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딱지대전(1)
오랜만에 족바리, 아니, 족발이었다.
평소 같으면 그냥 햄이나 구워 윗집 할머니께서 주신 김치랑 먹고 끝날 저녁이 성대한 만찬으로 변했다.
밥은 역시 혼자보다는 둘이, 그리고 넷이 즐겁다.
지환이라는 녀석은 첫인상이 강렬해서 그렇지 딱히 모난 구석이 없는 친구였다.
“그럼 계속 일본에서 살았던 거야?”
“그렇스므니다. 그래도 한국말 잘하므니다.”
“잘하긴. 저 정색할 때만 제대로 발음하면서 무슨.”
“철진은 한국 사람인데도 한국말 잘 못합니다.”
“저거 봐, 또!”
“싸우지 말고 다 먹었으면 치우자. 난 뼈 좀 동네 강아지들한테 던져주고 올 테니까.”
족발 뼈는 시골 강아지들의 또 다른 외식이다. 어릴 때부터 뼈나 잡고기는 아이들이 다른 집 마당에 던져두곤 했었다. 당시엔 사료는 고사하고 남은 밥이 말 그대로 개밥이나 다름없어서 아이들의 눈에는 늘 측은지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강아지를 좋아하지 않는 아이는 없었다. 지금이야 할머니들이 마실 나올 때 유모차나 보행기에 묶어서 산책시키지만, 그 시절에는 누구네 강아지랄 것 없이 전부 아이들의 보살핌을 받았다. 반대로 이제 막 뜀박질을 시작해 산으로 들로 쏘다니는 아이들은 논으로 밭으로 일을 나간 어른들 대신 다 큰 개들이 보살폈다.
개들의 시간은 빠르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조심스럽게 쓰다듬던 핏덩이는 한 해가 지나면 든든한 보디가드가 된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문방구 앞에서 기르던 용순이라는 진돗개는 문방구에 계신 할아버지 대신 언제나 내 곁을 지켜주던 녀석이었다. 그리고 학교에 들어갈 무렵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발걸음은 어느덧 작은 언덕 위에서 멈췄다.
“조금 늦게 왔다. 그치?”
명절에나 올라와 가끔 음식을 놓아뒀는데 올해는 이사를 오고도 처음이다. 이제는 무덤이라 부르기도 어려운 작은 흙더미에 살점이 가득 붙은 큰 뼈 하나를 올려두었다.
죽음은 태어난 지 10년도 되지 않은 아이들에게 낯선 일이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 초상집에서도 아이는 태연하게 장난감을 가지고 논다. 건강하셨던 부모님이 갑자기 돌아오지 않는다고 말해봤자 실감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영원한 이별을 처음 실감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기르던 강아지의 죽음이다. 같이 뛰어놀던 아이가 점점 기력이 없어지고 이내 눈을 감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는 건 가슴이 미어지는 고통이었다. 나 또한 용순이가 무지개다리를 건넜을 때 며칠 밤을 울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아이는 조금 더 자란다.
“또 올게.”
작별인사는 길지 않았다. 죽음이 무뎌질 세월. 다만 그리움은 이따금 송곳처럼 비죽 튀어나와 가슴을 아리게 할 것이다.
씁쓸한 마음으로 돌아온 문방구에는 세 명이 여전히 딱지 삼매경이다.
“좀 늘었냐?”
“형! 안에 철판 같은 거 넣으면 안 돼요?”
“그건 반칙이지! 차라리 종이를 여러 장 넣는 건 어때?”
그래.
딱지를 치게 되면 누구나 겪는 유혹이다. 결국, 종이를 접어 만든 태생의 한계가 있다. 아무리 잘 만들어도 그 한계를 넘지는 못한다.
아무리 두꺼운 종이를 접어 만들어도 무게는 한없이 가볍고 그만큼 잘 뒤집어진다.
여기서 여러 편법이 나오는데 두 형제가 말하는 편법은 최소한 우리 마을에서는 걸리면 비난을 면하기 힘든 방법들이었다.
“딱지는 딱 두 가지만 허용돼. 물을 묻히거나 테이프를 바르거나.”
물딱지와 테이프 딱지는 나름대로 고수의 영역이었다. 어설프게 따라 만들긴 쉬우나 성능까지 제대로 나오느냐면 또 그건 아니다.
차라리 순정 그대로 경기에 나가는 편이 오히려 일정한 폼을 유지하기 좋았다. 무게와 질감이 달라지면 거기에 맞춰 힘과 각도도 조절해야 하는데 아이들에게는 그런 섬세한 기술이 드물었으니 말이다.
