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불청객(2)
“다녀왔습니다, 회장님.”
“놔두라카이 와 또 다녀왔드노. 불안시립드나?”
조동욱 회장은 돋보기안경을 벗고 읽던 책을 덮었다. 얼마나 읽었는지 표지가 너덜너덜한 책은 제목조차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평소에 없던 일이지 않습니까? 지금 두 형제분이 언제 발톱을 세워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와? 누구 다치기나 한다 드나? 어차피 지분도 없는 것들인데. 점마들끼리 치고받아 봤자 지들만 고생하지.”
“그래도 조상진 전무는 수완이 좋아서 이사진들 상당수를 포섭했다고 합니다.”
“내 죽으면 지가 회장된다꼬 꼬시낀기지 그게 어디 뭐 진짜 지 사람이가. 또 봐래이. 한 번 삐끗하면 끈 떨어진 연 대뿐다. 그래, 글마들이 만나는 장소가 어디라꼬?”
“기념관을 지을 땅에 매입하지 못한 문방구였습니다.”
“허. 거서 뭐 먹을 기 있다고.”
“그래서 문방구 주인을 만나고 왔습니다. 그런데 조철진 전무와 조상진 전무 이야기를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분명 땅을 사러 왔다고 하면 경쟁을 부추기려는 마음에 조철진 전무 이야기라도 나와야 했는데 전혀 입 밖에도 내지 않았습니다. 선물로 이 필통까지 주더군요.”
박 상무는 책상에 오래된 필통 하나를 올려놨다.
조동욱 회장은 주름이 자글자글한 손으로 그 필통을 한참 돌려보고 열어보다 이내 정답을 알았다는 듯이 씩 웃었다.
“박 상무, 니 당했다.”
“네?”
박 상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회장을 바라봤다.
“니는 그기 필통으로 비나?”
“그럼… 아!”
이제야 알겠다는 듯 꺼낸 필통을 다시 비닐봉지에 넣었다. 영락없이 돈다발이 들어간 모습이다. 그것도 꽤 두꺼운 돈뭉치가.
“끌끌끌. 간만에 옛날처럼 현장 뛸라카이 니도 잘 안 되는 갑제? 실수를 다 하네. 그기 돈 봉투지 어데 필통으로 비노?”
“…….”
꼼짝없이 당했다. 하지만 박 상무는 그것보다 인제 와서 필통을 선물한 의미를 알아차렸다는 사실이 더 충격으로 다가왔다.
“내 보기에는 가 보통내기가 아이다. 내 아들 둘 대 꼬 뭘 할라는 지 좀 알아보그라. 사람 쓰지 말고 전산으로만. 국정원 출신인 니도 이리 당하고 오는데 어설프게 사람 썼다가는 고마 산통 다 깨지뿐다.”
‘보기엔 그냥 평범한 청년으로 보였는데 그 편한 웃음 뒤에서 이런 비수를 꽂았단 말이야? 내가 눈치채지도 못하게?’
방심한 탓도 있지만 그 짧은 순간에 이런 기발한 방법으로 자신을 옭아맨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돈다발이 든 비닐봉지를 건네받는 장면을 아마 그때 열어놨던 문방구 안에서 찍고 있었을 것이다.
무슨 전후 사정이 있었던 간에 돈을 받는 모습이 찍힌 영상은 만약 자신이 일선에서 일하고 있었다면 단번에 매장당할 독약이었다.
“뒷돈 챙기지 말라칸지가 엊그제인데 미련시립구로 돈 봉투 안에 필통을 받아 와뿐네. 끌끌끌.”
“죄송합니다. 조금 더 신중했어야 했는데.”
“됐다고마. 니보다 똑똑한 아가 없는 줄 알고 수십 년을 설칬는데 임자 한 번 만날 줄 알았다. 밥이나 무로 가자.”
고개를 깊이 숙인 박 상무의 등을 다독이며 자리에서 일어난 조동민 회장은 걸어가면서도 낡은 필통에 들어간 잡다한 기능이 신기했는지 버튼을 눌러 튀어나오는 빈 서랍과 연필깎이를 만지작거렸다.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어데긴, 구내식당이지. 오늘 수요일이라 면식 나온다 카이.”
삼정전자의 총수. 조동욱 회장은 끔찍한 수전노로 명성이 자자했다.
아버지가 사업 도중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아무 준비 없이 빚더미 회사를 물려받은 게 시작이었다.
