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16화 (16/151)

#16. 승패(3)

“왔냐? 빨리 들어와 봐!”

“형… 이게 무슨…….”

상식의 경계.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경계가 있었다. 인간은 태어나 자라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을 배우며 모두 그 경계를 가지게 된다.

누군가는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쌓인 경험으로, 또 누군가는 끝없는 탐구심으로 저마다 그 경계를 넓혀간다.

하지만 인생을 살면서 경계선 밖의 존재를 마주하게 되는 순간이 반드시 찾아온다. 마치 크툴루신화 속 신을 만난 것처럼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 말이다.

지금 철진과 상진이 그 순간을 맞이했다. 이 형님 덕분에 말이다.

“실버스타 칼라티비! 그리고 비디오플레이어까지!”

“아니, 그러니까, 형. 이걸 왜?”

“너희들 이거 몰라?”

“박물관에서 본 거 같아요.”

“난 책에서.”

“그럴 리가 없어… 고작 다섯 살 차이인데…….”

내 상식의 경계가 무너진다. 내 소중한 추억이 이 두 명에게는 암모나이트 화석처럼 이질적인 물건으로 보인다니.

“그런데 이거 켜지긴 하는 거예요?”

“뭐? 켜지긴 하냐고? 잘 봐.”

딸깍.

나는 전원 다이얼을 조심스럽게 돌렸다.

치지지지직.

브라운관 화면에는 자글자글한 흑백 무늬가 요동치고 있었다.

“야, 이거 안테나가 좀 안 맞는 거 같은데. 너 잠깐 밖으로 나가봐.”

“네? 제가요?”

“나가면 이 창문 밖에 옷걸이 보일 거야. 그거 내가 스돕 할 때까지 조금씩 움직여봐.”

딴에는 지상파 채널도 보고 싶은 마음에 급조해 만든 안테나가 말썽인 게 확실했다.

“됐어요?”

“아냐. 조금 더.”

“됐어요?”

(여섯… 시… 고향…….)

“어어, 나온다!”

노이즈가 거의 없는 깔끔한 영상이 드디어 브라운관에 비췄다.

“세상에. 이게 진짜 켜지네.”

“수리 기사님도 켜질 줄 몰랐대. 죽이지?”

두 녀석은 신기한 물건을 보는 눈이었지만 아직 이 티비의 진가를 모르는 듯했다.

브라운관 아날로그 티비는 단순히 영상을 출력하는 역할을 한다. 그것도 아주 저해상도로. 문제는 이 저해상도를 극복할 방안을 기계적으로 찾는 데 조금의 공백기가 있었다는 점이다. 20년도 안 돼서 문짝만 한 티비가 저렴한 가격에 나오긴 했지만, 당시만 해도 아날로그 화면의 그 흐릿한 해상도는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 상당히 아쉬운 화질이었다.

하지만 만화영화는 그 악조건 속에서 정답을 찾았다. 브라운관에 최적화된 색채와 선명도를 구현한 것이다. 하드웨어의 한계를 소프트웨어의 최적화로 이겨냈달까?

디지털 화면으로는 뭉개지는 픽셀도 아날로그 화면은 부드럽게 윤곽이 살아난다.

그게 내가 100만 원이나 주고 이 무모한 도전을 한 이유였다.

만화는 제대로 봐야 한다.

“잘 봐.”

나는 챔피언 비디오를 플레이어에 넣고 재생을 눌렀다.

(옛날 어린이들은 호환, 마마, 전쟁 등이 가장 무서운 재앙이었으나, 현대의 어린이들은 무분별한…….)

남들은 수백 번도 넘게 들어 익숙한 인트로 영상이 비디오를 모르고 지냈던 나에게는 너무나 생소했다. 그건 두 형제도 마찬가지. 화면에 원색의 만화가 재생되자 우리 세 명은 완전히 빠져들기 시작했다.

“어!”

“이렇게 보인다고?”

비디오는 너튜브 영상과는 완전히 딴판이다. 나도 테스트 삼아 잠깐 돌려보고 제대로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색감도 훨씬 밝고 움직일 때 선들도 부드럽다.

그런데 이렇게 만화영화만 보기엔 무언가 아쉽다.

나는 잠시 비디오를 멈췄다.

“오늘 첫 상영회인데 이렇게 볼 순 없지. 기다려.”

과자 바구니에 있던 불량식품들을 모두 종류별로 집었다. 나야 심심할 때마다 꺼내먹으니 별다른 감흥이 없지만 두 형제는 미니카 부품을 사느라 이 과자들을 한 번도 맛본 적이 없다.

