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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26화 (26/151)

#26. 첫 대면(1)

“이곳인데, 지금 자리를 비운 것 같습니다. 돌아가시겠습니까?”

“여기가 집이라매? 오겠지.”

조동욱 회장은 낡은 평상에 걸터앉아 문방구 주변을 둘러봤다. 언제 지어졌는지 가늠할 수 없는 오래된 외관과는 반대로 아침마다 부지런히 쓸었는지 구석구석 먼지가 쌓인 곳이 없었다.

“그럼 차에 들어가서 기다리시지요. 밤 공기가 찹니다.”

“어데. 간만에 이래 나와 있으이 시원하고 좋네. 니 나이 들어가 뼈 시리믄 드가 있으라.”

“저도 아직 청춘입니다.”

어둑어둑해지는 해가 저물 무렵, 인기척에 저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골목 어귀에서 걸어 나온 사람은 민호가 아닌 봇짐을 든 할머니였다.

“호야 찾아오셨는가?”

“문방구 주인은 어디 갔습니까?”

“아, 가끔 늦게 오기두 허지. 회사를 댕기니께. 추우실 텐디 들어와서 기다리슈.”

“저희는 괜찮…….”

“날씨도 요사시러워서 쌀쌀한디 언제까정 서 있을라고? 자자, 마을회관에 보일러 땃땃하니께!”

우악스러운 손길에 떠밀려 얼떨결에 마을회관까지 내려온 두 사람이 머뭇거리자 할머니는 얼른 들어가라 등을 떠밀었다.

그렇게 힘에 못 이겨 들어간 마을회관은 할머니의 말대로 뜨끈한 열기가 차가운 얼굴에 확 들이쳤다.

“아이고! 나머지 선수들은 워쩐겨!”

“아까정 저나해 봤는디 시내에서 저녁까지 먹고 온댜. 근디 뒤에는 누구여?”

“호야 손님이여. 날 추운데 밖에 서 계시길래 여서 기다리라 모시고 왔제.”

“하이고, 먼 길 오셨네! 여짝 자리가 아랫목이니까 여기 앉아서 좀 쉬고 계시유. 전에 먹다 남은 개떡이 있는지 모르것네.”

“근디 오늘 선수도 없는데 우짤라고? 아, 둘이 치면 그게 무슨 재민가?”

두 할머니는 어정쩡하게 아랫목에 앉아 있는 조동욱 회장을 빤히 쳐다봤다. 많은 뜻이 담긴 눈빛이다.

“혹시 고스톱 칠 줄 아는가?”

“예?”

“아, 나이가 몇 개인디 당연히 알것제! 올해 몇이당가?”

“예순둘입니더.”

“하이고! 청년이네, 청년이야! 완전히 겉늙어부럿네. 나가 올해 여든이여!”

“아, 나이 자랑은 그만들 허고. 자, 시작해 봅세.”

“아니, 내는 괜찮…….”

“사람이 넷인디 그럼 이 밤에 테레비만 보고 있을랑가? 저짝 젊은 양반이 광 팔고. 자자, 이 떡도 묵으면서, 으이?”

거절의 의사는 이미 발동이 걸려버린 두 할머니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능숙한 솜씨로 패가 섞이고 조동욱 회장과 박 상무의 앞에 화투패가 놓였다.

“제가 정중히 거절하겠습니다.”

“됐다고마. 쪼매 치고 있지 뭐. 기름값이라도 벌어가야 안 되겠나? 광이나 잘 팔그라.”

어차피 문방구 주인은 언제 올지 기약이 없었다. 하지만 마냥 기다리다 그냥 가기에도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헛걸음이 될 수 있었다. 그런 와중에 제대로 점수 계산이나 할는지 모르는 늙은이 둘이 화투를 치자 하니 단돈 만 원이라도 벌어가야겠다는 속셈이었다.

화투는 셈이다.

나와 있는 패와 나올 패를 계산하는 셈이 빠르고 정확한 사람이 돈을 딴다. 그리고 조동욱 회장은 그 셈으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짝짝.

그런데 두꺼운 모포에 짝 하고 달라붙은 화투 소리는 시간이 갈수록 조동욱 회장의 차례에서 자꾸 멈췄다.

‘쌍피를 묵으야 되나? 지금 묵으면 싼다. 아이다. 안 묵으면 피박이다.’

