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더불어 사는 길
“남편, 이리 와봐.”
“왜?”
“글쎄 와보시라니까요?”
한가한 주말 점심. 소파에 누워 TV를 보던 지환은 아내의 부름에 몸을 일으켰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필요한 모양이다. 이젠 아내의 음성만으로 대강
대화의 내용을 선별할 지경이 된 지환은 예감했다.
지금 아내의 상냥한 음성은.
“불렀어? 왜?”
“나 있지, 배고파.”
심부름이다.
“그래? 뭐 시켜 먹을까? 그런데 밥 먹은 지가 얼마 안 된 걸로 아는데.”
“세간의 배꼽시계와 나의 배꼽시계를 동일선상에 놓지 말아줄래? 출출해,
아침 좀 덜먹었잖아.”
“아아. 그랬나? 한 그릇 다 비워서 포식하신 줄 알았습니다.”
“…….”
“그래. 뭐 시켜 먹자. 뭐 먹고 싶은데?”
“배달음식은 좀 부담스럽고, 라면.”
응? 라면?
지환은 예상 밖의 메뉴에 눈을 치켜떴다.
“당신 웬일로 라면이 먹고 싶어? 잘 안 찾아 먹더니.”
“아니, 뭐, 그냥. 안 먹은 지 오래돼서 그런가, 갑자기 먹고 싶어졌어.”
“그래. 라면 정도야 얼마든지 끓여주지. 내가 또 기깔나게 끓이거든.”
주 종목이야. 지환은 강한 자신감을 보이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온종일 침대 지박령처럼 누워 있던 희원은 배시시 웃으며 그가 나가는 걸음을 따라 소파로 걸어 나갔다.
정윤이 남 형사에게 반했다던 라면 끓이는 뒷모습이 자꾸 기억에 남아 몇번이고 곱씹게 되었다.
그러다가, 지환이 라면을 끓이는 모습이 보고 싶어졌다.
사실은 라면이 먹고 싶은 게 아니라.
“어디 보자…… 라면이 뭐가 있나…… 뭘 끓여다가 바쳐야 잘 끓였다고 칭찬을 받으려나…….”
라면 끓이는 모습이 보고 싶다는 게 더 정확한 심경의 표현일 것이다.
저장음식을 이것저것 넣어둔 공간 앞에 서서 지환이 라면을 고른다.
팔을 긁적긁적하며 무릎을 굽혀 앉았다가 일어서며 위에 있는 공간까지 두루두루 살핀다.
“부인, 선호하는 라면이 있으신지요?”
“음. 글쎄요.”
2019. 5. 17. 90. 더불어 사는 길, 완벽한 쇼윈도 : 네이버웹소설
https://novel.naver.com/webnovel/detail.nhn?novelId=740268&volumeNo=90 4/33
희원은 쿠션을 안고 소파에 누웠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정윤이 했던 말들을 되감기했다.
이런 모습이었나.
“그럼 짜장 라면? 주말엔 남편이 요리사라는 슬로건을 남겨주었지.”
“아니 나 국물 라면.”
“그럼 오동통한 건 어때.”
“음, 오늘은 안 당긴다. 다른 거.”
“매운 녀석도 있다.”
“음…… 매운 거 좋은데?”
“오케이. 당첨.”
지환이 라면을 꺼내 든다. 하나를 꺼내 들고는 멈칫, 하더니 뒤를 돌아본다.
감상에 젖은 눈빛으로 지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희원은 예고 없이 돌아선
지환의 행동에 몸을 뒤척였다.
“내가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하나? 두 개?”
“하나면 될 것 같아.”
“오케이.”
흥얼흥얼거리며 양은 냄비를 찾아 올린다. 설명서에 적힌 그대로 정양의 정수기 물을 받아 붓더니 가스불에 올린다.
“부인. 달걀은 넣어드릴까요?”
“좋죠.”
“풀어볼까? 그냥 넣을까?”
“풀어줘. 휘휘 저어서.”
“오케이.”
냉장고에서 달걀을 꺼낸다.
“푹 익혀? 아니면 꼬들꼬들하게?”
“푹 익혀주면 좋겠어.”
“난 꼬들꼬들하게 먹는데, 다르구나. 알겠습니다.”
취향 존중이란 게 이런 걸까. 라면 한 봉지를 들고 꽤나 많은 질문이 쏟아진다.