맨손으로 처음 시작했다는 흔한 레퍼토리가 아닌 절망의 늪에서 사업을 일으켰다는 독보적인 성공신화 뒤편에는 어려운 시절부터 병적으로 절약에 집착해 왔던 버릇이 남아버렸다.
“회장님, 이제 나이도 있으신데 좋은 음식이라도 드시러 가시지요. 정 지갑 사정이 안 좋으시면 제가 사겠습니다.”
“이 바라 또 놀리제? 어데 뺨은 종로에서 맞고 와가 내한테 분풀이고? 끌끌끌.”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구내식당 한쪽에 마련된 작은 방으로 들어왔다.
구내식당을 자주 이용하는 조동욱 회장을 위한 공간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회장님과 불편한 만남으로 급체하는 직원이 속출하자 그 해결책으로 나온 곳이다. 회장님의 취향이 그대로 들어간 VIP룸은 회장실처럼 소박한 나무 식탁과 의자 두 개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그리고 식탁에는 이미 연락받은 조리실에서 준비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잔치국수가 나와 있었다.
과하게 올라간 고명은 누가 보더라도 회장과 박 상무만을 위한 특별 서비스다.
“금마 그…….”
한동안 부지런히 젓가락을 놀리던 조동욱 회장이 미간을 찡그리며 말을 멈췄다.
“문방구 사장 말씀입니까?”
“그래. 니 연락처 줬드나?”
“대외비 일회용 번호를 줬습니다.”
“연락 안 왔제?”
“네.”
“그라믄 거둘 생각 말그라.”
“하하하. 제가 당했는데 그런 시골에서 썩기엔 아깝지 않습니까? 원하면 비서실에 자리 하나 내주고 키워야지요.”
“그 나이 먹도록 성에 차는 아가 안 보인다 카디마 인제사 사람 욕심을 내면 그게 염치가 없는 기라. 총 뺏긴 포수한테 산군이 어데 겁이나 먹는다나? 고마 늙어서 당했다 치고 미련 두지 말그라.”
“그래도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왜 두 아드님이 그 문방구에 모이는지 말입니다.”
“그 콤퓨타로는 몬 알아내겠제?”
“결과가 나와봐야 알겠지만, 접점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기껏해야 가족 관계나 출신 대학, 직장 정도니까요.”
“에잉. 놔도뿌라. 국수 뿐다. 언능 묵자.”
* * *
불청객이 왔다 간 뒤에 나는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걱정되는 마음에 여태 물어보지 않은 두 형제의 호구조사를 들어간 것이다.
기껏해야 좀 사는 집안에서 고생 없이 자란 녀석들이겠거니 했는데 의외로 인터넷에 이름 석 자를 치니 바로 정체가 드러났다.
삼정전자 조동욱 회장의 장남 조철진, 차남 조상진.
삼정전자의 재벌 2세로 경영 수업을 받는 중에 손을 썼는지 그다지 언론에는 노출이 안 된 모양이었다.
워낙 관심이 없다 보니 어디선가 들었을 법한 이름인데도 얼굴과 매칭이 안 되었다.
한국 굴지의 대기업 재벌 2세와 형, 동생을 하는 사이로 지내고 있었다는 게 실감이 잘 나지 않지만, 막상 그렇다고 돈을 빌릴 것도 아니고 한 자리 달라고 부탁을 할 것도 아니다.
퇴사하고 지난날을 돌아보면 나는 그다지 돈 욕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거기에 이 한적한 시골 문방구에 앉아 있으면 뭘 그리 아등바등 살았나 싶을 정도로 지난날이 부질없게 다가왔다.
지금은 나에게 이 두 형제는 그저 어린 시절 동네 코흘리개 아이나 다름없다.
조금 낯간지러운 말이지만 나는 이 마을의 마지막 골목 대장으로 마땅히 이 아이들이 다치지 않았으면 했다.
끼익.
이런저런 고민으로 머리가 아파질 때쯤 문밖에 차가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양반은 못 되는 녀석들이다.
드르륵.
“형, 우리 왔다 간다!”
“둘, 잠깐 가지 말고 들어와.”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달력에 이름을 적고 돌아가려는 두 사람을 붙잡았다.
몰골이 가관이다. 둘 다 며칠 사이 퀭한 눈동자에 다크써클이 한껏 내려와 있는 얼굴로 변했다. 내가 한창 사업제안서를 쓰던 그때와 똑같은 모습이다. 마냥 놀기만 하는 녀석들은 아니었네.
