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45화 (45/151)

#45. 불발(2)

“니도 장사를 할라모 물건이 있어야 안 되겠나. 일 다니믄서 어데 이런 잡동사니 사는 데 올케 알겠나? 유통 쪽에 이야기해 둘 테니까 제값 주고 가져가그라. 어떻노?”

의외의 제안이었다. 정말 돈 봉투라도 내밀면 저 고집을 꺾고 거절하는 데 고생깨나 하겠다 싶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말씀을 꺼내셨다.

“와? 마음에 안 드나? 돈 가방을 달라카믄 내야 편하다.”

“아닙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능구렁이다. 분명 명백한 도움이지만 딴에는 제값을 치르라 말하니 도움이라 하기도 애매했다.

장사가 거의 안 되는 상황이라 애써 무시하고 있었으나 설날을 기점으로 쌓여 있던 재고는 눈에 띄게 줄었다. 그걸 금세 파악하다니……. 천생 장사꾼이라 그런가? 상대방에게 간절한 게 무엇인지 간파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꼴이라 기분이 좋진 않았지만 뒤집어 본다면 그만큼 무언가 챙겨주고 싶다는 뜻이었다.

“니 말이다.”

커피를 단숨에 들이켠 조동욱 회장은 유리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고 나를 빤히 바라보셨다.

“다른 뜻이 있으모 차라리 속 시원히 말을 하그라. 내사마 니 정도 되는 아면 뭘 해도 밀어준다. 내 회사 와서 일 좀 배우든가. 아니모 투자를 받아가 사업을 크게 해보든가. 큰돈 벌믄서 살 재주가 있는 아가 와 그 쪼매난 회사에서 아둥바둥 다니믄서 이 문방구까지 하노 이 말이다.”

“돈을 많이 벌면 좋은 집, 좋은 차, 좋은 음식을 먹습니다. 그걸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돈을 많이 버는 것도 결국 대가가 따릅니다.”

“니 계산이 잘못되꾸마. 세가 빠지게 땀 흘려 일하고 이백도 겨우 버는 아들이 천지삐까리다. 가들캉 내캉 일하는 기 같아 비드나?”

“회장님도 철진이도 상진이도, 지금 이 자리까지 올라오시면서 그 대가를 치르지 않았다 장담하실 수 있습니까?”

굴지의 대기업 삼정그룹이 일어서는 데 조동욱 회장의 처절한 노력이 들어갔음은 매스컴에 심심치 않게 나오는 주제였다.

산업화를 거치면서 신화적인 기업이 여럿 등장했음에도 소금물로 배를 채우며 독하게 살았던 조동욱 회장의 피눈물 나는 투쟁기는 다른 재계 영웅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인생을 내던진 배팅. 지금의 삼정그룹이 있기까지 조동욱 회장은 멈추지 않는 경주마처럼 지금까지 달려온 것이다.

나 또한 그리 살았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어떻게든 회사에 붙어 있으며 온갖 격무에 시달렸으니까.

하지만 그런 삶은 정답이 아니었다. 아니, 정답은 애초에 없을지도 모른다.

한 발짝 뒤로 물러나 바라보니 애늙은이처럼 살아온 인생이 덧없어 보였다. 할아버지의 문방구를 물려받은 것도, 연봉을 줄여 이직한 것도 누군가 조동욱 회장처럼 왜 그랬냐 묻는다면 확신에 찬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래야만 했다는 사명감이나 철학이 담긴 행동이 아니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동안 소중한 기억을 잊고 살았다는 점이다. 어른이 되었다는 구실 좋은 핑계로 말이다.

이 문방구에서 인연이 된 사람들도 모두 마찬가지다.

어린 시절 희미해진 추억, 혹은 누리지 못했던 그때의 동경을 찾아 이 작은 문방구로 온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 중 한 명은 다름 아닌 조동욱 회장이다.

“밥 잘 무따. 필요한 기 있으모 여 적어서 보내라.”

내 질문에 반박할 거리를 찾지 못한 것이 민망하셨는지 작별 인사가 대답을 대신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기 뭐 엎드려 절받기도 아이고, 참. 내 간다! 어어.”

“누렁아!”

조동욱 회장의 다리 사이에 누워 있던 누렁이가 마음에 드는 자리가 없어진 것에 심통이 났는지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떨어지지 않았다.

“이, 이기 와 이라노?”

찌지직.

“야!”

결국, 누렁이의 무게에 못 이겨 바지가 세로로 길게 찢어졌다.

“죄송합니다. 바지는 변상해 드리겠습니다. 우선 갈아입으실 바지를……. 너 이리 와!”