“김치는 배추? 총각? 뭐가 좋겠어? 둘 다 줄까?”
“남편 뜻대로.”
“그럼 둘 다 먹어 봐.”
귀찮거나 성가실 리 없는 희원은 고분고분 그의 질문에 답을 했다.
자꾸만 정윤의 마음이 전달되는 것만 같아, 중간중간 웃음이 샜다.
김치를 덜어서 접시에 척척 담는다. 와중에 달걀을 풀어 두는데, 손목 스냅이 예사롭지 않다.
“이리 와서 있어요. 불 앞에 있지 말고.”
“거의 다 됐어. 파 넣어줄까? 후추? 뭐 더 첨가하고 싶은 건 없어?”
“응. 없어.”
마음은 부족함 없이 꽉꽉 행복으로 가득 찬다.
라면 하나도 정성스럽게 끓여 주더라던 정윤의 그 마음은, 사실 눈물겨울만큼 행복했던 거였다.
“딱 10초만 더 있다가 끄자. 거의 다 된 것 같으니까.”
……그 마음이란, 이런 거였다.
시간이 다 되었는지 불을 끄고 다시 물어온다. 냄비째 먹을래? 그릇에 담아줄까?
식탁에 앉은 희원은 그가 차려준 라면 한 끼를 받아들고는 지환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식당의 메인 메뉴를 선보이는 셰프의 자부심처럼, 그는 허리춤에 두
손을 올리고는 턱 끝으로 어서 먹어보라 권유했다.
“얼른 먹어. 더 있으면 완전 면이 풀어지겠어.”
“……고마워요.”
“고맙긴. 싱겁거나 짜면 말하고. 뜨거운 물 옆에 뒀으니까 짜면 물 부어서먹어.”
희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라면을 들어 올렸다. 자꾸 기분이 몽글몽글해지는
게, 그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나 있잖아, 정말 결혼 너무 잘한 것 같아.”
“……고작 라면 하나를 끓여줬다고 평소에 듣지 못하는 말까지 듣는 거야?”
“그러니까. 남편이 라면을 이렇게 잘 끓이는 줄 오늘 처음 알았네.”
그래, 사랑이 별거냐.
언제고 내 사람에게 맞출 준비가 되어 있다면 그게 바로 사랑이지.
볕이 따뜻한 어느 날, 그대가 끓여준 라면 한 그릇에 감동받을 수 있다면
그게 사랑이지 별 거 있겠느냐.
희원은 라면을 감아올려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그 앞에 앉아, 그는 딴짓을 하는 일 없이 라면을 먹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간간이 말을 걸어주고, 간간이 물을 따라 주었다.
서로는 누군가와 가족이 방법을 모른다고 했지만,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실은 그랬던 것이다.
*
“형, 인터뷰는 몇 시에 있지?”
후, 후…… 리허설을 마치고 돌아온 구언은 호흡을 정리하며 매니저에게 물었다.
오래전부터 계획되어 있던 해외 공연에 나선 그는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있었다.
일정이 촉박하니 인터뷰는 중간중간 쉴 틈 없이 진행되었고,
“바로 해도 돼. 너 좀 정리되면 한 십 분 뒤에 들어오라고 할게. 지금 대기중이야.”
“알았어.”
그 중엔 영향력 있는 잡지사도 있었고, 방송채널 인터뷰도 포함되어 있었다.
구언은 물을 마시며 땀을 닦았다.
격하게 몸을 움직이고 난 뒤 급격한 몸의 변화를, 그는 좋아했다.
온몸 구석구석이 뜨거웠고 풀리는 느낌이 있었다.
어느 한 곳으로 치중되지 않고 피가 순환하는 느낌.
구언은 자신의 몸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에 집중하며 숨을 차분하게 했다.
인터뷰하러 온 업체를 만나겠다며 매니저가 사라지고 대기실에 혼자 남은
구언은 남은 물을 다 마셨다.
“아, 물이 없나. 아직 부족한데.”
생수가 떨어졌음을 확인한 구언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일어섰다.
옆 대기실에 가서 물을 좀 얻어와야겠다.
“어느 대기실로 가서 물을 얻어야 될까나…….”
구언은 대기실 문을 열고 나서 두리번거렸다. 아아, 저쪽으로 가면 되겠다.
