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다미야 미니카 대회(1)
이직하고 출근을 시작한 지 한 달이 다 되어 간다. 그럭저럭 새로 들어온 경력직치고는 나름대로 적응을 잘하고 있었다.
“김 과장, 이 자료 혹시 내일 아침에 검토 가능할까?”
“네? 아, 주시면 한번 보겠습니다.”
“수정할 게 있으면 수정해 줘! 아, 그리고 내일 고객사에서 기능 구현 때문에 회의를 하자네. 김 과장도 같이 가자고.”
“저는 실무 쪽은 하나도 모르는데, 가서 도움이 될까요?”
“어차피 제안서랑 수행계획서에 다 들어가야 하는 내용이니까. 앉아만 있으라고, 앉아만.”
“네, 준비하겠습니다.”
아직 공시도 나오지 않은 사업에 사전회의. 고객사의 유지보수사업을 오래 맡은 업체는 이런 기형적인 업무가 종종 있었다. 어차피 입찰할 업체가 없는 사업에 고객사의 담당자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관련 사업을 전담해 왔다면 갑과 을의 사이가 불분명해졌다.
제안서도, 사업 관리도 대부분 관행대로 흘러가기에 사실상 내가 하는 업무는 이전과 비교해서 극단적으로 줄게 되었다. 업무시간에 사람들 손에 못 이기는 척 이끌려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이른바 농땡이를 피울 정도니 말이다.
“자, 퇴근합시다! 김 과장도 오늘 일 없지?”
“네, 저도 이제 가야죠.”
그래도 업무가 업무인지라 이따금 야근하기는 했지만, 그마저도 9시를 넘긴 적은 없었다.
누군가 많은 업무를 받으면 부서에 상관없이 나누는 게 내가 아직 적응하지 못한 이곳의 당연한 문화다. 이전 회사에서는 도와달라고 말할 사람조차 없었는데 이곳에는 퇴근 시간이 넘어서 일하는 사람이 있다면 도와줄까? 라고 물어보는 사람들 때문에 업무가 더 늦어질 지경이다. 내가 아닌 우리가 일하는 곳이다.
“요 앞에 껍데기집?”
격 없이 지내는 성격 덕분에 금방 친해질 수 있었던 팀장님이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소주잔을 꺾는 흉내를 내었다. 팀장님 곁에는 벌써 도원결의를 맺은 동료들이 두리번거리며 다음 타겟을 물색하고 있었다.
케톡.
「형, 언제 와요? 철진이 형이 문 억지로 열려다가 손잡이 부러뜨렸어요.」
지금 간다, 이 자식들아.
“죄송합니다. 집에 일이 생겨서 오늘은 일찍 가봐야겠습니다.”
“쩝, 뭐 할 수 없지. 그럼, 우리끼리 가자고.”
“김 과장! 2차는 저기 국밥집 갈 건데 이따 마음 바뀌면 와요!”
다들 아침마다 술 때문에 집에서 바가지를 긁혀 당분간 못 마신다는 한탄을 하면서도 퇴근 시간만 되면 뉴럴라이저를 맞은 것처럼 또 술을 마시러 가는 모습이 우스우면서도 사람 냄새가 난다. 아쉽지만 오늘 술자리는 패스.
회식이 없어도 하루가 바쁘다.
퇴근은 깔끔한 5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달려가면 고양이 한 마리와 시커먼 남자 둘이 나를 기다린다.
작년 이맘때쯤 결혼하고 아이가 있는 친구와 술을 마신 적이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만난 터라 밤늦도록 회포를 풀려고 했지만. 아이가 기다린다며 서둘러 버스에 오른 친구를 뒤로하고 섭섭한 마음으로 혼자 술 한 잔을 더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 내 꼴이 그 친구와 비슷하다.
세 놈 다 내 자식이 아니라는 다소 막장 드라마 같은 점만 빼면 말이다. 하지만 어쩐지 입가에는 기분 좋은 미소가 번졌다.
* * *
끼익.
나는 차를 세우자마자 곧장 신고 접수(?)를 받은 문을 확인하기 위해 달려왔다. 어찌나 세게 잡아당겼는지 문고리가 부러진 게 아니라 완전히 뜯겨나가 있었다. 어떻게 본드로 대충 붙이면 되겠지 하고 안일하게 생각했는데 군대도 안 갔다 온 놈이 힘은 장사였다.
“야! 문 왜 부쉈어!”
“아니, 이게 안 잠긴 줄 알고 밀었는데…….”
