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 부부의 길 (88/98)

88. 부부의 길

“날씨 좋ㅡ다!”

입국 수속을 마친 지환은 공항을 빠져나오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그마한 캐리어를 끌고 따라 나오던 희원은 그가 바라보는 하늘을 따라 바라보았다.

마치 PC 모니터 속 바탕화면처럼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

“남편, 하늘이 너무 예뻐.”

“그러니까 말이야. 예술인데?”

두 사람은 움직이는 것도 잊고 한참이나 하늘을 응시했다.

고개만 들면 마주할 수 있는 하늘이지만 이렇듯 높고 푸른, 선명하고 쨍한

날씨는 체감하기에 오랜만이라ㅡ

코끝을 스치는, 약간은 낯선 이국땅의 냄새.

한국 땅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그림 같은 꽃과 나무.

퍽퍽한 기색 하나 없이 느릿한 몸짓에서 여유가 흐르는, 현지 사람들의 모습.

“남편. 하늘 구경은 이제 그만하고 이제 슬슬 갈까?”

“아아, 그럽시다. 가야지.”

두 사람은 괌에 도착했다.

뒤늦은 신혼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한 뒤, 사전에 입을 맞춰보기라도 한 것

처럼 이곳을 함께 선택했다.

그녀는 홀로 빚어낸 기억 속에 그를 초대하고 싶었고.

그는 함께 해주지 못해 못내 미안했던 마음을 씻고 싶었다.

“희원아, 일단 렌트부터 하자. 저쪽으로 가볼까?”

“저쪽으로 가면 돼? 어떻게 알아?”

“왜 몰라? 저쪽이지. 따라오시죠.”

지환이 대번 길을 찾자 희원은 당황하며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낯선 곳에 떨어지면 조금 헤맬 줄 알았더니 오히려 앞장서서 귀신같이 길을 찾는다.

엇. 미심쩍은 표정으로 따라 걷다 보니 정말 렌터카 상담소가 나온다.

“서지환 씨. 괌에 처음 온 것 맞아?”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처음이라니까.”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한 번에 길을 찾아? 이건 무슨 조화야?”

“버스 타는 사람들 빼고는 다 이쪽으로 걷잖아. 그럼 이쪽에 뭐가 있다는거지.”

“아…….”

아…… 눈썰미 대단하다…….

희원은 렌터카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는 지환의 뒷모습에 눈을 빛냈다.

‘검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빼면, 평상시 남편은 어딘가 약간

모자란 것 같은 포스를 풍기곤 했다. 

뉴스를 보다가 가끔 관련 법규를 버릇처럼 중얼중얼거릴 때 빼고는 뭐랄

까, 우리 남편 정말 검사 맞나 싶을 정도로 허점투성이였으니까.

“우리 남편 정말 검사 맞나 봐. 다시 봤어.”

타고난 길치인 희원이 옆에 바투 서서 눈을 빛내자 지환은 여권을 꺼내 들다가 피식 웃었다.

길 좀 찾았다고 직업까지 인정해주겠단다.

하긴, 내비게이션 없이는 친정도 운전해서 찾아가지 못할 천하의 길치인

희원이 보기엔 대단할지도 모르지.

“봤지. 남편이 이렇게 똑똑하다. 평소엔 내가 감추고 사는 거야. 당신이 나의 똑똑함을 부담스러워할까 봐.”

“앞으론 감출 거면 적당히 감춰. 뇌가 해맑아도 너무 해맑은 것처럼 굴지말고.”

“…….”

지환은 희원의 일침에 입술을 꾹 닫으며 상담 의자에 앉았다.

복잡한 절차는 아니었고, 상담사의 안내에 따라 지환은 계약서를 작성했다. 

사인하라는 곳에 사인하고 건넬 줄 알았더니 들고 신중하게 읽는다.

희원은 팔짱을 끼고 그의 뒤에 섰다.

“계약서에 뭐라고 적혀 있는지 알고 보는 거야?”

“알려고 보는 거야.”

“……진짜 무슨 말인지 보면 알아?”

“허, 이 여자 좀 보게. 남편의 영어 실력을 뭐로 보고. 당연히 읽을 줄 알지,이 사람아.”

“진짜? 정말? 이걸 다?”

오오. 희원은 2차로 놀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주 깨알 같은 글씨로 자잘하게 적힌 영어 계약서를 꼼꼼하게 훑으며, 전부 이해했단다.

