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 내가…… (98/98)

29. 내가……

“사모님, 이제 오세요? 안녕히 다녀오셨습니까?”희주는 현관에서 자신을 맞이하는 상주 직원의 인사에 침묵하며 신발을 벗었다. 

마련된 슬리퍼를 신고 걸음을 옮기려는데, 직원이 가까이 다가오며 목소리를 낮춘다. 

“의원님 들어오셨어요, 사모님.”희주는 홱 돌아보았다. 

“오셨다고? 벌써?”황급히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의원님 언제 오셨어?”“아까요. 오늘 일찍 오셨어요.”이런 젠장. 남편이 일찍 돌아왔단다. 

“지금 어디 계셔?”“서재요. 서재에 계십니다.”“저녁은? 식사는 하셨어?”“샐러드 조금 드셨어요.”“……알았어.”희주는 속도를 붙여 걸음을 걷다가 남편의 서재 앞에 멈춰 섰다. 

아무 생각 없이 노크를 하려고 손을 들었다가 잊었던 것이 떠오른 듯 화들짝 놀라 손을 내렸다. 

일전에도 서재로 찾아왔다가 혼나지 않았던가. 

그녀는 잠시 멍하게 서 있다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머리를 정돈했다. 

자신의 손톱이 길거나 화려한지 확인하고, 액세서리가 너무 화려한 건 아닌지 다시 한번 점검했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다시 문을 응시했다.  

왔다고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어쩐지 굳게 닫힌 이 문을 열어볼 자신이 없다. 

남편은 자신이 서재에 들어서는걸 무척 싫어했으니까. 

“그냥…… 나오실 때까지 기다릴까…….”아니, 사실 남편은 자신이 어디로 찾아오건 싫어했다. 

결혼이라는 제도를 이용해 자신을 필요에 따라 쓰고 버릴 뿐, 다른 이상 이하도 없는 관계.

……휴. 희주는 남편의 서재 앞에서 잠시 시간을 죽이다가 고개를 들었다. 

조심스럽게 노크를 했다. 들어왔다는 건 알려야 하니까. 

“저예요.”운을 떼도 안에서 들려오는 기척이 없다. 

희주는 가만히 서 있다가 다시 노크를 했다. 

“저예요. 들어가도 될까요?”다시 한 번 운을 뗄 때쯤 서재 안에서 둔탁한 소리들이 맞물리기 시작했다. 

낯선 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뜬 희주가 가만히 서 있자 소리는 조금씩 강해지더니, 작아져갔다. 

서재 안에서 이런 소리가 왜 나지? 무슨 소리지?

잘은 모르겠지만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소리 같기도 했고, 쇠가 움직이는 소리 같기도 했다. 

벌컥, 문이 열린다. 

“뭐야.”텅 빈 서재가 눈에 들어온다. 

마치 아무 일도 벌어진 적 없다는 듯 말끔하고, 조용한 공간.

“뭐냐고.”“아…… 저…… 저 들어왔어요. 오늘 일찍 들어오셨네요?”“집에 없었나?”“네?” 자신이 부재였던 것도 몰랐던 모양이다. 

그냥 가만히 침실로 올라갈걸. 희주는 괜한 부스럼을 만들었다는 생각을 했다. 

“네. 오늘 사모님들하고 정기 모임이 있어서요. 아시죠, 저 올해 사연회 모임 회장이…….”“들어와.”……네? 

들어오라며 돌아선다. 

희주는 남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뭐에 홀린 듯 안으로 들어섰다. 

남편은 곧장 서재 의자에 앉더니,

“주워들은 거 없어? 모여서 이런저런 이야기했을 거 아냐.”들어오라고 한 목적을 밝혔다. 

희주는 저도 모르게 두 손을 공손히 앞으로 모으고, 있었던 일들을 회상했다.

