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
“얘들아, 꼭 이런 잡다하고 불쾌한 일을 도모하는 것에 나를 포함시켜야겠
어? 굳이? 굳이?”
너무나도 많은 일이 벌어졌던 긴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왔다.
바라만 보아도 시선이 포근해지는 봄의 풍경 한가운데 서 있던 희원은 툴
툴거리며 다가오는 정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언니! 잘 왔어요! 와줘서 고마워요!”
“왔냐?”
흰 셔츠에 타이를 매던 지환이 바라보며 아는 척을 하자 정윤은 답 대신 눈을 흘겼다.
그러다가 다시 희원에게 시선을 돌리며 활짝 웃었다.
“어머, 희원아, 너무 예쁜데? 너무너무 예쁜데?”
“아아. 진짜요? 저 좀 괜찮아요?”
“차검, 사람을 지우개로 지워도 유분수지 난 왜 없는 사람 취급해?”
“왜긴 왜야, 조만간 내가 너를 없애버릴 거니까.”
킁. 지환은 정윤이 쌀쌀맞게 대꾸하자 입을 콱 다물었다.
희원의 곁에 가깝게 다가서서 예쁘다, 예쁘다, 연신 칭찬하는 정윤을 바라
보다가 지환은 타이를 마무리했다.
거울이 없으니 영, 잘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희원아, 드레스 네가 직접 고른 거야? 센스 터지네.”
“이거 진짜 몇 날 며칠 골랐는지 몰라요. 언니한테 보낸 링크 중에 하나거든요, 이 드레스.”
“거기 두 사람, 미안한데 나 넥타이 잘 맸는지 좀 봐줄래?”
“봄날의 여신이 따로 없다, 진짜 잘 어울려. 너무 예뻐, 희원아.”
“역시 우리 정윤 언니밖에 없네. 잘 어울리는 건지 확신이 없었는데, 고마워요.”
“저기, 얘들아? 나 넥타이 잘 맸는지 좀 봐…….”
“닥쳐! 어디서 하찮은 소품 주제에 말을 걸고 난리야! 넌 니가 알아서 해!
넥타이 하나도 혼자 못 하냐?!”
……킁. 정윤의 앙칼진 소리에 지환은 다시 입을 헙, 다물었다.
희원이 곁눈질로 보더니 괜찮다, 잘 맸다며 눈을 찡긋거리곤 오케이 사인을 보내준다.
아내한테 칭찬받았다며 금세 멍청한 표정으로 웃는 지환을 바라보다가 정윤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아오, 열 받아. 아오, 서지환 저 말미잘 생각하면 열 받아 죽겠어.”
“차검. 침착해. 동료의 셀프 웨딩 촬영에 동반된 것이 그렇게도 기분 나빠?”
“누가 그게 기분 나쁘대? 그리고 난 너의 동료로 온 게 아니라 희원이 언니 자격으로 온 거거든?!”
“언니 자격으로 오셨다는 분께서 어찌 그렇게 분노 대잔치 중이신지? 이 좋은 날에?”
“나만 불렀어야지! 나만! 왜 나를 불러놓고 쓸데없는 니 말미잘 동생을 또 불렀느냔 말이야!”
말미잘 동생?
지환은 잔뜩 약이 오른 정윤의 말에 가만히 생각하다가 아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지환과 희원의 셀프 웨딩 촬영식이 있는 날.
도움을 요청했더니 정윤이 쾌히 시간을 빼주더라. 거기까진 문제가 없었다.
“너무 한 거 아니야? 날 불렀으면 걔를 부르지 말아야지. 왜 날 불러놓고
걔를 불러? 죽을래?!”
“허, 차검, 니가 모르고 온 것처럼 말하니 굉장히 당황스러운데.”
지환은 정윤의 볼멘소리에 당황한 듯 턱을 문질렀다.
이곳에 현수가 오기로 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뭐, 좋다. 싫을 수도 있지. 싫을 수도 있는데.
“차검. 내가 분명히 남 형사도 올 거라고. 처음에 너에게 선택권을 준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닌가?”
정윤이 희원을 바라보다 흠칫, 놀란 표정을 짓는다.
저, 저, 말미잘 같은 게 희원이 앞에서 헛소리를 해댄다.
야! 니가 그렇게 말하면 내가 남 형사 보러 온 것 같잖아!
