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18화 (18/151)

#18. 새로운 시작(1)

“다 됐다.”

“아, 죄송합니다. 깜빡 졸았습니다.”

푹 자버렸다. 어쩌면 코를 골았는지도 모르겠다. 오래된 커트보가 닿는 감촉도 좋았고 가죽 의자에서 나는 간질간질한 냄새와 귀 바로 옆에서 들리는 가위 소리를 듣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잠이 들어 버렸다.

“마음에 들지?”

“네… 마음에 듭니다…….”

이발소 할아버지가 정성스럽게 빗겨주신 머리는 마치 자로 잰 듯 정확한 2:8 가르마로 변해 있었다.

잘못 봤나 싶어 몇 번이나 눈을 깜박여 봤지만,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은 트로트 가수 성운도 아저씨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머리였다.

이미 엎질러진 물. 여기서 수정을 요구하면 어떤 머리로 탈바꿈할지 예측할 수 없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극한의 볼륨감을 위해 숱을 거의 치지 않으셨다는 점이다.

하지만 실망하거나 절망한 기색을 내비치면 안 된다. 모처럼 반가운 손님이 와서 한껏 신경써 주셨다는 느낌이 강하게 나는데 면전에서 그 고마운 마음을 깰 용기가 차마 나지 않았다.

하루에 두 명도 오지 않을 손님 중 하나가 단골의 손자인 걸 안 이상 작별인사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쉽게 끝나지 못했다. 결국, 결혼 여부와 여자친구 여부, 그리고 또 온다는 약속을 하고서야 다시 차에 오를 수 있었다.

수습할 수 있을까?

백미러로 본 머리는 생각보다 더 심각했다. 우선 급한 대로 정돈된 머리를 헝클어 버리니 조금 덥수룩하지만, 그럭저럭 사진이 찍히지 않을 정도는 되었다. 구렛나루 부분을 제외하면 이발소에 들르기 전이 차라리 나았을지도 몰랐다.

돌이킬 수 없는 일에 미련을 가지면 나만 손해다. 그래도 뭐 이 정도면 면접에서 예의 없다는 말은 면하겠네.

면도날로 깔끔하게 다듬어진 삼묵색의 구레나룻은 헤어스타일 취향을 탓할지언정 면접 전에 이발도 하지 않은 지저분한 사람으로 보이진 않을 테니까.

다음은 와이셔츠다. 집에 있는 누런색 와이셔츠는 입고 나가기가 민망한 수준이다. 인터넷 주문이 싸고 편한데 당연히 멀쩡할 줄 알고 면접 전날까지 복장을 확인하지 않은 게 화근이었다.

하지만 이 민망한 머리로 옷집 문을 여는 데에는 생각보다 큰 용기가 필요했다. 면접장에 어떻게 들어가지? 라는 걱정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 * *

“김민호 과장이랬나?”

“네, 배강솔루션에 있을 때 제 후배였습니다.”

“이사님이 꼭 데려오라고 하던데 그 정도야?”

“부서도 없이 제안팀이 할 업무를 혼자서 다 하는 친굽니다. 경쟁업체 쪽에서 김민호 과장이 동일 사업입찰에 붙었다는 정보를 들으면 따로 디자인 외주를 맡길 정도입니다.”

“에이. 그런 친구가 왜 계약직으로 거기 붙어 있어? 나와서 프리랜서를 해도 두세 배는 벌겠구먼.”

말이 앞뒤가 맞지 않았다. 일을 잘한다는 건 머리가 잘 돌아간다는 뜻이고 그런 사람이 멍청하게 낮은 연봉으로 회사에 다닐 이유가 없다. 질문을 던졌던 중년 남자의 눈에 불신이 가득했다.

“배강솔루션에서 정규직 전환을 약속하고 꽤 오래 붙잡아 뒀습니다. 결국,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되긴 했는데 묵묵히 일하는 친구라 저도 속을 잘 모릅니다. 아마 팀장님 말씀대로 프리랜서를 했으면 못 해도 부장급 연봉은 받았을 겁니다. 워낙 탐내는 곳이 많아서요.”

“그래? 나야 개발직에서 올라왔으니까 이 바닥은 잘 몰라서 그 친구가 어느 정도인지 감을 못 잡겠네.”

