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32화 (32/151)

#32. 설날(2)

“어디 가는데?”

“마트 가야지. 그릴이랑 이것저것 사야 해.”

“고기 구워 먹게? 고구마도 구울까!?”

“뭐, 뭐야. 왜 이렇게 신났어, 갑자기? 사고 날 뻔했잖아, 인마! 뭐 제삿날이랑 설이랑 합쳐서 지내려고?”

갑자기 큰소리로 묻는 바람에 놀라 핸들이 심하게 흔들렸다.

“아니, 그냥… 고구마도 굽나 해서.”

“소고기를 놔두고 무슨 고구마 타령이야, 너는. 소 한 마리도 다 먹게 생겨서.”

마트는 설 저녁이라 그런지 손님이 거의 없었다.

“넌 가서 버터랑 막걸리 좀 골라와. 난 그릴 가져올 테니까.”

고기를 굽는 데 거창한 재료는 필요치 않았다. 쌈과 채소는 하우스를 하시는 어르신들이, 김치와 장은 남쪽 출신 어르신들이 가져오신다.

필요한 건 그릴과 술이 전부다.

“형, 다 골랐어.”

“야! 그거 다 싣지도 못해!”

카트 두 대를 막걸리로 가득 채운 철진이 높게 쌓인 박스 사이로 힘겹게 운전하면서 다가왔다.

“사람이 몇 명인데 이 정도는 먹어야지.”

마을 사람을 모두 모아도 30명이 안 된다. 지금 카트에 실린 막걸리로는 인당 4~5병을 먹으라는 소린데 유통기한이 짧아 남으면 처분도 난감한 지독한 악성 재고가 될 것이 분명했다.

“카트 하나는 도로 가져다 놔. 아, 잠깐! 세뱃돈 받은 거.”

“그거 왜?”

“내놔.”

“아.”

나는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물론 마을에 남아있는 두 사람에게도 받아낼 작정이지만 우선은 철진이다.

“이건 안 돼! 차라리 입금해 줄게.”

철진은 손에 든 만 원짜리와 오천 원짜리를 가만히 보더니 다시 폰 케이스에 욱여넣었다.

그래. 돈만 준다면야 아무래도 상관없다. 요즈음 들어 이런 일에 묘하게 나만 돈을 쓰게 된다. 나보다 벌어도 몇 배는 더 벌 놈들에게 이 정도 더치페이는 체면이 구겨지더라도 요구할 만했다.

쇼핑은 그렇게 단숨에 끝.

술을 잔뜩 싣고 또 바닥이 내려앉은 경차는 뻥 뚫린 도로를 달려 다시 마을에 도착했다.

“자, 이제 분업을 좀 하자. 상진이 너는 이장님 댁에 가서 방송 좀 해달라 말씀드리고 지환이 구해와. 철진이는 막걸리 마을회관에 갖다 놔.”

이제 남은 건 고기를 굽는 일이다.

별다른 기술은 없다. 그저 흙바닥에 벽돌로 그릴이 올라갈 자리를 만들고 장작에 기름을 조금 뿌리면 끝난다.

마트에 파는 숯으로 구우면 더 편하고 맛있겠지만 고기를 장작불에 굽는 맛이 또 남다르다. 특히 우리 문방구는 보일러를 들이기 전에도 연탄이 아닌 장작불로 방을 덥혔다. 장작불에 굽는 그 투박한 고기 맛이 그립기도 했다.

“하이고, 뭘 또 이리 사 왔댜.”

슬슬 장작에서 불길이 올라오는 차에 이장님과 그새 초췌한 얼굴이 된 지환이가 골목길을 따라 내려왔다.

“두 녀석 아버지가 보내셨어요. 술도 있으니까. 이장님이 방송하셔서 어르신들 좀 모아주세요.”

“이이. 그려. 내 언능 방송하고 올 테니께. 호야가 있으이 내 따로 신경 안 써도 되겠구먼.”

또 한바탕 설교를 늘어놓으실 줄 알았는데 할당량(?)을 만족스럽게 채우셨는지 순순히 마을회관으로 들어가셨다.

“지환아…….”

“삼강오륜을 아십니까?”

“어?”

“유교에서 사람이라면 마땅히 지켜야 할 인륜을 이야기합니다. 붕우유신, 벗 사이에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 믿음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사람이 맞습니까?”

“미안하다……. 그래도 삼강오륜까지 배울 줄 몰랐네.”

지환이는 너무나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유교의 도리를 들먹이며 우리를 나무랐다.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이렇게 몇 번 더 이장님께 보내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궁금하기도 하다.

