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5화 (5/151)

#5. 미니카(1)

“아버지, 저 장난감 사주시면 안 돼요?”

쇼핑센터의 커다란 장난감 판매대에 발길을 멈춘 아이가 아버지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껏 움츠러든 어깨와 꼬물거리는 손은 도저히 아버지에게 말하는 태도라 보기 어려웠다.

“삼정가의 장손이면 남들이 우습게 보는 행동은 하지 말거라.”

“네…….”

아이는 힘없이 아버지의 뒤를 따라 다시 걸었다. 미련이 남아 돌아본 장난감 판매대는 이내 두 부자를 보좌하는 직원들로 가려진다.

아이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지만, 누구도 그런 아이를 달래지 않았다. 눈물 때문에 아이의 시야는 점점 흐려졌다.

그리고 아침이다.

“개 같은 꿈이네, 첫 출근부터.”

침대에서 일어난 조철진은 간만에 꾼 꿈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연신 시발을 중얼거리며 샤워실로 터벅터벅 들어갔다.

재벌 2세로 태어나 평사원으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고속승진을 거듭했다. 하지만 그만큼 떨어지는 속도도 가파르다는 게 문제였다.

표면적으로는 전무의 타이틀을 달고 있으나 결국 작은 부서의 팀장으로 발령이 났다.

경영권을 틀어쥔 아버지의 속마음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저 한 달에 두어 번 가족이라는 테두리를 지키기 위한 식사 자리를 가지는 게 아버지를 만나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그 시간마저도 조용히 수저가 그릇을 건드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지시는 늘 아버지의 측근을 통해서 내려왔다. 그리고 지금껏 충실히 그 지시를 따른 결과는 명백한 좌천이다. 납득키 어려웠다.

쾅.

“으아아!”

샤워실 대리석 벽을 힘껏 내려친 조철진은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샤워기 물줄기 사이로 울분을 토해냈다.

출근 준비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성격상 꾸미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 조철진은 대충 눈에 띄는 양복을 걸쳐 입고 그대로 집 앞에 대기하고 있는 세단에 올랐다.

“좋은 아침입니다, 전무님.”

“좋기는 개뿔. 쫓겨나는 마당에. 오늘 스케줄은 어떻게 돼?”

“오전에 임직원 환영식이 있습니다.”

“그게 다야?”

“아직 전달받은 업무는 없습니다. 원래 공석인 자리라 인수인계 받을 내용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팀장이라며? 왜 공석이래?”

“전략혁신본부에 있는 3팀은 그…….”

“무덤이란 소리네. 염병. 멀쩡히 살아 있는 장남 장례식 한번 거하게 지내주시는군.”

“그래도 성과를 낸다면 다시 돌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너희들은 적당히 타이밍 봐서 다른 부서로 보내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안 갑니다.”

“가, 인마. 나야 망해도 삼정가 사람이야. 평생 놀고먹을 수 있어. 되지도 않은 의리는 무슨.”

암울한 이야기가 오가는 와중에 세단은 삼정자동차 본사 건물로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주차장에는 미리 연락받았는지 꽃다발을 든 중년 남자들이 입구에 서 있었다.

“오셨습니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네, 백문기 총괄이사님. 좋은 일로 온 것도 아닌데 이렇게 마중까지 나와주시고. 감사합니다.”

“하핫. 인생사 새옹지마라 하지 않습니까? 아무쪼록 너무 상심하지 마시고 이곳에서 재기하시길 바랍니다.”

손을 마주 잡은 조철진과 백 이사의 눈에는 서글서글한 웃음이 가득했다. 막역한 사이는 아니지만, 딱히 척을 진 사람도 아니다.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처지는 같았다.

“조촐한 환영식을 준비했는데 바로 올라가시지요.”

“감사합니다.”

임원급이 새로 부임하면 하게 되는 형식적인 환영식을 마친 조철진은 안내받은 자신의 자리에 올려진 박스를 뒤집어 털었다.

노트북, 수첩, 펜 몇 개, 그리고 미니카 상자가 쏟아졌다.

개인 사무실도 아니고 책상과 의자도 여느 평사원과 다르지 않았다. 파티션 위에 꽂힌 명패도 투명플라스틱에 프린트한 용지를 잘라 끼운 것이다.

조철진은 비로소 자신의 처지가 실감되었다.

‘한평생 아버지의 말만 듣고 산 끝이 여기라고?’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손에 넣지 못했다. 건설사의 사장 자리도, 힘이 되어줄 주주들도 자기 편으로 돌리는 데 실패했다.

