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2. 완벽에 대하여 (92/98)

92. 완벽에 대하여

작고 기다란 검사기 위로 선명한 두 줄이 비친다.

희원은 그대로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기쁘다거나 행복하다고 단정 지어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해일처럼

밀려들고, 희원은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불어 내쉬었다.

……임신을 했다.

아무리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아도 선명한 두 줄은 변함이 없고,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현실로 와닿지 않았다.

엄마가 된다. 내가.

내가?

테스트기를 들여다보고 있을수록 심장은 쿵쿵 뛰었다.

이유를 알지 못하는 불안함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약간 현실 부정을 하고 있는 것도 같고,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멍한 기분이도 하다.

앞으로 얼마간, 아니, 다소 긴 시간 동안 하지 못할 일상의 일들이 스친다.

“하…… 이제 어쩌지…….”

남편과 마주 앉아 하루를 정리하며 한두 캔씩 맥주를 비워내던 시간도 사라질 것이고ㅡ

삶과 같았던 무용과도 뭐, 두말할 것도 없이 당분간 안녕해야 할 것이다.

듣던 대로라면 기분은 하루에도 열두 번씩 널뛰기를 할 것이고, 급변하는 몸을 바라보며 슬프기도 할 것이다.

이, 임신 중독증이 오면 어떡하지? 내가 태교를 잘 못 하면 어떡하지?

아기가 건강하게 태어날 수 있을까? 지금부터 이제, 뭘 어떡해야 하는 거지?

출산 후 살이 안 빠지면 어떡해? 산후 우울증이 오면 어떡하지?!

신혼은 충분히 즐겼던가? 둘만의 시간이 더는 아쉽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하, 미치겠다. 어지러워.”

희원은 머릿속에서 미친 듯이 불어나는 생각을 감당하지 못해 벌떡 일어섰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면 임신했음을 알고 난 뒤, 주인공들이 무척 감동받

은 눈빛으로 서로 얼싸안고 엉엉 울던데.

아…… 뭐지 이 기분…….

상상했던 거랑은 좀…… 많이 다른 것 같은데…….

희원은 테스트기를 마지막으로 내려다보다가 잠가놓은 화장실 문을 바라보았다.

이 문을 열고 나서면 지환이 있을 것이고, 어떤 방식이든 사실을 알고 난 후 현실에 반응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황홀한 듯 웃어야 하나? 

여보! 이제 우리도 아빠 엄마가 되는 거예요! 하며 눈물이라도 흘려야 하나?

“휴…… 나도 모르겠다…….”

희원은 아무것도 정리를 하지 못한 채 문을 벌컥 열었다.

남편께선 화장실 앞에서 서성이고 있을 줄 알았더니, 소파에 앉아 TV 시청을 하고 계신다.

큼, 큼, 희원이 헛기침을 하며 곁에 다가가 앉자 지환이 TV에 시선을 준 채 입을 연다.

“어때? 맞아?”

채널을 바꾸나 싶더니 웬 홈쇼핑에 멈추고는 몰두하듯 바라본다.

희원은 그런 지환의 옆모습을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뭐야? 지금 절체절명의 순간에 TV나 틀어놓고 보면서 묻는 거야?

“맞아?”

“…….”

재차 물어도 희원이 대꾸를 하지 않자 지환은 힐끔,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엇. 사람도 찌를 수 있을 것 같은 눈빛을 하고 있다.

“서지환 씨, 지금 TV가 눈에 들어와?”

“아니. 안 들어와.”

희원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TV를 바라보았다.

TV 홈쇼핑 채널에선 그가 흥미를 보일 것 같지 않은, 굳이 보고 있을 이유가 없는 여성 신발을 판매하고 있다.

이제 보니 자신이 홈쇼핑 채널을 틀어놓은 줄도 모르는 것 같다.

마른침만 꿀꺽꿀꺽 삼켜대는 통에 목젖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걸 보니 매우 긴장한 것 같기는 하다.

