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딱지대전(2)
점심시간.
직장인들이 퇴근 시간 다음으로 좋아하는 시간이 아닐까?
우리 회사는 한 시간 반이라는, 업계에서 가장 긴 점심시간을 자랑했다. 회사 형편이 어려울 때 근방에서 가장 싼 사무실을 구했다가 점심시간에 멀리 떨어진 식당가를 다녀올 엄두가 나지 않은 사장님이 화끈하게 질러버린 결과라고 들었다. 지금은 그럭저럭 나아진 형편에 다시 원래 사무실로 금의환향하긴 했으나 점심시간은 직원들의 격렬한 반대로 줄어들지 않았다.
남자 직원들이 백반집에 달려가 제육볶음 정식을 먹는 데 10분. 담배를 피우고 돌아와 양치하는 데까지는 채 20분이 넘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 나는 담배조차 피지 않으니 서두르면 15분 안에 사무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1시간 15분이라는 든든한 자유시간이 매일 주어지는 것이다.
시작해 볼까?
빅 매치(?)가 열리기까지 7시간이 남았다. 그전까지 나는 오늘 S급 물딱지를 만들 예정이다.
굳이 어제 만들지 않고 지금 만드는 이유는 두 가지.
물딱지는 말 그대로 물이 들어간다. 아무리 테이핑을 한다고 하지만 결국 물은 시간이 지나면 마르고 위력이 떨어진 쭈글쭈글한 딱지가 되어버린다. 물딱지가 최상의 위력을 발휘하는 건 처음 물을 넣었을 때다. 그것도 충분히 스며들어 적절한 볼륨감과 무게를 맞추려면 지금이 가장 적기였다.
그리고 굳이 녀석들이 있는 자리에서 내 제작 비법을 공개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셋 다 배움이 빠른 놈들이니까 말이다.
책상에 늘어놓은 준비물은 3가지다.
주사기, 비닐 테이프, 그리고 딱지.
주사기를 살 때 행여나 조금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까 봐 딱지에 물을 채울 때 쓰려고 한다는 용도를 분명히 하려고 딱지까지 챙겨갔던 내가 조금 한심해 보이긴 했지만, 어찌어찌 걱정했던 주사기까지 구했다.
제작은 간단하다. 종이가 겹치는 삼각형 부분을 테이프로 꼼꼼히 바르고 그 안에 적정량의 물을 주사기로 주입한다. 너무 과하면 바닥 면까지 흐물흐물해지고 너무 적게 넣으면 효과가 미미하다. 조금씩 물이 번지는 무늬를 확인하며 주입하는 게 핵심!
그리고 다시 겹쳐 접으면 윗면은 물을 먹어 묵직하고 아랫면은 탄탄하게 힘을 받치는 극상의 딱지가 탄생하게 된다.
자, 이제…….
“김 과장, 뭐 해?”
“아. 팀장님. 사촌 조카들이 놀러 왔는데 딱지치기를 하자고 해서요. 또 삼촌이 질 순 없으니까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놀러 오긴 했지만, 사촌들이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재벌 2세들이다. 차마 그런 말을 할 수도 없고 해도 믿지 않을 터라 대충 둘러대긴 했는데 오히려 관심은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
“뭐? 딱지치기? 나도 왕년에 딱지치기 좀 했었는데. 어디 봐봐.”
“딱지?”
“요샌 딱지가 이렇게 나오나? 우리 때는 무조건 신문지였는데.”
아. 일이 꼬였다.
담배 타임이 끝난 팀원들이 모두 내 자리로 모여 딱지를 구경하기 시작한 것이다.
“야. 난 옛날에 마을에서 딱지치기 하러 가면 애들이 아무도 안 놀아줬어. 맨날 따가니까.”
“전 집에 딱지가 너무 많아서 나중에 고물상에 파니까 만 원이나 나오더라고요.”
“뭔데 그리 소란들이야?”
“사장님, 식사는 맛있게 하셨습니까?”
“그래, 다들 맛있게 먹었나? 그런데 왜 이리 모여서 떠들고 있어, 다른 사람들 잠도 못 자게. 어? 딱지네? 캬! 이거 진짜 오랜만이다! 이거 김 과장 거야?”
“네. 하하하……. 조카들이랑 오늘 하려고요.”
“이거 옛날 생각나네! 우리도 어때?”
사장님의 그 한마디가 시작이었다.