지환은 눈빛이 변한 희원을 힐끔 올려보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읽을 줄은 아는데 말할 줄은 몰라. 내가 바로 주입식 교육의 산물이지.”

기다리던 상담사에게 문제없겠다며 계약서를 건넨다. 

희원은 그의 뒤에 서서 크게 웃었다.

상담사는 지환이 건넨 종이를 툭툭 치며 정리하고 복사하다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신혼여행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지환이 그렇다고 말하자 상담사는 눈썹을 크게 추켜올렸다가 내리며 아주좋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곳에서 멋진 추억을 만들길 바랍니다. 두 사람의 앞날에 축복이 있기를.]

[감사합니다. 돌아오는 날 또 뵙죠.]

끝으로 지환에게 차 키를 건네주며 상담사가 축언을 전하자 지환은 화답했다.

두 사람은 차량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 남은 일정 동안 발이 되어줄 차량에올라탔다.

“희원아 이제 갈까? 일단 숙소로 가자.”

“오케이, 콜!”

이것저것 차량 버튼을 확인한 지환이 차량의 뚜껑을 열자 희원의 입이 쩍벌어진다.

“여, 열린다! 뚜껑이 열린다아아아!”

희원은 저도 모르게 소리치며 두 팔을 하늘 위로 올렸다.

쭈욱 뻗은 두 팔이 하늘과 맞닿을 것만 같아, 희원은 환호성을 질렀다.

……화창한 날씨, 친절한 사람들. 얼굴을 스치고 가는 보드라운 바람.

시야를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도로 위는 막히는 일 없이 한산하다.

이제 막 시작하는 신혼부부들을 반기는 이곳의 모든 것은 달콤하게 여겨졌다.

“가는 동안 노래 틀어줄까?”

“아, 좋지! 너무 좋지! 바람 진짜 너무 시원해!”

함께하는 여행이지만 나보다는 그대가 더 많이 행복하고 예쁜 추억을 담아갈 수 있게 노력해야겠다고,

서로는 그런 생각을 했다.

남들보다 늦은 신혼여행인 만큼, 조금 더 특별하고 행복한 기억이 될 수 있길.

이 순간 두 사람은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

엄마.

아이를 낳는다는 건 어떤 일이야?

“얘들은 잘 도착했나 모르겠네.”

희원의 어머니 임정순 여사는 중얼거리며 시아버님의 서재를 열고 들어갔다.

청소를 할 요량으로 들어선 임 여사는 시계를 힐끗 바라보았다.

딸아이는 일 때문에 밀려 갈 수 없었던 신혼여행을 난데없이 가게 되었다며, 얼마 전에 집엘 혼자 찾아왔다.

언제나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던 엄마와 딸은, 오랜만에 둘만의 시간을 가

지며 소소하거나, 혹은 깊은 속내를 털어놓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누다가 여전히 아이를 낳고 싶지 않느냐 조심히 묻자,

아이 문제는 정말로 잘 모르겠어, 엄마.

딸아이는 눈을 내리깐 채 조용히 답했다.

그래. 어려운 일이다.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아라.

엄마는 딸아이의 어깨를 다독였다.

비록 원하는 답은 아니었지만 이제 막 결혼을 시작한 아이들에게 어떠한 자극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예전엔 뚝 잘라 안 낳겠다더니, 잘 모르겠다는 걸 봐서는 조금 마음이 움직인 모양이네.”

임 여사는 중얼거리며 피식 혼자 웃었다.

결혼, 임신, 이런 이야기만 나와도 입에 거품을 물며 눈에 불을 켜고 거부

하던 딸아이의 지난 모습이 엊그제 같은데.

엄마.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르겠어. 뭘 원하는 건지 자꾸 바뀌어.

엄마는 나를 낳고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었어?

아직은 완벽하게 해갈되지 않은 고민과 염려를 눈동자에 가득 담고, 딸아이는 물어왔다.

그냥 내 인생을 살걸 그랬다고 후회한 적,

엄마는 정말 없었어?

아이가 무엇을 고민하는지, 무엇을 어려워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엄마는 아이가 뱉은 질문의 끝에 조용히 아이의 손을 잡았다.

그러곤 언제가 써두었던 편지를 봉투에 넣어 건넸다.

신혼여행지에 가서 쓰라고 얼마간의 비상금을 함께 넣어주며, 편지 또한

그곳에 가서 열어보라고.

“이제라도 신혼여행을 가고. 내 기분이 다 좋네.”