희원은 그런 지환의 옆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테스트기를 그의 눈앞에 내밀었다.

그녀가 뭔가 불쑥 내밀자 지환이 화들짝 놀란 얼굴로 눈을 크게 감았다가 뜨며 테스트기를 바라본다.

선명한 두 줄이 시선을 어지럽힌다. 

아…….

“남편. 두 줄이 뭔지는 알아?”

“아…… 어…… 설명서…… 읽었어…….”

두 줄이다. 그것도 엄청 진하고 선명한 두 줄.

지환은 희원이 내민 테스트기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눈만 감았다가 떴다.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복잡한 심경이 고스란히 표정에 담겨, 희원은 그의 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뭐, 이쪽도 그다지 감동이라거나 기뻐 미친다거나, 그런 상태는 아닌 것 같다.

“임신 맞는 것 같아. 내일 병원 가봐야겠어.”

희원은 덤덤하게 테스트기를 내리며 중얼거렸다.

지금 이 순간 드는 생각이라곤,

“하, 이럴 줄 알았다면 마지막으로 맥주나 실컷 마셔둘걸. 이제 아쉬워서 어쩌지?”

양껏 못 마시고 내려두었던 술잔이 아쉽다.

“무용단에 전화를, 아니다, 내가 일단 사무실에 가서 직접 얘기를 하고 남은 공연 보류 신청을 해야겠어.”

남은 스케줄은 또 어떻게 처리하나 막막하다, 정도.

“아, 뭐야, 진짜 실감이 안 나. 나 정말 임신이라고? 여기 뭐가 있다고?”

그러다가, 희원이 중얼거리며 자신의 배를 문지르자 지환이 슬그머니 손을 얹는다.

난데없이 자신의 배에 손을 가져다 대니 희원은 지환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어우, 사람이 너무 놀라니까 말을 잃는다.”

지환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이런 기분은 또 처음이라, 웃어야 하는지 울어야 하는지 감도 오질 않았다.

하나의 행동으로 지금을 표현하기엔 차오르는 감정의 색깔이 다채로웠다.

“하, 난 좀 심란해졌어. 임신하면 다들 막 기뻐 날뛰던데 난 그게 안 되네?”

“내일 병원 가봐야 정확하게 알겠지만, 일단 당신 임신……은 맞는 것 같지?”

“네. 그런 것 같네요. 테스트기 세 개나 해봤는데 세 개나 맞는다고 나오는걸 보면.”

지환은 조심스럽게 배를 문지르다가 희원을 바라보았다.

“고맙다. 이제 고생하겠네, 우리 부인.”

“뭐, 해야지. 남들도 다하는 고생인데 나라고 피해 갈 수 있겠나.”

무섭다고 징징거려도 할 말 없는데, 막상 임신을 하고 나니 희원은 겸허해졌다.

아직 무엇도 와닿는 것 없고, 무엇부터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래, 다들 이렇게 시작하나 보다. 남들이라고 대단하게 시작하지는 않겠지, 싶은 생각이 든 것이다.

지환과 희원은 서로 멀뚱멀뚱 바라보다가 피식, 피식,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하도 어이가 없고, 막연히 기다렸지만 갑자기 이루어지니 당황스럽기도 하고.

언제였을까, 언제 생긴 걸까 곱씹어 보지만 딱히 유력한 날이 떠오르지는 않고.

뭐, 매일매일이 유력했으니까.

“아, 왜 자꾸 웃는 건데! 많이 웃으면 배 당긴단 말이야!”

조금씩 커져가는 웃음에 희원은 괜한 화살을 남편에게 돌렸다.

어깨를 아프지 않게 때려보아도, 그의 얼굴을 밉지 않게 노려보아도 한번 터진 웃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 웃는 얼굴을 마주 보며 한참이나 웃었다.

“큰일 했다, 큰일 했어. 권희원.”

