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다미야 미니카 대회(2)
“전무님, 꼭 하셔야겠습니까?”
“어. 이번에 이거 못 하면 그냥 뒈질래. 저번 축구팀 때도 다 말려서 참았잖아.”
“안 참으셨습니다. 회장님께 말씀드리고 혼나지 않았습니까?”
“이씨. 그거나 그거나! 결국 못 했잖어!”
철진의 확고한 의지에 임 차장은 이마를 손끝으로 문지르며 난감한 기색을 보였다. 철진의 이번 억지는 흡사 꺾이지 않는 마음과 같았다.
한때 축구팀 운영게임에 푹 빠져 살았던 적이 있었던 철진에게 축구팀의 구단주가 되어 직접 운영하고 싶다는 꿈은 본인이 생각하기에 꽤 실현 가능성이 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철진은 집안이 집안이다 보니 아버지만 잘 구슬린다면 아주 허무맹랑한 꿈이 아니었다.
물론 모두의 만류를 뿌리치고 그 말을 아버지 앞에서 입 밖으로 꺼내자마자 정신 차리고 회사 일이나 제대로 배우라는 호통을 들은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지금은 그때와 달라. 일단 저지르고 볼 수 있어. 혼나는 거야 그때 가서 혼나고. 오히려 상황도 훨씬 좋아.’
구단주를 하겠다는 꿈도 선수로 뛰질 못하니 딴에는 나름 현실적인 방안으로 타협을 본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구단주가 아니라 직접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나서는 프로 선수(?)가 될 수 있다니! 이번 건은 양보와 타협의 영역이 아니었다.
“상진이만 설득하면 돼. 그럴싸한 명분 좀 찾아봐.”
모름지기 마름은 주인을 잘 만나야 한다. 21세기의 마름은 일을 많이 한다고 월급을 더 많이 받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장밋빛 미래가 보장된 것도 아니다. 임 차장을 비롯한 삼정자동차 전략혁신본부 3팀은 주인을 아주 잘못 만난 편에 속했다.
“삼정자동차 홍보 때문이라고 하는 건 어떻습니까?”
“뭐 맞는 말이긴 한데 그걸로 상진이가 눈 하나 깜짝할까? 지한테 도움 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저… 이건 어떨까요?”
머리를 맞대고 이런저런 그럴싸한 의견들이 취합되기 시작할 무렵, 급하게 작성된 계약서도 뽑혀 나왔다.
“그럼 간다!”
어찌나 서두르는지 손에 들린 계약서를 파일에도 넣지 않고 뛰쳐나간 철진은 오늘 퇴근 시간까지 돌아올 기세가 아니었다.
“안 말려도 괜찮을까요?”
“뭐, 우리 일이 늘어나는 것도 아닌데 알아서 하시겠지. 티셔츠는 빨리 입고 싶어 하시니까 지금 바로 제작업체 한번 알아봐. 전무님도 저거 하신다고 당분간 정신 팔려 계실 테니 진짜 좀 쉬겠네. 너희들도 사우나나 다녀오든지, 아니면 카페 가서 커피라도 한잔하다가 퇴근해.”
“정말 그래도 될까요?”
“요 앞, 당구장만 가지 마. 거기 임원들 출근 도장 찍는 곳이니까.”
임 차장은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고 의자에 기대 달콤한 낮잠을 청했다. 책상 위에 떡하니 발을 올리고 자는 모습은 어쩐지 예전의 철진과 닮아 있었다.
사자가 없으면 여우가 왕인 법. 오랜만에 찾아온 무두절은 그렇게 임 차장의 세상이 되었다.
* * *
상진은 지난 과오를 청산하기 위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쇼핑센터 수주 실패는 뼈아픈 패배로 당장에 부서가 공중분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타격이었다.
그저 남는 여유 자금과 인력으로 찔러본 사업이 아니라 완공일 단축까지 경쟁력으로 내세우기 위해 자금과 파견 인력까지 세팅해둔 탓이었다. 모 아니면 도를 지르는 철진의 작품이지만 결국 뒤집어쓴 사람은 상진이였다.
본인의 객기까지 더해진 결과라 하소연을 하는 꼴도 우스웠기에 지금 상진이 지휘하는 총괄사업팀은 전력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무차별 폭격.
어떻게든 남는 자금과 인력을 소모해 매출을 올리기 위한 발버둥은 그만큼 많은 양의 서류를 필요했고 모두 정신없는 하루를 또다시 보내고 있었다.
