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금의환향(2)
챔피언과 도전자.
이 상반된 위치에 선 사람들은 모두를 열광시킨다.
그 옛날 콜로세움부터 지금의 스포츠까지. 인류는 이 상반된 두 존재가 격돌하는 순간을 간절하게 원하고 지독하게 탐닉했다.
이기면 모든 것을 취하는 도전자, 지면 모든 것을 빼앗기는 챔피언.
백 년도 살지 못할 짧은 생을 가진 나약한 인간에게 이보다 더 잔인한 대결이 있을까? 이기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 격돌은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지고 지금까지 이어졌다.
그렇게 누군가는 보잘것없는 유치한 애들 장난이라 치부하는 이 게임에서도 결국 승자와 패자가 갈렸다.
단 한 번도 챔피언의 자리를 내준 적 없는 절대자의 위치.
무릅은 그렇게 점점 느려지는 손과 침침한 눈으로 힘겹게 그 자리를 지켜오고 있었다. 해마다 고수들의 실력은 늘어가고 정점에 다다른 자신의 실력은 갈수록 녹슬었다.
매년 대회가 열릴 때마다 초유의 관심사는 무릅신을 꺾을 자가 누구인가였다.
그 중압감은 세월이 지나도 이겨내기 어려웠다. 자신을 응원하는 팬들의 목소리보다 도전자가 승기를 잡았을 때 함성이 더 크게 들렸다.
모래성.
비주류 게임이라는 서러움과 정점에 올라서 자리를 지켜옴이 쌓아 올린 명성은 모래성 같았다.
얕은 파도가 한번 지나가면 없어질 모래성처럼 한없이 위태로웠다.
그리고 무릅은 오늘 그 모래성을 자기 손으로 허물었다.
(아, 이게 무슨 일입니까? 무릅 선수가 캐릭터를 고르지 않습니다! 이제 남은 시간은 10초! 9초! 드디어 조이스틱이 움직입니다!)
?.
무릅은 캐릭터 화면 한가운데 있는 물음표를 선택해 랜덤칸을 활성화했다.
제아무리 자신이라도 전 캐릭터를 선수 수준으로 플레이하지는 못한다.
긴 리치와 짧은 모션, 혹은 높은 대미지, 상대방과의 상성.
치밀한 계산과 전략으로 대회 전부터 주력 캐릭터를 연습해 와도 모자랄 판국인데, 갑작스럽게 랜덤을 고른 무릅의 행동에 관객들은 어찌 반응해야 할지 잊어버렸다.
환호성도, 야유도. 정적도 없었다.
당황한 쪽은 대회 스태프도 마찬가지였다. 진행 도우미로 보이는 직원이 급하게 무릅에게 달려왔다.
“저, 무릅 선수. 혹시 잘못 선택하신 건가요? 랙이나 버그 때문이라면 이의 제기를…….”
“아닙니다. 그대로 진행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대로 경기가 진행됩니다! 세계대회 본선에서 랜덤 캐릭터가 처음으로 나왔습니다! 그것도 강력한 우승 후보인 무릅 선수의 캐릭터입니다!)
그렇게 챔피언이 출전한 첫 경기의 막이 올랐다.
그리고 이변은 없었다.
5전 2승 3패.
첫 번째 경기에서 무릅은 아쉬운 패배를 맛봤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챔피언의 패배.
수년 만에 우승을 놓친 챔피언의 얼굴에는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는 아쉬움과 절망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후련하고 어딘가 모르게 즐거운 웃음도 지어 보였다. 대회장에 있는 카메라는 그런 무릅 선수를 그대로 비추고 있었다.
* * *
“핑이 아닌 랜덤 캐릭터를 선택한 것은 따로 준비한 작전이었나요?”
“아닙니다. 즉흥적으로 고르게 되었습니다.”
“1차전에서 패배하셨는데 지금 심정이 어떠신가요?”
“재미있었습니다.”
“네?”
“재미있게 한판 했습니다. 하하.”
“인터뷰 시간 끝났습니다. 관계자 외에는 모두 대기실 밖으로 나가주시기 바랍니다.”
무릅 선수에게 어렵사리 인터뷰를 따낸 리포터는 뭐라 더 질문을 하려 했지만, 스태프에게 막혀 아쉽게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경기는 다시 2차전의 열기로 뜨거웠고 경쟁 선수의 플레이를 보기 위해 다른 선수들도 모두 경기장으로 빠져나갔다.