“차라리 마니 만드러서 그중에 갠차는 걸 찻는 거시 어떠스므니까?”
“정답!”
딱지는 화폐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고 그중에 쓸 만한 딱지가 있을 확률도 높다.
물론 가장 좋은 최상의 딱지는 역시 돈을 주고 사는 푸캣몬 딱지지만 개당 500원이면 5일 동안 꼬박 용돈을 모아야 한 개를 얻을 수 있다. 결국, 아쉬운 아이들은 파지를 찾아 종일 동네를 쏘다니기 일쑤다.
“룰을 정해야겠지? 그냥 아무 종이로 만드는 건 너무 쉬우니까. 책은 안 돼. 종이는 무조건 날짜 지난 잡지로만! 그리고 직접 구해야 하는 거 알지?”
“좋아!”
“그렇게 하죠.”
쉬워 보이지만 의외로 까다로운 룰이다. 인터넷 시대에 종이 잡지는 의외로 찾기 힘들다. 운이 좋아 잡지를 찾더라도 한 권에 딱지는 하나가 나온다.
노력 대비 아쉬운 수익이나 이 정도가 되어야 희소성이 유지가 된다. 너도 나도 한 포대씩 딱지가 있다면 굳이 위험부담을 안고 딱지를 칠 필요가 없을 테니까.
“오늘은 연습게임이니까 편하게 치고 내일부터는 짤없이 따면 가져가는 거야. 참, 지환이도 달력에 이름 써.”
“달려쿠 말이므니까?”
“우리 문방구는 하루에 천 원만 쓸 수 있어. 그 이상 비싼 걸 사려면 돈을 모아야 해.”
“아. 이해해쓰므니다.”
오호. 선입견은 아니지만 세 명 중에 가장 화려한 옷을 입었기도 했고 재일교포라 내 말이 뭘 뜻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줄 알았다.
두 형제도 처음엔 다소 억지스러운 내 규칙을 따르는 데 제법 시간이 걸렸으니까 말이다.
“그럼 사고 싶은 게 있으면 골라와.”
지환이도 두 형제와 다르지 않았다. 문방구를 처음 봤는지 신기한 듯 여기저기 한참을 구경하다 푸캣몬 딱지 두 장을 골라왔고 그렇게 자정이 되도록 딱지를 치다 돌아갔다.
내일부터 세 사람은 조금 바빠질지도 모르겠다. 잡지를 구하러 다녀야 하니 말이다. 물론 다 내가 따갈 거라 헛수고겠지만.
승부의 세계는 냉혹한 법이다. 특히 딱지가 걸린 승부는 자비가 없다. 오직 승자의 두둑한 주머니와 패자의 허탈함만 있을 뿐이다.
그게 계속 찍어내듯 딱지가 만들어짐에도 희소성을 유지하는 비결이었다. 고수가 정기적으로 수거(?)해 간 딱지를 잠근다. 그리고 필요할 때마다 조금씩 화폐로 사용했다. 떡볶이나 쭈쭈바 같은 군것질거리와 교환하면서.
하지만 누구도 불만을 품지 않았다. 언젠가 자신들도 그런 고수가 될 수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까.
* * *
“우리 자브지들 어디 있므스니까?”
“네?”
평소 라운지 바에서 업무를 보다시피 하는 사장님이 갑자기 호텔 로비에 나타나신 것만 해도 놀랄 일인데, 알아듣기 힘든 발음으로 무언가 요구하자 직원들은 진땀을 흘렸다.
“자브지!”
“아, 잡지 말씀입니까?”
“하이! 자브지!”
갑자기 고요 속의 외침을 하게 된 직원 중 한 명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지환이 정답을 맞힌 직원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이번 달 건 안 돼므니다. 12워루 자브지가 피료 하므니다.”
“그건 다 폐기했습니다. 저희는 매달 1일이 자료 폐기일이라서요.”
“그럴 리가 업스므니다!”
믿기 힘들었는지 직접 로비 대기실에 꽂혀 있던 잡지를 하나하나 꺼내봤지만, 한국에서 1, 2위를 다투는 고급호텔의 일 처리는 너무나 깔끔했다. 아무리 깊숙한 곳에 꽂혀 있던 잡지를 꺼내도 모두 이번 달 최신 잡지였다.
“아아! 칙쇼!”
지환은 눈을 질끈 감았다. 당장에 오늘 밤 경기에 쓸 딱지를 최대한 많이 챙겨가야 했다. 호텔 로비에는 당연히 잡지가 있겠거니 하고 왔는데 생각지도 못한 난관에 부딪친 것이다.
