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17화 (17/151)

#17. 그 맛을 찾아서

방금 내린 눈을 치우는 일은 제법 중노동이다. 지금이야 추위에 몸이 얼어 잘 느껴지지 않지만 당장 노곤한 몸을 눕혔다 일어나면 여기저기 근육들이 비명을 지를 것이 자명했다.

하지만 길가에 시원하게 밀어낸 눈들을 보고 있자니 새삼 뿌듯함이 차오른다. 세상에는 열심히 해도 성과가 눈에 보이지 않는 일투성이니까.

제설 작업을 얼추 마무리한 우리는 할머니의 부름에 드럼통을 대충 잘라 만든 화로에 둘러 모였다.

“뜨거우니께 조심혀.”

장작불로 구워진 호박고구마가 쿠킹호일에 싸여 미세한 틈 사이로 힘차게 김을 뿜어내고 있다.

“그냥 먹으면 입천장 다 까진다. 반으로 나눠서 최대한 식혀야 해.”

“아뜨뜨!”

“말을 하면 좀 듣는 척이라도 해, 인마!”

장작불에 구운 고구마를 먹을 때 가장 흔하게 하는 실수다. 손에 잡고 있는 쿠킹호일이 상대적으로 빨리 식으니 안에 내용물도 그러리라 착각하게 된다.

우리는, 아니, 나를 비롯한 이 마을의 아이들은 밭에서 서리한 고구마를 몰래 구워 먹으며 터득한 노하우가 이번에는 안타깝게도 전해지지 않았다.

“목 맥히믄 여 동치미 국물도 묵고 김치도 묵고 햐.”

“감사합니다.”

팔도에서 올라온 어르신들이 각자 솜씨를 뽐낸 소박한 동치미와 김치다.

손바닥만 한 무가 통째로 들어간 동치미 국물이 스텐 그릇에 담겨 둥둥 떠다닌다. 김치는 접시도 없이 도마에 올려진 그대로 할머니 한 분이 전담해서 맨손으로 쭉쭉 찢어 굴 하나를 말아 나눠주셨다.

이 마을은 변하지 않았다. 지금, 이 모습이 30년 전에도 똑같았다. 그래도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똑같을 것이다.

“아니, 더 안 먹고 벌써 그만 먹는댜?”

“배가 부르네요. 잘 먹었습니다.”

어릴 땐 다섯 개도 넘게 먹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두 개만 먹어도 배가 든든하다. 그리고 식탐을 냈다간 소화제 찾을 걱정부터 하는 나이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두 형제는 바닥에 쿠킹호일이 수북이 쌓일 때까지 손을 놓지 않고 있다. 코와 볼에는 숯검정을 발라놓고 말이다.

“하이고메, 복스럽게도 먹네!”

어찌나 먹어대는지 주변에 어르신들이 모두 먹던 손을 멈추고 두 형제만 흐뭇하게 바라봤다. 하지만 두 형제는 고구마에 정신이 팔려 그 시선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고구마로 거나한 만찬을 마친 형제는 정오가 되어서야 그길로 말끔하게 눈이 치워진 길을 따라 나갔다.

얼굴에는 여전히 숯검정을 가득 묻힌 채로.

* * *

대한민국에서 가장 맛있는 스테이크라면 모두의 의견이 분분해진다. 하지만 가장 비싼 스테이크집이라면 모두 입을 모아 말하는 곳이 있다.

바로 청담동에 위치한 운프간 레스토랑.

강남에서 땅값 비싸기로 유명한 청담동의 노른자 땅에 당당하게 간판을 내걸고 지금까지 영업하고 있는 운프간 레스토랑은 감히 비교를 거부하는 독보적인 가격대로 소문이 자자했다.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상진은 직원의 공손한 안내를 받고 뒤를 따라 걸었다.

“어?”

“어? 네가 여기 웬일이야?”

“죄송합니다. 스페셜 오더 메뉴가 같아서 일행이신 줄 오해했습니다. 다른 자리로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냥 같이 먹죠.”

지금 예약된 자리를 변경하면 상진은 일요일 저녁에 북적거리는 홀에서 식사하게 된다. 평소 같았으면 서로 아는 척도 안 했을 두 사람이지만, 근래 격 없이 지내고 있었기에 합석은 자연스러웠다.

“그럼, 식사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아, 에피타이저는 생략하고 바로 메인디쉬로.”

“저도 그렇게 주세요.”

직원이 수첩에 오더를 적고 나가자 두 사람은 어색한 침묵 속에 폰만 만지작거렸다.