날이 날이니만큼 오늘은 마음껏 먹고 즐기기로 했다.

“형, 오늘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어차피 형은 저번에 4천 원 쓰고 미니카 튜닝은 끝났어.”

그렇게 바닥에 펼쳐진 과자들은 극장의 팝콘을 대신했다. 물가가 올라서 손바닥만 한 과자들 대부분 천 원이 넘었다. 매출로 치자면 꽤 큰 출혈이다.

난생처음 먹어보는 원초적인 단맛이 뇌리를 자극했는지 두 형제는 티비에서 눈을 떼지 못하면서도 손을 부지런히 놀렸다. 특히 양손으로 비벼서 빨아먹는 아풀러는 금방 동이나 새로 두 봉지나 더 가져왔다.

“이거 진짜 맛있어요.”

“그렇지?”

상진의 우울했던 표정도 한결 나아졌다.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색은 안 했지만, 말투가 풀이 죽어 있었던 게 신경 쓰였었다.

어설픈 위로와 공감은 독이다. 나는 상진이와 다른 삶을 살았다. 힘내라, 잘될거다라는 말은 그저 영양가 없는 생색내기다.

이럴 땐 평소와 같으면 충분하다.

“형, 빨리 다음 편.”

“야 이 씨, 네가 좀 바꿔! 아니다. 망가지면 이거 어디서 구하지도 못해. 내가 할게.”

만화영화 한 편은 20분 남짓. 그렇게 우리는 밤을 새워 비디오를 봤다.

겨울밤 뜨끈한 아랫목에 모여 앉아서.

* * *

비디오를 보느라 밤을 그대로 지새웠다.

원래 미니카 튜닝을 하면서 영상을 보려 했던 두 형제도 만화영화에 집중하느라 미니카는 손도 대지 못했다.

“야, 너희들 이러고 오늘 출근할 수 있어?”

“형, 오늘 토요일이야. 빨리 다음 편.”

문방구에 틀어박혀 지내니 요일도 잊었다. 뭐, 사실 매일이 주말처럼 한가롭긴 마찬가지다.

“호야, 호야 자능가?”

“할머니, 어쩐 일이세요?”

퀭한 눈으로 마지막 비디오를 넣으려 몸을 일으켰을 때 밖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에 방문을 열었다. 밖에는 윗집 할머니가 목도리에 벙어리장갑까지 중무장을 하고 서 있으셨다.

“호야, 눈 왔다, 눈. 넉가래 가지고 언능 나오그래이!”

“와! 눈이…….”

정말 많이 왔다. 더럽게 많이.

족히 20㎝도 넘게 내린 눈이 온 세상을 뒤덮었다. 늦겨울 날씨가 참으로 고약하지 않은가?

눈이 즐거울 나이는 지났다. 계절이 주는 낭만 대신 출퇴근과 운전을 걱정하는 중년의 아저씨가 되어 버렸다. 하다못해 연인과 눈길을 사박사박 걷던 추억마저 전무했다. 이 눈가루들은 그저…….

퍽.

차가운 감촉과 함께 시야가 잠시 어두워졌다.

“뒈졌다. 너희들.”

“으하하! 쫓아온다!”

나는 기어코 두 형제의 머리를 붙잡아 눈밭에 박고서야 긴 추적을 끝냈다. 그리고 창고에서 넉가래 3개를 들고 어기적거리는 걸음으로 마을회관을 향했다.

“자. 갱운기는 박 씨 할배랑 내가 몰고 길을 맹글 테니께 우리 호야랑 복지관 얼라들은 뒤에서 안 밀린 눈을 도랑으로 치우면 되야!”

우리 마을은 제설차가 오지 않는다. 경계선도 보이지 않는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제설차가 한번 올라오다가 개울에 빠진 적이 있어서 그렇다 들었다.

큰길은 경운기 뒤에 철판을 매달아 대충 눈을 밀어내면 나머지는 마을 사람들의 몫이다. 그리고 오늘은 나를 포함해 젊은 장정이 두 명이나 더 있다.

“이걸 정말 우리가 다 해야 해?”

“군대 제설 작전이라 생각해. 이걸 다 언제 하나 싶은데 무념무상으로 치우다 보면 끝나잖아.”

“난 사령부 작전병이라 안 해봤어요.”

“난 공익.”

“뭐야? 네가 왜 공익이야! 딱 봐도 행정보급관 관상이구먼!”

“나도 좀 민망하긴 한데 난시가 심하대.”