임 여사는 잠깐 아이들 생각을 하다가 빙긋 웃었다.

하루하루, 서툰 방식이나마 가족의 울타리를 만들어가는 딸아이의 눈빛이

변하고 있음을 느낀 엄마는 두 사람의 사소한 변화를 무척이나 반겼다.

처음보다 더 많이, 서로에게 조금씩 더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엄마

는 더 바랄 것이 없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나저나 아버님은 어딜 가셨지. 요즘 출타가 잦으신데, 말씀도 없으시고.”

임 여사는 책 사이사이의 먼지를 털어냈다.

요즘 시아버님의 바깥나들이가 평소보다 더 잦아, 오늘도 아버님의 서재는 텅 비어 있다.

혈압이 들쑥날쑥한 시아버님의 책상에 손녀 희원이가 선물해드린 혈압기가 놓여 있다.

마른 수건으로 혈압기 위를 닦아낸 임 여사는 수순대로 아버님 책상 아래

휴지통을 비우고, 책상 위를 정리했다.

별생각 없이 돌아서 나가려는데, 돌아서는 시선 사이로 커튼 뒤 검은 봉지가 눈에 들어온다.

감춰두려 했으나 커튼이 움직이며 조금 형체가 드러났음이 분명한 봉지. 

임 여사는 봉지를 들었다.

묶인 것을 조심히 풀어 안을 들여다본 임 여사는 입술을 멍하니 벌렸다.

“……이게 뭐야.”

아…… 임 여사는 한동안 눈을 깜빡깜빡거리다가, 뒤로 휘청거렸다.

자신이 매일 아침마다 아버님께 물과 함께 챙겨드린 약이 들어 있던 것이다.

덜덜덜 떨리는 손으로 안을 헤집어 약 봉투를 보니 두어 달 전 처방받은 날

짜가 적힌 약부터, 최근 것까지 들어 있다.

드신 척하고는 드시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검은 봉지를 붙잡은 그대로 임 여사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이고…… 아버님…….”

임 여사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

바다가 바로 보이는, 일전에 그녀가 홀로 지냈던 숙소에 들어온 두 사람은

간단하게 짐을 풀고 호텔 이곳저곳을 누볐다.

“여기서 사진 찍으니까 진짜 배경이 예술이었어.”

“아아. 그랬겠네.”

희원이 멈춰 서며 미리 와봤던 곳을 소개하자 지환은 느릿한 시선으로 공간을 두리번거렸다.

마치 기시감을 느끼듯 공간은 눈에 익었다.

그녀의 SNS로 눈여겨보았던 장소들을 실제로 보게 된 지환은 남다른 반가움에 웃음이 터졌다.

도둑처럼 그녀의 사진을 염탐할 때만 해도, 이곳에 함께 서 있게 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희원아, 사진 같이 찍을까?”

“좋지. 이리 와봐요.”

거짓말처럼 함께 있다.

그녀가 홀로 서 있던 공간에, 내가 있다.

지환은 만감이 교차하는 느낌에 가만히 아내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희원이 익숙한 구도로 휴대폰을 들자 얼굴을 가까이 대며, 지환은 그녀와 사진을 찍었다.

이렇게 차근차근 모든 공간을 돌아다니면서 그녀가 홀로 빚어낸 기억 속에 들어가고 싶어졌다.

사진을 찍고 난 후 지환과 희원은 약속이나 한 듯 손을 붙잡았다.

“이번엔 저쪽으로 가볼래요?”

“좋지. 저긴 뭔데?”

“저쪽으로 가면 분수대가 나와. 동전 던지면서 소원도 빌고 그래.”

“아아, 거기.”

그래. 거기. 아주 잘 알지.

지원은 희원이 끄는 대로 고분고분 발길을 옮기며 분수대를 떠올렸다.

그때 그녀의 SNS 속, 분수대 앞에 서서 동전을 던진 사진 아래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동전을 던지며 나는 빌었다.이 또한 지나가리라.]

“여기야. 여기 분수대. 예쁘죠?”

“그래, 예쁘다. 여기였구나.”

……이 또한 지나가리라.

혹시 그거 아니.

그때 그, 너의 짧은 문구가 내 마음을 밟고 가더라.

“이곳에 동전을 던지며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대요.”

“아아, 그래.”

너의 인생에서 내가 끝나고 말기를,

지나가고 말기를 너는 얼마나 원하고 바랐니.