일요일 저녁, 그것도 급하게 예약해서 이곳에 온 이유를 서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직원이 스페셜 오더가 같다는 쐐기까지 박았으니 다른 변명을 할 수 없었다.

어색한 시간이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지글거리는 스테이크 접시를 든 직원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안심스테이크와 스페셜 오더인 고구마 버터구이, 그리고 김치입니다.”

명성에 걸맞은 먹음직스러운 비주얼. 스테이크에서 나오는 육향이 방안을 가득 메웠다. 하지만 두 사람이 가장 먼저 나이프로 커팅한 음식은 사이드 메뉴인 고구마 버터구이였다.

메뉴판에 없는 요리. 매년 극소수의 회원권을 가진 고객들만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이다. 진귀한 재료나 까다로운 요리는 예약 후에도 시간이 걸리지만 간단한 고구마 버터구이는 전날에도 쉽게 예약이 가능했다.

세계 정상급 쉐프가 최고의 재료로 조리한 고구마 버터구이. 그 옆에는 어울리지 않게 김치가 정갈하게 플레이팅 되어 있었다. 다름 아닌 두 형제가 동시에 스페셜 오더를 내린 메뉴다.

하지만 그 요리를 먹은 당사자들은 고개를 연신 갸웃거렸다.

혹시나 잘못되었나 싶어 김치까지 싸서 먹어봤으나 맛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게 아니지?”

“아니야…….”

두 형제는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당 30만 원이 훌쩍 넘는 코스 요리를 주문하고도 일어난 자리에 스테이크는 아직 김이 모락모락 나는 채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어디로 갈 거야?”

“내가 보기엔 그 장작불이 맛의 비밀이야.”

“호일에 싸놨는데 뭐 불향이 들어간 것도 아니고 차이가 그렇게 날까?”

“아니라니까! 넌 먹을 줄만 아는 놈이 뭔 말이 그렇게 많아?”

“형도 똑같잖아!”

“일단 내 차로 움직이자. 넌 장작불로 굽는 고구마 파는 곳 좀 알아봐.”

두 사람을 태운 차는 무작정 도로를 달렸다.

차를 세워두고 둘 다 먼저 검색해 본다는 선택지가 가장 최선이 아닐까 싶었으나 지금 두 형제는 이성적인 판단이 어려웠다.

눈을 치우고 배가 터지도록 먹었던 고구마의 맛을 잊을 수 없었다. 아니, 시간이 지날수록 자꾸 떠올랐다. ‘맛있었지’ 정도의 감상으로는 이렇게 레스토랑에 예약까지 하진 않을 터였다. 게다가 두 사람이 이렇게 나란히 차를 타고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한 맛이다.

이제는 집념을 넘어 광기에 가까운 집착이었다.

“뭐 좀 뜨는 거 있어?”

“없어. 죄다 고구마요리법만 나와. 어? 형! 저기, 저기!”

상진이 다급하게 철진의 어깨를 두들기며 한 곳을 가리켰다.

「군고구마 8,000원」

작은 리어카에 실린 드럼통에는 분명 그리 적힌 팻말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장작으로 보이는 나무들이 쌓여 있다.

끼익.

“뭐, 뭡니까?”

갑자기 고급세단이 코앞에 멈췄다. 그리고 검은 양복을 입은 험상궂은 남자가 내려서 자신의 앞에 서자 잔뜩 긴장한 군고구마 장수가 물었다.

“이거 다 주쇼.”

“네?”

“자, 여기 돈이요!”

빳빳한 오만 원권이 상진의 지갑에서 통째로 뽑혀 나왔다.

“어휴, 잠시만 기다리세요! 금방 포장해 드리겠습니다!”

돈 앞에서는 무서울 것이 없는 게 장사꾼이다. 군고구마 장수는 철진의 살벌한 인상에도 함박웃음을 지으며 흰 봉투에 고구마를 부지런히 옮겨 담았다.

“이것도 아니야…….”

“쿨럭쿨럭. 형! 물!”

“야, 여기 물이 어디 있어! 하, 씨. 잠시만 기다려!”

철진이 편의점으로 달려가 사 온 물을 허겁지겁 먹은 상진의 얼굴이 비로소 평온해졌다.

“괜찮냐?”

“으… 죽는 줄 알았네.”

“야. 이거 내가 생각해 봤는데 아무리 먹어도 그때 그 맛이 안 날 것 같아.”

“그게 무슨 소리야?”

