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불발(1)
채널명: 무릅의 철건TV
구독자: 30.02만 명
설명: 철건을 즐겁게 즐기는 너튜브 채널!
틈날 때마다 너튜브 무릅 채널을 열고 새로고침 하는 게 하루 일과가 되어 버렸다. 어느 정도 규모가 큰 사업들은 1월에 모두 나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라 회사에서 딱히 할 일이 없기도 했고, 걱정했던 재익이 형의 채널이 궁금해 참을 수가 없었다.
평소 업무 시간 틈틈이 주식 차트를 보는 부지런한(?) 직원들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오늘에야 그 마음이 이해된다.
상진이의 인맥 덕분에 인터넷에는 당일 날 뉴스 기사들이 드문드문 올라왔다. 예상대로 포털사이트 메인에 걸리는 기사는 단 한 개도 없었다. 억지로 부탁한 이벤트성 취재. 가십거리도 안 되는 기사를 포털사이트 메인에 걸어주는 언론사가 있을 리 만무했다. 구글에 무릅을 검색하고 다섯 페이지 정도를 넘기면 그제야 나오게 되는 기사들.
그게 내가 우리 문방구에 온 손님에게 해줄 수 있는 전부다.
철진이와 지환이도 회사를 통해 광고를 맡겨본다 했지만, 구독자 수에 맞는 금액이 따로 책정되어 몇백만 원의 광고료와 루데호텔 숙박권이나 삼정차 렌트 정도가 될 것 같다고 했으니 앞으로 행보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내가 기분이 좋은 이유는 그렇게 늘어난 구독자 200명 때문이었다.
고작 200명.
하지만 영상에 달리는 댓글들은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이전에는 대단하다, 혹은 기술에 대한 질문들이 대다수였으나 최신 댓글에는 드문드문 응원의 메시지와 새로운 출발을 지켜보겠다는 말이 보였다.
챔피언을 내려놓고 얻은 대가로는 초라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하룻밤 사이에 늘어난 이 200명의 구독자가 챔피언이 아닌 무릅이라는 사람을 좋아해 구독한 것이라 믿었다.
사실 냉정하게 따지자면 이렇게 과하게 신경 쓸 정도로 친한 사이가 아니다. 문방구에서 만나 게임을 같이 했던 기간만 따지자면 일주일도 안 된다.
하지만 우리 문방구의 작은 오락기 때문에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이한 사람이다. 마땅히 해줄 수 있는 게 있다면 해주고 싶은 게 내 솔직한 심정이었다. 아마 철진이와 상진이, 지환이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겠지.
확실하진 않지만, 재익이 형과 성준이 형도 철진이가 삼정그룹 장남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상진이와 지환이는 직접 보질 못했고 철진이 역시 그동안 매스컴이나 언론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일까? 따지고 보면 덩치가 큰 거 말고는 건달이나 다름없는 얼굴이다. 재벌가의 귀한 인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철진이 역시 구태여 그런 걸 자랑하는 성격도 아니었고 당사자가 말하지 않는데 내가 나서서 알려주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했다. 어련히 지내다 보면 알아차리지 않을까 했으나 지난번에 저녁으로 족발을 시킬 때 젊은 애들이 돈이 어디 있냐며 한사코 돈을 다 내려던 성준이 형의 모습을 떠올려보니 아마 철진이가 말하지 않으면 전혀 알아차리지 못할지도 몰랐다.
나 같아도 시골문방구에 삼정그룹 장남이 매일 출근 도장을 찍는다면 믿지 않을 테니까.
아마 앞으로도 이 사실을 말할 기회는 당분간 없을 것 같다. 너튜브 채널에도 새로운 방송 콘텐츠를 준비하느라 스케줄이 빡빡하다는 글이 올라왔으니 말이다.
“김 과장, 오늘 일정도 없는데 우리 카페 가서 커피 한잔 마시고 쨀까?”
딴짓하는 나를 발견한 팀장님이 다가와 귓가에 슬쩍 일탈을 제안했다.
“괜찮을까요?”
“뭐 어때? 우리도 한창 바쁠 땐 철야에 주말 출근도 했는데 이 정도쯤이야!”
지금 시간은 3시 반. 카페에서 업무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기껏해야 30분. 퇴근하기엔 조금, 아니, 많이 이른 시간이다.
야근을 더러 하긴 했으나 올해는 유독 굵직한 사업에 단독 입찰이 많아 일이 많이 준 것도 이 여유로움에 한몫을 했다.
한정된 인력과 자금으로 목표 매출을 달성하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큰 사업 한두 개를 따거나 혹은 자잘한 사업 여러 개를 따거나.