자그마한 동전 하나에 온 마음을 실어 던지며, 제발 피해 갈 수 있기를. 

제발 고요해질 수 있기를.

“우리 온 김에 동전 던지면서 소원 빌어볼까? 남편, 동전 가진 것 있어?”

“잠깐만. 있을 거야.”

……그때가 이렇게나 선명하다.

그것이 참 감사해, 새삼스럽지.

결국 너는 그때를 지나치고, 바람대로 무사히 지나왔고,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들이 되어 이곳에 함께 있게 됐음을.

“아아. 있다. 여기.”

“우리 같이 던질래요?”

“그럽시다, 부인.”

지환은 빙그레 웃으며 아내에게 동전 하나를 건넸다.

아내는 마치 신께 닿는 수단처럼 가만히 동전을 손에 쥐고 눈을 감는다.

지환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중얼중얼 조용히 속삭이며 소원을 빈 그녀는 다시 눈을 뜨고 동전을 던졌다.

풍덩, 동전은 약간의 출렁임을 끝으로 가라앉았다.

“내가 있잖아요, 여기서 처음에 빈 소원이 뭔 줄 알아?”

“……아니.”

“이 또한 지나가리라. 이렇게 빌었었어.”

지환이 모른 척하자 희원이 솔직하게 답하며 웃는다.

“그땐 정말 막막했거든요. 서지환이라는 사람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내

가 할 수 있을까, 무섭다. 이런 생각 하면서 그래도 벗어나야 한다면 도와달라고 빌었어.”

“지금은, 뭐라고 빌었는데?”

“알고 싶어요?”

희원이 고개를 돌리며 바라본다. 맞춰보라는 것처럼 눈을 빛낸다.

지환은 동전 하나를 쥐고 가만히 서 있다가 멀리 던졌다.

퐁당, 그가 던진 동전도 고요히 가라앉는다. 

잠시 분수대를 말없이 바라보던 지환은 희원에게 시선을 돌리며 입술을 열었다.

“말해봐. 뭐라고 빌었는지.”

“이제는 지나가지 말라고 빌었어.”

“…….”

“더 바라는 거 없으니 지금처럼 지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어. 사람 참 간사하죠, 손바닥 뒤집듯이 소원이 변해.”

희원이 민망하다는 듯 웃으며 말하자 지환은 엷은 웃음을 지으며 답을 대신했다.

다음 장소로 이동할까, 지환이 그녀에게 턱 끝으로 방향을 가리키자 그녀가 밉지 않게 눈꼬리를 올린다.

“서지환 씨는 말 안 해줄 거야? 치사하게?”

“뭘?”

“동전 던지면서 뭐라고 빌었는지 말 안 해줘?”

“아아. 그거.”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함께 오른발을 내디뎠고, 다음 발을 나란히 했다.

“제 아내가 뭐라고 빌건 간에 이루어지게 해주세요. 라고 했어.”

둘 사이를 비추는 조명은 어찌나 화려한지, 깊은 밤은 무색하기만 했다.

지금 이 순간, 세상에 더 아름다운 것은 무엇인가.

“그게 내 소원이야.”

감히 없을 것만 같았다.

*

밤에 취하고 빛깔 좋은 칵테일을 몇 잔 나눠 마신 두 사람은 객실로 올라왔다.

차례대로 씻고 나온 두 사람은 밤바람이 부는 테라스에 앉아 바다를 향해

시선을 주며 맥주를 마셨다.

이런 이야기를 해본 적이 있었나, 싶은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갔고.

가정을 위해 서로가 노력해야 하는 일, 우리에게 현재 부족한 일에 대해 진지한 대화가 진행되었다.

언제나 웃음만 주고받던 두 사람에게 처음 있는 일이었다.

“미래를 위해 돈을 열심히 모아야겠어. 난 그런 일에 젬병인데, 남편이 맡아서 관리할래?”

“그런 쪽으로는 내가 좀 더 꼼꼼할 것 같다. 내가 할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단 목표 금액 협의하고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저축을 좀 늘려야겠지. 당

신 수입이 일정하지 않으니까 고정수입 위주로 해봅시다.”

“그러게요, 난 수입이 일정하지 않아서 미래를 계획하기가 힘들어.”

“괜찮아. 남편이 벌잖아.”

“빚이나 갚아.”

“넵. 하, 밥값은 갚아도 갚아도 자꾸 늘어나는 것 같은데 이거. 느낌 탓인가?”