“됐어! 한 입 가지고 두말하기 싫어서 왔다! 어쩔래! 너 왜 자꾸 걔랑 나를
세트로 엮는 건데? 어?”
“분명히 저는 사전에 설명드렸고 듣고도 오신 쪽은 차정윤 검사님인 것으
로 제가 알고 있…….”
“희원아, 사진은 여기서 찍는 거야? 아니면 이동할 거야?”
불리한 진술이 계속되자 정윤은 지환의 말허리를 자르며 희원에게 시선을 돌렸다.
희원이 약간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웃고 있다.
……다 틀렸어. 희원이는 분명 남 형사를 보러 왔다고 생각할 거야.
아아아아. 망했어. 망했다고. 들통나버렸어.
“저희 여기서 일단 찍어도 될 것 같아요. 볕도 좋아서 이곳 마음에 들어요.”
“그래. 멀리 가지 말자. 중요한 건 사람이지 배경이 아니거든. 배경이 단출할수록 인물이 잘 나와.”
언니가 좋은 카메라도 가지고 왔다. 볼래?
정윤은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 희원에게 자랑하기 시작했다.
빨리 지금 이 상황을 종료해야 한다.
희원의 머릿속에서 남 형사, 세 글자를 지워야 한다.
“……한 거야. 이게 진짜 최신식인데 나 몇 번 안 썼어. 내가 이걸로 오늘 예쁘게 찍어줄게.”
“정말요? 하, 감사해요. 언니. 안 그래도 막막했는데, 언니 진짜 최고다.”
“그렇지? 나밖에 없지? 나만 한 사람이 없지?”
“네. 언니밖에 없어요. 그런데 남 형사님은 언제 오신대요?”
……응. 망한 거지.
정윤은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 말미잘 같은 서지환이 뭘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자꾸만 음흉하게 웃
는 희원의 얼굴도 뭔가를 알고 있는 것만 같아 영, 마음이 불편해진다.
아아아. 마음 하나 속일 줄 모르는 이 어리석은 영혼이여.
정윤은 탄식하며 고개를 내렸다.
“그런데 언니, 언니 오늘 정말 예뻐요. 막 데이트하러 나온 분위기예요.”
“희원아, 난 원래 예뻐.”
“차검, 남 형사 만난다고 힘 좀 주고 나왔나 봐.”
“……어어. 맞아. 힘 좀 줬어. 이제 됐냐?”
이것들이……
단체로 사람을 놀려먹고 있어…….
정윤이 끝내 항복하듯 두 손을 들며 순순히 자백하자 희원과 지환은 웃음을 터트렸다.
마음 한 조각 없이 찍었던 휘황찬란했던 결혼사진을 대신해, 소소하나마
마음이 담긴 사진을 남기고 싶다며 두 사람은 셀프 웨딩 촬영을 하기로 했다.
이 볕 좋은 아름다운 날에, 그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을 한 채 연신 웃고 있는 두 사람을 보고 있자니ㅡ
“에효, 그래, 좋을 때다. 좋을 때.”
에라, 나도 모르겠다. 정윤도 그만 두 사람을 따라 웃어버리고 말았다.
아무렴 어떠냐. 누가 오건 누구를 보러 왔건 간에 두 사람을 축하해주고 싶은 마음은 변함이 없는걸.
“아아, 저기 현수 온다.”
지환이 중얼거리자 한참이나 웃던 정윤은 웃음을 뚝 그쳤다.
언제 해맑은 표정을 짓고 있었냐는 것처럼 쌩한 표정을 지으며 괜한 카메라만 만지작거렸다.
“여어! 남 형사!”
지환이 손을 흔들자 터벅터벅 현수가 걸어온다.
정윤의 마음속으로 쿵, 쿵, 쿵, 쿵, 그의 발자국 소리가 찍히는 것만 같다.
“형수님, 제가 좀 늦었습니다. 길이 막혀가.”
“아녜요, 남 형사님. 저희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요. 일찍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왔냐?”
“야, 형수님 오늘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눈이 부신데요.”
“인사를 하면…… 인사 좀…… 받아줄래……?”
“형님은 뭐 한다고 멋을 부렸습니까? 그래봐야 소품인데.”
인사를 건네니 힐끗, 바라보는 무심한 시선과 박대가 이어진다.
풉. 뒤에 서 있던 정윤이 웃자 현수는 지환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정윤을 바라보았다.
