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지워진 만큼 선명해지는
열린 문틈으로 바람이 들어온다.
바다의 소리가 조금은 아득하게 밀려온다.
침대에 포개진 두 사람은 가만히 숨죽인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먼저 입술을 연 쪽은 희원이었다.
“우리 어떡할까? 날짜가 조금 위험한데.”
“……아, 미안. 내가 너무 말이 없었지.”
지환은 이제야 정신이 든다는 것처럼 몸을 일으켰다.
그가 조금 비켜서 침대에 걸터앉자 희원은 따라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둘 사이를 뜨겁게 달구던 분위기는 삽시간에 내려앉고ㅡ
“괜찮아, 서지환 씨. 난 그냥 남편의 의견을 듣고 싶었던 것뿐이야.”
조금은 모른 척하고 싶었던,
약간은 미루고 싶었던 이야기를 공간 사이에 두었다.
“괜찮아. 그렇게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니까.”
그녀가 달래듯 스르륵 몸을 밀며 다가와 무릎에 눕는다.
지환은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당신은 어떤데.”
그녀의 머리칼을 가만히 쓸며, 이번엔 그가 물었다.
절대적으로 아이는 낳을 생각이 없다던 아내였으니까, 물으나 마나 싶은
질문이긴 했지만 어쩐지 지금 그녀의 분위기는 묘한 구석이 있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
“잘 모르겠어.”
잘 모르겠어. 그녀는 뜻밖의 말을 꺼내 그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자세가 불편한지 조금 몸을 뒤척이다가, 그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
“있잖아요, 사실 내가 왜 그렇게까지 아이를 낳기 싫다고 말했을까 생각해봤어.”
“지금 하는 일을 못 하게 될까 봐 그런 거지.”
“아니야. 무용은 아이를 낳고도 얼마든지 할 수 있어. 남편이 뜻을 합쳐 도와준다면.”
경력단절은 꺼내놓기 쉬운 변명에 불과했다.
남들을 이해시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였으니까.
“생각해보니 처음부터 그저 난 집안 어른들께 결혼과 임신을 권유받는 게 싫었던 것 같아.”
처음엔 종용당하는 것이 싫었다.
반항심과 오기가 동반되었다.
내 할아버지가, 내 부모님이 원하는 대로는 살아주지 않을 거라고, 마음이 거부했다.
“그런 마음이었던 것 같아. 나는 할아버지와 달라요. 나는 엄마랑 달라. 나
는 평범한 사람들과 달라도 많이 달라. 절대로 똑같이 살지 않을 거야, 이런 마음.”
비혼이 나의 뜻이며 신념이라고 우겼지만 사실은, 살아보라는 대로 살고싶지 않았을 뿐이다.
나는, 특별하니까.
“누구보다 내가 특별한 줄 알고 살았는데, 그래서 남들과는 다른 아주 멋진
인생이 기다리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난 지극히 평범했던 거죠.”
“당신 특별해. 얼마나 특별한 사람인데.”
“특별한 내가 특별하게 사는 게 아니라, 평범한 나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사람이랑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 건가 봐.”
결혼을 하고 보니 조금 더 넓은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그녀는 말했다.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모든 것이 순리대로 흘러갈 거라고 말하던 엄마의 잔소리는 예언과도 같았다.
“엄마가 그때 내게 했던 말 중 틀린 말이 하나도 없어. 요즘 생각하다 보면 소름이 끼친다니까.”
아, 맞다.
희원은 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냈다.
지환에게 보여주려는 듯 조심스럽게 펼치며, 그녀는 약간의 미소를 머금었다.
“엄마가 나한테 써준 편지인데, 남편도 보여주고 싶어.”
“보여줘.”
희원이 편지를 내밀자 지환은 단숨에 읽었다.
읽는 동안 고요했던 눈빛은 점차 일렁이더니, 다 읽고 난 후엔 복잡해 보였다.
희원은 지환의 손에 있는 편지를 다시 가져가 눈으로 읽으며, 입술을 열었다.
“결혼한 뒤로 꿈은 자꾸 바뀌고, 좋거나 싫은 것들도 변하고, 이상향으로 생각했던 내 미래도 자꾸 변해.”
희원아. 엄마야.
우리 딸에게 언젠가 이야기를 해주고 싶은 게 있어서 깊은 밤 몇 자 적어본다.
