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금의환향(3)
가마솥에는 이미 연기가 뿌옇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탔네.”
“탔스므니다.”
“말 안 해도 알고 있거든!”
치이이이.
부랴부랴 달려와 솥 안에 물을 부어봤지만 까만 잿가루만 올라왔다.
화형식을 해도 이보다 더 잘 태울 순 없을 것 같다. 처음 끓인 물은 금방 버려야 하기에 일부러 잘박하게 채우고 뚜껑을 닫지 않은 게 원인이었다. 기껏 비싼 한우 뼈를 고았는데 잠깐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대가가 너무나 컸다.
“남은 뼈도 없는데 큰일 났네. 거기 둘. 스톱.”
“아이 씨. 너 때문에 걸렸잖아.”
“난 한 걸음만 더 가면 차에 탈 수 있었스므니다.”
“헛소리하지 말고 철진이는 나랑 같이 이 솥 좀 저기 수돗가로 들고 가자. 지환이 너는 주방에서 수세미랑 세제 좀 가져와.”
두꺼운 무쇠솥을 씻는 건 상당한 중노동이다. 어릴 적에도 할아버지를 돕는답시고 철 수세미로 눌어붙은 누룽지를 문지르며 구슬땀을 흘렸었다.
이번엔 그보다 더 심한 상태다. 깨끗하게 닦아내고 물을 끓여 안에 스며든 불순물을 제거해야 했다. 마음 같아선 그냥 고물상에 내다 버리고 싶지만, 이건 빌린 가마솥이다.
새벽까지 닦아내고 다시 물을 부어 끓이는 걸 얼마나 반복해야 할지 모르는데 내일 대접할 음식도 골치가 아팠다.
일단 하자. 내일은 어떻게 되겠지.
가만히 서서 고민한다고 상황이 변하진 않는다. 나는 체념하고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수세미를 집어 들었다. 이왕 머리가 복잡할 거면 손발이라도 바삐 움직이는 게 나은 선택이었다.
박박박.
딱딱하게 타버린 뼈 기름과 한참 씨름을 하고 있는데, 두 놈은 멀찍이서 바라만 보다가 팔자 좋게 다시 오락기 앞에 앉았다. 12시가 지났으니 다시 천 원이 갱신된 것이다.
저 작은 오락기가 뭐라고 이리 재미있게 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문득 걱정이 하나 더 떠올랐다.
재익이 형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차라리 최선을 다하고 아쉽게 패했다면 세월의 흐름을 탓하며 수고했음에 손뼉을 칠 수 있었다. 나도 격투 게임을 좋아했던 한 명의 팬이었으니까.
하지만 오늘 대회와 방송을 보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스스로 물러남과 다르지 않았다.
승자는 영원히 기억된다. 특히 오랫동안 챔피언의 자리에 있었던 무릅이라는 존재는 쉽게 잊히지 않을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다만 그 세계가 좁았다. 대기업 프로구단이 운영되는 PC게임과 비교한다는 자체가 민망할 정도.
그 좁은 세계에, 챔피언의 자리까지 내어놓고 옛 추억을 떠올려 초심으로 돌아간다는 기분 좋은 말로 마무리 짓는다면 미래가 불투명해 보였다.
당장에 내 앞날도 모르는 판국에 누굴 걱정하겠냐 만은 이대로 넘기기엔 마음 한 구석이 아렸다.
그러고 보니 막상 며칠 동안 재미있게 같이 게임을 해놓고 나이 이외엔 아는 게 없다. 그저 문방구에 오면 인사를 하고 게임을 하고, 나눴던 이야기도 대부분 게임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너튜브 구독자 30만이면 먹고살 만한가? 전에 보니까 게임 채널은 광고 단가도 많이 낮다던데…….
결혼은 했나? 애가 있으면 더 걱정이다.
왕년에 잘나갔던 프로게이머 선수들이 점점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져 생계를 위해 생활전선에 뛰어드는 스토리는 그리 특별하지 않았다.
하지만 적지 않은 나이로 새롭게 출발하려는 사람을 사회는 봐주는 법이 없었다. 각박한 세상이다. 사회는 틀에서 벗어난 사람이 다시 그 속에 들어오는 걸 허락하지 않으니까.
당장에 내가 몸담은 직무만 하더라도 관련 업계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 일한 기간이 1년이 넘으면 이직이 어려웠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니 한참 힘차게 문지르던 수세미가 멈췄다.