꿍해 있는 지환이를 달래는 데에는 의외로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따가 물딱지 만드는 법 알려줄게.”

“정말 나만 알려주는 거시므니까?”

“그래. 그러니까 화 풀어.”

은밀한 거래.

잔치를 앞두고 지환이의 화를 풀어주기 위해서 궁여지책으로 떠올린 생각인데 의외로 쉽게 먹혀들었다.

두 형제가 들으면 억울하겠지만 이미 지환이는 충분히 대가를 치렀다. 마땅히 물딱지를 누릴 자격을 얻은 것이다.

그리고 지환이는 세 사람 중 딱지 실력이 가장 떨어졌다. 철진이처럼 강한 힘으로 치지도 못했고 상진이처럼 딱지를 잘 접지도 못했다. 이 정도 기술 전수는 밸런스 조절로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형! 이제 고기만 오면 돼!”

마을회관에 세팅이 끝났나 보다.

고기를 굽는 그릴은 총 3개. ㄷ자로 그릴을 세팅한 이유는 다름 아닌 혼자서 오롯이 이 고기를 구워야 하기 때문이다.

“형, 좀 도와줄까요?”

“야, 먹을 줄이나 아는 놈들이 무슨 고기를 굽는다고. 귀한 고기 태울 생각하지 말고 부지런히 날라.”

손만 조금 바쁘지, 많은 고기를 굽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처음 올린 고기가 익을 때쯤이면 마지막 그릴에 고기가 다 올라가니 그저 붕어빵 타이쿤처럼 타이밍에 맞춰 순서대로 뒤집기만 하면 된다.

치이이익.

마블링이 얼마나 많은지 갈빗살이 핑크빛이다 못해 희게 보인다. 저절로 입이 떡하고 벌어지는 비주얼인데 세 명은 어쩐지 시큰둥한 표정이다. 이 자식들 평소에 이런 걸 먹고 있었구나!

얄미운 마음을 뒤로하고 부지런히 구운 고기는 그대로 마을회관으로 들어갔다. 그릴이 넓어서 설 선물 세트 한 상자가 금방 동이 났다.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다. 쌀쌀한 날씨에도 땀이 흐르고 연기에 눈을 제대로 뜰 수조차 없다.

하지만 괜찮았다.

방송을 듣고 마을회관에 모인 어르신 중에는 자식이 없어서, 혹은 바쁜 일 때문에 오지 않아서 홀로 지낸 분들이 더러 있었다.

슬픔과 외로움은 상대적일 때가 많다.

옆집에서 들리는 웃음소리에 홀로 남겨진 처지가 더욱 처량하게 느껴졌을 어르신들에게 드리는 위안의 선물이다. 그 선물을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조동욱 회장이 줬다는 게 믿기지 않지만 말이다.

“자. 이게 마지막이야. 들어가자.”

산처럼 쌓여 있던 고기는 금방 다 구워졌다.

절반이나 남았지만 이미 구워서 들어간 접시만 해도 수십 개. 철진이만 자제시키면 배부르게 먹고도 남을 양이다.

“호야, 고생했네! 빨리 와서 먹그라.”

“아니, 왜 안 드셨어요?”

“드시라고 했는데 계속 기다린다고 하셔서…….”

“아, 호야가 읍는데 우리끼리 묵으면 쓰나.”

부지런히 날랐던 고기는 모두 입에도 대지 않으셨다. 날씨가 날씨인지라 금방 차갑게 식어버린 고기를 앞에 두고 다들 그렇게 내가 오길 기다리셨다.

감사한 분들이다. 이토록 사소한 일에도 친손주 대하시듯 하신다. 홀로 문방구를 지키셨을 할아버지도 이분들의 도움으로 적적함과 그리움을 이겨내셨을 것이다. 모두 가족이나 다름없는 분들이다.

자식, 손주 된 도리를 다하지 못한 죄는 이분들이 대신 나누어 가져주셨다.

“자자. 호야도 왔으니 이제 묵어야제!”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이장님이 운을 띄워 얼른 사발에 막걸리가 채워졌다.

“야. 너희는 운전해야지.”

“오늘 자고 갈 거야.”

“어디서? 야야!”

내 질문을 무시하고 철진이는 사발을 재빨리 들이켰다.

“야, 너희들은 마시지 마!”

상진이와 지환이도 내가 말리러 다가오자 황급히 사발을 비웠다.

네 명이 자기엔 방이 좁다. 거기에 누렁이까지 다섯이다.

