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딱지대전(3)
일당백. 만인 지적. 일기당천
절대적 차이를 나타내는 지독하게 오만한 단어들이다.
하지만 지금 나를 표현하는 말로는 더할 나위 없이 적절했다.
뻥.
마치 북이 터지는 듯 경쾌한 소리가 밤공기를 갈랐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넘어간 딱지는
“훗. 이게 마지막인가?”
완승이다.
선공을 뺏겨 어쩌다 두어 번 지긴 했으나 공격을 잡고서는 반드시 상대방 딱지를 뒤집는 데 성공했다.
바람 치기, 칼 치기 같은 고급기술은 나올 기회도 없었다.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쓸 필요는 없으니까 말이다.
“딱지는 개수가 많다고 다가 아니야. 내 손에 익은 딱지가 필요해.”
아무리 고수라도 결국 딱지마다 천차만별인 강도와 그립감, 그리고 타점을 모두 기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경기에 나오는 선발투수는 많아야 3명. 그 3명을 어떻게 기용하느냐가 관건이다.
지금처럼 개수만 많고 길들지 않은 딱지를 상대할 때는 특히 마음 놓고 아끼는 딱지를 쓸 수 있으니 공세가 더욱 매서울 수밖에 없다.
이제 세 명에게 남은 딱지는 진짜 거금 오백 원을 주고 산 것들뿐이다.
나라 잃은 표정이 딱 저럴까? 그 많던 딱지를 한 번에 잃은 상실감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터.
딱지의 묘미는 여기에 있다.
이기면 가져가고 지면 잃는 도박이나 다름없는 이 놀이가 주는 짜릿함과 상실감은 소중한 것을 잃을지도 모르니 신중해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연습을 게을리해서도 안 된다.
해가 지고 만화영화가 할 시간까지 종일 딱지를 치는 친구들이 있는데 하루라도 쉬었다 간 금방 뒤처지게 되니까.
노력, 제작기술, 그리고 배포와 재기의 발판을 염두 하는 절제심까지.
그 모든 것을 통달해야만 왕좌를 차지할 수 있다. 그리고 왕좌는 끊임없이 도전받는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아직 세 명은 첫 좌절을 이제 막 겪은 풋내기일 뿐이다. 좌절을 딛고 다시 일어서야 하는 풋내기.
“그런데 용케 이만큼이나 만들었네? 난 한두 개도 겨우 만들 줄 알았는데.”
“윗집 할머니가 주셨어요.”
“아!”
딱지들을 자세히 보니 전부 같은 종류 잡지다.
“이런 건 똑같네.”
“형도 그랬어?”
“어. 나도 어릴 때 딸 있는 집이나 우리 또래가 없는 집에 가서 딱지종이 얻어왔거든.”
무던히도 귀찮게 했었다.
이 촌구석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종이라고는 휴지와 신문지가 전부라 딱지는 늘 부족했다. 그래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웃집 대문을 두들긴 게 바로 엊그제 같았다.
하지만 그때는 너무도 어렸다. 다 큰 어른 녀석들이 할머니 집에 가서 딱지 접을 종이를 얻어오는 장면을 상상하자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형 딱지 잘 봐. 이 앞부분만 물렁물렁하고 뒤에는 딱딱하지?”
“진짜네? 뒤에 뭐 넣은 거 아냐?”
“우리 동네에서 그런 짓을 하다 걸리면 평생 낙인이야 인마, 이게 기술이야! 기술.”
마을마다 딱지를 만드는 방법도 다르고 용인하는 편법도 달랐다. 하지만 물딱지와 테이프는 어느 정도 대중화된 보조장치로 다른 동네로 원정을 가도 비슷한 룰을 지키고 있었다.
하루에 쓸 수 있는 돈은 천 원.
기껏해야 푸캣몬 딱지 두 개를 살 수 있는 돈이다. 그 두 개로 얼마나 좋은 딱지를 만드는 가는 이제 각자 연구해야 한다. 정답은 이미 보여줬으니.
“호야! 호야있능가?”
“네! 할머니 어쩐 일이세요?”
“내일모레 설인디 이거 좀 노나묵으라고.”
늦은 밤에 딱지 치는 소리가 혹시 시끄러워서 오신 건 아닌지 슬며시 걱정이 밀려왔지만, 다행히도 기우였다.
할머니 손에는 어떻게 들고 오셨는지 궁금해질 정도로 많은 곶감이 바구니에 한가득 담겨있었다.