“어쩌면 엄마도 나와 같은 생각에서 출발하고, 아이를 낳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생각을 거쳐서 흘러간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
나이가 들면 저절로 알게 되는 것들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따뜻함의 감사함이란다.
따뜻함은 절대로 노력 없이 만들 수 없고, 또 멈추면 유지할 수 없어.
그것이 공간의 온도이건 사람의 온기이건 간에 말이야.
따뜻함이란 삶의 근간이자 노동의 이유,
사람이 함께 사는 절대적이고 지배적인 이유란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생각이 특별한 게 아니라, 누구나 한 번쯤은 해본 생
각인 것 같아서. 뭐랄까, 난 굉장히 평범하게 잘 살아가고 있구나, 안심도됐고.”
누군가에게 따뜻한 네가 되어라.
네가 나누어준 따뜻함을 안고 다시 네게 군불이 되어 돌아올 그런 사람을만나라.
내 것도 네 것도 아닌 따뜻함에 함께임을 기억할, 그런 사람을 만나고 되어라.
“있잖아, 남편.”
“그래, 말해.”
“우리 따뜻하게 살자. 몸도 마음도 따뜻하게.”
그렇게 심신이 따뜻해지면 기댄 마음 사이로 둥근 세상이 마침내 열리는데ㅡ
“아이 문제는 이제, 남편에게 맡길게. 난 내 운명에 맡기기로 했으니까.”
딸아.
그게 바로 네 아이요,
네가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란다.
*
“저, 계장님.”
“예. 검사님.”
꿀 같았던 여행을 끝으로 지환과 희원은 다시 일상에 복귀했다.
책상에 앉아 잠시 생각에 잠겼던 지환이 부르자 최금호 계장이 고개를 돌리며 바라본다.
“계장님. 결혼생활 행복하십니까?”
“……예?”
예? 최 계장은 그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 하는 표정을 지으며 지환을 바
라보았다.
“검사님 결혼생활이 행복하시다고요?”
“아뇨. 행복하시냐고요.”
“아아. 질문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지환이 깍지 낀 손으로 턱을 받치며 당장 답을 내어놓으라는 식의 표정을
짓자 최 계장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커피를 들고 느릿느릿 다가오더니,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검사님. 지난 오랜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궁금해본 적 없던 제 결혼생활이
갑자기 왜 궁금하십니까?”
“질문은 제가 했습니다. 답 좀 해주십시오.”
“그런 건 신혼 때나 오고 가는 질문입니다. 검사님께나 어울리는 질문이라는 뜻이지요.”
“하……, 야박해. 알겠습니다. 이거 드세요.”
지환이 눈을 가늘게 뜨며 최 계장을 바라보다가 서랍을 열어 쿠키 봉투를꺼냈다.
아침에 정윤이 두고 간 쿠키를 바라본 최 계장은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왕 검사님께서 주시는 거니 잘 먹겠습니다. 커피를 맨입으로 마시려니 입이 껄끄러워서요.”
“저는 지금 계장님이 껄끄럽습니다. 빨리 답변 주십시오.”
지환이 어서어서 답을 내어놓으라는 듯 책상에 똑똑 노크를 하자 최 계장은 쿠키 봉투를 뜯었다.
이미 훌쩍 커버린 아이들과 아내.
최 계장은 평범한 직장인이자 집안의 가장이었다.
“딱히 행복할 것도 없고, 딱히 불행할 것도 없습니다. 답변이 되었습니까?”
“행복할 것도 없고, 불행할 것도 없다…….”
“집사람과 얼굴만 마주 봐도 웃음 나던 시간은 지난 것 같고. 앉아서 하는
얘기의 8할 이상은 아이들 이야기다 보니 요즘 말로 꿀 떨어진다는 세월은 오래전에 졸업했지요.”
“졸업…….”
“바쁘다 보니 대화할 시간도 없어요. 며칠씩 말다운 말 한마디 주고받기 어려울 때도 있고요.”
“뭔가 씁쓸한데요. 가장 가까운 사람과 말 한마디 주고받기 어려운 일상이라니.”
“검사님. 인생의 장르가 항상 로맨스일 수는 없습니다. 지나다 보면 다큐도
나오고, 미스터리도 나오고, 판타지도 나오고, 별별 장르가 다 나오니까요.”