“새로 입찰해서 부지를 따내는 것보다 중간에 문제가 생겨서 공사가 중단된 곳 위주로 검토해 주세요. 수익성이 확실해도 대금이 막혀서 꼬였다면 우리가 쉽게 먹을 수 있으니까요.”
“네, 전무님. 대구 재개발부지 입찰 건은…….”
벌컥.
노크도 없이 활짝 열린 문 앞에는 철진이 어울리지 않게 해맑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또 왜 왔어? 바빠 죽겠는데. 이번 주 내로 다 못 끝내면 대회 날 나가지도 못해.”
“야, 이거 봐.”
「삼정자동차 다미야 미니카 경주, MM팀 스폰서 계약서.」
“이게 뭔데?”
“우리 MM팀 공식 후원 기업이 바로 삼정자동차라는 거지.”
“미친 새끼! 정신 나갔어?”
“미친 새끼가 아니고 형이야, 형.”
“왜 아주 재벌 2세가 정신줄 놓고 장난감이나 가지고 논다고 광고를 하지 그래? 이거 오너리스크야. 알아? 잘못하면 주식까지 휘청한다고.”
“오너리스크로 보일지 유쾌한 홍보로 보일지는 네가 얼마나 언론사를 잘 구슬려 놨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고.”
상진은 권모술수에 능했다.
어린 나이에 아직 주식 지분도 받지 못한 차남이지만 승계 구도에서 유일한 경쟁자인 형과 비교하면 충분히 투자가치가 매력적이라는 점을 활용했다.
겉으로 보기에 오늘내일하는 회장이 당장에 쓰러지기라도 한다면 주주들은 상진의 편에 설 게 분명했다. 그 짐작 하나로 회사 내 임원진과 언론사에 인맥을 넓혀놨던 자신을 이용하려는 철진의 얕은 수작임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또 있었다.
“아버지가 허락할 것 같아?”
“허락보다 용서가 쉽지. 그 분야에서 이 형님은 스페셜리스트다.”
“미쳤어? 얼굴 팔리는 걸 그렇게 싫어하면서 갑자기 연예인 병이라도 도진 거야?”
“그래도 마스크 쓰잖아.”
“헛소리는 그만하고 진짜 왜 그러는 건데?”
“민호 형이 걸려.”
“…….”
“박 상무랑 한바탕 했다며. 이럴 때 세 명이 같이 얼굴도장이라도 찍어두지 않으면 나중에 무슨 일을 당할지 누가 알겠어? 너나 나나 아버지 밑에 박 상무를 그렇게 오래 봤는데 뒤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아무도 몰라.”
임 차장의 빛나는 아이디어가 제대로 통했는지 철진의 입에서 민호 형이 나오자 상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분명 민호 형은 두 형제를 위해 박 상무에게 무언가 했다고 하였다. 단순히 부탁을 한 건지 아니면 거래가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적어도 자신들과 접점이 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입증하는 편이 훨씬 안전했다.
“휴. 기자들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대신, 건설에 있던 형 직원들 좀 보내줘. 한 일주일 정도만.”
“야, 한 달도 보내 줄 수 있어! 자, 사인.”
자신이 팔려 가는 게 아니다. 모처럼 꿀 같은 휴식을 취하고 있는 팀원들이 듣는다면 하극상도 불사할 말을 태연하게 내뱉은 철진은 상진의 코앞에 사인을 독촉하며 팬을 들이밀었다. 흡사 영화에서 신체 포기각서를 받아내는 건달과 같은 모습이었다.
“나도 모르겠다, 이제. 아버지가 뭐라고 하면 형이 알아서 해.”
슥슥.
휘갈긴 사인이 마침내 계약서에 채워졌다.
“오케이!”
“그런데 민호 형이 허락 안 할걸?”
상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던 철진의 등에 찬물을 끼얹었다.
“하! 우리 민호 형이 그럴 리가!”
* * *
“안 돼.”
“왜!”
“우리끼리 그날 잠깐 가서 하루 다녀오는 건 괜찮은데 삼정자동차 로고라도 박고 나오면 어떻게 될지 몰라서 그래? 상진이 넌 이거 안 말리고 뭐 했어? 형이 모자라면 너라도 정신을 차려야 할 거 아냐!”
“씨. 틈만 나면 치사하게 머리를 걸고넘어지네!”