“이거 마인드의 차이야. 그때 힘들게 눈을 치우고 먹으니까 맛있었던 거지. 일단 몸이 힘들어야 해. 우리 집 헬스장으로 가자.”

두 형제의 고구마를 향한 여정은 멀고도 험난하기만 했다.

* * *

“야옹!”

“알았어. 밥 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누렁이는 아침을 훌쩍 넘긴 시간까지 밥도 주지 않고 자는 내가 못마땅했는지 알람시계를 자처했다. 처음엔 얼굴을 앞발로 톡톡 건드리더니 내가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쓰자 이젠 배 위에 올라타 시위를 했다.

촤르륵.

밥그릇에 사료를 부어주자 누렁이는 고개를 파묻고 늦은 아침 식사에 열중했다. 고양이 주제에 자율 급식이 안 돼서 매번 이렇게 밥을 줘야 한다. 화장실은 한 번에 가렸으면서 밖에서 고된 생활을 해서인지 밥만큼은 절제가 힘든가 보다. 조금 전까지 세상 다시없을 애교를 부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밥그릇만 탐하는 모습이 조금 얄밉다.

오늘은 차를 타고 나가야 한다. 월요일에 있을 면접 준비를 위해서다.

머리를 자르고 아무리 빨래를 해도 누런색이 안 빠지는 와이셔츠를 새로 사는 게 오늘 내가 정한 일과다. 고작 이런 일로 대단한 일과를 정한 것처럼 아침부터 부산떠는 꼴이 우습긴 했으나 매일 문방구에서 소일거리를 하며 지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차에 시동을 거는 것 자체가 큰마음을 먹어야 할 일이 되어버렸다.

눈이 쌓인 새하얀 경치를 즐기며 달린 차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멈췄다.

첫 번째 목표였던 대성 이발소. 다행히 아직 영업을 하고 계신다.

퇴사할 때도 연이은 야근 때문에 머리를 자를 시기는 진작에 놓쳤었다. 지금 나는 거짓말을 조금 보태서 머리끈으로 묶어도 될 만큼 머리가 길게 자라 있다. 이대로 면접을 보는 건 예의가 아니다.

마트 근처 미용실에서 머리를 잘라도 되지만 굳이 끼릭대며 삼색등이 힘겹게 돌아가는 이 오래된 이발소에 들린 이유는 역시나 어린 시절 추억 때문이다.

물론 머리를 자르는 건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던 어린 나에게 고문과도 같았다. 그 나이 때는 의자에 앉아만 있어도 좀이 쑤시고 몸이 뒤틀리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머리를 멀끔하게 자르고 나면 할아버지와 손을 잡고 돈가스집에 갈 수 있었다. 머리 자르기를 싫어하는 나를 위한 할아버지의 궁여지책이었다.

문득 생각해 보니 명절과 제사 때 뵈었던 할아버지는 늘 머리가 단정하셨다. 차를 타고도 제법 나와야 하는 이 거리를 그 늙은 몸으로 걸어와 머리를 자르고 가신 것이다. 내 작은 경차라도 같이 타고 갔더라면 좋았을 텐데. 무심하게 하늘로 할아버지를 보내드린 죄송한 마음이 추억과 섞여 이발소 문을 여는 손이 무거웠다.

짤랑.

문에 걸려 있는 풍경 소리가 맑게 울린다.

그렇게 문을 열고 들어온 이 오래된 이발소는 색이 바랜 간판처럼 실내도 무엇 하나 바뀐 게 없다. 타일로 투박하게 꾸며진 벽에 붙은 거울들, 마치 우등버스에서 가져온 것처럼 생긴 두꺼운 의자, 그리고 무슨 말인지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로 오래된 라디오까지. 어릴 때 할아버지 손을 잡고 왔을 때와 달라진 거라곤 너무 야위어 버리신 사장님뿐이다.

“안녕하세요.”

“자네, 그…….”

“저 윗마을 문방구집 손잡니다. 하하.”

“맞다! 세상에, 이렇게 자랐구먼!”

이 이발소에 들르지 않은 게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20년도 지난 얼굴을 이발소집 사장님이 기억할 리도 만무하다. 하지만 평생 단골이셨던 할아버지의 흔적이 내 얼굴에 남아 있나 보다.

“그래. 머리하려고?”

“네. 조금 다듬어주세요.”

이발소는 손님의 요구 조건이 통하지 않는다. 그저 상호 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결과가 좋기를 기도하는 것만이 손님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다.

찰칵찰칵.

기분 좋은 가위 소리에 눈을 감은 나는 그렇게 잠시 선잠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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