인생은 불안한 선택의 연속이라 했던가? 바닥에 나와 있는 국화 쌍피는 그 옛날 대금결제가 막혀 전전긍긍하던 상황에서 받은 착수금처럼 먹음직스럽게 보였다가도 불량이 터져 리콜 사태를 일으킨 하청업체로도 보였다.

“아, 화투 치는 사람 어디 갔는가?”

조동욱 회장은 곁눈질로 박 상무에게 눈치를 줬다. 판단을 해보라는 뜻이다.

끄덕.

둘도 없는 측근인 박 상무의 지지까지 등에 업은 조동욱 회장은 이내 국화 청단을 뽑아 들었다.

짝!

“오메! 쌌네! 이걸 우짠대? 홀홀홀.”

할머니는 손에 들고 있던 국화 피를 여유롭게 흔들었다.

“스돕이여! 자, 보자. 사광, 청단, 피박, 광박…….”

춘옥이 할머니 앞에 빼곡하게 쌓인 화투패들 사이에는 어느새 난초가 쌍피로 둔갑해 있었다.

“하이고, 점수가 이래 나뿟네. 372점!”

“얼만교…….”

“아, 쩜당 10이지 그럼 20으로 칠까!”

“이따가 계좌이체 할 테니 고마 빨리 패 돌리소.”

첫판부터 대차게 빨린 조동욱 회장은 문방구 사장이 오기 전 본전을 찾아야 했기에 시간이 없었다.

그렇게 판수는 점점 늘어나고 문방구 주인의 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나기 전까지 결국 조동욱 회장은 한 판도 이기지 못했다.

* * *

“호야! 손님 왔구먼! 여짝에!”

밖에서 내 차 소리를 들으셨는지 윗집 할머니께서 마을회관 창문을 열고 외치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차를 잠시 세웠다.

“손님이요?”

“이! 지금 나가신다!”

마을회관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그다지 반갑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뜻밖의 사람이 서 있었다.

삼정그룹 조동욱 회장. 두 형제의 아버지다.

“일단 들어오시죠.”

나는 두 사람을 방 안으로 안내하고 커피포트에 물을 올렸다.

뉴스에서나 보던 사람이 지금 내 방에 있다는 사실이 처음엔 믿기지 않았으나 이내 이곳까지 직접 온 연유가 짐작되자 마음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싸구려 커피믹스가 상도 없는 바닥에 놓였다.

“야옹!”

“야야, 가지마.”

밸도 없는지 난생처음 본 조동욱 회장의 다리 사이에 웅크리고 자리를 잡은 누렁이를 몇 번이나 불렀으나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대접할 게 마땅치 않습니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한참 나이가 어리니 말씀은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니 말이다. 내가 누군 줄은 알제?”

“삼정그룹 회장님입니다. 철진이와 상진이의 아버님 되시죠.”

“그래, 이야기가 빠르겠네. 단도직입적으로 물으꾸마.”

“네.”

“니는 그라믄 누고?”

“네? 제가 누구냐니요?”

“눈데 내 아들 둘을 꼬시끼가 데리고 있냐 이 말이다.”

예상대로다. 공인중개사로 위장해 처음 이곳에 왔던 사람이 지금도 곁을 지키고 앉아 있는 측근이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또다시 이런 만남이 있을 줄은 알고 있었다.

철진의 억지로 급작스럽게 받게 된 삼정자동차의 스폰서는 생각지도 못한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조금 민망한 일이지만 내가 미니카를 드는 사진과 세 명이 부둥켜안고 소리를 지르던 사진이 웬만한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는 두세 번씩 올라왔다. 다행히 마스크를 끼면 평범한 얼굴이라 아직 직장에서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으나 두 아들에 관련된 일인데 엄격하다던 아버지가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저는 문방구 주인입니다. 장사는 잘 안 되지만요.”

“농담 따먹기 하자고 이까지 온 기 아이다.”

“농담이 아닙니다. 저는 문방구 주인이고 철진이와 상진이는 문방구에 자주 놀러 오는 동생들입니다.”

살가운 포장이나 변명은 필요치 않다. 어른에게 예의를 갖추는 것과 무례를 참는 것은 다른 문제다. 지금 무례를 범한 사람은 내가 아니다.

“카모! 그 무식한 아가 갑자기 차를 3만 대나 팔아재끼고 지 행님 이기는 거 빠이 모르던 아가 다 된 밥 던져삐고 쌀 씻기부터 하는 기 니가 꾸민 게 아니란 말이가?”