제안서와 발표 준비를 해야 하는 우리 제안팀 입장에서는 당연히 큰 사업 하나를 따면 업무가 배 이상 줄어들었다. 큰 사업이나 작은 사업이나 준비해야 할 서류와 자료는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팀은 이미 굵직한 사업을 두 개나 수주했다.
올해는 제안팀이 그야말로 거저먹는 한 해다.
“이야. 제안팀, 또 도망가?”
“도망이라니? 업무 회의 하러 가는구먼.”
“가방이나 숨기고 거짓말을 하든가!”
“뛰자!”
지금은 사업 초라 개발팀도 분석 설계 시즌. 다른 팀들도 여유로운 건 피차일반이었다. 폰게임을 하거나 너튜브를 보는 와중에 대놓고 도망가는 우리를 잡을 명분은 없었다.
한 시간 일찍 하는 퇴근. 직장인에겐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다.
* * *
“결재 서류는 이게 다가?”
“네. 저녁 회의는 말씀대로 일정을 조정해서 다음 주로 미뤘습니다.”
“그래. 잘했다.”
조동욱 회장은 두껍게 쌓인 서류 판들을 박 상무에게 건네고 외투를 주섬주섬 걸쳤다.
“회장님, 어디 가십니까?”
집에 일찍 가면 뭐 하냐면서 늦게까지 회사를 지키기 일쑤였던 회장님이 잡혀 있던 일정도 미루고 외투를 걸치자 박 상무가 뒤따르며 물었다.
“문방구 간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어데. 혼자 갈 끼다.”
결전의 날이었다. 박 상무는 유능하고 한 번도 자신을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저번 고스톱 사건(?)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광팔이로 낀 박 상무는 어설픈 눈빛으로 자신을 돕고자 최선을 다했지만, 번번이 최악의 수를 골라줬다.
운이 크게 따라야 하는 일을 했다면 필시 패가망신을 면치 못할 위인이다. 월급쟁이로 살았기에 그나마 자신의 곁에서 승승장구했던 것인데 그걸 미처 깨닫지 못하고 생각 없이 평소대로 골라주는 패를 냈다가 전패라는 치욕을 맛봤다.
미안한 말이지만 지금 박 상무는 방해꾼이나 다름없었다.
‘7시에 온다 캐스이, 지금 가모 두 시간은 하겠고마. 두 시간이면 충분하다.’
충분하고도 남았다. 지난번 전패를 당하고 일어서기까지 두 시간이 안 걸렸으니.
조동욱 회장은 서류 가방에 십 원짜리와 백 원짜리 동전 뭉치를 가득 담고 차에 올랐다. 밥까지 얻어먹고 올 작정이라 기사도 대동하지 않고 오랜만에 앉은 운전석은 이질감까지 느껴졌다.
하지만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조동욱 회장의 차는 망설임이 없었다.
퇴근 시간보다 훨씬 이른 시간이라 여유로운 도로를 얼마나 달렸을까? 굽이진 언덕을 따라 올라오니 익숙한 마을회관이 보였다.
끼익.
차는 처음부터 목적이 이곳이라는 듯 마을회관 바로 옆에 멈춰 섰다.
‘이 할마시들 어데 갔노?’
하지만 마을회관은 굳게 닫혀 있었다.
까치발을 들고 이리저리 창문 안쪽을 살펴봤지만,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 * *
어? 조동욱 회장이 왜 저기에 있지?
분명 내가 온다 한 시간은 7시였다. 그런데 이렇게 일찍 와계실 줄이야.
“일찍 오셨네요?”
“여 할마시들은 오늘 어데 갔노?”
“아, 오늘 오일장이라 거기 갔다가 목욕탕에 들르세요. 늦게 오실 거예요.”
“닌 와 그 중요한 걸 말 안 해주노!”
“네?”
아까부터 난데없이 할머니들을 찾더니 인사 대신 영문 모를 소리만 하신다.
“아이다. 들어가자…….”
갑자기 어깨가 축 처진 조동욱 회장이 힘없는 어투로 나를 채근했다.
나는 평상 밑에 둔 열쇠로 문방구 문을 열고 천장에서 전깃줄로 길게 내려온 동그란 모양의 펜던트 스위치를 눌러 불을 밝혔다.
박박박.
우리가 온 걸 알아챈 누렁이가 방문을 긁는 소리가 온 집안에 울렸다.
냄새가 나는지 아니면 발소리로 알아차린 건지 유독 좋아하는 사람이 오면 저렇게 방문을 긁어댔다.