조용한 대기실 복도를 따라 단정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저벅저벅 구
두굽 소리가 반대편에서 들려온다.
저벅. 저벅.
코너 뒤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예사롭지 않게 들려온다.
구언은 왜인지 상대가 궁금해져 구두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대기실이 수두룩한 이곳에, 저런 구두와 어울릴만한 의상을 입었을 사람이 예상되지 않았다.
저벅, 저벅, 조금씩 가까워지는 구두 소리가 코너를 돌고 모습을 드러낸다.
“……어?”
구언은 걷다가 대번에 놀라며 멈췄다.
“Hey.”
상대는 놀라는 기색 없이 멈춰 서며 손을 들고 인사를 건네왔다.
마치 당신을 찾으러 왔다는 것처럼.
당신을 만나기 위해 처음부터 이곳에 걸음 했다는 것처럼.
바로 데니스 한이다.
“대표님이 여긴 어떻게?”
구언이 묻자 인사하기 위해 올렸던 손을 내리며 데니스 한 ㅡ 주혁은 웃었다.
여전히 푹 들어가는 보조개는 가지가지 매력적이다.
“당신의 공연 동영상을 보고 찾아왔지.”
“제 공연을…… 봤단 말입니까?”
“뭐, 이제라도 봤으니 다행이지 않겠나?”
“제 공연 동영상은 왜요? 갑자기?”
“당신을 스카우트하려고.”
“……예?”
주혁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멍하니 벌리는 구언을 바라보며 손
에 든 계약서를 흔들었다.
“한 침대를 쓴 사이인데 그렇게 쉽게 잊을 수 있겠나. 찾아봤는데 당신 너무 매력적이었어.”
“멘트 왜 이렇게 위험하게 치세요. 수위 조절 좀 하시죠, 듣기 아찔한데.”
“대화 좀 나눕시다. 당신도 시간 없고 나도 없고. 간결하고 강렬하게.”
“아아, 근데 제가 인터뷰가 잡혀서 곧.”
“그 인터뷰 나야. 내가 신청했어.”
“……허.”
“스카우트하러 오는데 그 정도 예의도 격식도 없이 찾아오겠어? 아무리 내
가 당신과 한 침대를 썼다고 해도…….”
“그, 그만! 그만! 말 좀 깨끗하고 청량하게 합시다! 소름 끼쳐 죽겠네!”
“시간 좀 내주시죠, 유구언 씨.”
구언은 이마를 짚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이 순간 무용수로서ㅡ
“뭐, 네. 알겠습니다. 어차피 잡힌 인터뷰 시간이고, 대표님이었다니 놀랍
긴 하지만 저도 대화를 거절할 이유는 없죠.”
“파격적인 제안과 조건을 가지고 왔으니, 들어나 보라고.”
심장이 뛰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
지환아,
희원이 할아버지가 약을 안 드셔.
내가 너무 놀랐는데 어디다 말할 곳이 없어서 말이야.
장모님의 전화를 받은 지환은 그녀의 본가로 총알처럼 튀어 왔다.
느닷없는 손녀사위의 잔소리에 놀란 희원의 할아버지 ㅡ 권 선생은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할아버지, 왜 처방받은 약을 안 드십니까. 놀라서 달려왔습니다.”
“네 장모가 그러더냐? 내가 약을 안 먹는다고?”
“뭐, 신고인 인적사항을 보호하고 싶지만 너무 유력해서 숨길 수가 없네요.”
“그게 뭐 대수라고 하던 일까지 내팽개치고 달려와?”
“아아. 염려 마십시오, 일은 끝내고 왔습니다.”
“……감동이 좀 식네그려.”
“사실은 일 팽개치고 왔습니다. 걱정하실까 봐 거짓말한 겁니다.”
“사람 들었다 놨다 하는 건 어디서 배워왔는가? 우리 손녀도 이렇게 꼬셨
나?”
“아, 뭐.”
지환이 머쓱하게 웃자 권 선생이 작은 안경 너머로 바라본다.
아, 이야기의 흐름이 딴 길로 샜다는 것을 인지한 지환은 다시 정색했다.
지환의 표정이 바뀌자 권 선생이 손사래를 친다.
“잔소리할 거면 나가. 나가서 밥이나 먹어.”