최 계장은 커피를 한 입 삼키며 말을 이었다.
“집사람이 이제는 제 피부처럼 여겨지다 보니 말을 섞지 않아도 말을 섞고있는 것 같을 때도 있습니다.”
“아아.”
나의 피부 같은 사람이라. 지환은 최 계장의 표현을 곱씹다가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만약에 자식을 낳게 된다면 아내에게 소홀하게 될까요? 혹은 인생이 완전히 바뀐다거나…….”
최 계장은 우적우적 쿠키를 씹다가 꿀꺽 삼키며 지환을 바라보았다.
이제야 지환의 질문을 알아듣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건 설명이 안 됩니다. 누구 말을 들을 것도 없어요. 그냥 해보세요.”
“……예? 해보라고요?”
“예. 해보세요, 검사님. 죽을 때까지 그 궁금증은 안 풀립니다.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말이죠.”
“지금 삶이 만족스럽고 행복한데 더 나은 삶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음. 검사님.”
“…….”
“지금 얻은 것도 언젠간 잃는 법입니다.”
영원히 쥐고 있는 무형의 것은 없는 법이라ㅡ
“쥐고 있는 것에 집착하거나 매달리지 마십시오. 우리가 지금의 삶을 알고
과거를 살아온 건 아니지 않겠습니까?”
“아…… 좋은데요, 계장님.”
어느덧 미지근해진 커피를 털어 마시더니, 최 계장이 쓰레기를 휴지통에 버린다.
“매일매일 행복하다고는 말 못 하겠습니다. 하지만 매일매일 행복하기만
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혼자 있으면 웃을 일 없을 때에도 집사람 때
문에 웃고, 자식 한 번 생각하며 웃는 거죠.”
“내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까요, 자신이 없습니다.”
“아아. 검사님 그건 염려 마십시오. 자식은 검사님이 키우는 게 아닙니다.”
“예? 그럼 누가?”
“돈이 키우거든요. 그러니까 열심히 버세요.”
“아…… 명언이다…….”
최 계장이 명언을 날리며 자리로 돌아가자 지환은 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머리로 생각하면 조금도 진전이 없는 문제.
“차검은 퇴근했나. 물어볼 게 있는데.”
“차 검사님이요? 아까 퇴근하셨습니다.”
“아, 그래요?”
혼잣말을 듣고 정윤의 행방을 알려주는 최 계장의 답변에 지환은 씩 웃었다.
그러나 이내 웃음을 지워버렸다.
“듣기에 검사님 사모님 만나러 가신다는 것 같던데.”
“……제 와이프 말입니까?”
“네. 검사님.”
“하…… 차검 진짜…….”
간다면 간다고 말이나 해주고 가지, 치사하게 혼자 가?
그것도 남의 와이프를 만나러?
지환은 의자에 머리를 기대며 한숨을 푸우우우우 내쉬었다.
지금이라도 정윤의 뒤를 쫓아가서 희원과 함께하고 싶지만 쌓여있는 서류
더미를 보자니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다.
제길, 매번 이래. 현실은 시궁창이야.
“저는 지금 진심으로 퇴근하고 싶습니다. 계장님.”
“저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힘내세요.”
아! 퇴근하고 싶다!
*
이번엔 희원이 먼저 정윤에게 연락을 했다.
저녁 함께 먹자고.
끝내지 못한 일이 조금 남았지만, 정윤은 눈썹을 휘날리며 약속 장소로 출발했다.
괜찮아. 어차피 일은 내일도 쌓일 텐데, 조금 더 쌓인다고 깔려 죽진 않을테니까.
“이렇게 따로 만날 친구가 생겨서 너무 좋다. 진짜 너무 좋은데?”
“저도 좋은데요? 퇴근하고 친한 친구랑 도란도란 저녁 먹고 수다 떠는 거
진짜 해보고 싶었는데.”
“못 해봤어? 왜? 자기도 나처럼 친구가 없어?”
정윤이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자 희원은 웃었다.
“친구들이 어울려 놀 땐 제가 통금이 있어서 못 해봤고, 이제 제가 시간이
좀 되니 다들 결혼을 일찍 해서 아이들 때문에 쉽게 못 나오더라고요.”