뭐라도 건져 올려 남편의 기대에 부응해주고 싶지만ㅡ

하루 종일 권희원이라는 무용수의 잔상에 빠져 있던 그녀에게 기억나는 다른 일이, 있을 리 없다.

“그다지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없었어요. 오늘은 좌담회라기보다 예술 공연 관람 일정을 소화하느라…….”“하, 없어?”돌아온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백인호 의원은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누가 너더러 음악이나 듣고 그림이나 보러 다니라고 그 자리에 올려놓은 줄 알아?”“……죄송해요. 그런데 정말 없었어요.”“내조라고는 손톱만큼도 할 줄을 몰라. 가진 게 많아 뒷배가 되길 하나, 인맥이 넓어 인력이 되길 하나. 쯧쯧.”“더 노력할게요. 죄송해요.”“나가봐.”“네.”희주는 꽉 막힌 숨통을 쥐고 돌아섰다. 

가급적 빨리, 이 공간을 탈출하고 싶은 마음만이 간절할 때ㅡ

“검찰 쪽에 혹시 아는 사람 있어? 중앙지검 쪽이면 더 좋겠고.”“네에?!”화들짝 놀란 희주가 다시 남편을 바라보았다. 

느닷없이 커진 그녀 목소리에 백인호 의원은 힐끔, 시선을 들었다. 

삽시간에 창백하게 얼굴이 질려간다. 

“어, 없어요. 정말 없어요.”손사래까지 쳐가며 없단다. 백인호 의원은 그런 그녀를 응시했다. 

금괴 밀수 수사 종결이 생각만큼 빠르지 않으니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더해 종결을 촉구해야 했다. 

그래서 물어본 건데, 만에 하나 아는 사람이 있어 일에 도움이 될까 싶어 물어본 건데, 저렇게까지 없다며 벌벌 떤다. 

그녀는 언제나 주눅이 들어 있고 겁을 집어먹은 얼굴을 하고 있다 보니 별생각을 하지 못한 백인호 의원은 턱 끝을 들며 나가보라 했다. 

“그래. 니가 배운 사람들을 알 리가 없지. 기껏해야 딴따라들이나 알고 지냈을 테니. 가봐.”“검찰……은 왜요?”지환의 얼굴이 뇌리에 박힌 그녀는 남편의 질문 의도를 알지 못해 심장이 두근거렸다. 

남편이 뭘 알고 묻는 것인가 싶어 되묻지만, 자신이 상상한 그런 건 아닌 성싶었다. 

“시끄러운 소리 말고 나가보라고.”“……네.”외려 남편의 평소 같은 반응을 다행이라 여긴 희주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돌아섰다. 

지환이 자신의 과거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그는 알면 안 된다. 

죽어도.

“그럼 정말로 나가볼게요. 일찍 쉬세요.”……죽어도. 

“어후, 속이 다 후련하네.”두 번은 겪고 싶지 않은 엉망진창 공연을 끝냈지만 강희주를 만나고 착잡함을 한껏 지워낸 희원은 집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이윽고 희주를 떠올렸다. 

“내가 너무 일방적으로 쏟아냈나…… 좀 심했나.”마주 앉기가 무섭게 희원은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했다. 

최대한 목소리에 힘을 뺀 채 정중한 음성을 했지만 정리를 하자면 ‘항의’였다. 

‘공연자의 입장으로 오늘 공연은 최악이었습니다. 이런 공연을 했다는 것 자체가 저와 공연 관계자들에겐 수치일 수 있어요. 다 떠나서 이러한 일들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저희가 큰 실수를 했습니다. 권희원 씨.’돌아온 희주의 답변은 정중한 사과였다. 

공연 시간이 앞당겨진 것에 대한 정확한 이유는 자신들도 몰랐다고 한다. 

아마 중간에 애매하게 시간이 뜨자 기다리는 시간을 없애기 위해 임의 결정이 된 모양이라고. 

앞당겨졌다니 앞당겨진 줄로만 알았다. 