“밥이 넘어가겠습니까? 할아버님이 약을 안 드시는데요.”
“애미가 LA갈비 준비했던데.”
“아, 밥 두 공기는 너끈하게 먹겠…….”
하, 자꾸 딴 길로 샌다.
지환은 다시 독하게 마음을 먹고 강한 눈빛을 했다.
그러자 권 선생이 미간을 일그러트린다.
“어디 노인네 앞에서 눈에 힘을 줘? 힘 있다고 자랑하나?”
“아닙니다. 어딜 봐서 제가 눈에 힘을 줬다고 그러세요.”
지환이 흠칫, 하며 흐리멍덩하게 눈을 뜨자 권 선생이 쯧쯧 혀를 차며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리신다.
“쯧쯧, 느글느글하게 넘어가는 것 좀 보게. 저렇게 우리 손녀를 구워삶았구만.”
“저 희원이 남자친구 아니고 할아버님 손녀사위입니다. 그만 미워하셔도
되잖아요.”
“시끄러워! 너 때문에 희원이 못 보고 사니 눈에 가시가 돋치는 것 같아 죽겠어!”
“언제는 결혼하라고 노래를 부르셨다던데?”
“……아, 그거야 이렇게 진짜 갈 줄 몰랐으니까 했던 얘기고.”
손녀가 눈에 밟혀 어지간히 섭섭하신 모양이다.
지환은 볼멘소리를 했다.
“잘 부탁하신다고, 너희끼리 잘 살면 그만이라고 하셨던 할아버님 이야기
가 귓가에 아직도 선연한데, 섭섭합니다.”
“섭섭하라고 하는 얘길세. 살다 보니 화딱지가 나서.”
“소심하시네요.”
“지금 뭐라고 했냐?”
“아, 아닙니다.”
흐어, 어렵다.
잔소리를 하려고 들어왔다가 도리어 쩔쩔매며, 지환은 잠시 숨을 죽였다.
느릿한 손길로 책장을 넘기는 할아버지의 표정은 지극히 태연했다.
“약이 독해서 위도 쓰리고 머리도 아프고, 영 나한테 안 맞는 것 같아서 끊었다.”
“그러다가 더 큰일이 날 수 있습니다.”
“운명인 게지. 거슬러 봐야 얼마나 버티겠다고.”
“오래오래 건강하셔야죠. 희원이 봐서라도 이러시면 안 되는 것 아니십니까.”
“널 봐서 건강하라는 말은 안 나오는 모양이다.”
“저는 세트입니다. 희원이하고 세트예요. 이심전심.”
LA갈비 굽는 냄새가 스멀스멀 들어온다.
지환은 킁킁거리며 배를 문질렀다.
“할아버님. 손녀사위 배곯고 있는데,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가서 밥 먹으라니까? 누가 너를 말리냐?”
“이야기 매듭지어야 나가죠. 안 그러면 한 발자국도 안 갈 겁니다.”
“그러든가. 굶어봐야 니 배고프지 내 배고픈 것 아니니까.”
……약간 대고모님이 떠오르는데, 느낌 탓인가.
지환은 오버랩되는 서씨 집안의 대고모님을 떠올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미 고목처럼 뿌리가 깊은 어른을 설득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저는 할아버님이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내일모레 골골대진 않을 테니 걱정 마라.”
“저희 아이도 보셔야죠. 건강하셔야 저희 아이도 보고, 세뱃돈도 주시고,
낚시도 가르쳐주시고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처음으로 책장을 넘기던 권 선생의 손길이 멈칫한다.
작은 안경 너머 눈빛이 번쩍인다.
“아이? 안 낳는다더니? 벌써 가진 게야?! 벌써?!”
“아. 물론 미래형 이야기이긴 한데요.”
“……나가. 이 방에서 당장 나가.”
“안 낳겠다는 생각은 고쳐먹었습니다. 진짜로 고쳤다니까요.”
권 선생이 빤히 바라보다가 코웃음을 친다.
흐흥, 흐으응, 권 선생이 피식피식 웃으니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지환도 따라 웃었다.
아아. 이제 좀 말이 통하나 싶어 지환은 마음을 놓았다.
하지만 어림없는 일이었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말고 나가. 내가 우리 손녀를 모르는 게 아니야. 걔가 하
루아침에 생각을 고쳐먹을 위인이 아닌데, 당장 입바른 소리 하지 말고 썩
나가서 LA갈비를 먹든 불란서 갈비를 먹든 니 마음…….”