“왔나. 일찍 왔네.”
“그래. 일찍 왔다.”
정윤이 짧게 대꾸하며 인사를 받자 현수는 큼,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희원은 고개를 비스듬히 꺾으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와, 오늘 남 형사님 너무 멋있는데요?”
“아아. 맞습니까. 형님이 사진 찍어야 하니 멋 좀 부리고 오라고 해서.”
현수가 민망한지 머리를 긁적거린다.
정윤은 현수의 뒷모습을 위아래로 훑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세상에, 이 옷은 아직 안 돌아가시고 삶을 연명하고 계셨네? 상견례 때도
입어, 가족 행사 때마다 입어, 단벌 신사도 요즘 너 같은 단벌 신사가 어딨냐?”
“왜 시비고. 좋은 날에. 기분 나쁘게.”
“기분이 나쁜 게 아니라 성격이 안 좋은 거겠지. 흥.”
“시비 좀 걸지 마라이. 멋만 있구만.”
현수가 옷을 툭툭 털며 무심하게 대꾸하자 정윤은 고개를 홱 돌렸다.
“누가 멋이 없대? 내가 옷을 얼마나 많이 사다 줬는데 어쩜 한 번을 안 입
고. 혹시 다 가져다 버렸니? 응? 헌 옷 수거함에 넣었어? 아니면 중고시장에 내다 팔았냐?”
“미안한데 있잖아, 너네 두 사람 싸울 거면 미리 말해. 난 우리 와이프랑 저
기 가서 셀카라도 찍고 있을 테니까.”
지환이 냉랭해지는 기운을 느끼며 중재에 나서자 으르렁거리며 바라보던
현수와 정윤은 조금씩 떨어져 걸었다.
희원은 지환을 바라보다가 소리 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아아. 오늘 촬영 잘할 수 있을까.
“사진 빨리 찍자. 빨리 찍고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네, 언니!”
이, 엄청나게 살벌한 이혼 부부와 함께.
*
“자자! 웃어! 웃으라고! 더 활짝! 더더더더!”
흐어.
“더더더더! 야! 말미잘! 똑바로 안 해?! 더더 웃으라고 더더더더더!”
흐어어.
지환은 계속되는 정윤의 미소 요구에 입꼬리를 씰룩씰룩거렸다.
장시간 웃는 일에 낯선 입가가 파르르르 경련을 일으키며 지금 뭐 하는 짓
거리냐고 항의를 해오는 것만 같다.
기가 막힐 정도의 예술 사진을 찍어주겠다는 정윤의 말을 믿는 게 아니었다.
“더더! 자! 좋아! 지금 좋아! 지금 그대로 유지! 유지유지!”
그냥, 모델이 개고생을 하면 된다는 말이었다.
“야! 말미잘! 더 웃으라고! 리프팅 하는 것처럼 끌어올려!”
시끄러! 이게 최선이야! 입꼬리가 동공이랑 만나게 생겼잖아!
지환은 계속되는 정윤의 ‘더더더더’ 신호에 있는 힘껏 웃다가 자세를 바르게 하며 섰다.
혼신의 힘을 다해 웃고 있던 희원도 따라 멈추며 허리를 두드렸다.
“야, 차검. 너 누구 죽일 일 있어? 뭘 어떻게 더 웃으라는 거야?”
“언니. 저 입에 쥐난 것 같아요.”
“허, 얘들이 뭘 모르네. 야야야, 좋은 사진은 거저 나오는 줄 알아? 니들이 잘 웃어야 잘 나오는 거야.”
정윤은 그들의 고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조금 전에 찍은 사진을 돌려 보았다.
음. 지금도 좋긴 한데 더 좋은 사진이 나올 수도 있을 거라는 희망은 자꾸자꾸 생겨났다.
“두 사람, 어차피 금방 끝나. 순간은 잠깐이고 사진은 영원하지. 그러니까 더 웃어봐. 할 수 있어.”
“허…….”
괜찮아. 내가 웃는 거 아니니까.
정윤은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촬영에 돌입했다.
희원이 지환의 팔을 툭툭 친다. 어서 협조하고 빨리 끝내자고.
“야, 너는 괜찮냐?”
지환이 곁에서 반사판을 들고 서 있는 현수를 바라보며 묻자 현수는 무척이나 굳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저는 이미 팔에 감각이 없습니다. 신경 끄세요.”
