀감이 되는 부부가 되길 바랍니다.”
지금은 그녀라는 공통분모를 빼고서라도, 함께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일수 있는 사이.
구언은 별 탈 없이 마음을 접어주었고.
지환은 시원하게 녀석의 마음을 존중해주었다.
쉬운 관계는 아니었다.
“희원이 때문 아니더라도 종종 만나서 한잔할까.”
“아하, 저야 좋죠. 술값만 내주신다면.”
“나보다 잘 버는 게 대체 왜 이렇게 술값 타령이야. 월급쟁이 빤한 급여 알면서?”
“형이잖아요. 억울하면 나한테 형이라고 하든가.”
“……마셔. 빚을 내서라도 술값을 낼 테니까.”
지환과 구언은 잔을 부딪치고 가볍게 비웠다.
이쯤해서 우리, 친구라고 해도 될까. 서로는 그런 생각을 했다.
*
시간은 얼마나 흘렀을까.
[이제 나 데리러 와도 될 것 같아. 오면 전화해요.]
예상했던 것보다 빠르게 그녀의 술자리가 끝이 나는 것 같았다.
구언과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시던 지환은 희원에게 메시지를 받고 화장실을 향했다.
여기 있었다고 하면 그녀는 뭐라고 할까. 생각하다보니 괜스레 웃음이 난다.
“좀 조용해졌네. 쉬어가는 시간인가.”
손을 씻고 나오는데 드럽게 쿵쿵거리던 노래가 조금 잦아들었다.
어우, 이제 좀 살겠다. 지환은 한결 조용해진 공간을 걸으며 이마를 짚었다.
별생각 없이 주변으로 시선을 주고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리던 지환은 자리에 우뚝 멈췄다.
다시 고개를 돌려보니 저쯤, 희원이 서 있다.
“뭐야, 저기 있잖아.”
지환은 단번에 그녀를 알아보았다.
그녀 역시 친구들과 화장실을 다녀오는 길인지 통로 중간에 서 있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사진을 찍어주는걸 보니 팬을 만난 모양이다.
그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유명인이네, 유명인.”
제법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다.
세계적인 토크쇼 동영상이 공개되고 눈 돌아가는 조회수를 찍고 난 뒤, 그녀의 위상은 어제 오늘이 달랐다.
자신을 알아보며 반기는 눈길들이 나쁘지 않은지 희원은 연신 웃으며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다.
지환은 팔짱을 낀 채 아내를 먼발치서 바라보았다.
나도…… 가서 한 장 찍어달라고 할까…….
멀리서 바라보고 있자니 그녀는 모두의 연인 같은 느낌이다.
아득했고, 범접하기 어려운 타인 같았다.
한 사내의 아내로만 살기엔 그녀 인생이 조금 아깝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홀로 서 있어도 부족함 없이 빛났고 주변의 공간을 지배했다.
지금의 그녀는 늦은 밤 자신의 무릎 위에 누워 잠을 청하는, 늘어진 티셔츠의 주인공이라고는 다소 믿기 어려웠다.
아내를 바라보고 있다기보다 유명인을 바라보는 느낌으로 지환이 그녀를 주시하고 있을 때ㅡ
찰칵. 옆에서 카메라 셔터음이 들렸다.
가까이에 서 있던 지환은 힐끔 곁을 바라보았다.
줌을 당겨 그녀를 촬영하고 있던 사내는 연거푸 촬영 버튼을 누르며 그녀
의 얼굴을 휴대폰에 담았다.
지환의 시선이 자신의 휴대폰에 있음을 느낀 사내는 지환에게 시선을 옮겼다.
아예 대놓고 자신의 휴대폰 액정을 들여보고 있으니, 사내는 약간 지환과
거리를 두듯 걸음을 옆으로 비켰다.
그러더니 다른 뜻은 없다는 것처럼 말을 한다.
“오해하지 마세요. 저기 서 있는 저 여자분 엄청 유명한 사람이에요.”
“……아아. 네.”