상진은 공부를 잘했다고 하니 사령부에서 군 생활을 한 게 납득이 됐다. 그런데 철진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저 덩치로 공익이라니. 나는 디스크가 터져도 자비 없이 현역으로 끌려왔는데 말이다.

“그래. 뭐 몸 쓰는 건데 경험이 뭐가 중요하겠냐? 자, 이거 들고 밀어.”

“어디까지 치워야 해?”

“저 언덕 끝에 집 보이지?”

“설마!”

내가 가리킨 집은 너무 멀어 손톱만 하게 보였다. 사실 그 위로 산길까지 조금 더 올라가야 하지만 괜히 절망감을 키울 필요가 없을 것 같아 구태여 말하진 않았다.

“하다 보면 금방 끝나. 자, 가자!”

경운기에 제설 장비랍시고 달아놓은 철판은 정말 길이구나 싶을 정도로만 눈을 치워주었다. 뒤는 우리 장정 세 명의 몫이다.

나와 두 형제는 넉가래를 일렬로 세우고 경운기의 뒤를 따랐다. 갓 내린 눈이 어찌나 찰진지 조금만 밀어도 넉가래에 제법 무게감이 느껴졌다.

“형, 이거 봐라. 난 손 안 대고 편하게 한다.”

“어! 나도 그렇게 할래.”

“야, 그거 그렇게 하면…….”

툭.

“으엑!”

결국, 보이지 않는 턱에 걸린 넉가래에 배를 정통으로 가격당한 철진이 개구리 같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푸하하! 자식아, 편하게 잔머리 쓰다가 그럴 줄 알았다! 어디 넉가래를 잡아봤어야 말이지.”

“형, 나 죽을 거 같아.”

“거참 비루한 죽음이네. 끅끅끅.”

숨이 차서 괴로울 정도로 웃음이 멈추지 않는다. 이렇게 웃어본 적이 언제였던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웃을 일이 잘 없는 일을 했고 굳이 웃으려 하지도 않았다. 삭막한 도시 생활은 내가 모르는 사이 꽤 많은 것을 가져갔던 모양이다.

눈이다. 즐거운 눈.

겨울에 어스름한 안개가 끼면 눈이 내리길 기다렸었다. 눈싸움도, 눈사람 만들기도, 한 번도 완성해본 적 없는 이글루도. 그 기다림의 끝에 내린 눈에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오늘의 웃음까지도 담기겠지. 내년에 내릴 눈은 그렇게 조금 더 무거울지도 모른다.

* * *

슥. 슥.

넉가래가 지나간 자리에 초록색 빗자루로 남은 눈을 치우는 노인들의 몸놀림이 마치 나이를 잊은 것처럼 가볍다.

“하이고메, 올해는 호야랑 복지관 아들이 있어가 눈이 쭉쭉 밀리네!”

“쟈들이 머리는 좀 부족해도 심성은 착한 아들이여. 저 해맑은 거 봐. 울매나 보기 좋아. 그려? 안 그려?”

“흘흘. 강지 새끼도 아니고 눈이 저래 좋은가? 온몸에 눈을 저래 발라쌋네.”

바닥을 뒹구는 철진과 그걸 보며 웃고 있는 두 사람을 노인들은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고된 사회생활이 얼마나 바쁜지 야속한 자식들은 명절이나 제사가 아니면 서울에서 한 시간 거리인 이곳에 발길을 하지 않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들도 방학이 시작되었지만, 학원이니 영어캠프니, 자식보다 더 바쁘게 사는 모양이었다.

적적한 시골 마을에 오랜만에 들리는 청년들의 웃음소리는 그렇게 노인들의 시린 손처럼 차가운 마음을 녹였다.

“대충 마무리는 되아브렸고 호야랑 복지관 아들 시장할 텐디 장작에 고구마 좀 구워 가지고 오지?”

늦겨울 고구마는 설탕이 두 바가지는 들어간다 했다. 과자며 사탕이며 죄다 어르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것들이다. 그저 겨울에 잘 말려둔 고구마말랭이 한 소쿠리가 여름에 달달한 과일이 열릴 때까지 든든하게 먹을 간식이었다.

그래서 이맘때가 되면 집집마다 고구마가 넘쳐났다. 따로 내어줄 간식이라 해 봤자 그 고구마가 전부였다.

“안 그랴도 지금 춘옥이네에서 불 지펴놨어. 금방 가지고 올 꺼여.”

“호야! 아들이랑 일로 와서 고구마 묵으라!”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마을 언덕 위까지 메아리쳤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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