정 잘 곳이 없으면 마을회관에서 하룻밤을 지내도록 허락받으면 된다곤 하지만 분명 밤새 비디오를 보다 그대로 잠들 테니 사실상 무의미한 짓이다.

남자끼리 살을 맞대고 자는 경험은 혹한기훈련 이후로 다시는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자자, 오늘 고기는 우리 복지관 얼라들 부모님이 가져다주신 거니께 다들 감사하게 여기고 묵자고!”

“하이고메, 이리 많은 고기를 갖다가. 감사하구먼.”

“그런데 왜 복지관이에요?”

상진이 내 귀에 대고 조용히 물었다.

나도 문득 궁금했다. 어르신들이 복지관 얼라들이라고 하는 말을 계속 들어오긴 했는데 정작 왜 그렇게 부르시는지는 잘 몰랐다. 딱히 그렇게 부를 이유가…….

“아.”

“알아냈어요?”

“그냥 뭐 입에 익으신 말이지.”

진실은 때로는 기대보다 훨씬 끔찍하다.

장성한 사내들이 마을회관에서 미니카를 가지고 놀고 딱지를 치는 모습은 굳이 어르신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정상인으로 보기 어려웠다.

나도 미처 모르고 있었던 사실이다. 그리고 세 사람은 앞으로도 모르는 게 차라리 나았다.

“호야, 이 할미는 언제 한잔 따라 주는 겨.”

“네, 지금 갈게요!”

손자는 넷인데 할머니 할아버지는 스물.

자리를 부지런히 옮겨 다니며 마신 술이 과했지만 기분 좋은 취함이었다.

차갑게 식은 고기를 안주 삼아 마시는 막걸리 잔치는 그렇게 밤이 깊도록 계속되었다

그리고 잔치가 끝날 때가 되어서야 찝찝함이 슬며시 다시 올라왔다.

일단 받은 고기는 처리해야 하니 분주하게 움직이느라 고기를 누가 줬는지 잠시 잊고 있었다.

가족사에 간섭한 것도 모자라 축객령을 내리고 소금까지 뿌렸다. 아무리 좋게 생각해 보려 해도 비싼 고기를 선물로 줄 까닭이 무엇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다시 만나면 왜 그랬는지 물어봐야 하나? 아니다. 다시 만날 날이 있으면 안 된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게 막걸리 때문인지 고기의 출처 때문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뭐 아무렴 어떤가? 덕분에 즐거운 시간이다.

“나중에 아버지한테 잘 먹었다고 말씀드려. 사진도 찍고.”

고기를 받은 당사자가 마땅히 직접 해야 하는 말이다. 하지만 연락처도 모르고 굳이 찾아가서 인사를 전하는 것도 이상했다.

삼정그룹의 회장이다. 내가 여기서 예의를 들먹여 연락하거나 감사의 인사를 해야 하니 만나달라 청하는 것이 순수한 의도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사람이다. 인사는 두 아들의 입으로 대신 전하기로 했다.

* * *

“으아. 잘 먹었다.”

문방구로 돌아온 우리는 술기운을 날리기 위해 잠시 평상에 앉았다.

여기저기 자리를 옮겨 다니며 술을 마셨던 나는 평소보다 훨씬 많이 취했다.

본인이 취했다는 걸 인지하는 순간은 이미 다른 사람 눈에 고주망태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형이 되어서 동생들에게 꼬인 발음으로 주정을 부릴까 싶어 얼른 술기운을 날리고 싶었으나 취하면 부모도 못 알아본다는 막걸리는 뱅뱅 도는 하늘을 좀처럼 붙잡지 못했다.

“형.”

“왜?”

“취했어요?”

“그러네. 어으. 숙취해소제가 있는지 모르겠다. 내일 멀쩡히 못 일어날 느낌이야.”

“그럼 도전.”

“뭐?”

상진은 품에서 딱지를 꺼냈다. 그냥 잡지로 만든 딱지가 아니었다. 푸캣몬 딱지, 그것도 두 개가 합쳐진 양면딱지다.

당했다.

나는 지금 딱지는커녕 몸도 가누기 어려운 상태다.

이대로 딱지를 제대로 칠 수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왕좌는 언제 어디에서라도 도전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 기권은 곧 왕좌에서 내려와야 함을 뜻했다.

하지만 이렇게는 아니다. 신사답지 못하고 법도에 어긋나는 도전이다!

“이게 무슨 짓이야?”

“왕위를 계승하는 중이에요.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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