아무리 공식 대회라지만 한국에서 미니카의 인기는 이미 수십 년 전에 사그라든 뒤다. 대회는 완구판매행사의 일환처럼 당일 구매한 제품으로 아이들과 같이 조립해서 참여하는 부모가 대부분. 그들을 제외하면 소수 10~20명의 마니아가 승부를 겨루는 대회였다.
온라인 중계도, 뉴스 기사도 없이 너튜버들 몇 명이 동영상을 촬영하는 것 말고는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경기라 참가를 권했던 것이다.
그런데 등짝에 삼정자동차 로고를 박고 다닌다면 당장에 도촬 당한 사진들이 다음 날 뉴스 기사로 대문짝만하게 실릴 게 분명했다.
고작 장난감 대회에 참가한 20살 후반의 재벌 2세를 세상이 어떻게 판단할지 나조차도 예측이 되질 않는다.
이 둘은 모험을 하기에 너무 잃을 것이 많다.
“형, 이거 해도 괜찮아요. 공식팀 창단도 아니고 단순 스폰서니까 복잡하게 얽히는 것도 없어요.”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추억놀이는 놀이로 끝내야 한다. 난 그저 작은 회사에 다니는 평범한 직장인이지만 두 사람은 다르다. 이 경솔한 행동으로 회사에 손해라도 발생한다면 그 감당할 수 없는 책임은 이 두 형제가 오롯이 감내해야 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진이 내 앞에 나섰다.
“이게 뭐야?”
“대회가 끝나고 다음 날에 올라갈 기사들이에요.”
「삼정자동차 홍보를 위해 두 손을 걷어붙인 형제.」
「삼정자동차가 벌인 재미있는 깜짝 이벤트.」
「SB3 다음은 미니카? 유쾌한 삼정자동차의 전략.」
사진이 들어갈 공란에는 어떤 모습이 찍혀 있어야 하는지까지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다. 얼굴은 마스크를 쓴 옆모습이나 뒷모습이 아니면 안 된다는 문구까지 명시되어 있다.
“별거 없어! 그냥 티셔츠 입고 미니카에 스티커 몇 개 붙이면 된다니까. 남의 돈으로 미니카 부품도 사고 가서 소고기랑 참치도 먹고!”
너희 집안 돈이야…….
“철진이는 그렇다 치고 넌 왜 하자는 거야?”
알고 지낸 시간이 길지는 않으나 평소 상진이라면 절대 동의하지 않을 일이다. 제법 머리도 잘 돌아가고 셈도 밝은 녀석이 이런 불안한 일에 동의했다는 게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거 철진이 형 꿈이야. 전에도 이런 적 있었는데 아버지 때문에 못 했거든.”
끄덕끄덕.
철진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상진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분명 다른 속내가 있는 듯했지만, 묻는 말에 제대로 대답해줄 것 같지도 않고 해가 되는 일에 본심을 숨길 만큼 나쁜 성격이 아니었다.
나는 거의 볼을 찌를 기세로 내밀고 있는 철진의 펜을 받아들었다.
“야, 그런데 진짜 옷까지 맞춰 입어야 해? 너무 쪽팔릴 거 같은데.”
“형. 팀워크의 기본은 유니폼이야.”
사인과 도장을 잘못 찍어 인생을 망친 사람은 내 주위에도 족히 다섯은 넘었다. 회식을 정말 좋아하는 직장 동료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칼퇴근을 하게 만든 혼인신고서, 이사하자마자 누수가 터져 아랫집 리모델링 비를 물어준 친구의 부동산매매계약서 등등.
당시에는 경솔한 계약을 했음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면서도 나는 정말 조심해야겠다는 조금 이기적인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보니 이 황당한 계약서에 내 사인이 들어가 있다.
삼인성호(三人成虎)라 했던가?
세 사람만 우기면 없던 호랑이도 만들어 낸다 하였다. 매사에 철저한 편이라 자부했는데 철진이의 막무가내와 상진이의 논리에 잠시 홀린 것 같았다.
하지만 마냥 걱정보다는 철진의 행복한 표정이 더 눈에 들어온다. 오랜 꿈이라 했으니 두 사람이 집요하게 우기지 않아도 결국엔 이 계약서에는 내 이름이 들어가 있었을 것이다.
동생의 꿈을 꺾는 형만큼 잔인한 사이도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MM은 뭐야?”
“민호 문방구.”
“아…….”
역시 사인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