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불청객(1)
“야옹.”
“팔자 좋네. 넌 왜 집도 따로 사줬는데 자꾸 이불을 가져가는 거냐? 불쌍해서 거둬줬더니 아주 보따리를 뺏어가네.”
일어난 자리에는 베개만 덩그러니 있었다. 이불은 누렁이가 둘둘 말아 둥지를 만들어 놨다. 동물병원에서 산 집은 뭐가 문제인지 냄새만 몇 번 맡더니 한 번도 들어가지 않고 품속에만 파고들었다.
복슬복슬한 고양이를 안고 자는 건 행복한 일이다. 하지만 아침은 늘 이런 식으로 일어나니 미칠 노릇이다.
나는 서늘한 겨울 냉기에 코끝이 시려 잠에서 깨고 녀석은 세상 편하게 자다 사료 줄 때가 되어서나 슬며시 나온다.
이번에 나가면 진짜 이불을 하나 더 사든지 해야지.
“에취!”
문방구에서 일과는 지극히 단순했다.
할아버지처럼 그날 하루 쌓였던 먼지를 털고 서리를 맞은 평상과 트랙을 걸레로 닦았다.
손바닥만 한 문방구의 오픈 준비래 봤자 그렇게 30분이면 끝난다.
그리고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 등을 지진다. 이게 내가 일주일 동안 반복하는 유일한 일과다.
유일한 손님이었던 두 형제는 요즘 한창 바쁜지 잠깐씩 와서 달력의 오늘 날짜에 이름만 적고 가버린다. 그래서 공식적으로나 비공식적으로나 지금 나는 굉장히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매일 야근에 툭하면 주말 출근이 팔자인 줄 알았다. 처음엔 좀이 쑤셔서 자격증 공부라도 해볼까 찾아보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그 부지런했던 생활 패턴은 고작 사흘 만에 박살이 나버렸다. 누워서 이 폰 하나만 손에 쥐고 있으면 하루는 총알처럼 지나간다.
웹툰, 웹소설, 폰게임, 너튜브 순으로 이어지는 무한루프는 평생을 해도 지겹지 않을 것만 같다.
그래도 오늘은 사뭇 다른 하루가 시작된다. 오랜만에 외출복을 차려입은 나는 아슬아슬하게 시동이 걸리는 경차를 타고 시내로 나왔다.
부족한 상속세 때문이다.
“네, 231번 고객님.”
“저, 주식담보대출 좀 신청하려고 하는데요.”
부끄럽지만 이 나이를 먹도록 주식은커녕 금융 쪽에는 지식이 전무하다시피 했다. 6개월 이내에 상속세를 내지 않으면 이자가 어마어마하게 붙는다는 협박을 틈만 나면 문자로 통보하는 바람에 쉬어도 쉬는 게 아니었다.
내야 할 상속세는 자그마치 16억.
누적된 배당금과 예전에 살던 오피스텔 보증금에 적금, 퇴직금까지 쥐어짜면 12억까지는 어찌어찌 마련할 수 있었다.
나머지 4억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 이상 답이 없는 단위다. 그나마 배당금이 매년 나오긴 하지만 결국 세금을 떼면 4~5천 사이. 4억은 어림도 없다.
결국, 남은 건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일이다.
“주식 담보 대출은 최대 10억입니다. 담보 주식은 전일 종가의 70%…….”
랩처럼 내뱉은 증권사 직원의 말을 이해하느라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런저런 설명을 듣고 받은 대출은 만기까지 8%의 살인적인 이자율이다. 1년에 3천2백.
하지만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냥 원점으로 돌아온 것뿐.
대출이자와 원금은 배당금으로 채워가고 나는 다시 직장에 다니며 그렇게 다시 야근과 주말 출근을 하면 된다.
손에 16억짜리 주식이 있다는 든든함과 함께 말이다.
어차피 꺼내 쓰지도 못할 돈이지만.
참. 잊을 뻔했다.
오랜만에 나왔는데 장을 봐야 한다! 이렇게 나왔을 때 큰 마트에 들르지 않으면 또 저번처럼 손가락만 빨고 지내야 할지도 모르니까.