“안 주셔도 되는데.”
“언능 노나묵고 난중에 부족하면 더달라 혀. 많이 있응게.”
할머니의 말은 허풍이 아니다.
우리 마을은 유독 감나무와 밤나무가 많다. 가을이 되면 추수가 끝나도 어르신들의 손이 노는 법이 없었다. 종일 깎은 감은 처마가 기울 정도로 빼곡히 걸려서 이따금 멀리서 보면 그런 장관이 따로 없었다.
단 음식이 귀했던 시절 곶감은 사계절 내내 먹을 수 있는 별미였고 지금도 어르신들은 과자보다 더 좋아하셨다.
감을 따는 일은 국민학교를 졸업한 형들 차지였는데 높은 사다리를 타고 장대질하는 모습이 그땐 어딘가 어른스러워 보였는지 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아쉽게도 난 그 장대질을 하기 전에 전학을 갔기에 바람을 이루진 못했다. 하지만 그때의 곶감은 올해도 이렇게 맛볼 기회가 생겼다.
“잘 먹겠습니다!”
“이이.”
“할머니! 이거 손자들 오면 나눠주세요.”
“아이고 안 줘도 되는 디.”
딱히 답례로 드릴 음식이 없었다. 냉장고에는 인스턴스 음식만 가득했으니까. 급한 대로 손에 잡히는 불량식품과 장난감 몇 개를 할머니의 바구니에 담아드렸다.
내 기억으로는 할머니의 막냇손자가 이제 막 학교에 들어갈 나이쯤 된다. 폰 게임을 한창 할 나이에 이런 장난감이 눈에 들어오겠냐 만은 그래도 빈손으로 보내드리는 것보다는 백배 나았다.
“이거 봉지에 담아서 셋이 나눠 가져가.”
“형은요?”
“난 또 어르신들께 많이 받을 거라 괜찮아. 아, 안 괜찮다. 야! 지금 몇 시야?”
“아홉시 이므니다.”
“야! 나 잠깐 다녀올 테니까 놀다가 정리하고 가. 열쇠는 평상 발밑에 끼워두고!”
“어디 가는데?”
“약국!”
“약국은 갑자기 왜?”
* * *
설날.
집마다 고기반찬과 나물이 넘쳐나고 가족들이 선물한 홍삼이며 먹지도 않을 햄과 참치, 그리고 칫솔 따위가 쌓인다.
나까지 그 행렬에 동참할 필요는 없었다.
“어서 오세요.”
이제 막 문을 닫을 준비를 하는 약국에 운 좋게 마지막 손님이 될 수 있었다. 약사도 설 마지막 대목을 장식하는 내가 썩 반가울 것이다.
“파스랑 소화제, 감기약 있는 대로 다 주세요.”
“전부 다요?”
보행기와 낡은 유모차가 아니면 움직이기도 어려운 어르신들이 마을에 과반이 넘는다.
이 시골 마을에 약국이 있을 리가 만무하고 아픈 몸은 그럭저럭 참을 수 있으면 참는 게 미덕이었다. 늙은 몸이 아픈 건 예삿일이라는 생각으로 말이다.
무심한 자식들은 모른다.
어린 시절 보아온 부모님은 누구보다 건강하셨고 자식 앞에서 아픈 소리를 하는 부모는 아무도 없으니까.
섭섭하게 생각하거나 불효로 여길 필요도 없다.
저마다 바쁜 회사 일에 치이고 아이를 키우느라 눈코 뜰 새 없이 산다. 이 시골 마을에 남겨진 부모님까지 챙기기엔 세상이 너무 팍팍해졌는지도 모른다.
나조차도 편찮으신 할아버지의 몸을 뒤늦게 알아챘으니….
그렇게 사는 것이다.
있을 때 잘하라는 진부한 조언은 소중한 누군가와 이별을 하고서야 뼈저리게 다가온다.
“다해서 오십칠만 삼천 원입니다. 할부로 해드릴까요?”
“유, 육 개월로 해주세요.”
의약품은 비싸다. 각오한 일이긴 하지만 막상 결제하는 순간이 망설여진 나는 카드를 내미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띠링. 지이이이잉.
카드리더기에서 영수증이 국수 면발 나오듯 끊기지 않고 길게 이어진다. 마치 네가 지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똑똑히 보라는 것만 같았다.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약국에서 또 오시라는 인사가 살짝 괘씸하게 느껴졌다. 하긴 나 같아도 문 닫기 전에 오십만 원을 긁어주면 또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겠다.