“보통 사업 공고가 뜨면 제안팀이 최소 4명은 붙습니다. 거기에 디자인팀까지 붙으면 최소 6명, 작업은 두 달 정도 걸리죠. 그런데 김민호 과장은 그걸 혼자서 합니다. 디자인도 막내급 인원으로 지원받아서 3일 정도 다듬는 작업만 맡깁니다. 이게 진짜 업무량부터 살인적인 작업인데 발표 자료와 예상 Q&A까지 사고 한 번 없었습니다.”

“믿기질 않네. 못해도 300장은 넘는 작업량 아니야?”

제안서.

해당 사업을 함에 있어 당사가 얼마나 적합하고 타 경쟁업체 대비 우수한지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자료다. 특히 SI 분야에서는 이 제안서의 완성도가 곧 매출로 직결되는 만큼 사활을 걸다시피 중요하게 관리하고 있었다.

제안서에는 투입될 인력부터 해당 사업에서 원하는 결과를 도출하기까지 세부 계획, 각종 요청사항에 대한 대응까지 들어가야 했기에 그 양은 한 번 제본을 하면 전화번호부에 맞먹는 두께가 나왔다.

그런 제안서를 혼자 전담해서 작성했다고 하니 믿기지 않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닙니다.”

“그럼?”

“사업이 시작되면 사업 관리 인력으로 들어갑니다. 분기별 각종 관리산출물 작성도 도맡아 합니다. 감사대응도 직접 합니다.”

“그게 말이 돼? 권 차장, 사업 관리 문서들 본적 없어? 사업계획서부터 뭐 보안일지며 고객사에서 요구하는 별의별 문서들을 다 만들어줘야 해. 그걸 혼자 한다고? 감사대응도 직접 하면 PM도 필요 없겠네.”

“그래서 배강솔루션이 맡은 사업의 고객사들은 무슨 일이 생기면 PM보다 김민호 과장에게 먼저 연락합니다. 배강솔루션에서도 검증 안 된 PM을 그냥 데려오다 보니 김민호 과장이 없는 지금, 걸린 소송만 세 갭니다.”

오늘 면접을 담당한 이경수 팀장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책상에 놓인 이력서를 바라봤다.

“너무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들어서 이걸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원.”

“저도 눈으로 직접 일하는 모습을 보기 전에는 거짓말인 줄 알았습니다.”

“연봉 협상 괜찮을까? 우린 배강만큼 못 주는데…….”

“저도 걱정입니다. 아무래도 사무직은 연봉 테이블이 낮으니까요. 그런데 이 친구 놓치면 진짜 아깝습니다. 아니, 아까운 정도가 아니고 경쟁업체에라도 들어가면 저희가 정말 힘들지도 모릅니다.”

“기다려봐. 이사님 좀 만나고 올게. 혹시나 나 없을 때 그 친구 오면 잠깐 커피라도 마시면서 같이 있어. 믹스커피 말고 스타복스 걸로!”

면접을 코앞에 두고 임원실로 향하는 이경수 팀장의 뜀박질은 너무나 다급했다.

* * *

첫 입사 이후에 두 번째 면접이다.

그 첫 면접마저도 너무 오래전 일이라 기억조차 희미하다. 이직 면접은 여유로운 편이라 들었는데 안내받은 회의실 문을 열기까지 긴장 때문에 목 뒤가 뻣뻣해졌다.

“아! 딱 맞춰 왔네요! 반갑습니다. 저는 IHA 사업본부 이경수 팀장입니다.”

“김민호입니다.”

“권 차장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자, 여기 커피. 아메리카노 드시죠?”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오실 때 둘러보니 회사는 어떻습니까? 아무래도 배강솔루션보다는 조금 작은 곳이라 아쉬우시면 어쩌나 걱정입니다.”

“아닙니다. 정말 좋은 곳입니다.”

거짓말이 아니다.

사람이 좋은 곳이었다. 회의실까지 걸어오며 마주쳤던 사람들이 그러했다. 종이컵을 들고 흡연실로 같이 가는 사원들의 나이와 직급은 모두 달라 보였으나 서슴없이 농담하고 웃었다. 곁눈질로 힐끔 본 사무실에는 파티션마다 화분이나 피규어가 꾸며져 있다. 전 직장에서는 보지 못했던 광경이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서 권 차장이 소개로 모시긴 했는데 사실 저희 회사 연봉 테이블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닙니다. 혹시 희망하시는 연봉 수준이 어느 정도 되는지 들어볼 수 있을까요?”

이경수 팀장이라고 했던가? 서로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시원시원했다.

“포괄임금으로 6,000이면 만족할 것 같습니다.”

“흐음…….”