“철진아! 상진이 한국 왔는지 케톡 좀 넣어봐.”
“아, 형이 해! 게임하잖아!”
이 자식이.
“나 지금 바쁘잖아, 인마! 빨리 안 오면 그거 오락기 꺼버린다!”
조금 치사하지만 확실한 효과를 보장하는 협박에 입이 댓발 나온 철진이 주머니에서 폰을 꺼냈다.
“야! 때리지 마, 이 치사한 놈아! 케톡하는데!”
“승부의 세계는 치사함이 없므스니다. 원망은 민호 형에게 하면 되므니다.”
넌 치사한 게 맞아…….
이럴 줄 알았으면 지환이에게 부탁할 걸 그랬다.
* * *
철건 대회가 끝나고 재익과 성준은 곧장 공항으로 향했다.
하루 여유를 잡고 관광이나 할 요량으로 늦게 비행기를 잡았지만 이런 기분으로 관광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야! 걱정하지 마! 이 형이 누구냐? 너 그거 철건 안 해도 다 먹고살게 해줄 수 있어! 오락실 할래? 형이 강남에 오락실 하나 차려서 너 사장 시켜줄게. 부산에 삼부카니발보다 더 크게!”
“형, 난 진짜 괜찮다니까요? 괜히 또 그런다.”
특유의 밉지 않은 꺼드럭거림으로 또 허세를 부리는 성준을 타일렀으나 이번에는 성준도 물러서지 않을 기세였다.
“철건 세계 챔피언 무릅이 운영하는 오락실인데 그냥 돈 쓸어 담는 거야. 딱 기다려 봐!”
자신 있게 말하던 성준은 어디론가 급히 전화를 걸었다.
(왜?)
폰 너머에서 퉁명스러운 물음이 인사를 대신했다.
“어, 나야, 여보. 있잖아. 그 우리 저번에 여윳돈 적금해 놓은 그거 좀 쓰면 안 될까? 내가 진짜 괜찮은 사업 아이템이 있는데.”
(미쳤어? 이제 숨통 좀 트이니까 또 뭐? 사업? 지금 어디야! 업무 미팅 간 거 아니지? 일은 다 나한테 미뤄놓고 그딴 소리가 지금 입 밖으로 나와! 집에 들어오기만…….)
뚝.
황급히 종료 버튼을 누른 성준은 민망한 듯 볼을 긁적이며 재익의 눈치를 살폈다.
“봐요. 괜히 전화했다가 오늘 집에 가면 바가지만 긁히겠네. 아니, 집에도 못 들어가는 거 아니에요?”
“아니, 나는…….”
호언장담하던 성준은 전화 한 통에 한없이 작아졌다. 배포 넘치는 모습 뒤에는 아내에게 꼼짝없이 쥐여사는 어두운 면이 있음을 들킨 까닭이었다.
“비행기 시간 다 됐어요. 우리 어디로 가야 하더라?”
아직 탑승 시간까지 한참 남았지만, 성준의 민망함을 덜어주고자 재익은 괜히 비행기 표를 확인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은 괜찮다 했지만 그렇다고 걱정이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방송과 대회를 나가며 인지도를 차근차근 쌓기까지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격투 게임을 좀 더 알리고 싶은 마음에 사비를 털어 여러 아마추어 방송과 대회까지 지원했으니 사실 수중에 돈이 들어오기 시작한 날은 그리 길지 않았다. 즉흥적인 선택이었기에 뒷일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은 한참이나 일찍 도착해 버린 게이트 앞에서 그렇게 말없이 창문만 바라봤다.
그러다 또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성준이 재익의 귀에 꽂힌 이어폰을 뺐다.
“여차하면 우리 회사로 들어와. 내가 한 자리 마련해 줄게.”
“형네 회사 직원은 형수님이 유일하잖아요. 저까지 혼나라고요?”
“끄응.”
그 뒤에도 비행기를 타는 내내 아는 누구의 회사, 혹은 사돈에 팔촌이 운영하는 카페 이야기까지 나오는 바람에 도리어 재익이 그런 성준을 말리는 꼴이 되었다.
(우리 비행기는 방금 도착했습니다. 비행기가 완전히 멈춘 후 좌석벨트 표시등이 꺼질 때까지 자리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선반을 여실 때는 안에 있는 물건이 떨어질 수 있으니…….)
