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15화 (15/151)

#15. 승패(2)

“택뱁니…….”

드르륵.

“으악!”

갑자기 문이 열릴 줄 몰랐는지 택배기사님이 놀라 소리를 질렀다.

차 소리가 들려서 급한 마음에 달려 나왔더니 타이밍이 영 좋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작은 헤프닝이 있었지만 원하는 물건들은 무사히 받았다.

박스 안에는 과하게 포장된 뽁뽁이와 스티로폼이 가득 차 있다. 모두 풀어놓으니 방 안에는 이사할 때보다 더 난잡한 잡동사니들이 널브러졌다.

박박박박.

“야! 그거 긁지 마! 눈 날리잖아!”

스티로폼의 질감이 마음에 들었는지 누렁이가 발톱으로 한참 긁어대는 걸 뒤늦게 발견했다. 개울가에 얼음도 다 녹은 마당에 방에는 때 아닌 눈 천지가 되었다. 저건 정전기 때문에 청소도 힘든데 간만에 아주 대형사고다.

하지만 청소는 나중이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마침내 둘둘 말린 뽁뽁이까지 뜯어내자 드디어 우람한 ‘그것’이 본 모습을 드러냈다.

은성사의 보급형 티브이 CR401.

사백일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이 브라운관 티비는 당시 과장을 조금 보태서 한 집 걸러 한 집에 들어간 칼라 티비다. 자비 없는 볼록한 화면에 버튼식도 아닌 회전식 채널 변경. 아날로그의 감성이 극에 닿은 디자인이다.

조금 색이 바래긴 했지만, 상태도 정말 좋다. 어디 한 군데 부서지거나 흠집 난 곳이 없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예전 할아버지 집에 있던 티비와 똑같은 모델을 구한 것이다.

처음엔 그저 가벼운 마음이었다.

폰으로 너튜브를 보고 있자니 팔이 아프고 바닥에 두고 누워서 보자니 목이 아팠다. 그렇게 폰을 연결해서 볼 모니터나 알아보려고 티비장 치수를 재다가 문득 떠올랐다. 그 갈색 실버스타 티비가.

설마 하는 마음에 중고 상점에 검색해 보니 테스트 영상까지 첨부된 A급이 떡하니 올라와 있었다. 그 매물을 본 순간 가격은 중요치 않았다. 어떻게든 손에 넣으려 했지만 아쉽게도 선입찰이 불발되는 바람에 첫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마지막으로 남은 매물은 어느 빈티지 카페에 인테리어 소품으로 있던 제품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구매 후 수리를 맡기려 했으나 업체에 연락할 때마다 난색을 표했다. 너무 오래된 모델이고 과연 수리해서 얼마나 정상적으로 동작할지 장담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그렇게 사정사정해서 어렵게 수리를 마친 티브이가 지금 도착했다. 그리고 같이 구매한 VHS 비디오테이프 플레이어, 일전에 너튜브로 봤던 미니카 만화영화 ‘챔피언’의 한국 정식 발매 비디오 전편까지.

쓴 돈은 백만 원이 조금 넘는다.

그리고 제대로 티브이에 인버터를 끼워 비디오가 나올지는 장담할 수 없다.

티브이가 문제를 일으킬지, 아니면 인버터가 호환이 안 될지, 혹은 비디오가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망가졌을 수도 있다. 한 번 문제가 생기면 어느 부분이 잘못된 건지도 알 길이 없다.

계획은 무모했고, 실패한다면 돌이킬 수 없다. 살 땐 비싸게 주고 샀지만 팔리지 않는 것들이니까.

“후우… 이제 시작해 볼까?”

인버터와 비디오플레이어가 연결된 티브이를 조심스럽게 티비장 위에 올렸다. 중심을 맞추긴 쉬웠다. 티비장은 마치 비 온 다음 날 차가 빠져나간 주차장처럼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예전 티비의 흔적이 밝은 경계선을 남겨놨다.

우선 시작은 비디오 클리너다.

쾌청.

이름부터 아주 산뜻하다. 약을 넣고 돌리는 제품도 있었는데 괜히 오래된 비디오플레이어에 손상을 줄까 싶어 건식 클리너의 대명사였던 쾌청으로 구매했다.

“자, 안 나오면 망하는 거야. 제발…….”