“서지환 씨도 큰일 했네. 과감하고 능숙하더니, 큰일 했어.”

서로는 서로의 능력을 칭찬하며 한참이나 큰 웃음을 터트렸다.

그들이 삶의 변화를 대하는 자세란 세간의 풍문처럼 로맨틱하지도, 무한히 감동스럽지도 않았다.

다만 할 말을 잃고 터트리는 웃음엔 하지 못한 말들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남편. 집엔 언제 말하지? 양가 어르신들 모두 좋아하시겠다.”

“그러게. 특히 할아버님께선 어깨춤을 추실 수도 있어.”

……그래서, 그들에게 새 생명이 찾아왔음은 어떤 의미가 되었을까.

전반적인 인생을 놓고 보자면 완벽한 부모가 되기엔 여전히 모자라고, 여

전히 자신 없는 두 사람에게 법보다 더 무서운 ‘책임’이 있다는 걸 알게 한 하나의 사건이었다.

거저 얻어지는 것은 없다는 것을 몸소 깨달았고, 오늘과 같은 내일을 살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깨달았으며,

혼자만의 힘으로는 절대로 할 수 없다는 것 또한 배우게 되었다.

엄마의 말씀처럼 둥근 세상이 찾아왔고, 그 세상이란 대고모님의 말씀처럼 광활한 우주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아이를 품에 안는 순간부터ㅡ

둘은 하나요, 셋은 가족이었다.

*

ㅡ3년 후.

“자, 우리 이제 한 바퀴 돌았으니까 외래 진료 도우러 나갈까요?”

“희주 씨. 조금만 쉬었다가 나가요. 아침부터 하루 종일 움직였잖아요. 안 더워요?”

“더워. 더워 죽을 것 같아. 그런데 시간이 부족하다고요. 해지기 전에 빨리 다녀와야죠.”

“아…… 지금 나가면…… 해질 때쯤이나 돌아오겠구나…….”

아…… 그렇구나…….

마을을 한 바퀴 돌며 보수 공사 현장을 꼼꼼하게 체크하고 돌아오자마자 다시 나가잔다.

자원봉사자는 나갈 채비를 서두르는 희주를 바라보다가 남몰래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막 점심이나 먹을까 하는 시간이지만 지금 나간다면 아마도, 밤늦게나 돌아올 것이다.

“아…… 그래도 점심시간인데.”

“윤쌤, 우리 가면서 먹어요. 샌드위치 있어.”

“아…… 샌드위치…… 듣기만 해도 신물이 넘어오는 그 샌드위치…….”

희주가 ‘윤쌤’이라 부르는 자원봉사자는 자신의 미래를 보고 왔다는 것처럼 체념한 얼굴로 자리에서 다시 일어섰다.

몇 년 전 지진으로 엉망이 된 최빈국을 다시 찾은 희주는 단 하루도 허투루 보내는 날 없이 바빴다.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갔고, 무엇이건 도왔으며, 닥치는 대로 일거리를 물어왔다.

“희주 씨, 그러다가 탈 나요. 쉬엄쉬엄해야지.”

“살면서 너무 많이 쉬어서요, 기운이 넘쳐나는 거 있죠. 모아둔 힘이 많나봐.”

“에효, 우리 희주 씨를 어찌 말리겠습니까? 소인이 또 따라서 움직여야죠. 갑시다, 가요.”

“오케이. 내가 오늘은 특별히 윤쌤에게 오렌지 주스도 줄게요.”

“어이고, 백골이 난망하옵니…… 아, 맞다. 한국에서 후원 요청이 또 있었어요.”

“아, 그래요?”

검은 티셔츠, 면 반바지 차림으로 언제나 착용하는 모자를 집어 든 희주는 윤쌤을 바라보았다.

하루 종일 내리쬐는 굵은 햇살이 무색할 정도로, 희고 맑은 희주의 피부는 여전히 고왔다.

