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오락기는 괴돌이가 나와야 해(2)
이게 옳은 일일까?
두려움은 저지른 일을 눈앞에 마주하고서야 비로소 실감이 난다. 지금 내가 그러했다.
“어떤가? 핵심인 기판은 파손이 너무 심해서 애를 먹긴 했는데, 다 고치고 보니까 기판마다 게임이 달라서 인터넷에서 쉽게 구할 수 있더군. 괜히 헛수고했지 뭔가. 그래도 다른 부품들은 전부 멀쩡해서 의외로 금방 끝났네.”
땡그랑. 드르르륵.
백 원짜리 동전 하나가 들어가자 배출구에서 괴돌이가 나오는 소리가 들린다.
“그쪽은 아직 테스트는 안 해봤지만 구조가 간단해서 아마 별 탈 없이 나올 거야. 이 뒤에 기판 단자를 연결하면…….”
이런저런 설명을 들었을 때만 해도 내가 다 이해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다행히 이 문방구 오락기의 실체는 전파상 아저씨의 말씀대로 커다란 게임기나 다름없었다.
기판은 일종의 팩이었다. 기판이 바뀌면 게임도 바뀌는 구조.
그냥 요즘 DIY로 만드는 미니 PC로 화면만 띄우는 것도 고민을 해봤지만, 저작권을 무시하는 불법 방식이라 일찌감치 논외로 두었다.
그렇게 완성된 오락기는 막상 문방구로 들고 가려 하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바로 나조차도 우리 문방구에 없던 오락기라 잘하지 못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처음으로 세 녀석과 동등한 조건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하루에 쓸 수 있는 돈도 천 원. 너튜브나 다른 공략집을 보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고작 5, 6살 차이지만 젊은 놈들의 손을 따라갈 수 있을지도 미지수. 형으로서의 권위가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물론 이번 게임에 한해서지만 말이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닙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여깄습니다.”
“잠깐, 늦었는데 식사라도 하고 가겠나? 조금 있으면 우리 애도 오는데!”
사례금이 담긴 봉투를 드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아저씨가 급히 내 팔을 붙잡았다.
“아, 죄송합니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어서요. 다음에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그래? 뭐 선약이 있으면 할 수 없지…….”
같이 밥을 먹지 못하는 게 뭐가 그리 아쉬우신지 그 후로도 오락기를 들고 나가는 그 짧은 거리 동안 얼른 먹고 가라는 말씀하셨지만, 이 오락기를 눈앞에 두고 밥이 곱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
얼른 인사를 하고 나온 나는 이제 네 번이나 와서 네비도 찍지 않은 익숙한 길을 따라 문방구로 향했다.
뻥.
문방구에는 먼저 도착한 철진이와 지환이가 딱지를 치고 있었다. 두꺼운 딱지에서 나는 경쾌한 북소리가 차 안까지 들려왔다.
“형. 그건 뭐야?”
“일단 좀 들어봐.”
차에 실을 땐 몰랐는데 오락기는 크기에 비해 무게가 제법 나가는 편이었다. 혹시나 바닥에 내려놓을 때 충격이 갈까 봐 얼른 철진이를 불렀다.
“오락기?”
“기다려봐. 아직 세팅 덜 끝났어.”
나는 준비한 물건들을 트렁크에서 꺼냈다.
긴 멀티탭과 목욕탕 의자 두 개, 그리고 인간 사료라 불리는 괴돌이 한 포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내가 오락기에 괴돌이를 채우는 사이 철진이와 지환이는 멀티탭을 문방구 안에서 끌어와 오락기에 연결하고 각자 목욕탕 의자를 들고 기다렸다.
딸칵.
전원이 켜지고 드디어 게임 화면이 브라운관에 비친다.
눈사람 형제1.
운이 좋았다. 기판만 바꾸면 게임이 바뀐다고 하지만 시작으로 하기에 이만한 게임도 없었다.
아무래도 협동해서 하는 게임이 같이하기에도 좋았고 이른바 오락실 체어샷 같은 불상사가 일어날 가능성도 적었다.
물론 다 큰 어른들이 그렇게 싸울 리가 있겠냐만은 남자는 원래 나이가 들어도 어린애와 다르지 않았다. 게임을 하다 기분 상하는 일은 게임개발회사의 악의가 들어간 재미의 요소였기에 아직은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아, 눈사람 형제! 이거 재밌스므니다!”
“뭐?”
“너 이거 해봤어?”
“일본에 살 때 자주 했스므니다.”
