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35화 (35/151)

#35. 해장

삼정건설 본사 대회의실.

이곳에 연락을 받고 영문도 모른 채 급하게 온 임원진이 모두 모였다. 어찌나 급하게 달려왔는지 양복도 입지 않고 앉아 있는 사람들도 더러 보였다.

“와 다들 말이 읍노? 아침 댓바람부터 끌리나와가 불만이가? 허허.”

“저… 회장님, 무슨 의중이신지 말씀이라도…….”

“그걸 와 나한테 묻노? 느그 잘나신 사업총괄부 본부장한테 물어보그라. 나도 끌리나온 기다.”

‘나는 느그들 뜻대로 할 기다. 자. 함 꼬시끼 봐라.’

“지난번 수주에 실패한 사우디 쇼핑센터는 제 만용과 고집 때문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크흠.”

이사진들은 갑자기 자신의 실책을 드러낸 조상진 전무의 사과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후계 구도에서 갑자기 밀려나 삼정자동차로 가게 된 조철진 전무를 밀던 이사들은 다시 황급히 조상진 전무로 라인을 갈아타느라 발 빠르게 움직였었다. 하지만 조상진 전무가 수주가 거의 확실시되었던 사우디 쇼핑센터 사업을 놓치고 도리어 귀양을 떠났던 조철진 전무가 기적 같은 성과를 내자 큰 파란을 일으켰다.

한번 라인을 갈아탈 때도 면이 서질 않았는데 두 번은 안 될 말. 그저 조상진 대표가 수주 실패를 다른 사업으로 최대한 빨리 만회했으면 하고 숨죽여 기다리는 와중에 스스로 회장님 앞에서 자신의 실책을 언급하니 진땀이 흘렀다.

‘혹시 사임은 아니겠지?’

책임을 지고 물러난다. 8천억짜리 다 된 사업을 놓쳤으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그 빈 자리에 쫓겨난 조철진 전무가 다시 돌아오기라도 한다면 그 불도저 같은 성격에 자신들의 목은 물론 줄줄이 엮인 자기 사람들의 자리마저도 위태로웠다.

“그래서 패자부활전을 노려보려 합니다.”

“패자부활전이요?”

삑.

회의실의 커다란 빔프로젝터가 켜지고 그 안에는 빈 살만의 얼굴이 나타났다.

“빈 살만. 32세. 현 사우디의 왕세자이며 왕가의 반대세력을 숙청하고 실권을 틀어쥔 인물입니다. 이번 쇼핑센터 사업도 빈 살만의 제안으로 추진되었으며 기존 쇼핑몰에 추가 부지를 매입해 두바이몰을 뛰어넘는 규모로 계획되었습니다. 사업 계획 단계에서 건설사들에게 요구한 내용 중에 두바이가 들어간 문구는 총 11문장입니다.”

슬라이드를 넘기자 이번에는 두바이의 전체 조감도가 나왔다.

“두바이몰보다 더 큰 쇼핑센터를 원했다면 두바이보다 더 크고 화려한 도시를 제안했을 때 거절하지 않을 겁니다. 아니, 당장은 거절하더라도 계속 머릿속에 맴돌겠지요.”

“그걸 우리 삼정건설이 할 수 있다 판단하십니까?”

도시 하나를 새로 만드는 일. 그것도 해외 중 작업 여건이 가장 까다로운 중동.

얼마가 들지 견적조차 나오지 않는 사업이다. 소화하지 못할 먹이를 삼키고 그대로 배가 터져 죽는 굵직한 기업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건설업계에 잔뼈가 굵은 이사진들은 이 제안이 분명 그리될 것이라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걸렸다.’

“제안이 성공할 가능성은 있나 봅니다?”

이러나저러나 결국 몇백, 몇천억짜리 사업을 결정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다. 될 사업과 안 될 사업을 구분하는 눈이 없으면 당장 내일이라도 옷을 벗고 나와야 한다. 조동욱 회장과 마찬가지로 이들도 이번 제안의 성공 여부가 아닌 성공한 다음의 일을 걱정했다.

될 사업이다.

“사실상 빈 살만과 독대만 가능하다면 그 뒤에 일은 나중에 생각해도 늦지 않습니다. 어차피 사업이 수면 위로 떠오르더라도 경쟁은 불가피하니까요. 다만 다시 제로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사업을 제안한 우리 삼정건설이 압도적인 차이로 유리한 경기겠지만요. 그 차이는 우리가 만들 겁니다.”

반론은 없었다.

가능성은 크고 실패해도 잃을 게 없는 사업. 그리고 그 사업을 가장 먼저 준비할 수 있다. 찔러보지 않는 사람이 바보다.