아니, 한 가지 손에 넣은 게 있다.

조철진은 미니카 상자를 손에 집었다.

“어? 전무님, 어디 가십니까?”

“갈 데가 있어서. 임 차장은 남아서 혹시 내가 파악해야 할 업무가 있는지 좀 봐줘. 내일 보자.”

* * *

(매장 사정으로 주문 접수가 거절되었습니다.)

“더러워서 안 먹는다!”

벌써 다섯 번째다.

점심 때 가볍게 짜장면이나 먹을까 하고 배달 앱을 켠 지 벌써 한 시간이나 지났다.

애초에 심사숙고해서 고를 필요도 없었다. 배달 주문을 넣자마자 번번이 거절 메시지가 올라온다. 이 깡촌까지 오토바이를 타고 들어올 배달원이 없는 뜻이다.

시간이 지나자 허기는 잦아들고 짜증만 솟구친다.

시골 생활을 우습게 여긴 것이 화근이었다.

아침은 원래 먹지 않았고 회사에서 매일같이 하는 야근 덕분에 구내식당에서 저녁을 해결했었다. 조금만 버티면 다시 그런 패턴을 되찾을 수 있는데 마트에서 장을 보고 음식을 하는 귀찮은 짓을 할 순 없었다. 그 때문에 다음 달 출근 전까지 대충 배달 음식으로 밥을 때우려는 내 안일한 계획은 이틀 만에 박살이 났다.

가장 가까운 편의점도 차를 타고 오 분 넘게 나가야 할 거리. 귀찮음과 배고픔을 저울질하기엔 날씨가 너무 추웠다. 꽝꽝 언 내 작고 오래된 경차는 편의점에서 음식을 사고 돌아오고서야 히터에서 미지근한 바람이 나올 터였다.

“조난이네. 조난이야.”

나는 슬리퍼를 끄적거리며 문방구 입구로 걸어가 불량식품 몇 개를 집어 돌아왔다. 나이가 들수록 잘 챙겨 먹어야 한다지만 요즘 서른 중반은 아직 청년이 아니던가?

그렇게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와 과자를 부스럭대고 있을 때였다.

드르륵. 탁.

손잡이 아래쪽을 잡고 천천히 열지 않으면 덜그럭거리는 문을 누군가 힘으로 거칠게 밀어냈다.

“주인 계쇼?”

뭐야? 왜 또 왔어?

예고도 없이 문 앞에 서 있는 남자는 다름 아닌 어제 내가 다시는 오지 말라 간절히 바랐던 그 사람이다.

땅을 팔라고? 아니면 환불하러 왔나? 아이 씨, 둘 다 골치 아픈 건 매한가지다.

“흠흠. 이거 말인데, 혹시 만들 줄 아쇼?”

“예?”

“아니, 내가 만들려고 해봤는데 이게 설명서도 일본어라 도저히 조립이 안 돼서…….”

멋쩍게 뒤통수를 긁으며 내민 미니카 상자에는 조잡한 부품들이 널브러져 있다. 고작 이걸 조립하겠다고 여길 다시 왔다고? 의도가 빤히 보이는 얕은 수작이다.

아니다.

다시 보니 그렇다고 하기엔 내민 미니카 상자에 조악하게 끼워진 부품들이 제법 많았다. 진짜 조립을 해본 것이다.

“일단 들어와요.”

“세상에… 이런 데서 산단 말요?”

이 자식, 호의를 베풀었더니 바로 디스를 하네. 덩치는 전등에 머리가 닿을까 봐 허리를 굽히면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연신 주위를 둘러봤다. 비싼 옷에 외제차를 타고 다는 놈이라 이런 허름한 집은 처음 봤으려니 하고 넘겨야지.

두 번이나 이 문방구로 들어온 손님, 아니, 진상이다.

방 안까지 들인 건 과한 처사가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목적이 불순하지 않으니 그걸로 되었다. 마침 지루하기도 했고.

“말은 편하게 해도 되지? 나보다 한참 어린 것 같은데.”

얼굴은 험악했으나 피부와 몸짓에서 나오는 특유의 어린 티는 숨길 수 없다. 많아야 서른 초반. 아니면 스물 후반의 나이로 보인다. 나보다 어린놈에게 건들거리는 말투를 들으며 존대해줄 생각은 조금도 없다.

“마음대로 하쇼.”

“그래. 잠깐 기다려.”