차에는 어르신들께 나눠드릴 약과 파스가 가득하다.
명절은 명절인가 보다. 지갑 빼고 모든 게 풍족한 날이니.
* * *
“어제도 문방구 갔다 왔드나?”
“…….”
올 것이 왔다.
꼬리가 길어도 너무 길었던 까닭이다.
하루가 멀다고 문방구에서 밤늦게까지 놀았다. 게다가 미니카 대회까지 나갔으니 박 상무를 통해 그 소식을 못 들었을 리가 없었다.
두 형제는 수저를 내려놓았다. 익숙해졌다곤 하나 호통을 들으며 밥이 넘어갈 강심장이 되진 못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다음 이어진 말은 호통 대신 무심한 듯한 질문이었다.
“차례상에 올라간 곶감도 거서 받은 기가? 문방구 아한테?”
“그건 윗집 할머니가 주셨습니다.”
“뭐라꼬! 그 할마시가?”
“아시는 분이세요?”
안다. 그것도 아주 잘.
그 할머니 덕분에 새벽까지 침침한 눈을 비벼가며 컴퓨터로 고스톱을 치고 있었으니까.
“니 그 할마시가 얼마나 악독한지 알고 그걸 받아온 기가!”
천하의 삼정그룹 회장이 마을회관에서 윗집 할머니에게 고스톱으로 돈을 털렸다는 사실을 알 길이 없는 두 형제의 얼굴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 가득했다.
“아, 아이다. 밥 묵자.”
사업을 일으키며 험한 꼴을 많이 당했었다. 먹고살기 막막한 시절에 빚만 가득한 회사를 키우는 데는 간과 쓸개를 모두 내어놓고도 손가락질을 받는 것이 일상다반사였다. 하지만 산업화의 바람을 타고 회사가 크게 자라자 아쉬운 소리를 하는 쪽은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돈이 전부인 시대다.
정계의 콧대 높은 양반들조차 주머니가 가벼워지면 명절과 행사를 핑계 삼아 전화를 해댄다. 이 대한민국 아래에 삼정그룹의 회장을 앞에 두고 심기가 불편한 소리를 하는 사람은 감히 나타나지 않았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을 못 한다 했던가? 조동욱 회장은 그렇게 수십 년간 삼정그룹의 자존심이 되어 갔다.
‘못된 할마시 같으니! 사람을 그래 놀릴 수가 있나. 체면 떨어지구로! ’
그런 조동욱 회장에게 마을회관에서 있었던 치욕의 날은 실로 오랜만에 겪는 굴욕이었다.
‘고고 쌍피라고 먹으믄 큰일 날 것인디.’
‘아, 돈 없으면 이자는 안 받고 할부로도 해줄 테니께 걱정하덜 말어.’
‘하이고메, 고로코롬 굶어싸니 몸도 비쩍 꼴았제.’
화투 한 판에 쏟아졌던 무수히 많은 트래시 토크는 가뜩이나 수세에 몰린 조동욱 회장을 더욱 심란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는 전패.
3점 한 번 못 내보고 피박 광박을 연신 때려 맞으며 종국에는 맞고가 아니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삼백 점대 점수까지 독박으로 당해버렸다.
“우리 설 선물로 들어온 한우랑 전복 있제?”
“네, 회장님.”
“그거 다 일마들 차에 실어주뿌라.”
“네?”
“느그들이 내일 문방구 글마한테 보내라. 딴사람 쓰지 말고 느그 둘이 들고 가라. 알긋나? 내사마 그래 당했는데 벨 읍시 깨평까지 받을 생각 읍다. 문방구 글마가 눈치가 있으모 알아서 할 끼다.”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답하지 못했다.
명절 선물은 늘 삼정그룹 계열사에서 만든 제품들로 보내졌다. 명절 선물로는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이었으나 조금이라도 단가를 줄이고자 하는 조동욱 회장의 지독한 면이 반영되어 이제는 모두 그러려니 하고 넘길 지경이었다.
그런데 한번 받은 걸 다시 남에게 주라는 말을 태연하게 던졌다. 그것도 비싼 한우와 전복을 말이다.
‘노인네 진짜 갈 때가 됐나? 왜 안 하던 짓을 하지?’
설.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새해 인사와 만수무강을 바라는 마음을 담아 절을 올리는 날이다. 이 뜻깊은 날에 조동욱 회장은 다른 사람도 아닌 두 친아들에게서 세배 대신 들리지 않는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