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다미야 미니카 대회(3)
쇼핑은 즐겁다.
딱히 사고 싶은 물건이 거의 없다시피 했던 지난날에는 뭘 사는 것도 귀찮고 피곤하기만 했었다.
그런데 여기 와서는 부쩍 물욕이 샘솟는지 지른 돈이 벌써 백 단위가 넘었다. 물론 산 물건들은 차마 누구에게 당당하게 자랑할 게 못 되지만 말이다.
하지만 슬슬 자금의 압박이 오기 시작했다.
지금 절실히 필요한 건 바로 점핑트랙.
평상에 놓여 있는 기본 트랙은 아무래도 대회에 나갈 미니카를 세팅하는 데 무리가 있었다. 그렇다고 서울에 있는 공식 센터의 트랙을 방문하자니 퇴근 시간에 맞춰 방문하면 몇 시간 연습하지 못하고 영업이 끝날 거다. 어찌어찌 시간에 맞춰 방문한다 해도 두 형제가 미니카를 가지고 레이스를 하는 모습이 혹시나 대회 전에 공개될까 걱정이었다.
점프대가 있는 트랙은 공식 몰에서 자비 없는 가격에 세트도 아닌 개당 부품으로 팔고 있었다.
1,600,000원. 심지어 배송비는 별도였다.
나름 고심해서 기존 트랙 부품까지 뜯어 쓴다는 생각으로 예상 코스를 짰더니 나온 금액이었다.
“이거 당분간 1일 1식 하게 생겼네.”
대회가 코앞인데 고민할 여유는 없었다. 결제는 이미 끝나 배송 받은 박스가 방 안에 가득한 상황.
점핑 라인 2개, 지그재그 라인 1개, 나머지는 코너링과 직선 코스로 연습용 트랙치고는 살짝 아쉬운 구성이지만 방 안에서 줄자를 가지고 세팅한 최대한의 크기다.
촤르르륵.
나는 바닥에 트랙을 쏟아붓고 어설프게 그려놓은 설계도를 따라 조립을 시작했다. 일전에 창고에 있던 트랙을 조립했던 경험도 있었고 신형이라 훨씬 쉬운 편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부분에서 일어났다.
우다다다.
“뭐, 뭐야? 갑자기 왜 그래!”
못 보던 장난감이 많아져 흥분한 누렁이가 갑자기 방 안을 전력 질주로 뛰어다닌다. 기분이 정말 좋으면 꼬리가 부푸는데 지금 누렁이의 꼬리는 흡사 너구리라 해도 믿을 정도로 부풀어 있었다.
우당탕.
“야!”
결국, 조립해 놓은 트랙을 모두 분해해서 상자에 넣고서야 사태가 진정되었다.
“돌겠네.”
상자를 주시하고 있는 꼴을 보니 트랙을 꺼내면 또 한바탕 푸닥거리를 할 기세다. 거기에 만약 움직이는 미니카라도 올려둔다면 이놈에게 극상의 놀잇감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어디 화장실에라도 가둬두자니 처지가 딱해서 차마 그럴 수도 없다.
검은 머리 짐승 말고 노란 머리 짐승도 거두는 게 아니었다. 상자를 기웃거리는 귀여운 얼굴을 보고 있자니 화도 나지 않는다.
그냥 땅바닥에 조립해 둘까? 아니다. 아직 해가 지면 날씨가 제법 쌀쌀했다. 하루에 3~4시간씩 그 추위에 덜덜 떨며 미니카를 달릴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러다간 돈을 160만 원이나 주고 산 트랙을 조립도 못 해보고 반품하게 생겼다.
나는 복잡한 머리를 식히려 문방구 밖으로 나왔다.
요 며칠 내려 여기저기 쌓여 있던 눈은 벌써 녹아 없어졌다. 다들 무슨 음식을 하고 있는지 집마다 투박하게 튀어나온 배관으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모습이 정겹다.