지환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다시 사내의 휴대폰에 시선을 주었다.
두어 걸음 멀어진 것이 무색하게, 바짝 붙었다.
“지금 제가 일반인 도촬하는 거 아니고요, 저분 무용하는 분이에요. 도촬아니라고요.”
“저는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만?”
“아니 하도 뚫어지게 보시길래 오해하나 싶어서요.”
“됐고, 조금 더 줌을 당겨봐요. 얼굴이 잘 안 보이잖습니까.”
“……예? 아, 네.”
사내는 지환의 권유에 조금 더 줌을 당겼다.
그녀 주변으로 사람이 점점 더 많아지고, 그녀는 더욱 활짝 웃으며 모여든
사람들과 사진을 찍어주기에 여념이 없다.
“가셔서 사진 한 장 찍으시지 왜 이렇게 멀리서 찍으십니까?”
“사람이 많잖아요. 조금 있다가 가서 부탁하려고요.”
“아아. 그럼 줌을 조금 더 당겨 봐요.”
“이게 다 당긴 거예요.”
찰칵, 찰칵. 사내가 연신 셔터를 누르며 사진을 찍는다.
지환은 흡족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진 좀 건졌습니까?”
“네. 얼추 몇 장 건진 것 같네요.”
“잘됐군요.”
사내가 찍은 사진을 바라보며 잘 나온 사진을 거르자 지환은 씩 웃었다.
갑자기 나타나 질척거리는 지환을 바라보다가, 사내는 희원에게 시선을 옮기며 입술을 열었다.
“그쪽도 저분 팬이세요?”
“네네. 팬입니다.”
“그럼 사진 찍으세요. 이런 기회 흔치 않은데.”
“아, 사진은 괜찮습니다.”
괜찮아. 나는 매일매일 4D로 보거든.
공연한 자신감을 보이며 지환이 거들먹거리지만 희원에게 시선을 빼앗긴 사내는 관심이 없다.
희원이 쳇바퀴 선물 받은 다람쥐처럼 웃자 사내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랑에 빠진 얼굴이다.
“예쁘지 않아요? 저분.”
“아, 네. 예쁘네요.”
“너무 예쁜 것 같아요. 혼자만 막 빛이 나고, 어우, 막, 어우, 실물이 더 엄청나네요.”
조명을 받아서일까. 그녀는 집을 나설 때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얼굴이 되었다.
그토록 화장에 공을 들이더니, 성공했네. 지환은 그런 생각을 하며 피식 웃었다.
희원에게 영혼을 조공한 얼굴로 사내는 하트를 쏟아냈다.
“저분한테 가서 진지하게 번호 달라고 하면 안 주겠죠? 그건 좀 오버겠죠?”
“오버 정도가 아니라 그랬다간 잡혀갑니다.”
잡혀간다고 하니 사내가 힐끔 지환을 바라본다.
무슨 헛소리냐는 듯한 표정이다.
“겨우 번호 물어보는데 잡혀가요? 누구한테요?”
“누구긴. 나한테.”
“……예? 댁한테요?”
사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것처럼 지환을 위아래로 훑는다.
니가 뭔데 날 잡아가냐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사내는 아하, 이제야 알겠다는 듯 코웃음을 흘렸다.
“뭐, 그런 거예요? 그쪽이 저분 사생팬? 삼촌팬인가?”
“남편인데.”
“아아. 남편. 남…….”
편…….
사내가 말꼬리를 흐리며 흐리멍덩해진 눈으로 바라보자 지환은 자신의 옷을 툭툭 털었다.
홀로 남겨진 구언은 이 양반이 대체 왜 안 오나,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고.
“가셔서 사진 한 장 찍으시죠. 우리 와이프 이제 곧 집에 갈 시간인데.”
“아…… 네…….”
“따라와요.”
지환은 온갖 멋짐을 발끝에 싣고 그녀를 향해 돌진하듯 걸어갔다.
자신의 아내에게 영혼을 조공한 사내를 뒤에 매달고.