“야! 너네 소품들! 똑바로 해! 우리 희원이가 얼마나 예쁘게 나오는지는 너희들 손에 달렸어!”
드레스 자락을 매만지던 희원은 고개를 들었다.
언니…… 저…… 그만 예쁘고 싶어요…….
“남 형사 반사판! 반사판 똑바로 들어! 모델 얼굴에 빛이 안 나잖아, 빛이!”
“하, 미치겠네. 알았다! 알았다고!”
현수는 이를 꽉 깨물며 반사판을 다시 들었다.
뭔가 화기애애해야 할 것만 같은 셀프 웨딩촬영 현장이 그 어느 때보다 강
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다.
“야, 남 형사. 쟤 왜 저렇게 열을 올리냐? 남의 웨딩 촬영에 와서.”
“원래 뭐든 시키면 저런 모습입니다. 뭘 시키면 안 됩니다.”
“아…… 그러냐…… 몰랐다…….”
맡은 바 소임에 허점을 허용치 않는 정윤의 성격이 빛을 발하는 순간.
최고의 사진 한 장을 건지기 위해 정윤은 잔디밭에 드러눕고, 바위를 밟고
올라서는 투혼을 아까지 않았다.
“웃어! 웃으라고 이것들아! 반사판! 밥값 해라!”
“밥값이라니. 밥 아직 안 사줬거든! 나 아직 식전이거든!”
“……후불이야! 똑바로 해 반사판!”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끗힐끗 구경하며 스쳐간다.
희원은 이를 꽉 깨물고 웃었다.
잘못했다간 정윤 언니에게 험한 말이 날아올 것만 같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자, 좀 된 것 같아.”
“같아, 가 아니라 되었다, 로 말해줘.”
웃는 것만으로 탈진할 지경이 되어버린 지환은 헉, 헉, 밭은 숨을 내쉬며 정윤을 바라보았다.
지환만의 문제가 아니다.
희원도 간절한 눈빛을 담아 정윤을 바라보았다.
“흠, 잠깐만. 사진 좀 보고. 건질 게 있는지 좀 봐야겠어.”
“수천 장을 찍은 것 같은데…… 설마 하나가 없겠나 싶은데…….”
“없을 수도 있지. 내 마음에 안 들 수도 있잖아.”
아니 우리 사진인데……
왜 니 마음에 들어야 하는데…….
지환은 마지막 말을 꿀꺽 삼켰다.
지금 정윤의 심기를 어지럽혔다간 천 장 정도 더 찍을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든 것이다.
반사판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영혼을 탈곡시킨 표정으로 간신히 반사판을 내리며, 현수는 정윤을 바라보았다.
마치 영원의 시간을 거치는 것 같은 사진 검열의 시간이 흐른다.
세 사람은 저 멀리 서서 정윤을 오래도록 응시했다.
편안하게 잔디밭에 털썩 주저앉아서 사진을 보는 정윤의 표정은, 아직 한
장도 못 건졌다, 하는 심각한 표정이라 세 사람의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
“뭐, 이 정도면 된 것 같기도 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지환의 입에서 방언 터지듯 감사의 인사가 튀어나온다.
세 사람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환호했다.
정윤은 카메라를 내리며 뭐 저런 것들이 다 있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지들 잘 나오라고 생고생하며 찍어줬더니.
“가자. 이제 그만 철수.”
“야, 우리 단체사진 하나 찍어야지, 차검.”
“됐어. 난 사진 별로.”
“형님, 됐습니다. 두 분 많이 찍었으면 우리는 그냥…….”
단체 사진 찍자니까 정윤과 현수가 질색한다.
“왜요, 우리 기념인데 한 장만 찍어요. 네?”
“아…….”
“아…….”
희원이 찍자며 거들자 차마 반항이 어려운 정윤과 현수의 입에서 탄식이 흐른다.
“뭐, 그래. 한 장 정도. 괜찮겠지.”
정윤은 버텨봐야 희원을 이길 수 없단 걸 예감하고는 카메라 타이머를 맞추기 시작했다.
남 형사 나부랭이와 사진 한 장 남기고 싶지 않지만 뭐, 어쩌겠나.
적당한 구도를 잡고 카메라를 고정시킨 정윤은 세 사람에게 다가갔다.
현수. 지환. 희원. 정윤. 이렇게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었다.