“됐다고마! 차에 탈 낀데 말라고. 가 혼내지 마라.”

하필 길게 찢어진 부분이 앞쪽이라 속옷과 맨다리가 그대로 보였지만 집까지 차를 타고 간다 하시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렇게 조동욱 회장은 바지춤을 붙잡고 어기적거리며 문방구를 나섰다.

간만에 사고를 쳤는데 그게 하필 대형사고라니!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넌 오늘부터 나흘간 간식은 없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했다. 누렁이는 큰 발톱에 책임을 져야 한다.

* * *

“허허. 거참.”

조동욱 회장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하고 나오긴 했으나 난감한 상황에 놓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차를 타고 어찌어찌 집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현관부터 만나는 경비원, 집에 있는 직원들을 마주쳐야 했다.

차에 오르면서도 어디서 뒷말이나 나오지 않을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짝.

‘응?’

그런 와중에 귓가에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조동욱 회장은 운전석 문을 반쯤 열다 말고 손이 멈췄다.

“하이고메, 오늘 일진이 왜 이러는 겨.”

분명 마을회관에서 나는 소리였다.

‘할마시들, 오일장에 갔다 온 긴가?’

저녁 늦게 온다 하더니 마을회관에는 판이 벌어진 지 한참 전으로 보였다.

‘지금 드가보까? 아이다. 이 꼬라지로 어데 드간단 말이고.’

늦겨울 찬바람이 다리를 시리게 만들 정도로 크게 찢긴 바지를 입고 마을회관의 문을 열 순 없었다.

그냥 차에 오르려니 손에 든 가방 속 동전 뭉치가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한참의 망설임 끝에 조동욱 회장은 다시 문방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쾅쾅.

문이 어찌나 낡고 심하게 흔들리는지 노크 수준으로 가볍게 두들겨도 부서질 듯한 소음이 사방에 울려 퍼졌다.

“두고 가신 물건이라도 있으십니까?”

고무장갑을 낀 채로 문을 연 민호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내 바지 좀 갈아입자.”

민호는 방에 들어온 조동욱 회장에게 이젠 접객용이 되어 버린 하늘색 츄리닝을 내밀었다.

“이거 빠이 없나?”

“네.”

공교롭게도 다른 바지들은 모두 건조대에 걸려 있었다. 출근할 때 입을 바지를 제외하면 민호가 줄 수 있는 바지는 하늘색 츄리닝이 유일했다. 그나마 상진이와는 다르게 오염(?) 걱정이 없어 위아래 세트로 빌려줬다는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일단 입자.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이다.’

시간이 촉박했다.

이미 한참 늦은 저녁 시간이다. 결심이 섰으면 고민 없이 달려들어야 직성이 풀리던 조동욱 회장은 하늘색 아다다스 추리닝을 입고 다시 마을회관으로 향했다.

“오메! 호야네 손님 할바시 아니여?”

호칭이 다소 이상했으나 할머님들이 보기에 이보다 더 조동욱 회장을 잘 표현하는 말을 찾기 어려웠다.

“내가 낄 자리 있는교?”

철컥. 탁!

조동욱 회장이 서류가방을 열고 바닥에 십 원짜리와 백 원짜리 뭉치를 세워두자 윗집 할머니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홀홀홀. 선수가 왔는디 없는 자리도 만들겨. 우째 오늘은 기운이 남달라 보이는디?”

화투판에서 가장 어려운 일. 어떻게 호구를 판때기에 앉히느냐이다.

그런데 그 호구가 제 발로 찾아왔으니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기가 어려웠던 윗집 할머니는 연신 마음에도 없는 칭찬을 해댔다.

* * *

“어디 보자……. 괴돌이도 거의 다 먹었고, 꿀호박, 아풀러…….”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다.

이왕 도움을 받기로 했으니 오늘 최대한 빠르게 정리해서 받은 연락처로 보낼 작정이다.

발주서는 엑셀로 따로 양식을 만들어야 한다.

아무리 삼정그룹이라지만 문방구에서 팔 법한 물건들을 취급할 리가 없었다. 괜히 이름만 적어 보냈다간 그게 뭡니까? 라는 전화를 얼마나 받을지 몰랐다. 필요한 물품 목록과 함께 제품의 이미지까지 첨부하지 않으면 서로 피곤한 상황에 놓인다.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낡아서 도저히 팔지 못하는 물건들과 새로 진열해 놓을 물건들을 적으니 벌써 폰 메모장이 가득 찼다. 누가 사갈지, 얼마나 팔릴지 모르지만, 문방구라는 이름에 걸맞은 구색은 갖추고 싶다. 그 시절 할아버지의 문방구는 문을 열고 들어오면 온 세상의 장난감이 다 모인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으니 말이다.