“머 하노? 결정났으모 빨리 일해라! 여유 부릴 시간이 있나? 오늘 여 디자인 나오기 전까지는 아무도 몬 간다. 집에 다 전화해 놓그라.”

삼정건설 창립 이래 가장 큰 규모의 사업이 될지도 모른다. 휴일에 난데없이 모이라 한 회장님의 다그침은 더 이상 경우 없는 억지가 아니었다.

* * *

“이제 좀 살겠네.”

두 녀석을 보내고 나서도 해가 지도록 변기를 붙잡고 살았다.

“이렇게 마셔본 건 대학생 때 말고는 없었는데…….”

지독한 숙취.

철진이에게 부탁해 기어이 컵라면 하나를 억지로 먹긴 했으나 한번 뒤집힌 속은 그 잠시를 참지 못하고 기어코 모두 게워내게 했다.

평소 술을 과하게 마시는 걸 좋아하지 않아 조절에 실패한 내 탓이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속이 진정되자 급격한 허기가 찾아왔다. 그것도 뜨끈한 국물로. 당연히 배달은 올 리가 없다.

정구지를 넣은 뜨끈한 부산식 돼지국밥.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그것뿐이다.

나는 서둘러 차 키를 챙겼다.

차를 타고 조금 나가면 근방에서 손맛 좋기로 유명한 아랫마을 할머니께서 하시는 국밥집이 나온다. 나이가 있으셔서 늦게까지 하질 못하시니 언제 문을 닫을지 몰라 서둘러야 한다.

전에는 아랫마을에서 분식집을 하셨는데 그때도 맛있기로 소문나서 중학교 형, 누나들이 자주 왔었다. 아쉽지만 우리 마을에는 그런 분식집이 없었다. 분교 학생들로 동전 장사를 해서 벌이를 하는 것은 할아버지의 문방구조차 빠듯한 장사였으니 말이다.

부산에서 종갓집 시집살이를 하며 음식을 배우셨다는 이야기를 매번 입에 달고 사시는 만큼 할머니의 돼지국밥 맛은 확실했다.

다행히 아직 국밥집은 한창 영업 중이었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국밥 한 그릇 주세요.”

마르다 못해 쩍쩍 갈라지는 듯한 혓바닥에 국물이 간절해서인지 인사와 주문이 붙어 나왔다.

“호야 왔나! 하이고메, 만다꼬 이까지 왔노? 고마 근처에서 묵지.”

“여기가 제일 맛있어요.”

카운터에 앉아 계시던 할머니가 내 어깨를 때리며 반겨주셨다. 온 동네를 쏘다녔던 나다. 아랫마을이었지만, 분식집 할머니 역시 지금껏 인연을 이어오고 계신 분이었다.

“곰방 내오꾸마. 쪼매만 기다리래이. 여! 돼지국밥 하나! 고기 많이!”

장사가 잘되는 국밥집이다.

최근에 자리를 옮기셔서 매장도 크고 종업원도 세 명이나 보였다. 아직 이른 저녁 시간인데도 손님이 제법…….

어?

“안녕하세요, 선생님.”

“아! 누렁이 아버님!”

“이런 데서 다 뵙네요. 하하.”

생생동물병원의 수의사 선생님이다. 세상 다시 없을 어색한 만남.

일전에 모임이 있다고 문자까지 받았지만, 딱히 처음 보는 사람들과 불편하게 이야기를 나누기 싫어 정중히 거절했었다. 게다가 만약 그냥 빈말로 권유한 것이라면 덜컥 가겠다 말하는 게 오히려 눈치 없는 행동이다.

“그럼 식사 맛있게 하세요.”

“아! 같이 드세요. 저도 이제 방금 왔어요.”

“아닙니다. 하하.”

사람은 분수를 알아야 한다.

이미 서른 중반을 넘긴 나이에 이렇게 어리고 예쁜 여성분에게 이 이상 아는 체를 하는 것도 민망했다.

우르르.

“여기 스무 명 앉을 수 있습니까?”

빈자리를 찾아가려는 찰나.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온 단체 손님들로 국밥집은 단번에 만석이 되었다. 지금 서둘러 앉으면 내 자리는 하나 확보하겠지만 4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다. 그랬다간 나 하나 앉자고 단체 손님이 나가는 불상사가 생긴다.

“그냥 여기 앉아서 같이 먹어요! 주문도 하셨잖아요.”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자리에 앉고 보니 수의사 선생님의 말씀대로 국밥은 방금 나온 듯했다. 그런데 빈 소주병이 두 병이나 있다.