“부인!”
“……어? 뭐야! 벌써 왔어?!”
사진을 찍어주던 희원이 돌아보며 눈을 동그랗게 뜬다.
‘부인’이라고 하자 둥글게 둥글게 모여 있던 사람들 중 남자 절반이 떨어져나간다.
그녀의 유명세만큼 기혼이라는 정보는 널리널리 전파되지 않았음이 심각하게 안타까운 지환이다.
흥, 지환은 더욱더 눈에 불을 켜며 그녀 가까이에 다가섰다.
약간의 취기가 있는 까닭 때문인지, 그녀는 평소보다 더욱 과격하게 그를 반겼다.
“언제 왔어어어어. 지금 온 거야?”
“차차 설명하고 일단 이분 사진 좀 찍어드려. 팬이래.”
지환이 뒤를 돌자 가까이서 그녀의 실물을 영접한 사내가 황송하다는 듯서 있다.
희원은 두 번째 쳇바퀴 선물을 받은 다람쥐처럼 웃었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찍어드릴게요.”
“어…… 그럼…… 좀…… 네…….”
사내가 쭈뼛거리며 다가서자 지환이 휴대폰을 받아들고 사진을 찍어 주었다.
슬금슬금 지환의 뒤로 사람들이 줄을 선다.
“사진 잘 간직하시고 번호는 따지 맙시다.”
“네. 덕분에 사진 잘 찍었습니다.”
지환의 엄포에 고개를 끄덕이며 사내가 사라지고, 공간은 다시 포토존이 되어버렸다.
그녀의 사생 팬이자 성공한 덕후.
피리 부는 남편이었다.
*
“아이고 삭신이야…… 안 쑤시는 곳이 없네…….”
지환과 함께 귀가한 희원은 앓는 소리를 끙끙 내었다.
남편을 따라 구언과도 만나고, 그곳에서도 가볍게 술잔을 기울이다가 집으로 나선 것이다.
지하 주차장에 도착한 두 사람은 나란히 뒷좌석에서 내렸다.
눈을 뜨는 둥 마는 둥, 희원은 급격하게 밀려오는 피곤에 비틀거렸다.
“아아…… 피곤해…… 몸이 마음을 따라주질 않아…….”
“취했어?”
“아니, 취하진 않았는데 너무 피곤해. 늦게까지 노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어.”
밤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그녀는 생각처럼 늦게까지 놀 수 없는 체력에 탄식했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오늘 밤을 불태워보자! 시작엔 의욕적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둘 지쳐 나가 떨어졌다.
“다들 앉아서 옛날 같지 않다고 얼마나 한탄했는지 알아?”
“매일 춤추고 운동하면서 그렇게 힘들어?”
“아, 그거랑은 또 다르네. 나중엔 진이 다 빠져서 다 같이 말을 잃었어.”
멍하니 정신줄을 놓는 동료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단다.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놀고 싶었지만, 내일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되어버렸다고.
에휴. 희원은 비틀비틀 걸음을 옮기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업어줄까?”
“아? 진짜?”
기껏해야 지하 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를 타는 일만 남았는데, 업어주겠단다.
거절 모르는 희원이 눈을 반짝 빛내자 지환은 앞으로 조금 걸어가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았다.
“업혀봐. 업어줄게.”
“아, 뭐, 걸어가도 되긴 하는데. 업혀갈 정도는 아닌데.”
“그럼 걸어가든가.”
“아, 아! 업혀! 업혀! 지금 업힌다고!”
희원이 일어서려는 지환을 억지로 앉히며 주변을 둘러보더니, 풀썩 그의등에 안겼다.
“잠깐만, 너 지금 치마 입었잖아.”
“늘어나 늘어나. 엄청 잘 늘어나.”
희원을 들어 올리던 지환은 그녀가 입고 있는 코트가 잘 내려왔나 확인하고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 유치하고 닭살스러운 애정행각에 본인도 민망한지 뒤에 매달린 그녀가 웃는다.