툭.

한창 개수를 세며 장난감 상자들을 뒤적거리는데 바닥에 떨어진 상자가 보였다.

“철진이 놈 작품이네.”

바닥에 떨어진 상자는 대부분 철진이가 저지른 짓이었다. 큰 덩치 덕분에 문방구를 이리저리 어슬렁거릴 때면 꼭 이렇게 상자 한두 개를 떨어뜨리곤 했다.

바닥에 떨어진 상자는 진작에 빛이 바래서 눈살을 찌푸려 자세히 보아야 글씨를 읽을 수 있었다.

굴록17.

비비탄 총이다.

당시 상당히 비싼 축에 속했던 장난감으로 미니카가 자잘한 부속품을 사는 데 지속적인 지출이 발생했다면 이 비비탄 총은 한 번에 엄청난 용돈이 소모되었다.

만 원 가까이하는 이 비비탄 총을 하루 용돈 100원인 아이들이 어떻게 다 살 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늦게 가져온 친구는 있어도 사지 못한 친구는 없었다. 어려운 형편을 알 리가 없는 아이들이 얼마나 부모님을 졸라댔을지 생각하니 쓴웃음이 나왔다.

나는 상자를 열고 내용물을 방에 쏟았다.

굴록17 권총 한 자루, 탄창, 그리고 BB탄 조금과 갱지처럼 누렇게 변해버린 제품설명서.

요즘 나오는 권총에는 장난감을 표시하는 형광 칼라파트가 의무적으로 있어야 했으나 오랜 세월 잠들어 있던 이 녀석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위법이 되니 팔면 안 되는 물건들이다.

한 번만 쏴볼까?

이왕 버릴 것들이니 몇 번 쏴본다 한들 달라지는 건 없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나는 얼른 총을 들고 홀린 듯 밖으로 나왔다.

아니지, 아니야.

이왕 쏘기로 작정했는데 이 쥐콩만 한 권총으론 성이 차지 않는다.

나는 비비탄 총들이 쌓여 있는 상자 중 가장 아래에 깔린 녀석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레밍턴.

상자부터 압도적인 크기를 자랑하는 녀석으로 비비탄 총의 종결급 모델이었다. 압도적인 크기답게 아득한 가격으로 할아버지의 문방구에서도 한 번도 팔린 적이 없었다.

“이걸 이제야 쏴보네.”

당연히 나도 가지고 싶었으나 억지를 부려서 될 일이 있고 안 될 일이 있었다. 이 비싼 장난감을 그냥 달라 조르기엔 죄송했는지 당시에도 나는 국민 권총(?)인 굴록17을 가지고 놀았다.

훅. 철컥.

탄창에 비비탄을 하나하나 넣을 여유 따윈 없었다.

비비탄 한 알을 입구에 넣고 입으로 불어 장전한 뒤 허공을 겨눴다.

탕.

스프링이 퉁겨지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하얀 비비탄이 하늘 높이 솟아오른다.

“크. 이거지!”

나는 얼른 총열 덮개 부분에 있는 탄창을 빼내 본격적으로 총알을 채우기 시작했다. 간장 양념통처럼 생긴 비비탄 케이스가 있다면 오로록 쏟아낼 수 있지만, 그냥 봉지에 담긴 비비탄은 한 알 한 알 정성스럽게 넣는 수밖에 없다.

반이나 채웠을까?

빨리 쏘고 싶은 마음에 견디지 못하고 나는 곧장 탄창을 쑤셔 넣었다.

레밍턴의 꽃은 바로 연사력에 있다.

총열 덮개를 잡고 당겼다 앞으로 밀면 총알이 발사된다. 이 반복 동작이 다른 권총들과는 다르게 손힘이 약한 아이들도 상당히 빠르게 할 수 있어 압도적인 화력을 뿜어냈었다.

물론 레밍턴은 잘사는 집이 많은 아랫동네 아이들이 가지고 있었고 우리는 번번이 화력에 밀려 도망가기 일쑤였지만…….

퉁퉁퉁. 틱틱.

“어?”

불발이다. 몇 번 쏘지도 못했는데 안쪽에 무언가 걸리면서 총알이 나가지 않는다.

흔들어 보니 어디가 부러졌는지 딸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쳇. 소원풀이 한번 해보려 했더니 도와주질 않네.

차라리 처음부터 고장이 나든가. 이대로 끝내기엔 뒷맛이 아쉬웠다.

“레밍턴, 베레타, 글록…….”

발주서에 적힐 목록들이 조금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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