나도 오늘은 된장찌개라도 끓여볼까? 밀키트도 귀찮아서 레토르트로 사놓긴 했지만 이런 구수한 기분이 들면 별다른 반찬이 없어도 밥 한 공기를 비울 수 있을 것 같다.
“호야, 밤늦게 왜 나와 있는 겨? 그래 입고 다니믄 감기 들어.”
“이장님, 안녕하세요. 집에만 있기 그래서 잠깐 산책 겸 나왔어요. 이장님은 밤늦게 어디 가세요?”
“나는 저 마을회관에 기름 채워 넣고 오는 길이여. 할마시들 보일라를 어찌나 씨게 트는지 말통 4개로 한 달을 못 가아. 이게 말여. 아무리 나라에서 준다지만은 애낄 껀 애껴야 하는 겨. 전에도 말여…….”
아뿔싸. 여쭙는 게 아니었는데.
그저 스몰토크로 건넸던 질문이 트리거였는지 오밤중의 골목길에서 이장님의 일장연설이 예고도 없이 시작되었다. 이장님은 방앗간 아저씨와 쌍벽을 이루는 수다왕이셨다. 나이가 들면 말이 많아진다 했다. 하지만 이장님과 방앗간 아저씨는 그 수준이 조금 과했다.
마을회관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어느덧 근검절약을 등한시하는 어르신들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발전했다.
잠깐.
트랙을 설치할 곳이 한 군데 더 있었다.
“이장님, 부탁이 있어요!”
“응? 뭔 부탁?”
* * *
삐이이익.
오래된 노래방 마이크에서 나는 발진음을 알람으로 이장님의 방송이 시작되었다.
[옴마, 이게 왜 또 말썽이여. 아아, 마을회관에서 알립니다. 오늘부텀 마을회관에서 문방구 김 씨 손자 호야랑 복지관 얼라들이 장난감. 뭐시기?]
“미니카 트랙입니다.”
[그래, 맞다. 내 정신이 이래 깜빡깜빡한다니께. 방금 들었는데 이자뿌고 말여. 내가 소싯적에는 우리 마을 전화번호부도 싹 다 외우고 그랬는디 이게 나이가 드니께 밥 먹은 것도 가끔 이자뿌는 거여.]
“이장님, 방송…….”
[참. 그 여튼 마을회관에서 그 복지관 얼라들이 밤에 장난감을 가지고 노니께 다음 주까정 할마시들 해 지믄 화투는 춘옥이네에서 하시기 바랍니다. 에… 그 쩜당 10원이 넘어가믄 서로 맴 상하니께 자제허더록 하고 난초는 까정 쌍피로 하믄 점수가 너무 많이 나니께 것두 하지 말어. 춘옥이 할매 알아들었는가? 매번 저 아랫마을에서 그렇게 한다고 우기기나 하고 말여. 우리 마을에는 대대로 난초는 쌍피로 안 썻는디 우리 아름다운 전통을 왜 자꾸 그렇게 무시하는 겨. 내가 도저히 이해가 안 가서 그려. 그랴고 말자는 왜 자꾸 따고 그만한다는 겨? 깨평도 안 주고 그라면 자꾸 뒷말 나온다니께. 내가 아주 중재하느라 여간 골치가 아니여! 그럼 이상으로 방송을 마치것습니다.]
이장님의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프리스타일 랩이 겨우 마무리가 되었다.
“내가 이장의 권한으로다가 딱 말해 놨으니께 인자 여서 재미있게 놀면 되는 겨. 뭐 또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고! 그럼 수고혀.”
“감사합니다. 하하하…….”
길고 긴 방송 내용에서 기억나는 건 화투 이야기뿐이었지만 일단 다행히 허락은 맡았다.
마을회관은 우리 마을에서 가장 최신식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뜨끈한 보일러에 신식 화장실까지 있어서 마을 어르신들이 사랑방으로 사용하는 공간이었다. 문방구보다 훨씬 넓은 공간이라 트랙을 설치하고도 여유가 충분했다.