“진짜입니다. 정말이에요, 할아버님.”
권 선생의 눈빛이 점점 더 흉악해지고 날카로워진다.
지환은 위축되지 않고 진심을 눈빛에 담으려 노력했다.
“나 약 안 먹는 거, 희원이도 아나?”
“모릅니다. 알면 어후, 감당되시겠습니까?”
“이 구간은 좀 마음에 드는구먼. 입 좀 무겁게 해. 쪼로록 가서 일러바치지 말고.”
“희원이는 좀 무서우신 모양이죠?”
“……나가. 어서. 애미 갈비 다 구웠겠다.”
불리한 질문엔 대꾸를 안 하신다.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빨라지는 것을 보니, 이제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으신 것 같다.
지환은 애써 시선을 외면하시는 할아버님을 바라보다가 일어섰다.
“저희가 올바른 가정을 만들고 예쁘게 사는 모습, 할아버님께서 오래오래
지켜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진심으로요.”
“……크흠.”
괜한 헛기침을 하며, 권 선생이 대꾸를 미룬다.
손녀의 결혼을 끝으로 책임져야 할 많은 것들을 끝냈다고 생각해 헛헛했던 요즘.
자꾸만 속이 텅 빈 것 같고, 삶의 의욕이 사라지던 요즘.
“다음에 병원가실 땐 저랑 같이 가요. 저 그럼 장모님 식사 준비 도우러 나
가보겠습니다. 식사 준비 끝나면 모시러 올게요.”
“……낚시는 배울 생각이 있고?”
걸음을 나서려던 지환은 홱 뒤로 돌아섰다.
여전히 책장을 넘기는 권 선생을 바라보다가, 지환은 빙그레 웃었다.
“그럼요. 바둑도 배우고 싶습니다.”
“뭐, 희원이를 닮은 애가 있다면 예쁘기는 하겠네.”
“저도 껴주세요.”
“가서 상 차려. 노인네 굶기면 벌 받는다.”
“옙! 다 되면 다시 오겠습니다!”
지환은 보폭이 큰 걸음으로 밖을 나섰다. 쿵, 문이 닫히자 책장을 넘기던
권 선생은 고개를 들었다.
발칙할 만큼 싹싹하고 할 말 다 하는 손녀사위를 떠올리며 권 선생은 피식웃었다.
“거짓말이기만 해 봐라. 아주 요절을 내줄 테다.”
피식 새어 나온 웃음은 쉽게 그치지 않았다.
꿈에나 볼 수 있을까 싶었던 그림을 볼 수 있을 것만 같아, 오래된 심장에
뜨거운 피가 몰려드는 것만 같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내 손녀의 화목한 가정을.
*
다음에 병원 갈 일이 있거든 연락합세.
안 그래도 의사 양반이 보호자 데려오라고 난리니까.
“약을 잘 드셔야 할 텐데. 설득이 되었나.”
지환은 집을 나서기 전 들었던 할아버님의 이야기에 조금 마음을 놓았다.
얼마나 마음이 헛헛하셨다면 그럴까, 조금 더 자주 아내와 찾아뵈어야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지환은 집 앞에 도착했고,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을 때.
“여보세요, 네. 저 지환입니다.”
ㅡ그래, 나다.
2019. 5. 17. 90. 더불어 사는 길, 완벽한 쇼윈도 : 네이버웹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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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고모님께 전화가 걸려왔다.
안 그래도 할아버님을 만나 뵙고 오며 묘하게 닮은 대고모님 생각을 했었는데.
반가움에 지환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네. 잘 지내셨어요? 대모고님.”
ㅡ그래. 보내준 선물은 잘 받았다. 뭘 그렇게 바리바리 보냈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는 현관 앞에 섰다.
괌을 다녀오며 희원이 이것저것 골라온 선물을 대고모님께로 택배 보냈는
데, 받아보신 모양이다.
“제가 고른 것 아닙니다. 집사람이 해서.”
ㅡ안다. 내 평생 너한테 뭘 받아본 적이 없어서 당연히 알지.
“죄송합니다. 더 잘했어야 하는데요.”
비밀번호를 누르고 열린 문틈으로 그가 들어섰다.