두꺼운 화장 속 표정을 가렸을 때보다 훨씬 더 빛이 나고, 훨씬 더 생기 있게 여겨졌다.

“어디 보자…… 이분 또 개인적으로 직접 후원하시네. 서윤지 씨라고.”

“……아. 네.”

윤쌤이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후원자 신상에 대해 알려주자 희주는 모자를 눌러쓰며 너털웃음을 흘렸다.

후원금을 보낸 이는 다름 아닌 희원이다.

언제였을까, 단 한 번 우연하게 연락이 닿았었지.

봉사활동을 하고 다닌다고 말하자, 그 후로 희원은 종종 후원금을 직접 보내왔다. 

여타의 말은 없었다.

그저 후원금이 도착하고, 보냈다는 메시지가 다였다.

그러다가 언젠가부터 후원자의 이름은 ‘서윤지’로 바뀌었다.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의 딸아이 이름이란걸.

희원이, 자신의 딸아이 이름으로 후원을 시작했다라는걸.

“금액이 꽤 커요. 이분 돈 많은 분인가 봐요.”

“아아, 글쎄요. 어쨌든 후원금은 투명하게 쓰고, 나중에 정산서 자세하게 출력해서 보내드려요.”

“네네. 알겠습니다, 희주 씨.”

윤쌤이 건넨 후원서를 건네받은 희주는 한참이나 적힌 희원의 이름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반듯하게 접어 주머니에 넣고, 봉사단체 이름이 적힌 조끼를 입었다.

우리는 한국에서 무척 잘 지내고 있다는, 그러니 당신도 잘 지내라는, 어떠

한 메시지의 전달인 것만 같아 희원의 후원금은 도착할 때마다 다른 의미로도 기뻤다. 

“하, 좋다.”

“맨날 뭐가 그렇게 좋습니까? 희주 씨? 그렇게 행복해요?”

“그럼요. 좋지 않아요? 난 숨만 쉬어도 좋은데?”

“희주 씨는 봉사가 천직인가 봅니다. 저는 가끔 힘들기도 한데 말이죠. 한국이 그립기도 하고.”

“아시잖아요. 그리워할 만한 것들이 딱히 없어서.”

“아…… 아, 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이야기를 꺼내서.”

“무슨 말씀이세요. 저 쿨한 거 아시잖아요?”

당황한 윤쌤을 오히려 달래며 희주는 크게 웃었다.

……곁의 모든 것이 감사한 시간. 얼마 만인가.

하루의 낮과 밤이, 별일 아닌 것에 터져 나오는 웃음이,

온전히 ‘나’로 살아가는 오늘이.

“윤쌤. 출동합시다. 오늘도 감사하게.”

“예예. 감사하게. 샌드위치, 오렌지 주스, 감사하게.”

그래요. 

당신들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거라, 나는 믿어 의심하지 않아.

나는 온전한 나로.

기쁨도 슬픔도 완연한 내 것으로.

“자, 출발ㅡ!”

그렇게, 당신들은 우리가 되어.

*

“아빠, 엄마는 언제 와? 응?”

“응. 엄마 조금만 더 기다리면 올 거야. 이제 엄마 끝날 시간 다 됐어.”

“엄마 또 춤추러 갔어? 엄마는 춤추고 오는 거야?”

“응. 윤지야, 엄마 춤추러 갔어. 다 추면 올 거야”

“언제 다 추는데?”

“음. 그건 엄마 마음이라 사실 아빠도 잘 몰라.”

아이는 아빠 무릎에 앉아서 시선은 아끼는 애착 인형에 주고는 입술만 쫑알쫑알 움직인다.

지환은 아이의 이마에 붙은 잔머리를 쓸어 넘겨주며 묻는 말에 답을 해주었다.

대국이 한창이었음을 알려주듯 놓인 바둑판엔 검은 바둑알과 흰 바둑알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신 희원의 할아버지 ㅡ 권 선생이 다급하게 안으로 들어선다.