지환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힐끔 고개를 돌렸다.
“왜 웃어?”
“그냥. 나이 먹고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서.”
줄줄줄 그녀가 내려가는 느낌에 지환이 훌쩍 그녀를 반동으로 올렸다.
몇 층이나 내려오나, 엘리베이터 층수를 확인하며 지환도 웃었다.
“그래. 나도 내가 나이 먹고 이런 짓 가능할 거라고는 생각 안 했으니까.”
“우리 좀 유치한 것 같아. 안 그래요?”
띵동,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문이 열린다.
붙어 있는 거울로 한 몸이 된 두 사람이 비친다.
엘리베이터에 올라선 지환은 비스듬하게 서며, 거울에 희원이 보일 수 있도록 했다.
코알라 새끼처럼 자신에게 매달려 거울을 들여다보는 희원을 응시하다가 지환은 미소 지었다.
집으로 올라가는 짧은 순간.
거울에 반사되는 서로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두 사람은 뜻이 같은 웃음만 주고받았다.
내 얼굴을 바라보듯 네 얼굴을 바라보다가ㅡ
집 앞에 내려서는 그녀가 그의 손을 대신하여 비밀번호를 눌렀다.
“아아, 다 왔다아.”
바깥에서 머물다가 들어온 자들만이 알 수 있다는, 역시나 세상에서 제일
편한 우리 집이 등장한다.
희원이 매달린 채 신발을 벗어 현관에 툭툭 떨군다. 지환은 그녀를 업은 채
로 거실에 들어서 소파에 내려주었다.
약간은 아쉽다는 듯 희원이 올려보자 지환은 허리를 두드렸다.
“흐어, 부러질 뻔했네.”
“아오. 그렇게 부실해서야 되겠어?”
희원이 입술을 삐죽거리자 지환은 일부러 허리를 두드리던 움직임을 멈췄다.
즐거운 에너지를 몽땅 쏟고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축, 늘어진 모습을 하고는 소파에 드러누웠다.
“대체 그 안에서 뭘 어떻게 하고 놀았는데 녹초가 되었어?”
“엄청났죠. 다들 그렇게 모인 건 오랜만이었으니까.”
희원이 힘들지만 모처럼 즐거웠다고 말하며 웃자 지환은 재킷을 벗으며 소파에 앉았다.
그녀가 꼬물거리며 곁으로 다가오더니 무릎에 촥, 하고 달라붙어 눕는다.
이젠 자동 반사다.
“……행복해.”
그녀에게 무릎을 내어주고 다정하게 머리를 쓸어 넘겨주던 지환은 손길을멈칫, 했다.
문득 그녀의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은 맥락이 없었지만 그래서 더욱 깊게다가왔다.
“행복해. 그냥 순간순간 갑자기 막 행복해. 설레고, 웃음이 나.”
중얼거리던 그녀가 눈을 뜨며 위를 올려다본다.
지환은 고개를 더 내리며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남편. 내일 하루 종일 우리 뭐 할까?”
“글쎄, 부인하고 싶은 걸 해야지.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음. 나는요, 내일 하루 종일 침대와 한 몸이 되고 싶어. 지금 너무 힘들거든.”
“나랑 한 몸이 되어야지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아, 몰라. 힘들어. 그냥 하루 종일 누워서 남편이 끓여주는 라면이나 먹고
뒹굴거리고 싶어.”
……부부니까 할 수 있는 편안한 내일을 꿈꾼다.
그녀의 소박한 상상에 지환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해.”
“날이 추우니까…… 이불 밖은 위험하단 말이야…….”
희원이 편하다는 것처럼 몸을 뒤척이며 느리게 말하자 지환은 고개를 조금
더 내려 그녀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이윽고 입으로, 목덜미로 내려가던 그는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맞아. 이불 밖은 위험해.”
“…….”
“그런데 아마, 이불 속은 더 위험할 거야.”
희원은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2019. 5. 9. 88. 부부의 길, 완벽한 쇼윈도 : 네이버웹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