나는 조심스럽게 쾌청을 비디오플레이어 안에 밀어 넣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SKG 클리닝 테잎 쾌청입니다. 지금 클리닝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화면과 음질의 상태를 맑고 깨끗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운 음악과 함께 조잡한 3D 영상이 브라운관에 재생되고 있었다.

“됐어! 됐다고!”

해냈다! 내 오랜 바람이자 숙원 사업이었던 비디오플레이어가 연결된 티비.

티비는 그 시절에도 냉장고와 함께 집마다 들어가 있는 필수 가전제품이었다.

하지만 비디오플레이어는 그렇지 못했다. 당시 비디오플레이어는 상당히 고가의 제품이었고 그 비싼 비디오플레이어를 설치해 봤자 이 시골 마을에 비디오 대여점이 있을 리 만무했다. 읍내에 나가서 빌려오면 된다고 할아버지께 졸라봤지만, 손자가 사달라 했다고 사줄 수 있는 레벨의 가격대가 아니었다.

우리 동네에서는 유일하게 전파상 집에만 귀한 비디오플레이어가 있었다. 그마저도 전파상집 딸은 천상 공주님으로 요술공주망키나 소공녀 같은 비디오만 있어서 남자아이들이 구경하러 가지 못했다. 나이가 들어서는 비디오나 DVD를 빌려보는 취미가 없었기에 한동안 그때의 간절함과 부러움을 잊고 살았다.

그렇게 30년이 지나서야 그 꿈을 이루게 되었다.

들인 돈이 백만 원이 아니라 천만 원이었어도 그다지 아깝지 않을 도전이었다. 물론 사람의 마음은 간사하기 짝이 없으니 성공하지 못했으면 지금쯤 땅을 치고 후회하고 있었겠지만.

* * *

“안에 상진이 있지?”

“그게, 저…….”

“비켜. 들어갈 거니까.”

철진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문을 막아선 직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지금은 안 됩니다.”

“뭐?”

“못 들어가십니다.”

기껏해야 이제 갓 대리나 달았을 법한 직원이 자신을 막아서고 들이지 않겠다 하니 철진은 기가 찰 노릇이었다.

“들어 오라 그래. 히끅.”

“쟤 술 마셨냐? 그것도 사무실에서 업무 시간에?”

“…….”

문 안에서 들리는 혀가 다 꼬인 목소리는 분명 만취한 상진의 목소리였다. 이 젊은 직원이 문을 막아선 이유를 알게 되자 철진의 살벌했던 표정이 풀렸다.

“챙기러 온 거니까 비켜봐.”

“왔어? 사무실은 안 건드렸으니까 다시 들어가면 되겠네.”

“지랄하고 있네.”

“다 끝났어. 롯지건설에서 일본 쪽 업체와 컨소시엄으로 단가를 10%까지 낮췄어. 우린 게임이 안 돼.”

“사전에 정보는 입수했을 거 아니야. 내가 준 자료에 낮은 단가별 산정 금액까지 있었을 텐데?”

“버렸어.”

“왜?”

“그게 공평하니까.”

“아버지 꼬드겨서 내 자리 뺏은 놈이 갑자기 페어플레이 정신이라도 생겼냐?”

“내가 그런 게 아니라니까!”

“네가 안 그런 거 알아.”

“그럼 왜 그런 되지도 않는 말을 하고 다닌 건데!”

“그래야 네가 회장 자리를 맡을 집념이 있다고 다들 여길 테니까.”

“…….”

“날 봐라. 빡대가리라 수십억을 기부하고 들어간 대학도 중퇴. 재무제표 하나 볼 줄 모르는 까막눈이다. 내가 지금 아버지 뒤를 이를 그릇이 못 된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그래서 다 포기하고 날 밀어줬다고?”

“나도 모르겠다. 시발. 나라고 회장 명함 안 박고 싶겠냐?”

“하. 어쩌자는 거야?”

상진은 트로피를 거머쥔 형이 왜 하필 지금 찾아와 자신의 속을 뒤집어 놓고 이해 못 할 말을 늘어놓고 있는지 따져 물었다.

“그러니까 염병 떨지 말고 일어나. 쟤들이 지금 널 보면 얼마나 같잖겠냐? 세상 부러울 거 없는 재벌 2세로 태어나서 사업 하나 놓쳤다고 세상 다 잃은 표정이나 하고 있고. 쟤들한테 집안 사정 물어봐라. 당장 다음 달 대출이자에 애들 학원비에, 듣기만 해도 막막할 테니까.”