사전에 협의가 되지 않은 일이라는 건 알지 못했다. 

이런 일, 다신 없어야겠다며 그녀는 진심으로 사과했다. 

차후 입장 정리를 하여 모두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겠노라, 명료하게 정리해주었다. 

강희주. 실제로 본 그녀는 더욱 호감형이었다. 

우리 나이도 같은데, 친구할까요? 

“친구라…….”대화가 끝날 무렵엔 친구를 하자더라. 

남편이 정치계에 있으니 곧잘 하는 빈말인가 싶었는데 전화번호를 내어주었다. 

희주가 먼저 전화번호를 건네주니 희원도 건네주었고, 얼마 후 SNS로 친구 신청이 들어왔다. 

자신의 무대를 보고 한껏 반했다니 희원의 입장에서 그녀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ㅡ띵동.

어느덧 집 앞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희원은 내렸다. 

“하리가 있으려나…….”현관문 앞에 서서 비밀번호를 누른 희원은 문을 열었다. 

요즘 이 문을 열고 닫는 것이 마냥 기쁘지는 않다. 

지환은 요즘 일이 많다며 수시로 늦고, 대화는 단절되었다. 

진짜로 일이 많아 늦는 건지 아니면 자신을 피하는 건지도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지환의 말수가 급격하게 줄었다는 것.

뭐, 본인이 시킨 일이니 가타부타 서운할 일은 아니지만 내내 희원의 마음은 불편했고, 무거웠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희원은 현관에 우뚝 멈췄다. 

그가 벗어놓은 구두가 제일 먼저 시선에 들어온다. 

가지런하게 벗어놓은 그의 구두. 희원은 그가 퇴근했음을 알고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그의 얼굴이라도 본 것처럼 반가웠다. 그게 뭐라고 심장이 뛰었다. 

이 집 어딘가에 그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기대로 다가왔다. 

오랜만에 느껴보는ㅡ

감정이 몸을 위로 뜨게 하는 순간.

“나 왔어요! 어디 있어요?”이모님이 퇴근하신걸 보니 하리도 있어야 하는데, 조용하다. 

신발을 벗고 들어선 희원이 급한 마음에 목소리를 올려 보지만 역시 조용하다. 

하리 방을 열어보고, 지환의 방을 열어보고, 자신의 침실도 열어봤지만 없다. 

“뭐야, 없잖아.”오랜만에 겪어보는ㅡ

올랐던 감정이 발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순간.

희원은 소파에 가방을 떨구며 털썩 주저앉았다. 

멀리 현관 쪽을 바라보며 눈만 감았다가 뜨다가, 소파 헤드에 머리를 기댔다. 

“휴. 지금 이 기분 무엇?”뭐지, 희주와의 대화를 통해 풀어냈던 기분이 다시 엉켜드는 것만 같다. 

마치 해야 할 일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숨만 쉬며 허공만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던 때ㅡ

띡, 띡, 띡, 띡.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희원은 벌떡 일어섰다. 

조금씩 열리는 문틈으로 익숙한 아이의 웃음소리가 번져 들어오니 희원은 날아가듯 현관으로 달려갔다. 

“어? 왔습니까?”하리의 손을 붙잡고, 한 손엔 마트 봉지를 들고 있다. 

희원은 운동화를 신고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헤헤헤헤, 하리는 마저 웃으며 다가와 희원의 허리를 붙잡았고, 지환은 안으로 들어섰다. 

“달력 보니까 오늘 공연 있던데. 늦을 줄 알았어요. 공연은 보통 점심 저녁으로 나누어 하는 것 같아서.”“특별 공연이라 늦은 공연은 없었어요. 마트 다녀왔나 봐요?”“네. 이것저것 살까 해서. 떨어진 것들도 많고.”하리 손 씻자. 지환이 희원의 허리를 붙잡고 있는 하리에게 말하며 주방으로 들어간다. 