마을 근처도 물론 슈퍼는 있다. 근처래 봤자 차를 타고 편의점이 있는 곳까지 나가야 하지만 말이다. 게다가 마을 슈퍼는 남자 혼자 장바구니를 들고 돌아다니기엔 묘한 민망함이 있다. 슈퍼 아주머니가 이것저것 물어보는 스몰토크도 부담스러웠다.
마트에서 사는 것이라 봐야 뻔하다.
올드보이도 울고 갈 종류별 냉동만두들, 그리고 소시지나 떡갈비가 나이를 먹고도 바꿀 수 없는 어린이 입맛에 맞았다. 어차피 다시 회사에 나가면 안 하고 싶어도 균형 잡힌 식사를 점심, 저녁으로 먹을 테니 이 정도 일탈은 몸이 조금 고생하면 된다.
“어머! 누렁이 아버지!”
“아, 선생님, 안녕하세요.”
과자 코너를 기웃거리다 생각도 못 한 사람을 만났다. 누렁이를 봐주셨던 동물병원 선생님과 정면으로 카트가 부딪쳤다.
이런 우연이. 아니다. 마트 4층에는 동물병원이 있으니까 마주치더라도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장 보시나 봐요?”
“네, 하하하.”
짤그랑.
술이다. 그것도 아주 많은 술이 종류별로 카트에 빼곡하게 담겨 있다. 마트 직원이 재고를 채우려고 몰고 다니는 게 아닐까 의심될 만한, 지독하게 편협한 쇼핑이다.
“술, 좋아하시나 봐요?”
“어머. 이건 그러니까… 동물병원 파티를 하거든요! 그때 쓸 술이에요!”
“아, 네.”
누렁이 병원비 60만 원으로 최고 매출 기념 술 파티라도 하는 건가! 그런데 인터넷으로 찾아봤을 때는 검사비가 원래 그 정도는 한다고 했는데…….
“괜찮으시면 누렁이 아버님도 오세요!”
“네? 아, 저는 괜찮습니다.”
“문자로 장소랑 위치 보낼 테니까 꼭 오세요! 꼭 이에요!”
“아…….”
뭐라 거절의 말을 하려는 사이 카트 속 술잔을 쨍그랑거리며 선생님은 어디론가 달려가 버리셨다.
딱히 술자리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친하지도 않은 사람들과 먹는 술은 사양이다. 문자가 오면 정중하게 거절해야지. 술병 개수를 보아하니 적지 않은 사람이 오는 모양이다. 목적 없이 만나는 사람이 즐거운 시절은 20대까지다. 30대 중반을 찍은 아저씨를 반기는 술자리가 있을 리도 만무하다.
“빈말이라도 초대해 주는 마음씨는 곱네.”
뜻밖의 만남을 뒤로하고 나는 다시 과자 쇼핑에 집중했다. 말도 안 되는 문방구 룰 때문에 불량식품은 먹지 못하니 여기서 최대한 많이 사놔야 한다.
* * *
“야야야야!”
쾅쾅쾅.
수의사는 양손 가득 술병이 든 봉투를 들고 문을 열라며 연신 동물병원 문에 발길질해댔다.
“선생님, 퇴근 안 하셨어요?”
“큰일 났어! 우리 파티해야 해.”
“벌써 술 드셨어요?”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자 간호사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물었다. 퇴근 후 술을 마시고 다시 동물병원에 찾아온 날이 자주 있는 것처럼.
“우씨! 안 먹었어! 마트에서 민호 씨를 만났단 말이야!”
“오올. 이젠 민호 씨예요?”
“얘는, 그냥 그렇게 부르는 거지. 그런데 술병이 너무 많아서 그냥 병원에서 파티한다고 얼버무려 버렸어…….”
“세상에. 왜 그러셨어요?”
간호사는 밑도 끝도 없는 일을 저지르고 무슨 면목이 있는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 수의사를 책망했다.
“그럼 이 술을 다 내가 먹는다고 할까!”
“드시잖아요.”
“야!”
일전에 망년회랍시고 둘이서 술을 마셨을 때 그 주량에 놀란 기억이 떠올라 슬며시 웃었다.
“파티… 정말 하실 거예요?”
“온다고 약속도 받아냈어!”
“어머, 어머!”
두 여인은 한동안 당사자는 꿈에도 갈 생각이 없는 파티 계획을 짜느라 해가 질 때까지 병원에서 나가지 못했다.