대기실은 재익과 매니저격으로 참여한 성준, 둘만 남게 되었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랬냐?”
“그냥요.”
“그냥?”
“저 옛날에 진짜 오락실에서 살다시피 했거든요. 그런데 제가 게임을 하고 있으면 아무도 반대편에 안 앉았어요. 괜히 돈만 날리니까요.”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
일방적으로 한쪽이 너무 잘한다면 선뜻 도전하는 사람이 나오지 않았다. 패배가 불 보듯 뻔히 보이는 압도적인 실력 차이는 도전자의 호승심도 사그라들게 했다.
“그러면 랜덤을 골랐어요. 어차피 보스까지 혼자 하는 게임이라 한 캐릭터만 하면 지겨우니까요. 그렇게 게임을 하고 있으면 랜덤 캐릭터라 해볼 만하다 생각 한 사람들이 또 돈을 넣기도 했고요.”
성준은 재익이 하는 말을 잠자코 듣기만 했다.
“제가 철건을 제일 재미있게 했던 건 랜덤 캐릭터였어요.”
“여기까지 와서 재미 하나 때문에 랜덤을 골랐다는 거냐?”
피식.
맥이 탁 풀리는 대답이었다.
세계정상급 선수들이 모두 모이는 이 큰 대회에서 학창시절 오락실에서나 할 법한 가벼운 게임을 즐긴 것이다.
“나도 모르겠다. 너 조금 있다가 라이브 방송도 해야 하지 않냐? 시청자들한테 뭐라고 하게?”
“그러게요. 하하하.”
“하하하? 에라이!”
성준도 재익이 왜 이런 무리수를 뒀는지 모르지 않았다. 지금까지 재익은 재익으로 살지 못했다. 철건 세계챔피언인 무릅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왔다. 덕분에 지금껏 많은 것을 누릴 수 있게 되었으나 반대로 잃은 것도 적지 않았다.
취미가 직업이 되는 순간 가지게 되는 딜레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하던 게임은 대회 준비가 되는 순간 잔업과 철야가 되어버렸다. 매너리즘이나 지루함 따위로 쉽게 그만두지 못하는 업무에 가까웠다.
가장 가까이에서 그 모습을 지켜본 성준은 본선을 광탈 한 주제에 시원하게 웃고 있는 재익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 문방구에 가서 그렇지? 괜히 데려갔네.”
“재미있었어요. 까마득히 잊고 있던 날이 떠오를 정도로요. 종일 해야 하는 게임을 열 판밖에 못 하니까 감질나 죽겠더라고요. 여기 오는 바람에 달력에 적립도 못 했는데. 형도 재미있었죠?”
“그야…….”
재익 못지않게 게임을 열심히 하고 또 좋아했던 성준이다. 그 시골 문방구에서 괴돌이를 먹으며 했던 킨오브98은 집에서 비싼 게임 기계와 맞춤 제작된 조이스틱으로 하는 게임과는 그 재미의 차원이 달랐다.
처음엔 그저 재익이의 너튜브 콘텐츠를 위해 한번 들렀을 뿐이었다. 하지만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문방구 주인이 오는 시간에 맞춰 모인 네 명은 천 원을 다 쓰고도 평상에 앉아 밤늦게까지 철 지난 킨오브파이터즈98 이야기를 나눴다.
두 사람은, 아니, 특히 재익은 눈물이 날 정도로 그 순간이 소중했다.
그래서 내려놓기로 했다.
챔피언이라는 타이틀을 내려놓고 즐겁게 오락실을 들락거렸던 그 시절 아이로 돌아가기로 한 것이다.
어쩌면 다시는 대회에 오르지 못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재익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문방구 주인한테 말하면 철건도 넣어주겠죠? 풀 고르면 철진이도 좀 위협적이겠네요.”
“기판 나눠줄 때 태그도 같이 보냈어.”
“예스!”
“아직 대회 끝난 거 아니니까 일단 나가서 마저 구경하자. 누가 네 자리에 올라가는지는 봐야지.”
“뭐 운 좋은 누가 올라가겠죠. 저는 상관없어요.”
재익은 대기실 의자에 편하게 드러누워 너튜브 영상을 틀었다. 이제는 고전 게임이 되어버린 철건 태그 플레이 영상이었다. 정작 대기실 문만 열고 나가면 전 세계에서 모인 프로 선수들이 철건의 최신게임으로 명승부를 내고 있는데 재익의 눈은 각진 폴리곤 그래픽의 옛날 게임이 플레이되고 있는 작은 폰 화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건 진짜 아차 하면 지는 거라 봐주면 안 되겠네요.”