그가 단박에 대답하자 희원이 웃는다.

어딘가 정돈되지 않고 유연한 희원의 삶에 비해, 미래 계획까지 가능한 지

환의 삶은 상당히 대조적이었다. 

계산과 계획에 능력 없는 그녀에 비해, 그는 탁월했다.

“그럼 난 뭘 할까요? 서지환 씨가 우리의 미래 계획을 세우는 동안 난 뭘 맡아서 하지?”

“내가 너무 신중해서 선택하지 못하는 일들을 당신이 바로바로 처리해주잖

아. 그 정도 역할이면 훌륭하지.”

“그럴까? 그럼 난 그거면 될까? 그건 자신 있거든.”

간혹은 너무 신중해서 선택을 하지 못하는 지환의 성격과는 달리, 희원은 시원하게 선택했다.

후회도 드물고, 실패하는 경우도 드물었다.

이만하면 완벽한 호흡을 자랑하는 거라며 서로는 마주 보고 웃었다.

“참, 나 엄마가 여행 가서 쓰라고 용돈 줬다?”

“장모님이?”

지환이 맥주를 삼키며 묻자 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가 써준 편지도 읽었지만, 어쩐지 그녀는 말이 떨어지질 않았다. 

“감사해서 어쩌지. 장모님 선물 좋은 거 사가지고 가야겠다.”

“내일은 쇼핑해. 가족 선물도 좀 사고.”

“그래. 내친김에 18불 넥타이 산 곳도 데려가 줘. 한 무더기 사다가 동료들 좀 나눠주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느낌엔 완연한 부부 같다.

이제 막 친해지고 이제 막 알아가는 사이가 아니라, 우리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공개해버린 듯한 느낌.

비어버린 맥주캔을 쥐고 지환이 테라스 밖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검은 바다는 철썩거리는 소리만 내어줄 뿐, 사방이 컴컴한 까닭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외려 소리만 들려오는 지금이 분위기를 더 차분하게 만들어주었다.

희원은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지환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누차 말하지만 그렇게 쳐다본다고 닳지 않아. 난 얼굴에 철판을 깔았거든.”

“이곳에 남편이랑 같이 있으니까, 기분이 이상해. 나 혼자 여기 앉아서 밤바다 바라봤었는데.”

“여기 앉아서 바다 보면서 내 생각, 했어?”

“……했죠.”

그녀의 솔직한 대답이 마음에 든다는 것처럼 지환이 흘깃 바라보며 흔연한

미소를 짓자 희원은 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잊고 싶어서 도망쳐 왔는데, 잘 안됐어. 실패하고 돌아갔지 뭐.”

“그런데 왜 나 안 받아줬어, 처음에.”

“약 올라서. 고생 좀 해보라고.”

“거짓말 좀 해라. 이럴 땐. 사람이 뭐 이렇게까지 솔직하냐?”

“그게 제 매력이랍니다.”

그녀가 소리 내어 웃자 지환은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고개를 돌렸다.

불시에, 예고 없이, 그는 그녀의 입술을 삼키듯 입술을 맞댔다.

검은 바다의 소리는 아주 일정하게 밀려오고, 다시금 사라지고ㅡ

“안으로 들어갈까?”

그가 다정하게 물으며 어깨를 감싸 안는다.

조금 더 공격적인 태도로 그가 희원의 목덜미에 입술을 파묻자 그녀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아아. 그래요, 좋아. 다 좋은데.”

희원이 좋다고 말하자 그는 그녀를 일으켰다.

“있잖아, 남편. 나 오늘 좀 위험한 날인데.”

“나도 위험해, 지금. 잔뜩 화가 났거든.”

침대까지 가는 길고 꽤 멀고, 그의 행동은 과감해졌다.

희원은 아찔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며 다시 입술을 열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나 진짜 위험한 날이라고.”

“……무슨 말이야.”

침대 매트리스에 무릎이 꺾인 희원이 뒤로 넘어간다.

포개지듯 침대로 넘어진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워지고, 비로소 시선이 닿았다.

……다시금 선택의 기로에 선다.

“들은 그대로야. 오늘 위험한 날이라, 서지환 씨 선택해야 해.”

우리는 어떤 부부가 될 것인가.

“남편, 어떡할까?”

그녀는 묻지 않고 넘어갈 수 없는 질문에 닿았다.

그리고 그에게 넘겨주었다.

“우리 피임, 할까요?”

피할 수 없는 숙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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