“너 인마. 부엌에 불 꺼져 있으면 평상 밑에 열쇠로 열라고 했잖아!”
“아니, 방에 불이랑 헷갈린다니까! 그냥 다 꺼두면 되잖아.”
“안 돼. 누렁이 혼자 있는데 너무 어두워. 여하튼 이거 내일 네가 공구 가져와서 수리해라. 문고리는 저 밑에 철물점에서 사고. 비싸고 튼튼한 거로!”
문을 부순 주제에 뭐가 그리 억울한지 철진이는 문방구에 들어갈 때까지 한참을 구시렁거렸다.
아직 해가 짧았다. 원래 누렁이는 밖에서 혼자 지내는 녀석이긴 했지만, 왠지 혼자 어두운 집에 두기가 그래서 늘 방에 불을 켜놨었다. 아마 철진은 그 불을 보고 내가 안에 있다고 착각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너희들 이제 미니카 부품은 더 살 거 없지?”
끄덕끄덕.
시간은 빠르다. 하루에 천 원씩을 모아 사는 부품인데 두 형제의 미니카는 어느새 알록달록한 부품들로 한껏 꾸며져 있었다.
“둘 중에 누가 빨라?”
한동안 두 형제의 레이스를 보지 못했다. 고작 문방구 앞에 있는 작은 트랙에서 우열을 가려봤자 얼마나 대단하겠냐만은 그래도 같은 돈을 들여 튜닝을 했는데 누구의 튜닝이 더 효과가 좋은지는 확인해 보고 싶었다.
“나.”
“저요.”
“뭐야? 누구야.”
“전에 내가 이겼잖아!”
“야, 그때는 내가 건전지가 다 된 거고! 그다음 날은 내가 이겼지!”
또다시 승리욕이 불타올랐는지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트랙 위에 미니카를 올렸다.
위에엥.
모터 소리부터가 처음과는 완전히 달랐다. 반 바퀴를 사이에 두고 달린 두 미니카는 그야말로 호각. 이대로 계속 달린다면 정말 누구 하나 건전지가 방전되어서 강제로 승부가 날 것 같았다.
“멈춰봐. 더 달리면 모터 탄다.”
모터는 기본적으로 공랭식이다. 게다가 구형 기종이라 두꺼운 모터 커버에 싸여 있어 잘못하면 커버와 함께 모터가 찐득하게 녹아내리게 된다.
“이러면 승부가 안 나잖아요.”
“이거 봐. 여기 가볼래?”
나는 폰으로 웹페이지 하나를 열어서 보여줬다.
「다미야 2023년 3월 봄 코리아 미니카 경주 대회」
오늘 점심시간에 문방구에 채워 넣을 미니카 부품을 찾다가 발견했다. 가장 놀라웠던 건 이 미니카 경주가 아직 공식 대회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일본 본토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그 규모가 크다는 점이었다.
문방구를 제패하고 다른 동네로 원정을 갔던 적은 있었지만. 공식 대회는 나조차도 한 번도 나가보지 못했다. 아마 한국에서는 최근에서야 열렸고 국제대회는 꾸준하게 개최되었던 모양이었다.
“형. 이거 형도 같이 나가자.”
“맞아요! 같이 나가요!”
“야, 내가 무슨…….”
예선과 본선은 연이어 주말에 진행되기에 그 주만 시간을 빼면 될 일이다. 재미 삼아 참가해 봐도 좋은 추억으로 남겠다 싶어 보여줬더니 불똥이 엄한 곳에 튀었다.
“형 미니카가 제일 빠르잖아!”
두 형제의 성화에 이기지 못하고 결국 세 명이 동시에 신청 접수를 눌러버렸다. 그저 재미있는 추억거리나 만들고 오라고 하려 했더니 덩달아 나도 참가하게 생겼다.
“이길 생각은 하지 말고 그냥 참가하는 데 의의를 두는 거야. 알겠지?”
대회를 확인하고 작년 결승 경기를 너튜브로 찾아봤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그 속도는 우리 구세대 미니카와 아득한 차이다.
“야, 괜히 또 졌다고 분해하지 말…….”
그냥 재미 삼아 나가보자는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려 했는데 두 형제는 이미 문방구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돌겠네.”
뒤늦게 따라 들어간 방에는 이미 두 사람이 널어놓은 미니카 부품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두 사람은 진심이었다.
“야, 그런데 너희들 이런 대회 나와도 돼?”
근본적인 의문이다. 그래도 대기업 재벌 2세들이다. 이런 대회에 나온다는 게 흠이 되진 않을까 걱정이 들었다.