“바둑판에 손댄 건 아니겠지?”

“아, 왜 이러십니까. 한두 번도 아니고. 저 그런 사람 아닙니다.”

“그런 사람 아니라서 저번엔 손대다 나한테 걸렸냐?”

“그게 언제 이야기인데요. 한 번도 못 이겨서 약이 올라서 딱 한 번 그런 걸 가지고 너무 오래 마음에 담아두십니다.”

“원래 소도둑부터 시작하는 놈은 별로 없어.”

자, 다시 시작하자고.

권 선생이 앉자마자 급하게 바둑알을 집어 든다.

처음 지환과 바둑을 두기 시작할 땐 형편없는 손녀사위 실력에 매번 시시한 승리를 거두곤 했는데.

검사라 그런 건가, 실력은 나날이 일취월장하더니 요즘은 전력을 다해도 실력이 비등비등하다.

권 선생이 잔뜩 집중하는 얼굴로 바둑판을 내려다보던 때.

“왕 하부지. 우리 엄마 언제 와요?”

저, 저, 조막만 한 입술이 열리며 옥구슬이 또로록 굴러 나온다.

권 선생은 잠시 바둑판에서 시선을 떼며 증손녀를 바라보았다.

인형의 머리카락을 빗어주며, 아이는 앙증맞은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엄마는 춤을 다 춰야 올 텐데. 윤지야, 엄마 보고 싶으냐?”

“엄마 춤추러 갔어여? 그럼 언제 다 춰여?”

“글쎄다. 그건 엄마 마음이라 왕 할아버지는 잘 모르겠는데.”

……같은 질문, 같은 답이 이어진다.

“윤지야. 엄마 보고 싶으냐?”

“응. 아니? 응. 아니?”

아리송한 아이의 답변이 이어지자 권 선생은 고개를 비스듬히 꺾으며 아이를 바라보았다.

“왕 하부지. 바둑은 왜 하는 거예여?”

“바둑? 네 아빠 이겨먹으려고 하는 거지.”

“울 아빠 이겨여? 왕 하부지가 우리 아빠 이겨여?”

“이기다마다. 네 아빠는 왕 할아버지한테 상대가 안 되니까.”

“아이 앞에서 흉은 좀…… 아빠 체면도 있는데요, 할아버지.”

지환이 낮게 중얼거리자 체면은 무슨, 하는 눈빛으로 권 선생이 지환을 바라본다.

“억울하면 실력을 키워야지. 바둑의 세계란 냉정한 거야, 이 사람아.”

“아빠. 아빠 맨날 져? 왜 아빠능 맨날 져?”

“이것 좀 보십시오, 할아버지. 윤지가 벌써 저를 이렇게 판단하지 않습니

까?”

“아, 그러니까 이기란 말이야. 누가 뭐래? 정정당당하게 이기면 되는 걸 왜

한 판을 못 이기고 무능력한 애비 노릇을 해?”

“하, 그럼 저 진심으로 합니다. 나중에 딴말 없기입니다. 할아버지.”

“허. 언제는 내가 딴말 했던가? 나는 일평생 그런 거 모르는 사람일세.”

지환은 무릎에 앉혀둔 윤지를 훌쩍 끌어 더 가까이 안으며 눈빛을 활활 태웠다.

무능력한 애비 인상을 씻으려면, 오늘은 이기는 수밖에 없다.

“왕 하부지랑 아빠랑 싸우면 왕 하부지가 이겨어.”

“윤지야, 아빠는 싸우는 게 아니야. 그런 소리 하면 큰일 나. 싸우는 거 절대로 아니에요.”

“응? 근데 왜 져? 싸우니까 지는 거야.”

지환은 윤지의 말에 할 말이 없어 고개를 들었다.