“자, 룰은 간단합니다. 부서별로 두 명씩 나와서 3판 2선 승으로 진행하겠습니다. 1등은 회식비 별도로 복분자 20병!”
그렇게 갑자기 열리게 된 딱지치기 대회는 꽤 본격적이었다. 모두가 혹할 만한 상품까지 걸리고 진행은 평소에도 말 잘하기로 유명한 영업팀 이사님이 맡았다.
수상하게 업무 외적으로 잘 굴러가는 회사다.
우리 회사에서 단골 회식 장소로 사용하는 삼겹살집의 가장 비싼 술인 복분자가 20병이나 걸리자 다들 업무보다 더 열정적으로 변했다.
“이야, 둘째 생각은 없었는데 말이야.”
“우리 개발 1팀은 당분간 요강 들고 다니겠습니다. 소변기 깨면 안 되잖아요.”
다들 이면지로 바쁘게 딱지를 접으면서도 누가 아저씨들 아니랄까 봐 질펀한 농담들로 저마다 자신감을 드러냈다.
우리 제안팀에서는 당연히 나와 팀장님이 몇 번의 내부 테스트에서 압도적인 실력을 증명했다.
골목 대장은 동네마다 한 명. 딱지치기의 고수도 한 명 내지는 많아야 두 명이다. 나머지 아이들은 그저 다 털려버린 딱지를 다시 만드느라 종일 파지를 주우러 다녀야 했다.
그 고수들이 우리 회사에 전부 모여 있다는 건 통계적으로도 말이 안 된다.
이 중에 분명 9할 이상은 혼이 담긴 구라를 치고 있다는 뜻이다. 아니면 추억 보정이 강하게 들어갔거나.
영웅은 영웅을 알아보는 법.
지금 내가 보기에 제대로 자세를 잡고 딱지를 치는 사람은 팀장님과 내가 유일하다.
그렇게 우리 두 명의 환상의 호흡으로 승부는 일 합을 넘기지 않았다. 치는 족족 넘어가는 딱지의 주인은 모두 상대 팀이었다.
회사 생활을 위해서라면 부장님과 이사님의 딱지는 조금 헛손질을 치거나 아니면 넘어가 주는 것이 미덕이다.
물론 일반적인 회사였다면 말이다.
신입사원들이 술을 먹다 돈이 떨어지면 전무님과 이사님의 숙소 문을 두들기는 곳이다. 이곳에서 그런 겸양을 떨 필요는 조금도 없었다.
“우승은 제안팀!”
싱거운 승리.
복분자 20병 앞에는 상사도 친하게 지냈던 선배도 보이지 않는다.
그걸 먹고 어디에 쓰겠냐만은 중년 나이에 들어선 내 본능은 분명 복분자의 효능을 강하게 갈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복분자 회식은 오늘 하지 못했다.
손가락으로 날짜를 곱씹던 팀장님이 다음 주 수요일이라는 구체적인 날짜까지 정해서 부탁했던 까닭이다.
나라가 위태로운 저출산 시대. 팀장님의 제안을 거부할 팀원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오늘의 메인 경기는 저녁에 펼쳐진다.
* * *
팍.
“이 소리가 아니야!”
“그냥 넘기면 되지 뭔 소리 타령이야?”
“민호 형은 뭔가 터지는 소리가 났단 말이야. 이게 아니야.”
“맞스므니다. 지금 우리 실력으론 딱지를 다 잃스므니다.”
세 명은 퇴근 시간보다 훨씬 일찍 문방구에 모여 작당 모의를 하는 중이었다.
날짜 지난 잡지로만 만들 수 있다는 제약은 의외로 효과적이어서 평생 잡지라고는 모르고 살았던 세 사람을 꽤나 골탕 먹였다.
딱지는 파지를 수거하는 할아버지의 리어카를 턴(?) 지환이 12개로 가장 많았고 두 형제는 고작 세네 개가 다였다.
딱지가 얼마나 구하기 어려운지 뼈저리게 느낀 뒤에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특히 두 형제에게 민호는 문방구 한정으로 신적인 존재나 다름없었다. 모르는 게 없고, 못 하는 게 없는 사람이 바로 민호였다.
오늘 만들어 온 딱지도 온 회사를 이 잡듯이 뒤져서 찾아낸 잡지로 만든 것인데 잃으면 구할 곳이 막막했다.