“그럼 넌 마지막에 해. 철진아, 동전 넣자!”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가위바위보 해야 합니다!”
“쟤 또 발음 또박또박 해지는 거 봐.”
우리는 지환이를 무시하고 준비한 동전을 넣었다.
드르르르륵.
“야야, 빨리 여기 손 받치고 있어!”
“으, 응?”
철진이를 다그쳐 얼른 손을 대주자 다행히 괴돌이는 바닥이 아닌 철진이의 손에 떨어졌다.
“오! 괴돌이까지!”
동전을 넣고 괴돌이를 한 주먹 받아내면 얼른 입 안에 털어 넣어야 한다. 게임을 하는 데 천천히 과자를 음미할 시간 따위는 없으니까. 그렇게 볼이 터질 듯 입에 욱여넣은 괴돌이가 주는 과한 단맛이 게임의 시작을 알려준다.
파블로프의 개.
아랫동네에서 쫓겨나기 전까지 그렇게 게임을 하다 보면 동전을 넣는 타이밍에 맞게 입안은 이미 침이 가득 고이곤 했다.
삐비비비빅. 삐비비빅.
정겨운 8비트 음악과 효과음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온다.
“야. 너 혼자 다 먹지 마!”
“내 쪽에 떨어진 걸 어떡해.”
“뭘 네 쪽에 떨어져, 한참 멀리 있었구먼.”
이 작은 오락기를 붙잡고 있는 어른 둘. 게다가 한 명은 검은 양복을 입은 곰처럼 커다란 덩치다. 모양새가 그리 좋아 보이진 않으리라 짐작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외진 시골에 있는 문방구.
격식을 차릴 필요도, 주위 사람의 눈을 신경 쓸 필요도 없다.
지난날 할아버지의 사과를 받게 된 그 오락기는 나에게 동심을 조금 내려놓고 어른스러워지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그때의 미련은 덮어두고 지낸다고 잊히는 게 아니었다.
잘하진 못하더라도 이렇게 같이 게임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거기 있으면 죽스므니다.”
“…….”
“둘이 같이 붙어 있으니까 피할 공간이 없는 거므니다. 아까 죽지만 않았어도 금방 자브는 건데.”
이 자식 이런 부류였구나.
지독한 훈수꾼이다. 실수하면 놓치지 않고 한 마디씩 던지는 그 꼬락서니가 얄밉기 그지없었다.
처음 한 게임치고는 나름 선방해서 첫 번째 보스까지 잡아냈지만 아쉽게도 그게 끝이었다. 분명 한두 스테이지는 더 갈 수 있었는데 말이다.
“둘은 너무 조심성이 업스므니다. 부딪치면 죽는 건데 그렇게 가까이 가서 쏘면 안 되므니다.”
이놈 때문이다.
뒤에서 자꾸 신경을 긁는 소리를 해대니 게임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야. 말만 하지 말고 네가 해봐, 그럼.”
“보여주겠스므니다.”
호언장담한 지환이가 의자에 앉은 지 벌써 10분이 넘었다. 아직 지환이는 한 번도 죽지 않고 너무나 무난하게 스테이지를 클리어해갔다.
이럴 리가 없다. 눈사람 형제는 우리가 한창 오락실에 다닐 때도 고전 게임 취급을 받았었다. 나보다 훨씬 어린 지환이가 이렇게 잘한다는 게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다 깼스므니다.”
“벌써?”
돌아다니는 몬스터를 한 번에 시원하게 싹쓸이하는 모습을 멍하니 보다 보니 어느덧 구해진 공주가 폴짝이며 웃고 있었다.
“야. 그런데 네가 이 게임을 어떻게 알아?”
“눈텐도스위치에 있스므니다.”
“아!”
수수께끼는 모두 풀렸다. 가끔 고전 게임이 새롭게 리뉴얼해서 출시가 되곤 하는데 눈사람 형제도 그중 하나였겠지.
분하지만 게임 선정이 잘못되었다.
다음 게임을 살 조건이 붙어버렸다. 눈텐도스위치에 없는 게임으로 말이다.
“어? 깼는데 또 할 수 있스므니다!”
원코인 클리어의 가장 큰 혜택이다. 클리어가 어려운 비주류 게임들은 이따금 인심 후한 오락실에서 이렇게 클리어 뒤에 코인을 유지해 주는 곳이 더러 있었다.
딸칵.
나는 오락기 뒷면에 있는 전원 버튼을 내렸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런 인심 좋은 문방구 아저씨가 아니다. 특히나 얄미운 훈수꾼에게는 더더욱.