희원은 하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지환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하리 손 씻으러 가여. 숭모. 하리는 손도 혼자 씻을 수 있어여.”혼자 손을 씻겠다더니 하리가 화장실로 사라진다. 

희원은 봉투에서 이거저거 꺼내 정리하는 지환을 바라보았다. 

……내 집에서 일어나는 풍경이지만, 내게만 유독 낯선 것 같은 풍경.

“그건 뭐예요?”그와 오랜만에 같은 공간을 쓰는 것 같다. 느낌은 그러했다. 

“아, 이거. 빵입니다. 빵 좋아합니까?”“좋아하죠. 어디서 났어요?”“먹어봤는데 맛있어서. 사무실 근처에서 팔더라고요. 혹시 권희원 씨 좋아할까 싶어서 몇 개 사 왔습니다.”치아? 치타? 뭐라 하던데.

지환이 중얼거리자 희원은 빵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날 위해 사 왔다는 빵 몇 개. 

“먹으면서 내 생각했나 봐요?”“맞춰봐요. 내가 권희원 씨 생각 얼마나 했을지. 아, 농담하지 말라고 했지.”지환은 생각났다는 듯 황급히 말꼬리를 흐리며 더욱 분주히 움직였다. 

“그거 치약이잖아요. 냉장고에 들어가는 물건은 아닌 것 같은데.”급기야 치약을 냉장고에 넣고 있다. 

“아, 그러네요. 케첩을 넣는다는 게 정신이.”“케첩 사 오지도 않았잖아요.”“마요네즈가 있죠. 마요네즈를 넣으려고 했습니다.”“케첩 여기 있는데?”희원은 지환이 내려놓은 마트 봉투에서 케첩을 꺼내 들며 웃었다. 

당황한 눈빛으로 돌아선 지환은 그제야 희원을 바라보았다. 

그저 바라보기만 했는데 살갗이 닿는 것만 같은 어색함이 있어, 두 사람은 잠시 바라보기만 했다.

희원은 먼 곳을 응시하는 것만 같은 아득함을 담아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의 신발을 발견한 때로부터, 그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때를 지나,

“서지환 씨,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랜만인 것 같죠.”“그러게요. 저도 지금 그런 생각을 하고 있긴 했습니다.”소파에 앉아 허탈한 숨을 고르던 때 역시 흐르고,

현관문을 열고 그가 등장했던 때를 망라하며 깨달은 것이 있다. 

“서지환 씨, 우리 이렇게 어색하게 지내지 말아요. 그때 내가 했던 말 취소할게요.”……감정을, 지배당하고 있다.

“서지환 씨하고 이렇게 지내는 거 불편하고 답답했어요. 뭔가 집에 오는 일이 즐겁지 않고.”다름 아닌 그에게 나의 감정을, 지배당하고 있다.

생각 끝에 더욱 심장이 가파르게 뛰어오르자 희원은 낮은 숨을 불어 내쉬었다. 

지환은 잠시 봉투를 내려다보듯 시선을 내리다가 다시 올렸다. 

“헷갈린다던 말, 듣고 미안하게 생각했습니다.”그는 늦된 사과를 건넸다.

“권희원 씨를 헷갈리게 할, 그럴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오해는 말아요.”“오해 안 해요.”희원은 그를 길게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오해 안 하니까 우리 지내왔던 대로 편안하게 지내요. 서지환 씨가 내게 사심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는 거, 충분히 알고 있으니까.”인정해야 한다. 나는 그에게 마음이 있다. 

언제 생겨났는지도 모르겠고, 또 언제 커졌는지도 잘은 모르겠지만ㅡ 

“따지고 보면 얼마 안 남았잖아요. 이 집에서 우리가 부딪힐 날도.”내가 당신에게 나의 감정을 저당 잡혔음을, 이제 더는 부정하기가 힘이 든다. 