찰칵. 촬영음이 끝나자 정윤은 걸어가 사진을 확인하고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야! 반사판! 안 웃냐?! 험악하게 이럴 거야?!”
“하…… 뭐고…… 그냥 찍으면 되는 거지.”
“남 형사님. 한 장만 우리 웃으면서 찍어요.”
“예. 형수님.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희원이 부탁하자 이번에도 단번에 수락한다.
정윤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눈빛으로 현수를 바라보다가 다시 타이머를 장착했다.
“야, 니들도 좀 다정하게 해주면 안 되겠냐? 무슨 양가 부모님 모시고 찍는
것도 아니고.”
“맞아요. 양쪽에 서서 어색하게 있지 말고요. 네?”
자연스럽게 찍자고. 희원이 애원하듯 바라보자 머뭇거리던 현수가 슬금슬금 게걸음을 걸어 정윤에게 다가간다.
어, 어, 어, 온다.
정윤은 현수가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는 옆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또다시 쿵쿵쿵쿵 하며 현수의 발걸음이 가슴속에 도장을 찍는다.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형수님?”
“음, 좀 아쉬운데요. 일단 찍어볼게요.”
헤어진 남녀에게 더 이상의 살가움은 버거우리라. 생각한 희원은 좁아진
두 사람의 간격에 만족하기로 한다.
“그럼 찍을게.”
정윤이 리모컨을 누르자 카메라에 빨간 불빛이 들어온다.
불빛은 조금씩 반짝반짝하며 촬영 임박을 알려오고ㅡ
“실례 좀 하자.”
“응?”
현수는 정윤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느닷없는 현수의 목소리에 정윤은 현수를 바라보았고ㅡ
찰칵ㅡ
그 순간 사진이 찍혔다.
희원과 지환이 돌아보기 전 재빨리 팔을 내린 현수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멀뚱멀뚱 서 있자 정윤은 입을 쩍 벌렸다.
뭐, 뭐, 뭐한 거야, 지금?
나한테 팔 올렸어? 남 형사? 너 지금?
“야, 차검. 가서 사진 확인해봐. 또 찍어?”
“……어? 아, 어어어. 잠깐만.”
넋이 나간 얼굴로 정윤이 잔디밭을 걷는다. 카메라를 들어 올리는 손이 조금 떨린다.
“아아, 됐네. 이만하면 됐어.”
“차검. 봐봐. 우리도 보자. 나랑 우리 와이프도 보여…….”
“시, 싫어! 나중에 봐! 보내줄게!”
“……그래라. 뭔 말만 하면 승질이야, 저건. 무섭게.”
정윤은 화들짝 놀라 카메라를 내렸다.
순간 사진을 확인한 정윤의 가슴속엔 자꾸만 심장이 쿵쿵쿵쿵 하며 발자국을 찍었다.
사진은 너무나도 멋지게 잘 나왔다.
“자! 밥 먹으러 갑시다! 다들 수고 많았어! 도와줘서 고맙다!”
“두 분 정말 감사합니다! 밥 먹으러 가요 우리! 맛있는 거 먹어요!”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이 사진은 혼자만 간직하고 싶어질 정도로.
*
“입 주변 근육이 전부 당겨 없어진 기분이야. 밥을 씹기도 힘들다.”
“나도나도, 나도 입이 너무 아파.”
네 사람은 근처 식당으로 이동했다.
사진을 찍는 동안 얼마나 웃었는지 음식을 씹어 삼키기도 힘이 든다.
“저는 젓가락질이 안 됩니다.”
현수는 팔이 덜덜덜덜 떨려 젓가락질이 힘들단다.
이 모든 상황의 원흉. 정윤은 아까부터 약간 넋이 빠진 얼굴이다.
“니들만 힘들었어? 나도 카메라 들고 찍느라 온몸이 쑤시거든?”
툴툴거리는 말과는 달리 목소리가 나근나근하다.
지환과 희원은 약간 달라진 정윤의 분위기에 서로 어깨를 으쓱, 올려 보였고 현수는 묵묵히 밥을 먹었다.
“두 사람 때문에 오늘 수월하게 찍었다. 고마워.”
지환은 두 사람이 아니었으면 시도도 하지 못했을 거라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결혼식에 사진이 필요하다는 이유 하나로 찍어놓았던 웨딩 사진.
서로 바라만 보아도 숨이 턱턱 막히고, 살갗이라도 닿을 때면 소스라치게
놀라 몸이 딱딱하게 굳었던 그때 그 시절.
