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36화 (36/151)

#36. 오락기는 괴돌이가 나와야 해(1)

“김 과장, 밥 먹으러 가지?”

“아, 네. 잠시만요.”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벌써 점심시간이다.

어제는 낑낑대며 선생님을 모셔다드리고 제대로 해장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집에 와 뻗어버렸다.

수의사 선생님이 전파상 아저씨의 딸일 줄이야! 이 좁은 동네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남아 있는 사람은 나 혼자가 아니었다.

또 무슨 오해를 하셨는지 전파상 아저씨는 연신 고맙다고만 하시는데 분명 딸을 데려와 줘서 고맙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 아니었다.

“그나저나 많이 예뻐졌네.”

어릴 때 봤다고 해봐야 고작 4~5살이다. 좋은 집에서 예쁜 옷을 입고 새침데기였다는 것 말고는 사실 얼굴이 기억에 잘 남아 있지 않았다.

전파상 아저씨의 말을 들어보니 술에 취해 집에 온 날은 제법 많았던 것 같았다. 물론 오늘처럼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취한 건 처음이라고 한사코 변명하셨지만 말이다. 그 이유를 알고 나니 마음이 그리 편치만은 않았다.

반려동물들은 대부분 수명이 짧다. 기껏해야 15년, 길어야 20년을 산다. 이런저런 병으로 병원을 찾고 그렇게 아이가 무지개다리를 건널 때마다 술을 마셨으리라. 누렁이를 키운다고 했을 때 초롱초롱해진 눈으로 이런저런 설명을 해주던 모습에서 그 유별난 사랑은 짐작했었다.

다음에 만나면 반말로 반갑게 인사를 해야 하나? 아닌가? 30년 전에 알고 지낸 인연으로 바로 그렇게 친근하게 구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잘 들어갔냐는 식상한 인사도 하지 못한다. 데려다준 사람이 다름 아닌 나였으니까.

측은지심에 이런저런 응원이나 위로를 해주고 싶어도 결국 아저씨의 주책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마냥 고생만 하지도 않았다.

언제라도 고장 난 물건이 있거나 저번처럼 만들어야 할 물건이 있으면 찾아달라는 말씀을 해주셨기에.

그냥 미안한 마음에 던지신 빈말일 수도 있었지만, 이 대한민국에서는 한번 뱉은 말은 좀처럼 주워 담을 수 없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과 ‘입이 방정이다’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구두 약속도 엄연히 약속이다.

지금 시간은 11시 48분. 전화를 걸어도 무례하지 않은 시간.

사실 저번 미니카 롤링 제작 건만 하더라도 대뜸 찾아뵙고 만들어달라 억지를 부렸던 민폐라, 가슴에만 담아두고 참고 있던 물건이 있었다.

바로 문방구 오락기다.

90년대 초중반. 그때 막 문방구에 보급되기 시작한 이 오락기는 실로 엄청난 파란을 일으켰다.

오락실의 물가는 다르게 흐른다. 최소 금액을 기준으로 50원을 넘지 못하다 굵직한 게임들이 출시되면서 단번에 백 원의 시대를 열었다.

어린아이들은 이제 물가가 올라서 게임도 제대로 못 한다며 장을 보던 어머니께 주워들은 호들갑을 떨어대곤 했지만 결국 재미있는 게임 앞에서는 장사가 없었다.

암흑기.

허무한 한 판에 날리는 소중한 백 원은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용돈을 모아 사던 장난감도 없었고 한창 먹을 나이 배를 채워주던 군것질거리도 없었다.

그저 좀비처럼 누군가 오락기에 돈을 넣으면 뒤에 몰려 에어기타처럼 허공에 조이스틱을 움직이며 서 있곤 했다.

하지만 우리 동네 아이들은 그 구경마저도 여의찮았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그때를 떠올렸다.

* * *

“와이게지땅콩! 파워덩크!”

오락실 오락기의 반도 안 되는 작은 화면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아이들이 기술 이름을 제멋대로 부르며 열중하고 있다.

툭툭.

한껏 버튼이 부서져라 두들기는 와중에 누군가 어깨를 밀어댔다.

“너희 동네 가서 해! 여긴 우리 동네 문방구야!”

우리는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게임은 끝나지 않았고 아랫동네 아이들이 얼른 자리에 앉아 게임을 이어서 즐겼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몰랐다.