그렇다 해도 겉으로 드러낼 수 없고, 알려줄 수도 없겠으니ㅡ

그저 나 스스로 인정하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 

“어차피 하리가 돌아가면 우린 타인처럼 살아야 하는데, 좀 아쉽잖아요. 그때까진 잘 지내봐요.”희원은 갑자기 변한 자신의 태도에 조용히 바라보고 있는 지환을 응시하다가, 돌아섰다. 

눈을 질끈 감았다. 

살아온 내내 그토록 혼자이고 싶었던 마음이, 그토록 타인에게 주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하필이면 그에게 도착했다. 

“나 좀 씻고 올게요. 우리 맛있는 저녁 먹어요.”불시착이었다. 

“망했다…… 망했어…….”아…… 희원은 길게 탄식했다. 

식사가 끝난 뒤, 지환은 자연스럽게 설거지를 담당했다. 

희원은 하리 옷을 갈아입히려고 서랍장을 열고는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망했다…… 망했어…… 이제 어쩌냐…….

그를 좋아한다.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내가 잘못 짚었나, 지금 내 감정을 내가 착각하는 거 아냐?”격하게 부정을 해보려 해도 서너 초 흐른 뒤엔 착각이 아니라는 확신이 다가왔다. 

부정을 하면 할수록 더욱 가슴은 뜨겁게 뛰어올랐다. 부질없는 일인 것이다. 

“이걸 어떡해…… 대체…… 어떡하냐…….”아…… 어떡하지…….

사랑 없는 결혼을 제시한 것도 본인이요, 사랑하지 말자 단언한 일 또한 본인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언제든 보내주자 제안한 것도 이 망할 주둥이였고ㅡ

우리는 사랑에 빠질 일이 없다, 확신을 한 것 또한 본인이 먼저였다. 

“미쳤나 봐, 미치지 않고서야 내가 어떻게 이래…….”더 좋은 표현, 더 나은 표현을 찾아볼 것도 없이 망했다. 

하다하다 남편을 짝사랑해야 한다니, 기구한 팔자 좀 보소.  

무슨 이런 일이 다 있어? 

“쪽팔려서 이걸 어디에 말해…….”하…… 진짜 내가…… 하…….

그녀가 연신 터져 나오는 한숨만 허공으로 발사하고 있을 때, 어느새 다가온 하리가 톡톡,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놀란 희원이 뒤를 돌아보자 하리가 땡글땡글한 눈을 맞춰온다. 

“숭모. 하리는 수박이 잠옷, 수박이 잠옷 입을 거예여.”“아? 그래? 아아, 그래. 하리 오늘 수박 잠옷 입자. 아주 좋은 선택인데?”희원은 입고 싶은 것이 분명한 하리의 의사전달에 빙긋 미소 지었다. 

잘린 수박이 앙증맞게 붙어 있는 잠옷은 하리가 가장 좋아하는 잠옷 중 하나다.

아이에게 보드랍고 도톰한 잠옷을 입힌 희원은 하리의 손을 붙잡고 아이의 방을 나섰다. 

설거지 마무리 중인 듯, 지환은 개수대 주변을 정리하고 있었다. 

물기를 전부 닦아내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지금까지의 생활패턴을 보건대 이 남자, 생각보다 깔끔하고 정리정돈에 능숙했다. 

“서지환 씨, 전부터 느낀 거지만 설거지를 대하는 태도가 예사롭지 않은데요?”“아아. 이렇게 하지 않으면 물때가 낍니다. 뭐든 사전 예방이 사후 처리보다 쉬운 법이니까.”사전 예방이 사후 처리보다 쉽다. 

지환이 별생각 없이 뱉어낸 말에 희원이 뜨끔한다. 

“그러게요.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나도 예방을 좀 할걸.” “예?”“아뇨. 아무것도 아녜요.”“싱겁긴.”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지환은 구부정한 자세로 가스레인지까지 꼼꼼하게 닦았다. 

……쿵, 쿵,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자니 심장이 뛴다. 