어차피 트랙은 탈착식이고 연습이 끝나면 세 명이 달라붙어 후다닥 분해하면 금방이다. 꿩 대신 닭이라는 말이 아까울 정도로 쾌적한 연습 공간.
오히려 여기라면 좁아서 세 사람이 앉을 공간도 없는 문방구보다 훨씬 나았다.
“야야! 여기야! 여기!”
때마침 두 사람의 차 소리가 들려 얼른 밖으로 나가 손을 휘저었다.
“형, 여기서 뭐 해? 아까 트랙 설치한다며?”
“문방구에서는 못 해. 대신 여기 써도 된다고 이장님께 허락 맡았어. 빨리 들어와.”
예상대로 세 명이 동시에 조립을 시작하자 어설픈 도면을 보고 하는데도 십 분도 걸리지 않았다.
공식 트랙에 비할 건 아니지만 이렇게 조립해 놓고 보니 제값을 하는 크기다.
“그런데 이거 형 돈으로 샀어?”
“당연하지, 인마.”
“우리 스폰서 비용으로 하면 되는데 왜?”
“그 돈은 식비랑 교통비 빼고는 쓰지 마.”
“왜? 부품도 사고 해야지!”
“저도 그게 좋겠어요.”
상진이는 내가 우려하는 게 뭔지 아는 눈치였다.
내 짐작으로 스폰서는 순전히 진철의 돌발적인 행동이다. 계약서 양식도 급하게 만들어 지원하는 비용에 대한 세부 항목이 빈약했다. 만약 지원 명목으로 받은 비용으로 미니카에 관련된 물건을 산다면 주최 측에서 후에 문제를 제기할 가능성도 있고 자사의 제품을 사용하는 것도 아닌데 비용을 청구했다는 사실에 회사 내부에서도 말이 나올지 몰랐다. 납득이 가능한 선에서 지원받는 게 여러모로 뒤탈이 없었다.
기름값, 톨비, 식사 비용 정도가 적당하다.
“뭐 둘이 그렇다면야… 그럼 달려볼까?”
의외로 쉽게 수긍한 철진이 품에서 미니카를 꺼냈다.
이렇게 긴 트랙에서 미니카를 달리는 건 우리 셋 모두 처음이다. 대회 규정에 맞게 순환트랙이 아닌 개별트랙으로 3라인을 구성했기에 동시에 경주도 가능했다.
철진의 말이 아니더라도 트랙을 달려보고 싶어 몸이 근질거렸었다.
“자, 준비!”
“호야. 있나?”
미니카 전원 버튼을 켜려는 찰나에 문이 열리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할머니, 여긴 어쩐 일이세요?”
“복지관 아들이랑 왔담서? 뻥튀기 좀 가지왔응께. 이거 묵으면서 햐.”
“잘 먹겠습니다.”
윗집 할머니가 가져오신 뻥튀기가 시작이었다.
“호야! 호야 있나?”
그렇게 차례로 마을회관에 들어온 어르신들은 다들 손에 식혜, 고구마말랭이, 김치전을 한가득 가져오셨다.
방송을 듣고 혹시나 우리가 끼니를 거르고 있을까 봐 다들 걱정되셨던 모양이었다.
마을회관은 어느덧 동네 어르신들이 모두 모여 트랙을 가운데 두고 둘러앉은 사랑방이 되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귀한 마을이다. 아이라 부르기엔 민망한 나이인 우리들조차 어르신들에겐 아직 앳된 나이였나 보다.
마을회관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논다 하니 모두 이렇게 모이셨다.
바라보는 시선이 부담스럽고 불편하게 느껴지는 건 잠시. 두 형제도 이내 자연스럽게 받아 든 음식을 먹으며 미니카를 만지작거렸다.
두 사람에게도 어르신들은 낯선 사람들이 아니었다.
눈을 치우던 날뿐만 아니라 매일같이 문방구를 드나들며 몇 번이나 마주치고 인사를 드렸던 분들이다.
