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19화 (19/151)

#19. 새로운 시작(2)

매달 첫째 주 화요일 점심.

대한민국 굴지의 대기업, 바로 삼정그룹의 핏줄이 모이는 식사 자리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살아도 가족끼리 한 달에 한 번은 얼굴을 보고 살아야 한다는 창업주의 유지를 이은 것이다.

삼정그룹 일가는 유독 씨가 귀했다. 창업주였던 故 조병기 회장의 자식은 조동욱 회장이 유일했다. 조동욱 회장의 자식 또한 아들 두 명이 전부다.

스무 명도 족히 앉을 수 있는 다이닝룸의 거대한 식탁에는 그렇게 세 명이 오붓하게 둘러앉았다.

성미가 급한 조동욱 회장의 식사는 늘 미리 나와서 먹기 좋게 식어 있어야 했다. 식탁에는 평소 조동욱 회장이 즐겨 먹는 소박한 나물 반찬과 고등어 한 조각, 그리고 된장찌개가 전부였다. 재벌가 식탁에 올라오는 반찬치고는 너무나 가짓수가 적었다.

“왔나? 밥 묵자.”

먹자라는 말과 함께 수저가 그릇을 건드리는 소리만 들린다.

“니 쇼핑센터 떨어진 거 말이다.”

“네.”

‘노인네 이제 시작이네.’

배가 어느 정도 찬 조동욱 회장이 한 달 만에 만난 아들에게 첫 번째로 건네는 말은 지난 쇼핑센터 수주실패에 대한 추궁이었다.

“우애 할 생각이고? 건물 지을 끼라고 자재비랑 파견인력 잠가 논 거에 떨어졌다고 자금 뺀다 눈치 주는 기관들까지. 니 수습할 수 있겠나?”

“못 합니다.”

“카모!”

쾅.

강하게 내려친 식탁에 그릇들이 들썩였다.

“될 일을 해도 모지랄 판국에 니 실수 하나로 지금 을매나 손해를 보노 이 말이다! 모질이 새끼도 아이고 스울대 나왔다는 아가. 쯧!”

서슬 퍼런 비수가 날아와 아들의 가슴에 박혔다. 평소 같으면 크고 작은 사고를 밥 먹듯 치는 철진을 향한 비수였으나 오늘은 상진이 그 주인공이었다. 똑똑하고 생각이 깊었던 둘째 아들의 실패에 조동욱 회장의 역정은 유독 그 기세가 매서웠다.

“죄송합니다.”

변명은 필요치 않았다. 일본 쪽에서 업체가 갑자기 들어와 단가 차이가 심하게 났다는 말 따위는 오직 결과만 논하는 아버지의 화만 더 키울 뿐이다.

“나갈 때 나가더라도 네가 싸놓은 똥은 다 치우고 나가라. 알긋나?”

“네. 알겠습니다.”

다행히 시간은 벌었다. 좌천이 아닌 대기. 어떻게든 만회해 보려 다른 사업을 쑤시고 다니는 팀원들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일을 면하자 상진의 굳었던 얼굴이 조금 풀렸다.

“다 뭇다. 묵고 가라.”

자리에서 일어난 조동욱 회장은 싸늘한 인사만 남기고 나가버렸다. 두 형제에게 매달마다 반드시 찾아오는 큰 시련의 시간이 비로소 끝난 것이다.

“어때?”

“뭐가?”

“매번 구경만 하다가 직접 당해보니까 어떠냐고.”

피식.

국그릇에 수저를 넣고 젓기만 하던 상진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처음이었다. 서울대에 합격했을 때도, MBA를 수료하고 회사에 입사하자마자 빠르게 성과를 냈을 때도, 칭찬에 인색한 아버지는 한 번도 잘했다는 칭찬을 하신 적이 없었다. 반면 성에 안 차는 장남의 실책은 늘 식사 자리에 메인요리가 되었다. 오늘은 처음으로 형 대신 그 요리가 된 역사적인 날이다.

“버틸 만한데 뭘 그리 호들갑이었어?”

“야. 매달 당해봐라. 너도 바로 술부터 찾을 테니까.”

아버지의 문책은 그 화살의 방향만 달랐을 뿐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아버지의 식사가 끝나면 곧장 먹던 수저를 내려놓고 서로 남인 것처럼 인사도 없이 각자 차를 타고 떠났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두 형제는 아버지가 떠난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식사를 마저 이어갔다. 으레 일어나시겠거니 하고 그릇을 치우기 위해 왔던 직원들이 다시 황급히 돌아갔다.