이제 막 씻고 나왔는지 머리에 수건을 올린 희원이 쪼르르 나오며 그를 반긴다.
통화중인 것을 본 희원이 누구? 눈으로 묻자,
ㅡ아무튼 잘 받았다고 네 처에게 알려줘라.
“네. 대고모님.”
대고모님. 하고 그는 알려주었다.
아아. 하며 희원이 옆에 붙어 섰다. 지환은 가방을 내리며 그녀의 허리를감았다.
ㅡ내 다른 것은 아니고, 김치를 좀 담으려는데 말이다.
“네? 김치요? 김장요?”
ㅡ김장은 무슨, 지금 철이 어느 때인데 김장을 운운해. 헌 김치 말고 새 김치 담는 거지.
“아…… 네. 대고모님.”
김치를 담근다.
왠지 다음 말을 알 것 같아 지환은 그녀를 어두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허, 나 김치 담그러 가야 해? 희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ㅡ너도 알다시피 우리 종가만의 비법 양념으로 김치를 해야 시원하고 맛있
게 담그는 거다. 너희도 가정을 이뤘으니 우리 서씨 집안 김치 비법은 알아둬야지.
“아…… 예, 대고모님.”
ㅡ날짜가 언제냐면 말이다.
대고모님은 김치 담그는 날짜를 알려주었다.
지환이 달력을 들고 살펴보자 주말이지만 희원이 공연 전체 리허설이 잡힌날이다.
이, 이, 이날 나 공연 리허설 날인데.
희원의 동공에 지진이 인다. 지환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ㅡ그날 전부 와서 거들고 김치 나눠 가지고, 또 여러 종류를 해서 찬찬히
알려줄 테니…….
“저, 대고모님.”
ㅡ왜?
“그날 집사람이 공연 연습이…… 있어서요.”
ㅡ공연? 연습?
아아. 공연이 있다고 할걸. 괜히 연습이라고 말했나.
지환은 말실수를 했다 싶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민망하면 나오는 자동 포즈다.
ㅡ그래서?
“아…… 그게, 집사람이 못 갈 것 같아서……요…….”
희원은 나 죽었소, 하는 표정을 지었다. 지환은 사고가 정지한 눈빛을 하며 멍하게 희원을 바라보았다.
ㅡ그게 무슨 대수냐? 누가 네 처를 부르라고 했냐?
“……예?”
ㅡ니가 와라.
“……예? 저요?”
지환이 저요? 물으며 더 황당한 표정을 짓자 희원은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
다는 눈빛을 했다.
뭐가 어떻게 흘러가는 건지 모르겠다.
ㅡ둘 중 누구라도 알면 된 거지. 꼭 네 처가 와야 하는 법은 없으니까, 니가와라. 너는 주말에 쉴 것 아니냐?
“아…… 예…… 그렇기는 한데…….”
ㅡ양념 만드는 거야 적어가면 되고. 굳이 적지 않아도 검사일 정도 하면 눈대중으로 읽고 외우겠지. 니가 와라.
“아…… 네…….”
ㅡ니가 힘도 세고 네 처보단 니가 더 제격인 것 같다. 걔는 비리비리해서
김치나 담그겠냐? 그럼 나는 그렇게 알고 있겠다.
“아…… 알겠습니다…… 네…….”
대고모님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희원은 옆에 서서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라셔? 나 못 간다고 뭐라 하셔? 어? 어? 뭐라 하셔?”
“아니 그게 아니라, 나 오래. 혼자.”
“……혼자?”
“김치 담그는 거 보고 배워 가래. 내가 힘도 좋아서 내가 더 제격인 것 같다고 하시네.”
웃음을 참아보려고 해도 웃음이 터진다.
희원이 황당하다는 듯 마구잡이로 웃어젖히자 지환은 하……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보았다.
“다들 나만 미워하는 것 같은데, 느낌 탓인가?”
“힘내. 남편. 심심한 위로를 보내요.”
“위로가 안 돼. 엄청 많이 담근단 말이야.”
“서씨 집안 김치니까 서씨 사람이 배워야지. 대고모님 정말 짱이다.”
손이 크다 못해 동네 사람들을 다 먹이고 남을 만큼의 김치를 담그시는 대
고모님을 알기에.
“하…….”
지환은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결혼 생활, 어렵다.
아!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