거절할 줄 알았더니 의외로 쿨하네. 그렇게 나름의 서열 정리를 끝낸 나는 문방구에서 송곳과 오초본드, 그리고 잡다한 공구 몇 개를 찾아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아니, 분명히 설명서에는 적혀 있는 부품이 여기는 없고 또 끼워지지도 않으니 이거 환장하겠다니까!”

내가 자리에 앉자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불만을 털어놨다. 남자가 화를 내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아무리 일제라지만 20년도 더 된 미니카다. 지금 이렇게 제품을 출시하면 온갖 별점 테러를 당하고 조용히 사장될 퀄리티. 그때 그 시절도 조악하고 불친절한 이 미완성의 미니카는 경험 많은 기술자(?)의 도움이 없으면 조립이 거의 불가능했다.

그리고 나는 이 분야의 스페셜리스트다.

“우선 이거 부러진 거부터 붙이자. 런너 조금만 잘라봐.”

“런너?”

“이거.”

남자는 내가 가리킨 런너를 니퍼로 잘랐다.

“잘했어. 이제 사포로 최대한 곱게 갈아서 가루를 모아. 그리고 이쑤시개에 오초본드를 조금 묻혀서 부러진 곳에 바르고 이 가루를 뿌리는 거야.”

“아하! 공구리에 자갈 넣는 거네!”

“거기까진 모르겠고 잘못 붙이면 안 돼. 기회는 한 번이야.”

오초본드의 접착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거기에 더해 런너 가루까지 뿌렸으니 붙고 나면 웬만해서는 떨어지지 않는다. 저 곰 같은 손이 그 섬세한 작업을 잘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나는 도와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스스로 완성해야 한다.

미니카의 시작은 그 성취감부터니까.

“떨지 말고 손에 힘을 최대한 빼. 붙으면 누르거나 문지르는 게 아니라 그대로 잡고 있는 거야.”

덩치는 부러진 부품 두 개를 들고 천천히 아귀를 맞췄다.

“됐다! 으하하! 살다 보니 임 차장이 사고 친 걸 내가 수습을 다 해보네.”

제법이잖아? 단차 없이 깔끔한 수리다. 잘못 붙으면 실톱으로 썰어내고 도와줄 각오까지 했었는데 의외로 섬세한 손놀림이다.

“자, 다음은 기어. 이건 설명서대로 일단 채워 넣으면 돼. 바퀴 축에 안 들어가는 건 라이터로 살짝 데운 다음 이걸로 통통 두들겨서 넣어봐.”

웃기는 꼴이다. 어제만 해도 땅을 팔라 건방지게 말하던 조폭이 지금 안방에 앉아 미니카를 만들고 있다.

하지만 그 모습이 나는 마음에 들었다.

30년 전에도 지금과 똑같았다. 할아버지의 방에서 친구들과 동생들이 울면서 가져온 미니카의 조립을 도와줬었다. 그건 내 의무였다.

골목 대장.

골목 대장의 칭호는 단순히 또래들에 비해 용감하고 덩치가 크다고 붙는 게 아니다. 싸움은 물론 달리기부터 시작해 딱지, 미니카, 구슬치기 등등. 모든 방면에서 압도적으로 뛰어나야 했다. 조막만 한 아이들이 믿고 의지한다는 건 그 정도 큰 차이여야지만 가능한 일이다. 대대로 내려오는 기술들은 학교가 폐교되기 전까지 마치 역사와 전통처럼 다음 골목 대장에게 계승되었다.

그리고 그 쓸쓸한 왕좌에 앉아 있던 마지막 골목 대장은 바로 나였다. 최선을 다해 배운 기술들을 누군가에게 전해 줄 새도 없이 모두 뿔뿔이 흩어져 버렸지만.

“다음은?”

“어? 아. 이제 모터 커버 끼워봐.”

“이거 안 들어가던데.”

“구멍이 좁아서 그래. 송곳을 라이터로 달군 다음 구멍에 찔러넣어. 너무 깊게 말고 살짝 넓어질 정도로만.”

“그냥 사포로 들어갈 기둥 조금 갈아내면 안 되나?”

“그러면 약해지잖아.”

“아!”

이해력이 좋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나름 그 하루 동안 제법 고심을 했는지 문제를 해결하려는 답을 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최악이었던 첫인상치고는 손님으로 썩 나쁘지 않다.

나도 이 덩치 덕분에 옛날 그때로 돌아간 기분이다.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던 그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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