“들으셨습니까? 요즘 윤지랑 대화를 하면 제가 말문이 막힙니다.”

“나도 요즘 아찔할 때가 많아. 조금 더 지나면 온 집안 어른들을 다 삼켜 먹겠어.”

“나중에 크게 될 모양입니다.”

“그러게. 보통은 넘을걸세.”

……아이가 생각 없이 뱉어내는 말을 모두모두 모아 특별하게 빚어내며,

아빠와 외증조할아버지는 윤지 바보가 되었다. 

지환은 바둑알을 들고 다시 생각에 잠긴 권 선생을 바라보다가 입술을 열었다.

“요즘도 운동 열심히 잘하십니까?”

“노인네 운동이랄 게 뭐 있나. 산책이나 슬슬 도는 거지.”

“막걸리는요.”

“끊었네. 아, 자꾸 말 시킬 겐가? 정신 사납게.”

결심했는지 권 선생이 바둑알을 내린다.

예사롭지 않은 손길로 바둑알을 정중히 내리니 지환은 그 손길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아아. 제발 못 보고 지나치시길 바랐는데.

“하…… 제가 이러면 또 막힙니다.”

“어때. 패배를 인정하나?”

끌끌끌끌. 권 선생이 승리를 예감하며 웃자 지환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바둑알을 들었다.

바둑이란 고도의 두뇌 싸움이자 심리전. 

지환은 예상했던 권 선생의 수의 허를 찌르며 바둑알을 내렸다.

“이건 어떠십니까?”

“이게 뭐야. 이게 뭐야!”

순식간에 역전되는 상황에 권 선생은 눈을 크게 떴다. 지환은 딸아이의 귓가에 소곤소곤 속삭였다.

“윤지야. 이건 비밀인데, 아빠가 왕 할아버지 이긴 것 같애.”

다 들려 이놈아…….

“아? 아빠가 이겼어? 왕 하부지 이겼어?”

“어. 아빠가 이긴 것 같애. 왕 할아버지 아빠한테 진 것 같애.”

“이놈이 근데.”

하, 열 받는다. 권 선생은 바둑알만 초조하게 이리저리 만지다가 마른침을 삼켰다.

꽤나 많은 시간이 흐르고, 답을 찾지 못한 권 선생이 최초로 불계패를 남기게 될 순간.

“저 왔어요ㅡ!”

문을 열고 희원이 들어선다.

“엄마아ㅡ!”

지환의 무릎에 앉아 있던 윤지가 튕기듯 일어나더니 엄마한테 달려간다.

아끼던 애착 인형도 내팽개치고 달려가니 희원은 허리를 구부리며 딸아이를 안았다.

“당신 왔어?”

지환이 고개를 돌리자 권 선생은 이때다 싶었는지 콜록, 기침을 하며 팔로 바둑판을 쓸었다.

촤라락, 바둑알이 쓸려 내려간다.

“어어어! 어어어어!”

판을 엎어지자 지환이 입을 쩍 벌린다.

권 선생은 일부러 기침을 내뱉다가 고개를 들었다. 

“어후, 어후,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아이고!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일부러 이러셨죠! 일부러! 지금 다 이긴 판인데 일부러 이러신 거죠!”

“일부러는 무슨! 아니야 이 사람아! 사람을 뭐로 보고!”

응? 희원은 무슨 상황인지 알지 못해 윤지를 바라보았다.

윤지는 그저 엄마를 만난 것이 반가운지 헤실헤실 웃으며 엄마 다리를 붙잡았다.

“아, 패배 인정하셔야죠! 다 이긴 건데! 아! 진짜 처음으로 이기고 있었는데!”

“억울하면 다시 두든가. 노인네한테 역정 내기 있어?”

“와…… 와…… 진짜, 와…….”

“희원이 왔냐? 밥은 먹었고?”

질색하는 손녀사위의 얼굴을 외면하며 권 선생은 희원을 바라보았다.