“오늘은 튜닝 마무리해야지?”

“난 거의 다 끝났어. 참, 민호 형이 트랙 바꾼다던데?”

“뭐?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케톡 보내봤지.”

“너 나는 케톡 친추에 들어 있냐?”

“몰라. 없을… 걸?”

“그래, 시발. 친형은 동네 똥개지 뭐.”

“문자 하잖아.”

“문자는 김미영인지 뭔지 하는 그 사람이 보내는 대출문자가 더 많이 오거든?”

다시 시작된 식사시간. 어느 집안에 형제가 할 법한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오간다. 스마트폰을 보며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는 무미건조한 대화들이지만 이들에게는 그 어떤 때보다 따뜻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던 사이다. 마주 앉아 이야기하며 밥을 먹는다는 것 자체가 기적 같은 일이었다.

“다 먹었으면 가자. 오늘 그럼 새 트랙에서 제대로 승부가 나겠네.”

“지고 분하다고 짐승처럼 소리나 지르지 마. 동네 어르신들 다 깰라.”

“하! 누가 할 소리!”

밥을 먹고 나면 문방구에 들러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그 사실만으로도 아버지와의 식사는 더 이상 불편하지 않았다.

* * *

식사를 마친 회장은 서재에 앉아 낡은 카세트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철 지난 노래를 듣고 있었다.

“박 상무 왔나?”

그 시간을 방해하지 않으려 인사도 없이 다시 나가려는 박 상무를 회장이 불러세웠다.

“식사는 맛있게 하셨습니까?”

“어데. 가들 얼굴 보고 먹으면 소화도 안 된다.”

“그런 것치고는 기분이 좋으신가 봅니다. 생전 안 들으시던 노래도 들으시고요.”

조동욱 회장이 서재에서 노래를 듣는 일은 측근인 박 상무조차 몇 번 겪지 못한 일이었다.

“끌끌끌. 자식 두 놈 모질게 키아놨드마 인자는 혼내키도 눈 하나 깜짝 안 한데이.”

“그게 그렇게 기분이 좋으십니까?”

“회사 안 물려줄까 봐 벌벌 떠는 기 엊그제 같았는데 인자는 고마 밥까지 비우고 나갔다. 세상 내가 무섭지가 않은 기라. 지들 사람도 어느 정도 확보한 거 같고 기반 좀 다지게 내비둘란다. 참말로 재주도 좋지.”

누구의 재주가 좋은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두 아들이 점점 변하고 있는 데에는 분명 그 문방구 주인의 영향이 있었으니 말이다.

“글마 하는 일이 뭐라 캤지?”

“배강SI솔루션에서 제안팀에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IHA라는 작은 회사로 이직했습니다.”

“니 아직 뒤 캐고 있었나?”

“그래서 물어보신 것 아닙니까?”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천연덕스럽게 물은 회장에게 박 상무는 당연하다는 듯 되물었다.

“끌끌끌. 적당히 사업 몇 개 주고, 알제?”

“따로 보고를 올리라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조금 이상하게 보일 수 있으니까요. 업무 진행 명목으로 접점만 키워가겠습니다.”

“그래. 인자 소화 다 대뿌따. 고마 일하러 가자.”

말하지 않아도 원하는 부분을 알아서 긁어주는 박 상무의 만족스러운 일 처리에 고개를 끄덕인 회장은 한 곡도 채 듣지 못한 카세트를 끄고 일어섰다.

* * *

“왜 혼자 궁상이야?”

바닥에 놓인 캔맥주와 쥐포를 본 철진의 감상이 인사를 대신했다.

“왔냐? 형 오늘 면접 붙었다.”

“진짜? 연봉은 얼만데?”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 없이 다짜고짜 연봉부터 물어보는 게 전형적인 한국인이다.

“6,000. 법인카드 하나 받고.”

“많은 거야, 적은 거야?”

“적으… 려나?”

돈이라는 건 상대적이다. 전 직장에서는 사무직으로는 꽤 괜찮은 연봉을 받았다. 물론 정규직이 받는 복지 혜택은 그림의 떡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동년배 중 정유회사나 금융회사에 다니는 소위 연봉 1억을 우습게 여기는 친구들에 비하면 초라한 금액이다.

“그런데 왜 갔어요? 우리 회사 오지.”

