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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27화 (27/151)

#27. 첫 대면(2)

서울에서도 단연 최고의 마천루라 불리는 루데타워의 가장 꼭대기에 있는 한 라운지 바에 철진과 상진이 들어섰다.

그리고 곧 두 사람을 알아본 직원의 안내를 받고 도착한 곳은 특히나 더 고급스럽게 꾸며진 룸이었다.

그곳에는 도저히 밖에서는 입고 다니지 못할, 화려한 무늬가 자수 된 붉은 양복을 입은 젊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게다가 길게 자란 직모는 눈까지 내려와 어디를 바라보는지 알 수 없는 남자였다.

“처루진 상, 상진 상, 오랜만이므니다.”

“지환이 넌 회사보다 여기로 출근하는 날이 더 많지?”

어눌한 한국어로 반긴 지환이라는 남자를 두 형제는 잘 아는 듯했다.

“잊었으므니까? 여기가 내 회사이므니다.”

“야. 시그엘 호텔이 네 직장이지 라운지 바가 네 직장은 아니잖아.”

“흠흠. 그런데 오늘은 웬일로 여기에 왔으무니까?”

민망한 표정으로 온더락 한 모금을 들이켠 지환이 물었다.

“아, 민호 형이 오늘 야근이라고 해서. 겸사겸사 오랜만에 네 얼굴도 볼 겸.”

“미노 형?”

“우리 그 기사에 같이 있었던 형 있잖아.”

“아! 미니카 대회! 알고 이스므니다. 대단했스므니다. 일본에서도 그 동영상은 인기이므니다. 얼굴도 잘생겨서 내 동생도 팬이므니다.”

“그럼, 너도 내일 같이 갈래?”

민호의 문방구에 다니기 전에는 이 라운지 바에 매일 같이 드나들었다. 두 형제가 사이가 좋지 않아 합석하는 경우는 드물었으나 지환은 두 사람의 테이블에 번갈아 오가며 격 없이 지냈었다. 철진의 제안은 그런 지환만 두고 문방구에 다녔다는 사실에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였다.

“제가 가치 가도 되게스므니까?”

“안 될 게 뭐 있어. 너도 어차피 여기서 매일 술이나 마시고 있잖아.”

“철진 상보다는 덜 마십니다. 아마 그렇게 마셨으니 금방 죽을 겁니다. 그게 내가 철진 상보다 상진 상과 대화를 더 자주 하는 이유입니다.”

“너 또 발음이…….”

갑자기 한국인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또박또박하게 말하는 지환에게 기가 찬 철진의 말끝이 흐려졌다.

“예? 나니?”

“이 새끼는 꼭, 제 하고 싶은 말 할 때만 발음이 좋더라. 여하튼 내일 7시까지 와. 주소 보내줄게.”

* * *

케톡.

「철진: 형 오늘 친구랑 같이 가도 돼?

민호: 초딩이냐? 문방구에 오는데 그걸 왜 물어봐. 당연히 되지.

철진: 아니, 나는…….

상진: ㅋㅋㅋㅋ」

퇴근길에 갑자기 들어온 철진의 실없는 케톡은 심란한 와중에 작은 웃음을 주었다.

아버지가 왔었다는 이야기는 당분간 하지 않기로 했다. 만약 이번 일을 트집 잡아 또다시 두 형제의 숨통을 조른다면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잘잘못을 떠나 가정사였다. 당사자들의 생각이 아닌, 남인 내 판단과 행동이 들어가선 안 되었다.

물론 남이 아니라는 접점을 만들 껀덕지는 차고 넘친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할아버지께서 받은 편지로 유추했을 때 삼정그룹의 창립자였던 故조병기 회장은 할아버지와 꽤 막역한 사이셨고 회사 운영이 어려울 때 큰 도움을 주셨던 게 분명했으니까.

하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조동욱 회장의 말대로 삼정그룹에서 떨어지는 콩고물을 받아먹기 위해 어떻게든 발버둥 치는 사람들은 차고 넘칠 테니까 말이다.

내 조언이 순수한 의도로 받아들여질 것 같지 않았다.

편지는 어디까지나 할아버지와 故조병기 회장의 인연이지 그보다 아래로 떨어진 나와 조동욱 회장의 인연이 아니다.

그리고 그 과거 인연의 대가는 주식으로 이미 정리가 되었다. 다른 기회가 되어 직접 물어본다면 답하겠지만 굳이 아쉬운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행동을 할 이유는 없었다.