“형이 다 거둬줘. 일 잘하고 똑똑한 애들로만 모았으니까 유용할 거야.”

“난 이미 내 사람은 다 챙겼다. 이제 더 만들어줄 자리도 없어.”

“무슨 뜻이야?”

“전략3팀 전원은 그대로 남아 있을 거라는 거다. 나까지 포함해서.”

“거기 남아서 뭐 하려고?”

“내가 나가면 한 번 버려진 놈들 두 번이라도 못 버리겠냐? 지금이야 실적이 좋으니까 손뼉 쳐 주는 거지. 줄 놓친 패배자들 이대로 놔두고 나만 빠져나오면 1년 안에 다 짐 싸서 나와야 해.”

전략3팀이 기획한 SB3은 다시없을 엄청난 판매 실적을 기록했다. 하지만 철진의 말대로 단발성 성과일 뿐이다. 게다가 삼정자동차의 순 매출은 오히려 다소 떨어지는 결과를 피할 수 없었다. 이런 이기적인 성과를 올린 전략3팀을 좋게 바라볼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철진은 그런 이들을 버릴 수 없었다.

“네 사람은 네가 챙기라고. 저놈 노려보는 눈을 보니 네 말 말고는 안 들을 것 같다. 받아봤자 짐이야.”

철진은 피식 웃으며 아까 자신을 막아선 직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상진은 철진의 말에 의자를 돌려 사무실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훑었다.

모두 자신과 같이 커피와 자양강장제를 물 대신 마시며 지금까지 달려온 직원들이다. 이번 사업을 준비하면서 같이 먹은 편의점 도시락과 국밥만 해도 족히 한 트럭은 넘겼다.

싸구려 인스턴스 음식들과 배달 국밥은 도저히 상진의 입맛에 맞는 음식이 아니었다. 마음 같아서는 근처 레스토랑에서 혼자 밥을 먹고 오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의 억지 때문에 고생을 하는 직원들을 두고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던 탓이다.

붙어 있는 시간만큼 알게 된 것들도 많았다. 누가 어느 대학 출신인지부터, 어디에 살고, 누가 마누라에게 잡혀 살아 야근할 때마다 안절부절못하며 전화통화를 하는지도 말이다.

식구.

지금 이 자리에 모여 있는 직원들은 진짜 동고동락하는 식구가 되어 있었다. 상진이 그토록 부러워하던 진짜 자신의 사람들이다. 상진은 마침내 참아왔던 감정이 터져 나왔다.

“미안… 합니다…….”

고개를 숙인 상진이 흐느끼는 목소리로 힘겹게 사과를 했다. 늘 자신만만하고 깔보는 듯한 시선과 말투로 사람들을 대했던 상진의 눈물은 모두의 콧잔등을 시큰하게 했다.

패배의 책임은 온전히 자신에게 있었다. 하지만 그 피해는 고스란히 같이 나누어 받게 되었다. 저들에게 죄가 있다면 그저 일머리가 좋아 상진의 눈에 띄었다는 것뿐이었다.

상진은 자신이 지금껏 의자를 돌려 앉아 술을 마신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 차마 저들을 마주할 면목이 없었던 것이다.

“괜찮습니다, 상무님. 다음 건은 꼭 수주하겠습니다.”

“백 대리! 동남아 쪽에 유사 사업이 있는지 한번 알아봐. 국내는 나랑 김 차장이 알아볼 테니까.”

“네!”

당연히 수주할 것이라 예상했던 사업에 떨어졌다. 시작부터 철진의 팀을 밀어내고 차지한 부서였다. 모두 자리를 보전받지 못한다는 사실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 희망을 이야기했다. 자신의 어린 상사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숙인 모습은 몸도 마음도 한계까지 몰린 이들을 다시 채찍질했다.

“술 좀 깨면 대리 불러서 문방구로 와. 돈도 많이 모았으니까. 팀원들도 오늘은 일찍 보내고.”

“아버지한테 보고도 아직 안 했어.”

“그 능구렁이는 결과 발표 전부터 알았을걸? 괜히 가서 욕먹지 말고 문자나 보내. 지가 답답했으면 진작 와서 한소리 했겠지. 난 먼저 가 있는다.”

뒤돌아서 여유롭게 손을 흔들며 사라진 철진이 서 있던 자리에는 인삼 음료 한 상자가 남겨져 있었다. 수고했고 힘내라는 형의 위로는 그 하찮은 선물이 대신 전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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