비행은 길지 않았다. 고작 일본에서 한국까지의 거리다. 하지만 재익은 성준의 말도 안 되는 제안들을 거절하느라 누구보다 길고 고된 비행을 방금 마치고 돌아왔다.
“연예인이라도 왔나 본데? 누구지?”
입국심사대 뒤에는 기자들이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고 빼곡히 서서 나오는 사람들을 확인하고 있었다. 두 사람도 혹시나 예쁜 여배우나 걸그룹 아이돌이 아닐까 하는 마음에 연신 뒤를 돌아봤으나 자신들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저기!”
갑자기 기자 중의 한 명이 재익을 보며 소리쳤다.
찰칵찰칵. 플래시가 쉴 새 없이 터지는 바람에 재익은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리고 주위는 순식간에 기자들로 둘러싸였다.
“이번 세계대회에 출전하신 소감이 어떻습니까?”
“아쉬운 패배를 했는데 향후 행보는 어떻게 되나요!”
“랜덤을 고른 이유가 있었나요?”
“다음 대회의 참석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기자들이 일제히 폰을 내밀며 동시다발적으로 질문을 쏟아냈다.
“저, 한 분씩 질문해 주세요. 다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인천공항의 외진 공터 한쪽에서 급작스럽게 열린 인터뷰릴레이는 흡사 기자간담회를 방불케 했다.
적당히 짧은 대답을 해주고 빠져나가는 연예인들과는 다르게 모처럼 공손한 태도로 질문 하나하나에 성실하게 답변해 주는 재익을 본 기자들의 질문은 점점 예의를 갖춰갔다.
“이제 질문이 더 없으시면 그만 가보겠습니다. 이렇게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짐도 찾지 못하고 다리가 저릴 정도로 오래 서 있었던 터라 슬슬 한계가 왔는데 딱 맞는 타이밍에 질문세례가 멈췄다.
두 사람은 한참 만에 공항을 나와 택시에 올랐다. 도시철도를 타야 하지만 이렇게 인터뷰를 하고 기차에 오르는 건 모양새가 빠진다는 성준의 억지가 먹혀들었기 때문이다.
“와.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저도 잘 모르겠어요.”
“대회 우승을 해도 이렇게 기자들이 온 적이 없는데. 혹시 뭐 다른 기사라도 뜬 건가? 검색해 볼까?”
기진맥진한 재익은 그제야 아직 폰을 비행기모드로 해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띠딩띠딩.
부재중 전화 21건.
새 문자 메시지 39건.
「안녕하세요. 한주일보 최원희 기자입니다….」
「인클루잡지 김다미 과장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루데 엔터테인먼트 마케팅부 지민서 대리입니다. 광고 제의 관련….」
「삼정건설 홍보부 차수현입니다…. 」
비행기 모드를 풀자 부재중 전화와 문자 때문에 진동이 끊기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하하하…….”
두 사람은 천천히 문자 메시지를 올려 보며 과하게 속력을 내는 택시 안에서 기뻐하는 대신 황당함을 담은 실소를 터트렸다. 너무 꿈같은 일이 일어나 좀처럼 실감이 되지 않은 까닭이었다.
* * *
「상진: 형, 말한 대로 했어요.
민호: 그래, 피곤할 텐데 이런 부탁 해서 미안.
상진: 아니에요. 전화 몇 통 한 건데요, 뭘. 그럼, 오늘 저녁에 갈게요.
철진: 야! 오늘 문방구에 노인네 온대!
상진: 취소.
민호: …….」
주제넘은 오지랖은 아닌지 한참을 고민했었다.
고작 이런 일로 상진이에게 부탁하는 것도 미안하고 혹시나 나중에 이 일로 곤욕을 겪었다며 재익이 형이 도리어 화를 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패배를 안고 귀국길에 오른 옛 챔피언이 맞닥뜨릴 공항이 초라하지 않았으면 했다.
스포트라이트는 당연히 승자의 것이어야 한다. 그 영광을 위해 뼈를 깎는 인고의 고통을 감내했으니까.
그러나 꼴찌도 박수받지 말라는 법은 없다. 누군가의 응원을 받으며 결승점에 닿을 수 있다면 그건 더 이상 패배가 아님을 나 또한 뒤늦게 깨달았었다.
일전에 울면서 내 미니카를 응원하던 그 아이처럼 나도 작은 응원을 보낸 것뿐이다.
조금 더 단단해질 챔피언의 내일을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