“문방구 주인도 철건 태그는 꽤 해봤을걸? 잘하면 나도 너 이길 거 같다.”
“하. 꿈도 크시네!”
어느덧 성준도 재익의 폰을 자기 쪽으로 당겨 같이 보길 자처했다. 미리 연습하진 못하지만, 눈으로라도 익혀두면 문방구 배 철건 대회에서 훨씬 유리한 고점을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 * *
대회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릅의 너튜브 채널 생방송 알람이 폰에 울렸다. 응원했던 선수가 첫 판에 탈락했기에 우리는 진작 티비를 끄고 킨오파에 열중하고 있어 하마터면 그 방송을 놓칠 뻔했다.
“야. 시작한다.”
화면 속 재익이 형은 걱정과는 달리 차분한 얼굴이었다.
(안녕하세요. 무릅입니다. 오늘 경기 잘 보셨습니까?)
ㅇㅇ: 왜 그랬어요?
킹잡기는예술: 랙이라도 걸렸음?
죠쥬: 그래도 아슬아슬하게 졌네요.
시월에핀폴: 도대체 왜??
채팅창에는 충격적인 패배의 이유를 궁금해하는 시청자들의 질문이 쉴 새 없이 쏟아져서 버벅거릴 지경이었다.
(오늘 경기는 아쉽게 1차전 패배를 했습니다. 응원해 주셨던 팬분들께는 죄송한 말씀을 전합니다. 많은 분이 왜 랜덤을 골랐는지 궁금해하실 텐데요. 일단은 한 일주일 전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 방송도 많이 도와주시는 성준이 형이 사진을 한 장 보내주시더라고요. 오래된 문방구 앞에 놓여 있는 작은 오락기였습니다. 어찌어찌 그 사진이 있는 문방구에 직접 방문했습니다. 너무 재미있게 게임을 했어요. 잊고 있었던 그때 추억이 되살아나면서 다시 초심으로 돌아온 기분이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우승이 목표가 아닌 게임을 즐기는 한 명의 게이머로 돌아가려 합니다.)
오징어조림: 그래서 거기가 어디예요?
Kmin: 그런 곳이 아직 있다고요?
NePi: 주소 좀.
세귤라: 그 문방구가 잘못했네.
(하하하. 주소는 알려드릴 수가 없습니다. 주인분께 허락도 받지 않았고 일단은 여기가 유명해지면 저도 제대로 못 즐기기 때문에 당분간 저만 알고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짧게 마무리하도록 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서 다시 일정대로 방송을 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남덜이: 아 치사하게!
신민욱: 제발 어느 지역인지만이라도…….
무릅의 개인 방송은 그렇게 끝났다.
“형…….”
“이거 좀 난감하게 됐스므니다.”
“괜찮아, 주소랑 사진도 안 나왔는데 뭐가 난감해.”
관련 게시판은 예상대로 우리 문방구가 어디냐는 글로 도배가 되다시피 했다. 재익이 형이 공개하진 않겠다 했지만 여기서 우리 문방구를 언급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판단조차 서지 않았다.
돈을 벌자고 연 문방구가 아니다. 하지만 손님이 많아지는 건 나쁘지 않은 일이다. 만약 내가 공개해도 괜찮다고 한다면 당장에 엄청난 홍보 효과가 생긴다.
무릅의 너튜브 채널은 30만이 넘는 구독자를 보유한 곳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내 붕 뜬 마음을 접었다. 누군가 기를 쓰고 찾아낸다면 할 수 없지만, 이 시골 문방구는 달력에 적힌 6명 외에 손님은 딱히 필요치 않았다.
마음이 이어져야 인연이 되는 법이다.
누군가 이 시골 문방구에 연이 닿는다면 새로운 손님이 되겠지만 억지로 찾아오라 광고를 하는 것은 이곳을 물려받은 의미를 퇴색시키게 할 것 같았다.
아마 재익이 형도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짐작했다.
“그래도 큰 대회에 나갔다 왔는데 오면 조촐한 환영식이라도 해야겠지? 냉동실에 고기도 아직 많이 남아있고… 아, 맞다! 설렁탕!”
대회가 끝나고 연이어 너튜브 방송까지 보느라 까맣게 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