“아아, 그렇구나. 그래, 그렇겠다. 결혼한 친구들은 그게 좀 크지.”
쉽게 이해했다는 듯 정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커트머리가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정윤은 얼마 전 미용실을 다녀왔는지 조
금 더 짧아진 머리를 하고 있었다.
큼직큼직한 이목구비가 짧은 머리와 더해져 더 부각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팍팍 좀 먹어. 항상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넌 너무 깨작거려. 마음에 안들어.”
“어우, 언니. 저 진짜 최선을 다해서 먹고 있다고요. 그리고 저 살이 금방
붙는 체질이라 살찌면 빼기 힘들어요.”
“아아. 하긴, 무용하려면 다이어트는 필수지? 몸매 관리.”
“네. 몸이 무거워지면 다치기도 쉬워요. 무릎이 남아나질 않으니까.”
식단 관리는 필수라고. 하루를 많이 먹으면 이틀은 조절해야 한다는 희원
의 덤덤한 말끝에 정윤은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니 왜일까, 세상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없다는 말이떠올랐다.
“어때, 요즘은 행복해? 서검이랑?”
더는 많이 먹으라 권하지 않으며 정윤이 음식을 덜어 자신의 접시로 가져간다.
행복하냐고 물어오는 정윤의 질문에 희원은 물을 마셨다.
“좋아요. 모든 게 다.”
“그래, 좋다니 다행이네. 처음 두 사람 결혼식 갔을 때만 해도 이 결혼 괜찮을까 반신반의했는데.”
“왜요?”
“그냥. 원래 뭐 눈엔 뭐만 보이는 법이거든. 내가 이혼하고 나니까 세상 사람들 다 아름답게 안 보이는 거지.”
말끝에 정윤이 호탕하게 웃는다.
희원은 약간 머뭇거리다가, 용기를 내어 입술을 열었다.
“저, 언니. 이런 질문 실례인 줄은 아는데요.”
“왜 이혼했냐고?”
“……네.”
“흠, 이건 좀 어렵다. 솔직하게 말하면 나도 잘 모르거든.”
응? 모른다고? 이번엔 희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흠, 정윤은 테이블에 턱을 괴며 창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모르겠어. 지금은 잘 생각이 안 나. 뭔가 견딜 수 없을 만큼 결혼생활이 힘
들고 어렵고 했던 것 같은데, 밖으로 꺼내놓을 만한 이유를 못 찾겠어.”
“아…… 희미하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요.”
부부만의 사정, 이야기.
희원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정윤은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뭐에 막 홀린 듯이 빠졌거든. 대책도 없고 눈이 멀었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알 것도 같고, 정신 차려보니 내가 결혼을 했더라고.”
정윤은 말했다. 쫓아다닌 것도, 프러포즈를 한 것도, 잡음이 많던 결혼을
서두른 것도 모두 다 본인이었다고.
“남 형사님의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요? 그건 기억이 나요?”
“아아. 그건 확실하게 기억나지.”
먼 곳으로 시선을 주고 있던 정윤이 뭐를 떠올렸는지 웃는다.
아마도 처음, 전 남편에게 빠져버렸던 날을 떠올린 게 분명하리라.
“어쩌다가 둘이 남았는데 휴대폰만 보더라. 뭘 그렇게 봐요? 이렇게 물었는데.”
‘남 형사님, 뭘 그렇게 봐요?’
‘아아. 야동 봅니다.’
“……그 순간 결혼해야겠다 했지.”
야동 보는 이 남자와 결혼해야겠다.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며 주먹을 말아쥐었다고 한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야동을 본다고 하니 가슴이 쿵쿵 뛰더라. 야한 남
자인 것 같아 더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야구 동영상이었다는 건 후에 알았지만.
희원은 어처구니없는 에피소드에 웃음을 터트렸다. 희원이 웃자 정윤도 따라 웃는다.
“너무 웃겨, 야동 본다고 해서 결혼을 결심했다뇨.”
“섹시했어. 얼마나 섹시했는데. 지금은 신물이 넘어올 것 같은 그 거지 같은 남방 패션도 얼마나 멋있게 보이던지.”
에효. 눈이 멀었어, 눈이 멀었어.
정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시 그날로 돌아간다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아, 그러고 하나 더 있다. 이게 좀 결정적인 사건이었는데.”