* * *
또 검은 차다. 장을 보고 굽이진 시골길을 올라가는 중에 문방구 옆에 세워진 검은 세단이 또 보였다.
철진이나 상진이는 아닌데 누구지?
나는 차에서 짐도 꺼내지 못하고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를 손님을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여기 주인 되십니까?”
“네, 맞습니다. 뭐 필요한 거 있으신가요? 찾아드릴까요?”
“어이쿠. 진짜 오래 운영하셨나 보네요? 젊으신 분 같은데.”
“할아버지께 물려받았습니다.”
사십 대 후반의 눈매가 날카로운 남자는 내 물음에 답하지 않고 다시 질문을 되돌려줬다.
뒤가 구린 놈이다. 자신의 정보는 내놓지 않고 질문만 해대는 꼴은 으레 그런 놈들이 하는 짓이다.
아마 내 말에 답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십 대 후반의 남자가 살 물건 따위는 문방구에 없으니까.
“이렇게 손자분이 대를 잇는 모습을 보면 참 뿌듯하시겠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오셨는지…….”
“아, 저는 부동산을 하고 있습니다. 땅이 좋아서 혹시나 매각 의사가 있으실까 해서 찾아왔습니다.”
남자는 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행복 부동산. 박재영 대표.」
여기저기 뿌려대는 명함치고는 지나치게 고급 재질이다. 두꺼운 종이에, 절단면 부분도 각지지 않고 코팅까지 되어 있다.
“네, 참. 저는 아직 입사 전이라 명함이 없습니다.”
“하하하. 괜찮습니다. 좋은 값에 팔아드리겠습니다. 혹시 또 다른 사람이 땅을 보러 왔던가요?”
“아뇨, 따로 그런 적은 없습니다.”
“나중에라도 다른 부동산에서 오면 거기보다 잘해드릴 테니 연락 주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여기 손님은 좀 옵니까?”
“어휴. 말도 마세요. 파리만 날립니다.”
“그래도 요새 20대, 30대들, 키덜트라고 해서 이런 문구점에 자주 들른다고 하던데요?”
“그랬으면 좋겠네요. 하하.”
유도하는 질문이 뻔히 보인다. 의도를 몰랐으면 사실대로 말해 줬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의심이 깊어진 이상, 장단에 맞춰 원하는 정보를 순순히 넘겨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 잠시만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이대로 보내면 안 된다! 분명 땅이나 보자고 찾아온 사람이 아니다.
답은 하나. 두 형제와 연관된 사람이다. 저대로 보내면 두 형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이거 별것 아닌데 집에 가서 자녀분 드리세요. 필통입니다. 재고가 많이 남아서요.”
색이 좀 바래긴 했지만, 양쪽으로 뚜껑이 열리는 고급 플라스틱 필통이다.
내부에는 조잡한 칸막이와 연필깎이, 도대체 무슨 용도인지 모를 연필스탠드가 나름 풀옵션으로 들어가 있는 이 필통은 당시에도 제법 사는 집 아이들의 전유물이었다. 우리 동네에도 이 필통을 가지고 다니는 아이는 나와 전파상 집 딸이 전부였다.
“아이고! 뭘 이런 것까지.”
나는 비닐 봉투를 열어 필통을 확인하는 남자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나중에 필요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남자의 손에 들린 검은색 비닐봉지는 급조한 보험치고는 썩 나쁘지 않은 비주얼이다.
드르륵.
방문을 닫고 동영상 녹화를 눌러놨던 폰을 집어 창문 사이로 촬영을 이어갔다.
남자는 한동안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며 차에 올라탔다.
공인중개사치고는 너무 딱딱한 모습이다. 옷차림도 지나치게 고급스럽다. 저런 방식으로 부동산을 했으면 아마 일 년도 못 가고 망한다는 것에 한 표를 자신 있게 낼 수 있을 정도다.
어설프진 않으나 시골 문방구나 물려받은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 우습게 여긴 탓에 들킨 것이다.
계약직을 전전하면 높은 직급에 있는 상사들의 자연스러운 하대가 보인다. 그것도 아주 잘.
저 남자는 아랫사람을 부리는 직종에 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이 시골 문방구에 올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두 형제에 관한 일이겠지.
“망할 진상 두 놈 때문에 이게 무슨 짓인지. 휴.”
일 매출 2,000원의 단골 두 명은 손이 너무 많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