“백 원에 한 판이야.”
빨리 다른 게임을 사야겠다.
두 사람이 게임을 하는 사이 나는 얼른 방으로 들어와 다음 게임을 물색했다. 사실 처음부터 하고 싶었던 게임은 정해져 있었다.
킨오브파이터즈98.
94, 95, 96 등. 다양한 시리즈가 있었지만 단연 모든 버그를 잡고 밸런스를 맞춘 98만이 대한민국 오락실을 평정한 유일한 시리즈였다.
서로 경쟁하는 게임이 우리 네 명에게 맞을진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한이 맺힌 게임이다.
아랫동네에서 눈치를 보며 힘들게 하기도 했고 당시 최신게임으로 철건에 1위 자리를 내주기 전까지 오랫동안 간판게임 자리를 지켰기에 오락실에서 정말 열심히 했던 게임 중 하나였다.
심지어 나는 꽤 잘하는 편에 속했다.
게임 기판은 판매와 구매가 활발한 카페가 한 군데 있었다. 이미 단종된 지 한참 지난 중고였기에 신품을 구매한다는 건 불가능했고 이렇게 각자 게임 기판을 사고팔며 옛 게임을 즐기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다.
“기판 종류가 많네…….”
전파상 아저씨 말대로 그냥 단자만 맞으면 설치가 될 줄 알았는데 같은 게임이라도 버전별로 기판 종류가 달랐다.
이럴 땐 최대한 자세히 적는 거다.
“야, 잠깐만 나와봐. 사진만 좀 찍게.”
“아! 형, 죽어!”
나는 두 사람 사이를 비집고 오락기의 사진을 찍었다. 외관부터 뒷면 커버를 열고 안쪽 기판 부분까지 세세하게.
「제목: 이 단자에 맞는 킨오브파이터즈98 기판 구합니다.
내용: 죄송합니다. 제가 지식이 별로 없습니다. 어떤 기판을 써야 하는지 몰라서 최대한 사진을 찍어봤습니다. 25만 원에 구매합니다.」
평균 거래 가격은 10만 원에서 20만 원 사이였다. 아무도 안전성을 보장해 주지 않는 중고거래 시장에서는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야 하고, 급하고 모르는 사람이 웃돈을 줘야 한다. 그저 사기꾼만 걸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게시글을 올린 뒤에 나도 얼른 다시 밖으로 나와 게임에 한 자리 끼어들었다.
죽어 나가는 사람은 나와 철진이다 보니 지환이를 옆에 두고 바통 터치를 하는 형국이었으나 마지막 보스까지 가볼 수 있고 어찌어찌 살아만 있으면 지환이가 알아서 해줄 거라는 생각에 게임은 초보 둘이 했을 때보다 더 재미있었다.
* * *
“이게 뭐야! 이런 곳이 아직 남아 있다고?”
남자는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연신 스크롤을 위로 올렸다 아래로 내리기를 반복했다.
가장 큰 고전 게임카페를 오랫동안 운영하며 이토록 놀랐던 적이 있었을까 싶었다.
분명 문방구였다. 그것도 아주 오래된 그때 그 시절 문방구가 그대로 사진에 담겨 있다.
그런 문방구가 아직 운영하고 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사진의 주인공인 오락기 또한 멀쩡하게 동작하고 있었다. 심지어 손님 두 명이 게임을 하고 있기까지 했다.
문방구 앞 오락기.
오락실도 이제 점점 사라져 원정을 다녀야 하는 판국에, 이 오래된 오락기가 운영되는 문방구는 남자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누가 보기 전에 빨리!’
남자는 운영자의 권한으로 그 게시글을 바로 비공개로 돌려버렸다. 그리고 한 줄의 댓글을 달았다.
「운영자: 그냥 드리겠습니다. 주소 불러주세요.」
치사한 방법이지만 이번만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곳의 주소를 반드시 알고 싶었다. 다른 경쟁자들과 피곤하게 릴레이를 하며 입찰을 기다리는 정정당당한 승부 따위를 고집할 여유가 없었다.
딩동.
댓글을 달자마자 곧장 알람이 울렸다.
「MM: 정말 감사합니다! 주소는 남양주시…….」
“됐어!”
남자는 주먹을 불끈 쥐고 소리 없는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고는 서둘러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어? 무릅이냐? 야! 대박 사건이다. 형이 지금 사진 보내줄 테니까. 봐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