“그래! 우리 팀으로 오면 그거보다 훨씬 많이 줄 텐데! 경력직으로 호봉 인정도 되지 않나?”

“내가 한번 알아볼게.”

“돈이 다가 아니야, 인마. 중요한 건 소속감과 성취감이지.”

딴에는 내 먹고살 걱정까지 해주는 마음이 고마웠다. 하지만 돈이 다가 아니다.

처지가 사람을 만든다 했다. 만약 내가 결혼을 하고 토끼 같은 자식이 있다면 지금과 다른 선택을 했을지 모른다. 아니, 처음부터 최 부장에게 들이받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이렇게 여자와 인연 한번 없이 서른 중반을 맞이했다. 지금처럼 혼자 산다면 노후자금까지 큰 무리 없이 모을 수 있다. 거기에 책임질 가족이라곤 공무원연금까지 착실하게 준비하신 아버지가 유일하다.

할아버지의 문방구와 주식을 상속받고 돈에 미련이 없으니 되돌아본 인생은 후회가 가득했다. 그래도 업계에 가장 큰 기업에 입사해 괜찮은 연봉을 받고 있다는 위안으로 많은 걸 놓쳤다.

딱히 취미 생활도 술자리도 즐기지 않는 내가 원했던 건 다름 아닌 소속감과 성취감이었다. 연줄 없는 계약직이 가지는 미묘한 벽과 정규직들에 매번 돌아가는 내 성과들은 환멸과 후회만 남겼다.

이제 실무에서 팀원들과 얼싸안고 울고 웃을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이 바닥은 수명이 짧은 편이니까. 한 번이라도 더 느껴보고 싶었다. 제안서가 통과되어 첫 수주에 성공했을 때 같이 얼싸안고 환호성을 질렀던 그때의 기쁨을. 결국, 밀려날 계약직이니 괜히 친하게 지내다 눈 밖에 나지 말라는 팀원들의 당부를 탕비실 뒤에서 듣기 전의 소속감을 말이다.

어차피 설명해줘 봤자 이놈들은 재벌 2세들이다. 내 소박한 꿈을 이해할 위치가 아니다. 서 있는 자리가 같아도 다른 곳을 바라보는 게 사람인데 심지어 재벌 2세와 서민의 차이다.

“뭔지 알 것 같아요.”

“나도.”

그게 무슨 소리냐고 따질 줄 알았더니 두 사람은 짐짓 어른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이 뭘 알아! 짜샤! 웃기고 있네! 뭐 그건 그렇고 비디오나 보고 있어 봐. 트랙 꺼내올게.”

슬슬 꺼낼 때가 되었다.

360도 트랙.

미니카의 속도를 가장 확실하게 검증할 수 있는 트랙이자 통곡의 벽이다. 당시에 이 트랙을 완주할 수 있다면 어느 정도 미니카에 조예(?)가 깊은 것으로 간주했다.

단순히 빠르다고 돌 수 있는 트랙이 아니다. 속도가 높아지면 필연적으로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아무리 최고 속도가 빨라도 토크가 떨어진다면 돌지 못하고 중간에 떨어지게 된다. 360도 코스를 돌더라도 그 속도로 코너를 돌면 십중팔구는 트랙 밖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런 코스 이탈은 미니카에도 큰 충격을 주기에 파손도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트랙에 추가된 코스 하나로 전문가의 영역에 들어선 것이다.

그동안 기본 모터로 돌지 못해서 실망할까 봐 그동안 꺼내지 않았지만, 이제는 준비가 되었다. 두 형제는 미니카 튜닝 부품의 가장 핵심인 모터를 모두 교체했다. 지금부터는 느린 속도가 아닌 코스 이탈 같은 다른 부분을 걱정해야 한다.

트랙 하나만 교체하면 끝나는 간단한 작업.

아직 두 형제는 튜닝이 끝나지 않았는지 비디오도 켜지 않고 미니카에 열중했다.

“완성했으니까. 다 되면 나와봐.”

“잠시만!”

나는 노을이 지는 산을 바라보며 평상에 걸터앉았다. 겨울 눈이 아직 녹지 않은 마을은 이렇게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푸근해졌다.

다음 주면 이제 이 여유도 안녕이다. 다시 구두를 신고 꽉 막힌 도로를 따라 회사로 가야 한다.

어쩐지 기대감보다 피곤에 찌들어 이 풍경을 지금처럼 여유롭게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이 더 크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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