“철진이는 무식하지 않습니다. 배려심이 깊은데 내색하지 않을 뿐입니다. 상진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보다 철진이를 잘 따르고 닮고 싶어 합니다.”

“누구 앞에서 선생 노릇을 할라드노! 삼정그룹이다. 떨어지는 콩고물 먹을라고 댐비드는 아들이 어데 니빠이 없는 줄 아나?”

“제 이야기가 안 끝났습니다.”

“뭐라꼬?”

“용서를 구하셨으면 합니다. 두 아드님에게요. 그 나이가 되도록 어린 시절 마땅히 누려야 할 추억조차 빼앗긴 채로 살아왔습니다. 누구에게 빼앗겼는지는 지금 아버님의 행동을 보니 알 것 같습니다.”

주제넘은 말일지도 몰랐다. 복잡한 가정사에 남이, 그것도 아들뻘 되는 어린놈이 대뜸 용서를 구하라 함은 도가 지나쳤다.

하지만 내가 용서되지 않았다. 미니카 상자를 바라보던 철진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미니카를 조립하며 형에게 도움을 받던 상진이의 어색한 표정도 말이다.

두 형제는 잘못된 시간을 살아왔다. 삼정그룹이라는 족쇄와 엄한 아버지가 그 원인이었다.

“건방진 놈…….”

“사진은 선물입니다. 필통이 다 떨어졌거든요.”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조동욱 회장에게 티비장 위에 세워놨던 액자 하나를 내밀었다.

“허.”

“삼정그룹의 후계자는 이곳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아버님이 가지신 삼정그룹의 회장이라는 명함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녀석은 제가 아끼는 동생들입니다. 제가 드릴 말씀은 그게 답니다. 그리고 다음번에 오실 땐 미리 언질이라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대접이 소홀해서 손이 민망합니다. 그럼 조심히 가세요.”

축객령.

더 이상 나눌 대화는 없었다. 불편한 자리를 파하면서 집에 온 손님을 내쫓는 찝찝함은 두 동생을 매정하게 키운 원망이 대신했다.

“맞다! 소금!”

다시는 오지 말라는 염원을 담아 입구에 저번보다 훨씬 많은 양의 맛소금을 뿌린 뒤에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

* * *

돌아가는 차 안은 처음 이곳으로 향했을 때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천하의 조동욱이 축객령까지 듣고 내쫓기듯 나왔다. 그것도 새파랗게 젊은 놈에게. 대통령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거물 인사인 자신을 이리 푸대접한 것에 대한 분노가 응당 일었어야 한다.

하지만 어쩐지 조동욱 회장은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대고 편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떻게 할까요?”

“뭘 말이고?”

“문방구 주인이 속내를 끝까지 말하지 않을 눈치입니다. 돈 몇 푼 주고 타이를 사람이 아닙니다.”

“끌끌끌. 와? 니가 당했다고 내까지 당할 것 같드나?”

“그런 게 아니라…….”

“참 물건인 기라. 지금껏 어데 내 눈 똑바로 뜨고 바라본 아가 있었드나?”

“마음에 드시나 봅니다.”

“마음에 들기는! 순 입만 살아가. 골방에 거렁뱅이매크로 사는 아를 내가 와!”

연락도 없이 급작스럽게 찾아간 집이었다. 장식품이나 컴퓨터는커녕 침대도 없는 방이었다. 벽지와 장판도 오래된 그대로, 사는 데 필요치 않은 물건이라곤 품에 파고들었던 고양이가 유일했다. 아무리 혼자 산다지만 사치와 거리가 먼 그 방은 조동욱 회장의 마음에 쏙 들었다.

“장사꾼은 장사를 해야 된데이. 꿍꿍이가 있어도 그만인기라. 이래 공짜로 선물까지 받았으믄 남는 장사한 기다.”

대답하면서도 조동욱 회장은 선물로 받은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두 아들과 문방구 주인이 무엇이 그리 기쁜지 얼싸안고 환호성을 지르는 순간이 담겨 있었다. 자신이 지금껏 보지 못했던 아들들의 모습이었다.

“참, 그라고 글마 빚도 있다.”

“빚이요? 저희가 조사했을 때는 신용 등급에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뭔 소리 하노? 쇼핑센타 말이다. 가만히 있으믄 수주할 사업을 상진이 홀려가 떨어뜨리놨으이 그게 빚아이고 뭐겠노? 8천억짜리 빚이지. 내 그거는 꼭 받아낼 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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