지환은 무작정 호텔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지도 앱에 더듬더듬 서점을 입력해 걷기 시작했다.
평소 같으면 직원들을 시켰을 일이다. 하지만 약속은 약속. 지환은 오랜 친구들과의 신의를 깨기 싫었다.
“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자브지 있스므니까?”
“네?”
또 한 번 기약 없는 스무고개를 하기 싫었던 지환은 얼른 폰에 하고 싶은 말을 적어 직원에게 보여주었다.
「12월 잡지가 있습니까?」
“아, 잡지 코너는 E 코너에 있습니다.”
“감사하므니다!”
직접 돈을 주고 사라는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딱히 잘못한 것도 아니다. 잡지가 많으면 어쩌지라는 걱정을 하며 도착한 E 코너는 무슨 분야인지도 모를 잡지들이 빈틈없이 꽂혀 있었다. 그것도 1월 잡지들로.
“아아…….”
그렇게 걸어서 서점 3곳을 더 들렀지만, 결과는 모두 마찬가지였다. 이미 1월 중순이 다 된 마당에 12월 잡지가 있을 리 만무했다.
허탈한 마음에 광장 벤치에 앉아 멍하니 있던 지환은 생각지도 못한 행운을 만났다. 바로 폐품을 수거하는 리어카 속에 잡지가 섞여 있는 걸 발견한 것이다.
“아저시! 아저시! 사므니다! 거기 든 거 다 사므니다!”
* * *
[파산했습니다. 보험금으로 2,000만 원이 지급됩니다.]
“돌아삐겠네.”
벌써 몇 번째 파산인지 이제 셀 수도 없었다. 파산할 때마다 다시 보험금을 받아 한 판을 하고 또 파산하길 반복하면서 조동욱 회장은 처음으로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베공: 아재, 다 빨렸으면 나가쇼. 돈도 없으면서 자꾸 리필 받은 걸로 한 판씩 하지 말고. 이거 따봤자 2천밖에 안 되는데 할 맛이 안 나네.」
“건방진 노무쉐끼!”
「최강삼정: 니 맷살이고? 어리ㄴ노므 ㅅ…」
[85번 방에서 강제퇴장 당하셨습니다.]
“어?”
키보드에 자음과 모음을 하나씩 찾아서 눌러가던 조동욱 회장은 뒤늦게 자신이 강제퇴장을 당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허탈한 한숨을 쉬며 멍하니 모니터만 응시했다.
인생은 도박이다. 사업도 마찬가지였다. 모 아니면 도. 성공하지 못하면 망한다. 특히 무한 경쟁 시대에 최첨단 반도체와 전자 산업을 주력으로 하는 삼정그룹에게, 승부에서 패배한다는 것은 재기불능의 타격을 가져왔다.
철저하게 검증하고 또 검증해서 손에 든 최고의 패로 승부를 봤었고 지금껏 승승장구했었다. 확실하지 않은 패를 쥐면 절대 레이스를 하는 법이 없었던 자신에게 화투는 너무나 어려운 세계였다.
확실한 승기를 잡더라도 조금만 욕심을 부리면 적게 따거나 오히려 역전패를 당했다. 무모한 모험은 당연히 크게 점수를 잃는 판이 되었다.
그깟 고스톱쯤이야 안 해도 그만이다. 천하의 삼정그룹 회장이 모양새 빠지게 컴퓨터로 고스톱이나 치고 있다는 소문이 들리면 회사에도 좋은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분함은 그리 쉬이 다스릴 수 있는 게 아니다.
한 판이라도, 단 한 판이라도 이겼다면 이리 억울하진 않았을 것이다.
전패. 확률적으로도 수십 판을 했는데 한 게임도 못 이길 확률은 너무나 희박했다.
“박 상무야.”
“네, 회장님.”
“이기 뭐 보이끼니 충전하는 기 있다카데? 한번 해도고.”
“추, 충전 말씀이십니까?”
구멍 난 양말도 기워 신기로 유명한 조동욱 회장 입에서 게임 돈을 충전해 달라는 말을 들을 줄 몰랐던 박 상무가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그래. 내 이거 충전 한 번 해가꼬 연습한 다음 그 할마시들한테 두 배는 넘게 딸 기다. 이기 조금만 하믄 될 것 같은데 돈이 딸 리가 흐름이 끈긴다 아이가.”
전형적인 도박중독자의 변명이 수십조가 넘는 재산을 가진 삼정그룹 회장의 입에서 나온 역사적인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