“살다 보니 좀 아쉽더라고. 그때 잘 찍을걸. 그땐 그냥 증거물 남긴다는 심정이었는데.”
“맞아요. 집에 있는 사진을 바꾸고 싶었어요. 보다 보니까 마음이 없었다는게 사진 속에서 느껴지더라고요.”
두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안타까웠다고 한다.
일평생 단 한 번밖에 없을 귀한 사진을, 사무적으로 찍어놓았음에 후회했다고.
“그래. 사진이 중요한 건 아니지만 두 사람 충분히 그럴 수 있어.”
정윤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문득 자신의 웨딩사진이 떠올랐다.
우린 누구보다 행복하게 찍었거든. 세상 그 누구보다 더, 행복하게.
“최선 다해서 찍었으니까 예쁘게 출력해서 액자로 해놔. 마음에 안 들면 다시 찍으면 되지.”
……그럼 뭐 해.
마음이란 결국 변하기 마련이고, 사진은 결국 아무런 힘도 가지지 못하는데.
“우리 술 한잔할까? 밥만 먹고 헤어지긴 좀 아쉬운데.”
“좋죠. 언니 술 시켜드릴까요? 남 형사님 괜찮으세요?”
“저는 좋습니다, 형수님. 안 그래도 목이 좀 말랐거든요.”
……예컨대 이런 건 축복인 것 같아.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것.
듣고 싶은 말이 있다는 것.
“사장님! 여기 술 한 병만 주세요ㅡ!”
“네!”
보고 싶은 사람에게, 듣고 싶은 말을 듣는 것.
지금 두 사람이 그렇게 보여. 존재하기 힘든 축복을 만나, 나와는 다른 세계로 이동한 사람들같이.
세상엔 완벽한 0의 관계도, 완벽한 100의 관계도 없음을 알고 있지만 말이야.
“으으. 술병 보니까 새삼 기운이 난다. 좋은데?”
……미련한 생각.
정윤은 떠오르는 생각들을 모두 지우며 활짝 웃었다.
그래, 이런 생각 같은 건 오래해봐야 아무 소용 없는 법이다.
타인의 삶은 타인의 삶일 뿐, 나의 삶이 될 순 없는 거니까.
정윤은 술을 따르고 네 개의 잔에 똑같이 따랐다.
“자, 우리 오랜만인데 건배하자.”
그녀가 술잔을 들자 세 사람은 따라 들었다.
여전히 말 없는 현수, 그리고 테이블 아래로 손을 맞잡은 희원과 지환까지.
“좋은 날, 오래오래 행복합시다.”
정윤의 인사와 함께 네 사람은 술을 마셨다.
희원은 술을 마시려다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다시 멈칫, 하고는 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다시 술잔에 입을 가져다 대려는데ㅡ
“우웩ㅡ!”
거친 소리와 함께 입을 틀어막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술을 마시던 세 사람은 일동 행동을 멈췄다.
“아, 죄송해요. 갑자기 술 냄새가 너무 지독…… 우웩!”
우우우욱! 희원은 피가 역류하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우당탕 일어섰다.
그 길로 화장실로 달려가는 희원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세 사람은 입을 쩍벌렸다.
“……뭐고. 형님. 지금 이, 이, 이거, 이거 뭐고……?”
“뭐, 뭐냐. 아니겠지? 아니, 맞나? 맞겠지? 아니, 아닌가? 맞나?”
“야, 서검! 빠, 빨리 따라가 봐! 멍충아!”
“어어어어어! 알겠다, 알겠다!”
지환이 벌떡 일어나 빛의 속도로 달려간다.
정윤은 화장실로 달려가는 지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그런 생각을 했다.
……세상엔 완벽한 0와 관계도,
완벽한 100의 관계도 없다고 여겼는데 말이야.
“저기, 남 형사.”
“아. 아아. 그래. 말해라.”
오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
어쩌면 당신들은 100의 관계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정윤은 멍한 눈빛을 하다가 입술을 열었다.
화장실 밖엔 손톱을 깨물며 초조하게 앞을 서성이는 남편이 있고ㅡ
“희원이, 임신했나 봐.”
화장실 안엔 변기통을 붙잡고 밀려 나오는 헛구역질에 두 눈을 질끈 감은, 아내가 있었다.
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