나는 이 소주병이 뭘 뜻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돈이 궁했던 대학생 시절 안주빨을 최대한 덜 세우고자 고안한 작전이다. 기본 안주로 뻥튀기가 나오면 그 뻥튀기로 먼저 소주 한 병을 비우는 것이다. 그때는 네 명이 겨우 한 병을 비웠는데 지금 여기 놓인 소주병 2개는 도대체 무슨 안주로 비웠는지 짐작하기 두려웠다.

“아! 이건…….”

내가 소주병을 너무 빤히 쳐다보고 있었나 보다.

“아, 아뇨. 저도 술 좋아합니다. 어제도 진탕 마시고 오늘 해장하러 온 거예요. 저 신경 쓰지 마시고 드세요.”

무안할까 봐 둘러댄 말은 얼추 사실이었다.

“돼지국밥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갑자기 몰린 사람들로 어수선했는지 국밥이 나오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뽀얀 국물에 그릇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쌓인 고기, 기본 반찬도 다 먹지 못할 양으로 담겨 나왔다.

“여기 청이슬도 두 병 더 주세요.”

“아, 저는 차를 들고 와서 괜찮습니다.”

“제, 제가 먹으려고…….”

“아.”

두 병을 더 먹는다고? 도대체 저 호리호리한 몸에 소주 4병이 들어갈 공간이 어디 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입이 방정이다. 술을 권할 것이라는 괜한 착각 때문에 어색한 분위기는 더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그래. 최대한 빨리 먹고 나가자. 술까지 마시면 길게 앉아 있을 테니까.

여자와 단둘이 밥을 먹은 건 선배의 간청으로 마지못해 나갔던 소개팅이 전부였다. 생각해 보니 정말 그렇다. 지금 나는 생애 두 번째로 여자와 밥을 먹는다.

두 사람 다 원치 않는 만남이었고 한쪽은 소주를 4명이나 마시고 있다는 사소한 문제만 뺀다면 어디 가서 자랑할 만한 이야기지 않은가?

누군가 설 연휴 때 무얼 했냐고 묻는다면 예쁜 여성분과 식사를 했다고 너스레를 떨며 자랑할 구실이 생겼다.

“누렁이는 잘 크나요?”

“네. 너무 건강해서 탈입니다.”

역시나 침묵이 어색했는지 수의사 선생님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잘 키워주셔서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 흑흑…….”

뭐, 뭐야? 왜 울어!

“몸 건강히만 키워주세요. 가끔 얼굴만 보여주시면 돼요……. 흐어엉!”

“쯧! 젊은 사람이.”

“여자가 불쌍하네.”

주위에서 우리 테이블을 바라보는 시선이 따가웠다. 큰 오해가 쌓여 정황상 나는 삽시간에 쓰레기가 되고 말았다.

“저, 선생님. 일단 취하신 것 같은데 댁으로 모셔다드릴게요.”

“흐어엉!”

나는 얼른 계산을 마치고 선생님을 조수석에 태웠다.

“선생님, 집이 어디세요?”

“흠냐흠냐…….”

말이 통할 상태가 아니었다. 맥주컵으로 소주를 마실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일단은 집을 알아내는 게 먼저였다. 혹시나 결혼했다거나 남자친구가 있다면 먼저 연락을 드리는 게 쓸데없는 오해를 막는 길이다.

“실례합니다.”

외투 주머니를 뒤져 나온 폰은 잠금이 있었지만, 선생님의 얼굴에 가져다 대자 쉽게 풀렸다.

「최근 통화

지숙이

아빠

지숙이

지숙이

지숙이

아빠

아빠」

최근 통화 목록에 지숙이라고 저장되어 있는 사람의 얼굴은 다행히 나에게도 구면이었다. 동물병원에 같이 계시던 간호사셨으니.

삐리리리.

“네~ 선생님.”

“저, 누렁이 주인입니다.”

“네?”

“선생님이 술에 취하셔서요. 그런데 혹시 선생님 집 주소 좀 알 수 있을까요?”

“네. 잠시만요. 풉. 흡. 그러니까. 주소가… 풉.”

폰 너머로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충분히 오해할 만한 일이다. 뭐 오해는 나중에 술이 깬 선생님이 푸실 테니 내가 걱정할 문제는 아니지만.

우여곡절 끝에 받은 주소로 네비를 찍고 차를 달렸다.

“미안해… 이렇게 하늘나라로 보내서 미안해…….”

언젠가 유머사이트에서 본 적이 있었다. 수의사라는 직업은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이 해서는 안 될 직업이라고.

지금 그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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