따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잃지는 않아야 한다. 이길 생각은 애초에 하질 못했다.
그래서 결성된 모임이 딱지 연맹이다.
누구 하나 올인이 나더라도 나머지 두 명이 그 개수만큼 보전해 주자는 취지에서 은밀히 합의한 것이다.
세 명이 한 명을 상대로 연합하는 것은 공평하지 못했으나 상대는 만인지적의 민호였다. 구형 미니카로 전국대회 결승전까지 올랐던 민호가 작정하고 딱지를 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악(?)을 멸하려면 응당 다구리 정도는 충분히 용납되는 상황. 호뢰관에서 여포를 막아야 하는 유비, 관우, 장비는 바로 자신들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모자랐다.
최악의 경우는 셋 다 올인이 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일단 오늘만 잘 넘기면 돼. 내일부터는 설 연휴니까. 그래도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면 몇 개는 더 구하겠지. 무슨 일이 있어도 푸캣몬 딱지는 안 꺼내는 거다?”
“알았으니까 연습이나 더 해보자. 민호 형 오기 전에.”
“아이고, 딱지치기 하는 겨?”
며칠 전 삼정그룹 조동욱 회장에게 직접 계좌이체로 거금의 도박 빚을 받아낸 윗집 할머니가 마을회관으로 또 원정을 나서며 아이들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이이. 하이고매, 딱지 고골로 얼마나 친다고. 더 맹글지, 왜. 옛날 얼라들은 한 포쓱 들고 댕겼는디 말여.”
“잡지로 만들어야 하는데 잡지가 많이 없어서요.”
“이? 동사무소에서 천지로 노나주는 게 잡지인디 와 그게 읎댜?”
“네?”
“집집마다 뭔 착한 생각인지 뭔지 하는 잡지랑 이달의 남양주 소식이라고 주는디, 우리 집에도 한가득 있제. 갖다 주랴?”
“감사합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딱지 재료를 얻게 된 세 명은 할머니의 느릿한 걸음을 따라 골목길을 걸었다.
‘담장이 이렇게 낮으면 도둑이 들 텐데.’
작은 도랑 곁을 타고 투박하게 발려진 울퉁불퉁한 시멘트벽은 어린아이 키가 조금 넘었다. 담장의 역할을 하는 게 아니라. 그저 집으로 들어오는 외풍이나 막고자 올린 벽을 아이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끄어어억.
초록색 사자 머리를 밀자, 녹이 슬어 여기저기 쥐가 파먹듯 떨어져 나간 철문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저짝 안방 농 우에 있으니께 가져가고 싶은 맨큼 가져가믄 데야.”
걸음이 무거워진 할머니는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지팡이로 안방을 가리켰다.
아무리 주인의 허락을 받았다고는 하나 남의 집에 선뜻 먼저 발을 들이기 민망해 머뭇거렸으나 그 안에는 거부할 수 없는 보물이 있었다.
그렇게 신발을 벗고 들어간 안방에는 세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많은 잡지들이 쌓여 있었다.
“대박이다.”
“50개는 넘게 나오겠스므니다!”
배를 곯고 없이 살아온 노인들이다. 필요하지 않아도 받고 집 안에 들인 것들은 버리는 법이 없었다.
행정복지센터에서 나눠주는 잡지 역시 마찬가지다. 농사일만 하느라 까막눈이나 겨우 면한 처지에 고상하게 책을 읽는 취미를 가진 노인들은 없었다. 하지만 그 시절 책이 얼마나 귀한 물건인지 알고 있던 그들에게는 버리려 해도 버릴 수 없는 물건인 셈이다.
자식들이 사준 휴대폰도 제대로 쓰지 못할 정도로 미련한 머리다. 자꾸만 깜빡깜빡하는 탓에 ‘옴마야! 이자뿟는 가베!’를 매일 입에 달고 산다. 트로트와 여섯 시 내 고장이 아니면 티비에 나오는 말들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이 매정하게 남겨둔 사람들이다.
하지만 살아온 세월만큼 깊어진 지혜와 아량은 누구도 따라오지 못한다.
언젠가 쓸모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귀한 책을 모아둔 할머니는 그렇게 아까운 생각 없이 복지관의 착한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결국, 할머니가 옳았다. 명절마다 올라와 잡동사니 좀 버리고 살라는 자식들의 잔소리를 애써 무시하고 지낸 보답은 복지관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