많이 받을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적게 받을 생각도 없었다. 내가 제시한 금액은 전 직장에서 받던 것보다 천만 원이나 낮았다.

이직하면서 절대 타협하면 안 되는 부분이 바로 연봉 하락이다.

이쪽 분야는 정년이 정해진 직종이 아니다. 나이가 차서 사업의 파견 인력으로 중간관리자를 전전하다가 사고가 터지면 책임자를 교체했다는 생색내기 소모품으로 평생을 다녔던 직장을 그만두게 된다. 그렇게 어중간한 사십 대가 초중반에 회사를 나와 이곳의 문을 두드린다면 차마 월급이랍시고 누구에게 말하기도 민망한 금액을 제시한다. 그 사람이 능력이 모자라서도 회사가 냉혈한이라서도 아니다. 그저 이 사회가 그렇게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참 전부터.

예외는 없었다. 내 위에 남아 있던 선배들이 모두 그렇게 떠났고 내 차례는 조금 일찍 왔을 뿐이다.

제시받은 연봉이 터무니없이 낮다 하여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건너 건너 들리는 이야기로 그냥 그렇게 참고 다닌다 하였다.

자존심은 이제 막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과 노후가 걱정되는 부모님이라는 짐보다 무겁지 않다.

나는 내 발로 이른 나이에 나왔지만, 그 신세가 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불러서 온 곳이 아니라 불러달라 해서 왔으니 한 발을 양보한다. 하지만 더 이상의 양보는 하지 않을 작정이다. 조건이 맞지 않으면 아쉽지만, 다음에 인연이 닿으면 같이 일하자는 인사와 함께 일어나면 된다.

구직활동이래 봤자 평소 친하게 지냈던 선배에게 전화를 한 번 한 게 전부다. 아직 찔러볼 회사는 많이 남아 있다.

“6,500으로 하시고 사업을 맡으실 때 수행비는 사업비에서 법인카드로 별도 지급해 드리겠습니다. 어떠신가요?”

응? 5,500이 아니라?

“네?”

“윗선에 배강솔루션과 같은 수준의 연봉을 제시해도 된다고 허락받았습니다. 아쉬운 감정 없이 저희 회사에 오셨으면 합니다.”

6,500에 수행비 명목으로 법인카드를 사용한다면 정말 전 직장과 거의 같은 연봉 수준이다. 배려치고는 뒤에 무슨 꿍꿍이가 있나 싶을 과했다.

“6,000으로 하시죠. 지금 제가 부른 것도 같은 이곳에 연차 대비 살짝 과하지 않습니까?”

500은 분명 큰돈이다. 직장인 월급에서 500만 원 올리기가 쉽지 않다는 걸 계약직을 전전하며 누구보다 뼈저리게 체감했다. 거기에 법인카드까지 합하면 오히려 더 연봉이 오른 셈이다.

하지만 받아선 안 된다. 연봉은 비밀계약이 원칙이나 회사는 비밀이 없다. 이 회사에 다니는 성실한 누군가가 자신보다 새로 들어온 직원의 연봉이 훨씬 더 높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 상실감이 얼마나 클지 모른다. 500만 원을 받고 그들의 상실감과 시기심을 같이 살 필요는 없다.

무엇보다 나는 누군가를 미워해서 직장을 나온 몸이다. 그런 내가 다른 직장에 들어가며 누군가의 미움을 받는 짓을 한다면 그 사람과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사양한 500만 원은 나에게 그런 의미였다.

“제가 연봉 협상을 지금까지 수백 번은 했는데 더 준다는 회사와 깎아달라는 면접자는 처음 봅니다. 하핫. 그럼, 조건에 맞게 근로계약서를 준비하겠습니다. 혹시 출근은 언제부터 가능할까요?”

“저는 내일도 가능합니다.”

“하핫. 출근 일자가 확정되고 노는 시간이 저는 제일 좋았습니다. 일주일 푹 쉬시고 월요일부터 출근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바로 오셔도 되는데 이제 뼈를 묻으셔야 하니 이런 기회는 두 번 없습니다.”

“그럼 다음 주 월요일부터 출근하겠습니다.”

면접은 짧고 강렬하게 끝났다. 서로 아쉬운 소리를 하기 위해 말끝을 잡고 빙글빙글 돌리는 불편한 자리가 될 줄로만 알았는데 걱정하던 일이 순탄하게 풀렸다.

오늘 밤은 맥주 한 캔과 쥐포로 소소한 축배를 들어야겠다. 같이 할 사람이 없어도 새로운 시작은 늘 설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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