큼. 언젠간 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오늘은 안 돼.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거든.

“밥 안 먹었지? 우리 밥 먹으러 나가자.”

권 선생이 일어선다.

우르르, 바둑알이 바지에서 쏟아지자 지환은 더욱더 눈꼬리를 올렸다.

“이놈이 노인네 앞에서 눈에 힘을 줘? 버르장머리가 없어도 너무 없어.”

“눈에 힘 안 줬어요.”

지환은 금세 눈에 힘을 풀었고 툴툴거렸다.

권 선생은 지환에게 어서 일어나라 손을 흔들었고, 일어서는 지환의 귓가에 귓속말을 했다.

“좀 봐줘. 윤지한테 이 왕 할애비가 줘터지고 다닌다고 인식되면 좋겠어?”

“저는 애비입니다. 저는 애비라고요.”

“글쎄 다음에 다시 하자니까? 오늘 다시 할래?”

“……됐어요. 다음에 할래요.”

툴툴 부은 지환이 입술을 불뚝 내밀고 대꾸하자 권 선생은 고기반찬을 대접하겠노라며 끌어댔다.

마지못한 척 걸음을 옮기며 지환은 희원을 바라보았다.

“부인. 남편은 오늘도 졌네.”

“뭐, 이젠 놀랍지도 않아. 식사나 하시죠.”

바둑을 두느라 수고했다며 희원이 어깨를 두드리자 지환은 윤지를 번쩍 안아들고 희원의 손을 잡았다.

불리할 땐 연기처럼 사라지시는 왕 할아버지께서는 벌써 주방으로 나가신 모양이다.

“당신, 공연은 잘하고 왔어?”

“잘했지. 어후, 구언이가 이제 옛날의 구언이가 아니야. 너무 슈퍼스타가 돼서 팬들이 말도 못 하게 밀려 왔어.”

“볼만했겠다.”

지환은 광경을 상상하며 웃었다.

데니스 한과 손을 잡고 전 세계를 누비며, 구언은 끝도 없이 날아올랐다.

“구언이가 출국하기 전에 식사 한번 하자 하더라. 남편이랑 같이.”

“좋지. 언제든지.”

아이를 낳고 희원은 무대로 성공적인 복귀를 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녀가 공연이 있을 때마다 윤지를 봐준 친정과 시댁의 도움이 있었고, 주

말이면 아이와 하루 종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남편이 있어 가능했다.

지금의 영광을 혼자 이뤘다고 말하기엔, 숨은 공로자들이 많았다.

“다음 주는 공연 없어. 내가 다음 주 주말엔 맛있는 거 많이 해줄게.”

“오. 좋은데. 오랜만에 주말 같이 보내나?”

주말마다 시간을 비우니 다소 미안한 마음이 들어, 희원은 코끝을 찡긋하며 웃었다.

두 사람은 이제 그만 나가자며 따뜻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언제나 완벽한 관계, 완벽한 삶을 살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겠다.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도 완벽한 삶이란 어쩌면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

결혼해서 살다 보니, 아이를 낳고 살다 보니,

어쩌면 ‘완벽’이라는 건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벽해야만 만족스러운 삶을 사는 게 아니라는 것 또한 깨달았다. 

살다 보면 당장 끝낼 것처럼 싸우는 날도 있겠지.

그림자도 보고 싶지 않아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는 날도 있을 것이다.

상처를 받는 날도, 상처를 입는 날도 있을 것이고 세상에서 가장 섭섭한 사람이 되는 날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때. 대부분의 날들은 사랑하며 살 텐데.

남아 있는 많은 날들을, 사랑으로 채워 넣을 텐데.

……나는 당신으로 인해 부족함을 채웁니다.

“당신 오늘도 수고했어.”

“응. 오늘도 고마워요, 남편.”

나는 당신으로 인해 희망을 배웁니다.

더욱더 완벽해질, 내일의 우리 모습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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