우리가 오락기가 비어 있는 걸 확인하고 다가와 동전을 넣으면 그때를 노려 이렇게 자리를 빼앗았다.

아무 근거 없는 억지였으나 남의 동네에 와서 오락기를 썼다는 건 당시 아이들에게는 꽤 그럴싸한 죄목이었다.

“야. 쟤들 거지 동네라 문방구에 오락기도 없대.”

“에~ 거지 동네래요.”

“우리 동네 거지 동네 아니야!”

우리는 울면서 다시 마을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우리끼리 갈 수 있는 곳은 아랫마을까지가 끝이었다. 진짜 오락실이 있는 읍내는 거리가 멀어 6학년 형들에게만 허락된 공간이었다. 콩만 한 아이들이 두 시간 거리를 꼬박 걸어야 하는 곳에 다녀온다는 건 당시 부모들에게도 용납되지 않았으니까.

“할부지! 우리도 오락기 하면 안 돼?”

문방구로 돌아온 나는 분이 풀리지 않아 할아버지에게 매달려 떼를 썼었다. 좀처럼 그런 일이 없었는데 이날은 유독 억울한 마음이 컸던 모양이다.

“이 할아비가 열 밤만 자면 구해놓을게.”

“정말?”

“그래. 우리 민호 열 밤만 자면 이 할아비가 꼭 사놓으마.”

* * *

하지만 열 밤을 자고 난 뒤, 나는 오락기 대신 할아버지의 사과를 받았다. 자세한 사정은 설명해 주지 않으셨지만, 당시로도 상당히 고가의 금액이었던 오락기를 그렇게 덜컥 살 만큼 문방구의 형편이 좋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답지 않은 억지를 부려 할아버지께서 미안해하시는 모습을 본 뒤로는 아이들에게 ‘오락기는 나쁜 거야’라며 오락하러 가지 말라 신신당부를 하고 다녔다.

어차피 아랫마을에 가도 텃세 때문에 제대로 게임하지 못할 테니 나름 합리적인 선전 전략이었다.

접근 자체를 허락하지 않으니 구경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조금 아쉽지만 오락기가 아니어도 다른 놀거리가 풍부했다. 아이들은 금세 다시 딱지와 구슬치기를 하며 오락기를 점차 잊어갔다.

그렇게 잊은 줄로만 알았다.

“망할 빅데이터 광고 같으니…….”

브라운관 티비와 비디오를 구했던 게 화근이었다. 평소 쇼핑을 즐겨하지 않았는데 유일하게 구하러 다닌 레트로 제품들로 인해 인터넷만 열면 관련 기기들이 광고로 주르륵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작은 광고창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 시절 문방구 오락기를 말이다.

하지만 진짜는 아니었다.

그냥 케이스만 흉내 냈을 뿐 안에는 일반 모니터에 조이스틱을 연결한 소형 피시에 불과한 제품들이었다.

진짜는 그런 어설픈 흉내로 따라가지 못한다.

마치 케이스 밖으로 튀어나올 듯한 작은 브라운관 화면, 어른 한 명도 버거울 정도로 좁은 2인 조이스틱.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바로 괴돌이다.

오락기는 당시 만화책과 더해서 아이들에게 7대 죄악처럼 여겨지던 마물이었다.

오락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집에서 등짝을 두들겨 맞는 아이들이 많았고 실제로도 오락실에 아이를 잡으러 부모님들이 하루가 멀다고 왔으니 말이다.

백 원으로 즐기는 오락 한 판은 그렇게 재미의 대가로 죄책감을 심어주었다.

하지만 아이들의 코 묻은 돈을 갈취하는 업체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아이들의 죄책감을 덜어줄 신제품을 발 빠르게 출시한 것이다.

바로 괴돌이가 나오는 오락기가 그들이 찾아낸 정답이었다.

백 원을 넣으면 투입구 옆에 작은 구멍으로 괴돌이가 흘러나왔다. 식품위생법이나 기타 법률을 깡그리 무시한 혁신이었으나 그때는 그래도 되는 시절이었다.

아이들은 그렇게 과자를 사 먹고 보너스로 즐기는 오락으로 죄책감에서 해방되었다.