방문을 열자 주인은 찬밥이고 연신 조동욱 회장의 다리 사이를 비비며 애교를 부렸다. 밥 주는 사람 따로, 좋아하는 사람 따로라 그거냐?
그래도 반겨주는 고양이라도 있으니 어색한 분위기는 한결 나아졌다.
“잠깐 앉아 계세요. 식사 안 하셨죠? 금방 차려올게요.”
“고마 있는 거 내 온나. 뭐 차릴라 카지 말고.”
빈말로 던진 작별 인사가 진짜 식사 대접이 될 줄이야…….
나는 외투만 벗고 큰 국그릇 두 개와 국자를 든 채 밖으로 나왔다.
가마솥은 아침에 올려둔 장작불이 잔불로 변해 있었다. 뚜껑을 열자 김이 펄펄 나는 설렁탕의 뽀얀 국물이 구수한 냄새를 풍긴다.
고즈넉한 저녁, 시골 가마솥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향기다.
푹 익어 부슬부슬해진 고기까지 가득 담아낸 설렁탕 두 그릇과 남해 출신 할머니께서 나눠주신 꾸덕꾸덕한 김치 한 접시가 개다리소반에 차려졌다. 조촐하지만 그래도 고깃국이 두 그릇이나 담겨나오니 제법 괜찮은 한 상이 되었다.
“아까 밖에 있던 가마솥에서 곤 기가? 내 온다고? 허허.”
“전에 나눠주신 고기가 많이 남아서요.”
“그래. 이, 쉽지 않을 낀데 만다꼬 번거롭구로.”
말은 그렇게 해도 진짜 시골 가마솥에 끓인 설렁탕이 썩 마음에 드셨는지 그릇에서 눈을 떼지 못하셨다.
그러곤 조심스럽게 한 숟갈을 드시더니 이내 말씀이 없으셨다.
“니…….”
“입맛에 맞지 않으세요?”
“니 요리 배았나?”
“아뇨. 따로 배우진 않았습니다.”
“이게 이 맛이…….”
후룩후룩.
체면도 잠시 내려놓으시고 연신 바쁘게 숟가락을 움직이시는 모습을 보고 조금 죄책감이 들었지만 모르는 게 약이라 했다.
그렇다. 지금 먹는 설렁탕은 어제 만든 게 아니다.
한우 사골로 우려낸 진짜배기 설렁탕은 어젯밤 세상을 떠났다. 화장까지 시켜서 까맣게 타버린 재는 쓰레기봉투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지금 가마솥에 들어가 있는 설렁탕은 부랴부랴 새벽까지 영업하는 식자재마트에서 사온 사골곰탕 통조림이다. 거기에 티가 날까 봐 소고기다신다를 양껏 넣고 MSG 가루도 넉넉하게 뿌렸다.
자고로 음식은 내 가족이 먹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만들어야 맛있어지는 법. 기성품에 아낌없이 들어간 조미료가 가마솥에서 오랫동안 끓여지니 가히 천하일미의 맛으로 변했다. 어설프게 흉내 낸 설렁탕이 전국에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이 모여 만든 극상의 기성품 맛을 이길 순 없다. 이렇게 맛있게 드시는 걸 보니 차라리 어제 솥을 태운 게 잘된 일일지도 몰랐다.
“한 그릇 더 드릴까요?”
“쪼매만 더 담아 도가.”
그렇게 처음보다 더 많이 담긴 설렁탕을 깨끗이 비우시고서야 식사가 끝났다.
후식은 오래된 유리컵에 탄 커피믹스다.
어색한 침묵 속에 식사가 끝났으니 나는 얼른 본론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오셨는지요?”
“값 치르러 왔다.”
“값이요?”
“니 덕분에 큰돈 벌게 생깃다. 장사꾼이 돈 벌었으면 값을 치라야지. 그래야 나중에 딴말을 안 할 끼니까.”
나도 보는 눈과 듣는 귀가 있었다. 최근에 철진이가 아이디어를 내고 홍보했다던 자동차의 판매 실적도 그렇고, 이번에 상진이가 다녀왔던 사우디 출장도 잘 끝난 모양이다.
그게 왜 내 덕분이냐고 묻는다면 아마 이 문방구에서 두 형제가 큰 심경의 변화를 겪었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그건 두 형제의 노력의 성과다. 내가 해준 건 아무것도 없다.
“설날에 소고기를 양껏 먹었습니다. 그걸로 대신하시…….”
“쉰소리 고마하고 내 말이나 마저 듣그라.”
내가 거절할 걸 예상하셨는지 단박에 말을 끊으셨다.
받지 않겠다는데 억지로 손에 뭘 그렇게 쥐여주시려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쉽지 않은 거절이 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