그가 무척 멋진 일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감각이 뛰어난 옷차림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편안한 옷을 입고 가스레인지를 닦고 있는 저 남자의 뒷모습에 가슴이 뛴다. 

미쳤다. 이것이 바로 짝사랑의 시작인가? 

아니, 그런데 어떻게 시작부터 중증이야? 

희원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제야 완벽하게 깔끔해진 공간이 마음에 드는 듯, 지환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쥐고 있던 쓰레기를 가볍게 휴지통으로 던지자 쏙 골인한다.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그의 행동에 희원은 다시 마른침을 삼켰다. 

뭐야, 휴지조각 던지는 게 왜 멋있어? 저게 뭐라고 갑자기 섹시해?

……설마.

“왜 그러고 서 있습니까?”나, 시작부터 말기인 거냐?!

희원은 지환의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마음을 인정하고 나니 그를 향한 감정이 증폭되는 것만 같다. 

생각을 미루고 미루고 미룬 뒤에야 해버린 자각.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심장은 요동을 치기 시작한다. 

한시도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사랑이 내려오는데, 밟고 싶지 않은 두려움이 함께 떠밀려온다. 

어떡하지.

내가 이 사람을 좋아하면, 이 결혼은 어떻게 되는 거지?

짧은 생각에 정리되지 않을 것들만 머리 위를 뛰어다닌다. 

가망 없다. 권희원의 애정 전선은 가망이 없어.

희원은 생각 끝에 울상을 했다. 

“권희원 씨?”지환은 물어도 답 없이 한참이나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입꼬리를 축 내리는 희원을 바라보았다. 

……아니지.

가망이 없긴 왜 없어? 가장 좋은 방법이 있잖아?

저 남자도 날 좋아하게 만들면 되는 거 아냐?

그녀의 심장은 머리에서 뛰었다가 발끝으로 내려가고, 손끝에서 노닐다가 다시 제자리를 찾아든다. 

희원의 표정은 다시금 환한 빛으로 물들었다. 

그녀의 급격한 표정 변화를 바라본 지환은 조심스러운 시선을 했다. 

“이제 좀 무서워지려고 하는데요. 권희원 씨. 괜찮은 겁니까?”그녀는 울상이었다가.

갑자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가.

“괜찮고 싶어요.”알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희원은 비로소 모든 감정을 지운 표정을 하며 그를 편안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오늘 사랑에 발을 디뎠다. 

얕게 보았으나, 생각보다 깊은 아찔함에 나는 허우적대기 시작했다. 

발이 닿지 않는 두려움, 헤엄쳐 벗어나기엔 끝이 보이지 않는 저 먼 반대편.

“나 있죠, 진심으로 괜찮고 싶어요.”“한국말에도 통역이 필요하다는 걸 절실하게 느끼게 해주네요. 권희원 씨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지금은 몰라도 돼요.” 사랑이란, 원래부터 이렇게 막막한 건가요.

“언젠간 알게 될 테니까.”희원은 깊게 숨을 내쉬며 하리를 내려다보았다. 

멀뚱멀뚱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하리를 바라보다가, 희원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하리야.”“으응?”“있잖아, 숙모는 하리를 사랑해.”“헤헤헤헤.”느닷없이 사랑한다고 말하자 하리가 웃는다. 

언제, 어느 때에 사랑한다 말해도 하리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것이 새삼 감사한 지금.

“하리도 숭모를 살앙해여.”“응. 그리고 숙모는 삼촌도 사랑해.”그는 절대로 진심이라 여기지 못할 그녀의 고백이 튀어나온다. 

하리가 내어준 숙제를 하듯.

서둘러 해치워야 긴긴 잠을 잘 수 있다는 것처럼. 

희원은 하리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지환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사랑해요.”사랑해요.

당신이 나를 사랑하게 될 때까지.

“나의 남편.”가볼게요. 내가, 이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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