그저 내가 조동욱 회장에게 말했던 진심이 통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자, 그럼 30분 컷을 내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집에 도착한 나는 곧장 팔을 걷어붙였다.

퇴근 뒤에 문방구의 불을 켜는 건 나름 투잡이라 볼 수 있다. 누렁이 밥을 준 뒤에 먼지를 털고 바닥을 쓰는 것이 전부긴 하지만 말이다. 그렇게 청소를 끝내면 곧장 씻고 간단하게 늦은 저녁을 먹는다.

이 긴 루틴은 생각보다 귀찮아서 조금 늦장을 부리면 한두 시간이 지나도 다 끝내지 못한다.

혼잣말로 타임라인을 정해둬야지만 퇴근 후 노곤해진 몸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이제 밥만 차려먹으면…….

“형! 우리 왔어!”

“그래.”

자식들 조금만 늦게 오지.

두 사람은 익숙하게 달력에 자기 이름을 쓰고 평소처럼 곧장 미니카 부품이 있는 상자 앞에 쭈그려 앉았다. 그런데 케톡으로 말했던 친구는 보이지 않았다.

“야. 친구 온다며?”

“지금 오는 중이래요.”

“그럼 셋 다 밥 안 먹었겠네? 족발 시켜 먹을까?”

“다른 건 안 돼요?”

“애석하지만 이 시골까지 배달 오는 곳은 족발집밖에 없단다.”

간만에 배달 음식이다.

특히 족발은 혼자 사는 내가 시키기에 상당히 난이도 있는 메뉴로 이렇게 두 사람이 왔을 때가 아니면 도전이 거의 불가능하다.

“형, 이건 뭐야?”

배달 앱으로 결제 주문을 마친 후에 방에서 누렁이랑 놀아주던 나에게 철진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철진이 가리킨 곳에는 푸캣몬 캐릭터가 그려진 딱지가 가득 담겨 있었다. 더 바꿔줄 미니카 부품이 있나 부속품이 든 상자를 뒤적거리다 계속 눈이 갔나 보다.

유행은 참 신기하다.

특히 작은 문방구에서 일어나는 유행은 더욱 그랬다. 누가 선동한 것도 아니고 강제로 시킨 것도 아닌데 어느샌가 모두 같은 놀이를 하고 있다.

그저 쉽게 싫증 내고 새로운 걸 좋아하는 아이들의 성정이라 여기기엔 1년이 넘도록 가는 유행도 더러 있었다.

나는 오늘 그 유행이 시작되는 순간을 확인했다.

“어? 아. 이게 있네. 딱지야. 직접 접어서 만드는 딱지. 그리고 이건 짱딱지.”

두 딱지는 푸캣몬의 선풍적인 인기를 힘입어 비교적 오랫동안 우리 문방구의 인기 상품으로 자리매김했었다.

딱지.

기본적으로 종이를 접어 만드는 패로 겨루는 전통 놀이다.

당시 종이가 귀했던 터라 딱지를 접을 수 있는 재질의 종이는 한정적이었다. 집에서 구할 수 있는 종이라고는 대부분 갱지라는 흐물흐물한 종이나 신문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종이로 딱지를 만들면 제대로 칠 수도 없고 아무도 따고 싶어 하지 않았기에 기껏 만든 딱지가 무용지물이 되었다.

딱지가 될 수 있는 종이는 책 표지, 혹은 잡지 커버였다. 그 귀한 책으로 딱지를 접는다는 발상은 도저히 어른들에게 용납이 되질 않았고 버릴 책이라는 건 애초에 성립되지 않는 말이다.

딱지는 그렇게 개당 가치가 아이들에게는 준화폐급으로 취급되었다. 딱지 하나에 아풀러나 쫀디기를 바꾸기도 했으니 대략 가치는 백 원쯤이었을 듯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서 이 딱지는 한 번 격동의 시대를 맞이한다.

바로 푸캣몬의 시대.

아이들이 구구단은 까먹어도 152마리의 푸캣몬 이름은 까먹지 못하게 한 바로 그 전설적인 만화영화다.

당연히 문방구에 나오는 장난감들도 푸캣몬이 찍혀 나오기 시작했는데 그중에 종이 딱지와 짱딱지는 당시 시세로도 상당히 프리미엄 가격대를 유지했다. 아이들의 부족한 주머니 사정에 한 봉지에 500원씩 하는 이 두 종류의 딱지는 궁핍한 생활을 하게 만드는 1등 공신이었다.

“형도 그럼 오랜만에 하나 사볼까?”