“마스크 쓰니까 모를 거예요.”
“나와도 딱히 상관없어.”
상관없을 리가 있나.
하지만 내가 뒤늦게 말린다고 들을 기세가 아니다. 그저 예선에서 보기 좋게 탈락하고 다른 미니카 구경이나 한다는 데 의의를 두자 말할 타이밍은 한참 전에 지났다.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예선에서 바로 탈락한다면 나이에 맞지 않게 한동안 풀이 죽어 있을 게 분명하다. 전에 내 미니카와 겨뤄보겠답시고 덤볐다가 두 바퀴도 못 가서 따라잡혔을 때 그 표정이 눈에 아직도 선했다.
앓느니 죽지. 어휴.
“잘 들어. 대회는 총 두 종목이야. 스피드 트랙과 점핑 트랙. 우리는 점핑 트랙으로 다시 신청할 거야.”
“스피드 트랙은 왜 안 돼?”
“거긴 진짜들만 오거든.”
검색해본 바로는 스피트 트랙은 카본 경량화부터 듣도 보도 못한 천상계의 튜닝카만 예선 통과가 가능했다. 우리 같은 어중이떠중이가 들어갔다간 예선 1차에서 탈락할 게 불 보듯 뻔했다.
반면 점핑 트랙은 비교적 최근에 생긴 종목이었다. 그만큼 노하우가 쌓이는 기간이 짧았고 트랙 사이사이에 점프대가 있어 아무리 우승 후보라 하더라도 그날 운이 나빠 탈선하는 경우가 많았다. 탈선의 위험을 쉽게 줄이려면 차체를 무겁게 하고 속도를 제한해야 했다. 우리 구형 미니카도 충분히 가능한 수준으로 말이다.
말하자면 운빨게임이라는 뜻.
충분히 해볼 만한 승부다.
운만 따라준다면 예선 1차 정도는 통과할지도 몰랐다.
그 정도만 해도 우리에겐 소중한 추억으로 남을 수 있다.
* * *
“전무님, 올해 홍보기획안입니다.”
“응? 아, 내가 알아야 할 게 있나?”
일머리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던 철진은 전적으로 직원들을 신뢰하는 방향으로 업무를 익혀 나갔다.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자료는 최대한 알기 쉽게 정리하여 철진에게 올려졌고 철진은 그런 보고서를 한 장도 허투루 읽는 법이 없었다.
“CF와 굵직한 프로모션은 1팀과 2팀이 전담하기로 했습니다. 저희는 지방행사 전시와 서포터를 맡습니다.”
“우리가 저번에 좀 심하긴 했지?”
“뭐 노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잘됐습니다. 건설 쪽에서 넘어온 저희 팀원들은 아직 업무에 미숙하니 시간을 벌었습니다. 내년 기획안도 미리 준비할 수 있고요.”
이미 3팀은 올해 목표 실적에 수십 배에 달하는 기록을 갈아치웠다. 그것도 마진율을 낮춰 전체 매출까지 타격을 줬으니 내년까지는 납작 엎드려 지내는 것이 상책이었다. 지금 전략혁신본부 3팀은 한가하게 지내는 것이 차라리 다른 부서를 도와주는 격이었다.
“지방행사라 해 봤자 죄다 백화점이네. 재미없게스리. 잠깐만.”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시려고요. 저희 저번 철야 끝나고 아직 링거 맞는 사원이 있습니다.”
조철진 전무를 가장 측근에서 오랫동안 지켜봤던 임 차장은 불길한 기운을 느꼈는지 운을 떼기도 전에 무조건 안 된다. 못 박았다.
“우리 레이싱 팀 서포트도 있네?”
“저희가 할 건 없습니다. 레이싱 대회 광고는 1팀이 CF를 전담하니 같이 들어갈 테고 레이싱 팀 운영비는 따로 책정되니까요. 아마 그냥 지방행사만 덩그러니 적어두기엔 칸이 허전해서 넣어놨을 겁니다.”
“이거 하자.”
“예?”
“팀 서포터.”
“아니, 이미 레이싱 팀 운영비는 따로 있다니까요.”
“말고 새로운 팀을 서포터 하자고.”
“휴. 저희한테 떨어진 비용이 얼만지 아시고 지금 하시는 말씀입니까?”
기껏해야 행사부지 대여료와 인테리어비 명목으로 받아낸 운용비는 1년 예산이라 말하기도 초라했다.
씨익.
철진은 답답한 소리를 한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임 차장에게 어금니가 훤히 보일 정도로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티 세 장이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