그 오락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중고마켓에서 찾아낸 매물들은 하나같이 모두 정상 작동을 하지 않는 녀석들이었다. 매물로 나온 오락기 중 그나마 동작을 하는 것들은 전부 동전 투입구가 그냥 버튼으로 개조된 버전이었고 동전 투입구가 남아 있으면서 괴돌이가 나오는 기종은 ‘고장’이라는 문구가 박혀 있는 것도 모자라 외관만 보더라도 파손의 정도가 심했다.

일전에 브라운관을 수리했던 업체로부터 다음부터는 이런 일은 맡지 않으니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당부까지 들었기에 전화하는 순간 진상 고객으로 당첨이었다.

가격은 고작 10만 원밖에 안 하는 저 고물 오락기가 지금 나는 그 어느 때보다 간절했다.

고민은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나는 망설임 없이 전파상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안녕하세요, 아저씨. 저 민홉니다. 설란이는 좀 괜찮나요?”

(아침 내도록 소리 지르고 울더니 이제 막 출근했다. 미친… 아, 아니, 애는 멀쩡한데…….)

너무 솔직하게 대답하신 게 수습되지 않자 아저씨는 말을 심하게 더듬으셨다. 기회다. 빠르게 본론으로 넘어갈 기회.

“다행이네요. 다름이 아니라 이렇게 전화를 드린 건…….”

(그래. 하루 만에 부탁할 게 있구나?)

역시 눈치가 빠르시다.

“그게, 오래된 오락기인데요. 아직 사지는 않았고 혹시 수리가 가능할까 해서요.”

(물건은 있고?)

“매물은 있는데 사도 수리할 업체가 없어서 아직 못 샀어요.”

(그럼 사서 바로 여기로 보내거라. 끝나면 내가 연락할 테니까.)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내가 다 고맙지! 그럼 잘 부탁하네!)

부탁은 내가 드렸는데 도대체 무엇이 그리 고맙고 잘 부탁한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전파상 아저씨라면 무조건 수리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곧장 중고마켓에 들어가 오락기를 주문하기까지는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기약 없는 기다림은 고통스럽기 그지없으나 아직 할 일이 끝난 게 아니다.

“어디 보자. 사업자등록도 변경해야 하고, 영업신고증에 보건증…….”

오락기 하나 들이는 데 무슨 절차가 이리 거창하냐 싶겠지만, 일단 오락기에서 괴돌이가 나온다. 포장되지 않은 음식을 판매하는 행위는 당연히 일반 음식점과 같다.

이 시골 마을 문방구에 그 세 명 말고 누가 오락기를 하러 오겠냐만은 법적인 절차를 어기면서까지 찝찝한 추억에 빠지고 싶지는 않았다.

“아! 밥을 안 먹었네.”

상관없다. 지금 이 기분으로는 밥을 안 먹어도 웃음이 나오고 배가 부르니까.

* * *

‘내가 미쳤지. 내가 미쳤지. 내가 미쳤지.’

지난밤의 그 파란만장했던 일들이 숙취를 뚫고 조금씩 떠오르자 강설란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진료 예약만 없었다면 임시 휴진을 했을 정도로 심리적으로 몰린 상황에, 이 사실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과 만나 일을 해야 하니 미칠 노릇이었다.

“좋은 아침…….”

“흐음~”

“뭐, 뭐야? 아침부터 기분 나쁘게…….”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턱을 쓰다듬으며 다가오는 간호사를 피해 이리저리 도망 다녔으나 안타깝게도 병원의 대기실은 그리 넓지 않았다.

“흐음~”

“아무 일도 없었어!”

“선생님이 몸도 못 가눌 정도로 취하실 수가 있나 해서요.”

“나, 나도 처음이야! 앞에 있으니까 긴장해서 급하게 마시다 보니까 그만…….”

“빨리 다 말해줘요! 어떻게 만났어요? 빨리요!”

간호사는 수의사의 손을 잡고 좀처럼 놔줄 기색이 아니었다.

병원에 온 아이가 유명을 달리할 때마다 슬픔을 못 이겨 양껏 술을 마시면서도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던 선생님의 색다른 모습이 간호사는 너무나 신기하기만 했다. 그리고 어쩌면 술 대신 위로해 줄 사람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기분 좋은 상상에 밤잠을 설쳤다.

어제 있었던 일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들어야만 오늘 업무를 시작할 기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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