“뭔데요?”
“내가 좀 힘든 날이었어. 남 형사네 집에 놀러 갔는데 라면을 끓여주더라고.”
“말로만 듣던 우리 집에서 라면 먹고 갈래? 이건 가요?”
“뭐, 내가 찾아간 쪽이니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하여튼 먹을 게 라면밖에 없다며 끓여줬는데.”
라면이 바글바글 끓어오르는 양은 냄비 앞에 서서, 그가 자꾸 뭔가를 중얼거리더라.
대체 뭘 저렇게 중얼중얼거리는가 싶어서 귀 기울여 들어봤더니ㅡ
“남 형사가 라면을 끓이면서 초를 세고 있는 거야. ‘30, 29, 28, 27……’ 이러면서.”
그때만 생각하면, 가슴이 저릿하다.
14, 13, 12, 11, 10…….
“그렇게 한참 가스 불 앞에 서서 초를 세는 거야.”
3, 2, 1.
정윤아, 라면 다 됐다. 와서 먹어라.
“3, 2, 1. 되니까 가스 불을 끄더라. 이게 무슨 말인지 알아?”
“……그럼요. 알죠.”
“그 30초가 나에겐 영원의 시간 같았어. 그날의 기분은 말로 좀 표현하기 힘든 것 같아.”
라면 하나도 허투루 끓여서 먹이고 싶지 않았던, 그의 마음.
대충 익었다 싶어 가스 불을 끄고 내어주는 게 아니라, 이왕이면 가장 맛있게 끓여서 먹이고 싶었던 그의 마음.
“라면을 그렇게 정성스럽게 끓이는 남자 처음 봤어. 본인이 먹을 라면이었
으면 그렇게 끓이지 않았을 사람인데. 불 앞에 서서 초를 세고 있는 뒷모습
을 보는데 그냥 뭐랄까, 마음이 너무…….”
결심이 섰다.
아아. 이런 당신이라면 결혼해도 되겠다.
이런 당신이라면, 정말이지 결혼해도 되겠다.
“그랬지. 그날 남 형사한테 프러포즈했어. 결혼하자고.”
“언니답네요.”
“그래. 생각해보니 좋은 날도 있었다. 좋은 날도 있었지. 그런데 결혼은 현실이더라.”
서로 너무 다르다는 것을 알았지만 크게 문제 삼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는 상대에게 맞춰야 한다는 것도 알았지만 어련히 알아서 잘 되겠거니, 모른 척했다.
너무 좋아해서 막연히 괜찮을 거라고 미뤄둔 일들이 결국 쌓이고 고여 갔다.
극복이, 되지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가족이어도 갈등이 있는데, 하물며 오랜 세월 타인으로 살
았던 사람과 가족이 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인 것 같아.”
“맞아요. 저도 요즘 그런 생각 많이 해요.”
“가족계획은 있어? 아이는 안 낳기로 한 거지?”
“아, 그게요.”
희원이 잠시 뜸을 들이며 말을 멈추자 정윤은 젓가락질을 멈췄다.
이번엔 희원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한다.
그날, 신혼여행의 밤 중에ㅡ
아이 문제는 당신에게 맡기겠다던 아내의 이야기를 끝으로 남편은 답을 내어주었다.
“언니, 저랑 오빠는 부딪쳐보기로 했어요.”
“응? 뭐를? 뭘 부딪쳐?”
“음. 뭐랄까, 앞으로 남은 우리 운명에?”
희원아,
네가 좋다면 나도 좋다.
“오빠랑 저는 지금보다 더 완벽한 가정을 이루고 싶어졌어요.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어요.”
“아…… 어머, 이건 또 상상 못 한 전개네. 그래? 난 어느 쪽이건 사실 다 찬성이야. 부부 일은 부부가 알아서.”
“네. 그렇게 살기로 했어요.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희원은 귓가에 스며들고 가슴으로 내려앉은 그의 이야기를 떠올려 머리에 새기며, 조용히 웃었다.
마음의 크기와는 별개로 겁이 많고, 변하는 환경이 두려웠던 부부는 마치
한 몸처럼 인생의 다음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미리 겁은 내지 않기로 했다.
네가 좋다면,
나도 좋아.
우리는 어떤 시간을 만나도, 함께라면 두렵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