나는 달력에 오늘분의 천원을 긋고 종이 딱지 두 개를 집었다.

“딱지 접을 줄은 알지? 이건 처음 접을 때 접히는 선이 중요해.”

봉지를 뜯고 나온 길쭉하고 두꺼운 종이 두 장을 십자가 모양으로 겹친 뒤에 점선을 따라 접으면 되는 지극히 단순한 제작방법이다.

하지만 아무리 간단해 보이는 일도 그 깊이를 알게 되면 심오한 세계가 펼쳐지는 법.

이 단순한 딱지도 대충 접은 것과 제대로 접은 것의 차이는 하늘과 땅이다.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그냥 접으면 되겠는데!”

“좋아. 둘 다 한번 만들어 봐. 클래스의 차이를 보여주마.”

딱지는 평면으로 보이지만 실상 입체적인 구조다. 네 방향에서 뾰족하게 접힌 끝이 오므려지면서 서로 겹치게 되는데 이때를 계산하지 않으면 안쪽이 부풀어 오른다. 그렇게 가운데가 불룩 솟아오른 딱지는 소위 넘기기 쉬운 호구 딱지가 되는 것이다.

납작하고 빳빳한 딱지는 넘기기 어렵고 공격할 때 힘을 잘 받는다. 하지만 이런 딱지는 그냥 꼼꼼하게 접는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딱지가 접히는 부분의 두께를 계산해 미리 여분의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 가격이 무려 500원인 만큼 만들기 쉽도록 접히는 부분을 친절하게 표시해 두었으나 그건 딱지를 잃게 하고 다시 구매하도록 만든 사악한 술수다.

만약 그대로 접었다면 그 딱지는 이미 잘못 잠근 첫 단추처럼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아무리 길을 들여도 내부에 공기층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렇게 옛 기억을 더듬어 동전으로 꽉꽉 눌러 만든 딱지는 내 예상대로 아주 만족스럽게 나왔다.

“다 만들었냐? 따면 가져가는 건데 초반부터 그러면 너무 정 없으니까 오늘은 연습 삼아 해보자.”

딱지는 기본이 1:1 매칭이다. 한쪽에서 승자가 결정되면 승자는 자연스럽게 다음 도전자를 받는다.

“선공은 양보하마.”

“후회할걸?”

나는 바닥에 놓인 딱지를 발로 연신 밟아 자리를 잡았다.

푸캣몬 딱지는 크기가 기껏해야 반 뼘이 조금 넘었다. 어릴 때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도 작아서 치기 힘들었는데 다 큰 어른, 특히 철진의 곰 발바닥 같은 손으로는 더욱 어려운 크기다.

팍.

“하! 제대로 공격도 못 하면서! 자, 이 형님이 보여주마.”

뻐엉.

“말도 안 돼!”

무언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철진의 딱지는 하늘로 높이 튀어 올라 뒤집혔다. 완벽한 승리. 딱지의 완성도나 기술을 만만하게 본다면 어렵게 용돈을 모아 산 딱지를 밥 먹듯 털리게 된다.

“자, 다음은 상진인가? 오호.”

상진이의 딱지는 조금 달랐다. 꼼꼼한 성격 탓인지 테두리 부분이 날카롭게 마감처리가 되어 있었다. 아마 딱지를 만들고도 한참 동안 손톱으로 문지른 듯했다.

“자, 이번에도 선공은 양보할게.”

부우웅.

이제 막 상진이가 공격하려는 찰나 밖에서 반가운 오토바이 소리가 들렸다.

“족발 왔나 보다. 잠시만!”

드르륵.

“어?”

족발이 오긴 했으나 사람은 배달원 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 친구 왔나 본데?”

“처음 뵙겠스므니다. 이지환이므니다.”

“그래, 반갑다! 김민호라고 해. 편하게 민호 형이라 불러. 아직 밥 안 먹었지? 어서 들어가자.”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오랜만에 영접하는 족발을 펼쳐두니 절로 입안에 군침이 돈다.

“자, 먹자. 어차피 다 운전해 갈 거라서 술은 안 시켰다. 괜찮지?”

“대리 부르면 되는데.”

“얌마, 여기까지 대리 부르면 민폐야. 지환이라고 했나? 많이 먹어. 너 온다고 일부러 중짜 하나 더 시켰으니까.”

하지만 내 권유에도 지환이는 족발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왜? 족발 못 먹어?”

“족발을 시킨 건 제가 족바리이기 때문입니까?”

“아, 아니야!”

이상한 녀석이 손님으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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