우리는 모두 이분들의 손자나 다름없었다. 마을회관의 공기가 어쩐지 따뜻한 건 이장님의 우려처럼 보일러를 높혀서만은 아닌 것 같았다.
“야. 그만 먹고 이제 굴려보자.”
가져다주신 음식이 입에 맞았는지 연신 젓가락을 놀리던 철진을 불렀다.
“자. 출발!”
웨에에엥.
속도는 모두 박빙이다. 본래 내 모터를 썼다면 당연히 압도적으로 차이를 낼 수 있다. 내 미니카에 들어간 모터는 코일에 감긴 구리선을 더 많이 보강한 이른바 개조 모터였으니까. 과열이나 내구성 문제로 제약을 걸어둔 정품 모터와는 성능 자체가 달랐다.
하지만 다미야 미니카 대회의 규정은 예상보다 훨씬 빡빡했다.
정품 모터를 사용해야 함은 물론, 타이어 두께, 지면과 바디의 유격 등등 꽤 구체적인 규정을 두고 있었다.
덕분에 나도 일반 모터로 주행하다 보니 스펙상은 세 미니카가 큰 차이가 없이 달리는 것이다.
미니카의 묘미는 여기에 있었다. 모두 비슷비슷한 스펙으로 보이지만 어떤 세팅을 하느냐에 따라 주행 스타일부터 완주했을 때 속도 차이가 극명하게 난다. 우리는 그 최적의 세팅값을 찾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 우리가 신청한 점핑트랙은 그 정답을 아직 아무도 찾지 못해 대회 때마다 개성 있는 미니카가 우승을 차지하고 있었다.
“옴마 저 쪼깨난 게 참말로 빠르네잉.”
“아, 우리 손주들 장난감 보면 요사시런 게 많다니께.”
“호야 차가 제일 빠르네!”
“복지관 아들 차도 애법 잘 쪼차가는구먼!”
첫 연습 주행은 뜻밖의 응원단 덕분에 배도 마음도 든든하게 시작할 수 있었다.
* * *
조동욱 회장은 직감을 믿지 않는 편이었다. 아니, 혐오한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몰랐다.
매사 직감적으로 중대사를 결정하는 방식은 창립자셨던 아버지의 특기였다. 전란이 끝나고 격동하는 정세 속에 배움이 짧았던 아버지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리라.
하지만 그렇게 사업을 운영하시고 세상을 떠나, 하나뿐인 아들에게 남긴 것이라곤 감당할 수 없는 빚이 전부였다.
피와 눈물로 배운 교훈은 조동욱 회장을 철두철미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눈앞에 문제를 직면하면 반드시 그 인과관계를 따져 물었다. 머리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일에는 아무리 시일이 급박하더라도 쉽게 결정하는 법이 없었다. 그렇게 아깝게 놓친 사업 중에는 회사를 단번에 성장시킬 알토란 같은 돈벌이가 셀 수 없이 많았다. 반면 덥석 물었다면 그대로 무너질 독배를 피한 횟수도 적지 않았다.
‘금자탑을 높이 쌓는 방법은 한 가지나 무너뜨리는 방법은 많다.’
삼정그룹을 한국 재계 1위 기업으로 끌어올린 조동욱 회장이 늘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었다.
그렇게 원칙을 지키며 살아온 세월이 자그마치 60년이다.
하지만 지금 그 원칙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었다. 바로 한 장의 계약서가 그리 만들었다.
「삼정자동차 다미야 미니카 경주, MM팀 스폰서 계약서.」
아무리 생각해 보고 사람을 시켜 알아봐도 이해가 안 되는 이 황당무계한 계약서가 큰 폭풍을 몰고 올 것이라는 막연한 직감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박 상무야. 이게 도대체 우째 돌아가는 기고?”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일마들 셋이 내 복창이라도 뒤집어 놓을라고 작정한기도 아니고 참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