“왜? 형, 나 바빠. 지금 며칠째 집에도 못 들어갔어.”
“저도 지금 바로 가야 해요.”
“일단 들어와 봐.”
나는 방으로 들어온 두 사람 앞에 사진 한 장을 확대해서 내밀었다.
“이거. 아는 사람이야?”
“박 상무.”
“아나 보네.”
그럼 이야기가 빠르다. 적어도 아군인지 적군인지 구분이 가능하니까.
“이 사람이 여기 찾아왔어?”
“그래, 너희들 뒤를 캐는 거 같아서 일단 모른다고 잡아떼고 보냈어.”
“그럼 됐네.”
“되긴 뭐가 돼. 냄새 맡고 여기까지 왔는데 잡아뗀다고 그냥 그렇구나 하고 갔겠냐? 나까지 한패로 알겠지. 그런데 누구야?”
낭창한 소리를 하는 철진에게 답답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내가 그 아저씨 때문에 얼마나 신경을 썼는데!
“노인네, 아니, 아버지 비서. 옛날부터 아버지 곁에서 이런 일 저런 일 하던 사람이야.”
“뭐야, 그럼 별일 아니었네.”
이젠 내가 안심이다. 최소한 경쟁업체나 뒤를 캐는 기자는 아니란 소리다.
“박 상무까지 동원해서 이젠 뒷조사까지 하고 있었네. 노인네 지독하기는.”
“이제 최소한 이 문방구는 얼씬도 안 할 거다.”
“팼어요?”
“박 상무 어디 출신인지 몰라? 그랬으면 민호 형이 맞아 죽었겠지.”
“야 이씨! 내가 깡패냐? 하여튼 다 내가 처리해 놨으니까 여긴 이제 괜찮아. 난 혹시나 너희들한테 해코지하는 사람인가 해서 물어본 거니까.”
“형이 어떻게 처리해요? 박 상무가 누군 줄 알고!”
“그래, 이건 우리가 맡을게!”
두 형제의 목소리가 격앙되었다. 자식들. 딴에는 내가 걱정되나 보다.
“내 말 들어. 이제 최소한 이 마을까지 사람을 보내거나 너희 뒤를 밟진 않을 거다.”
“뭘 어떻게 했길래 괜찮다는 거야?”
“거기까지 알 필요는 없어. 나중에 알려줄게. 나중에.”
머리가 안 돌아가는 남자는 아니었다. 부동산으로 위장한 것도 그렇고 그 나이에 대기업의 구린 일까지 도맡아 하는 측근이라면 더욱이 그랬다.
아마 지금쯤 내가 준 필통의 의미를 깨닫고 제법 골치가 아프겠지.
동영상의 존재는 두 형제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그 편이 서로에게 좋다. 약점은 아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 위력이 반감되니까.
회사생활도 그렇다. 하루 9시간씩 일주일을 붙어 있는 사람들이다. 누군가의 치부를 알게 되면 그 사람은 더 이상의 인간적 교류가 어려워진다. 적으로 두지 않으면서 마치 수평이 안 맞아 자꾸만 눈에 거슬리게 걸려 있는 액자처럼 미세한 갑을 관계가 된다.
아군은 절대 될 수 없다.
같은 회사 직원이라면, 특히 회장의 측근이라면 그런 관계는 득보다 실이 더 크다.
알고만 있고 모르는 척하면 되지 않겠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진짜 모르면 되는데 어렵게 갈 필요는 없다.
나 또한 이 집안싸움에 엮이고 싶지 않다. 별난 재벌집 손님을 받긴 했지만 결국 다른 세계의 일. 깊게 관여해서 좋을 일이 없다. 그저 건들면 너도 다친다는 정도로 적당한 약점만 쥐고 쫓아내는 게 가장 상책이다.
나는 둘에게 무언가 당부의 말을 하려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꼰대의 영역이다. 나는 최선을 선택했고 그다음은 두 사람의 처세술에 맡기면 된다.
우리는 모두 어른이니까.
“자.”
나는 마트에서 사 온 졸음 껌을 차에 타려는 두 사람에게 하나씩 던졌다. 피곤함에 찌든 얼굴은 당장 차를 몰고 가다 사고가 나도 이상하지 않아 보였다.
“졸지 말고 조심해서 가.”
짧은 인사를 끝으로 오늘 하루도 이렇게 마무리된다.
불청객은 이번 하나로 끝나길 바라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