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46화 (46/151)

#46. 꿩 대신 닭(1)

“네? 회장님이요? 여길요? 왜요?”

(내가 알아? 지금 바로 오신다니까 청소 깨끗이 하고 회의실에 다과 준비해놔!)

“무슨 일이길래 통화음이 여기까지 들려? 꼰대 뭔 일 터졌대?”

전화기 스피커에서 들리는 고함은 옆자리 파티션 너머까지 전해졌다. 평소 남의 일에 신경을 잘 쓰지 않던 선임도 통화 내용을 듣고 물어보는 게 실례라는 걸 알면서도 궁금증을 참지 못했다.

“회장님이 오신다는데요?”

“누구?”

“조동욱 회장님이요.”

“뭘 알아듣게 설명을 해야지. 회장님이 여길 왜 와?”

밑도 끝도 없는 황당한 소리를 하는 막내에게 저도 모르게 쏘아붙인 선임은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말을 해달라 했지만,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저도 그렇게 듣기만 했어요.”

“…….”

삼정유통.

골목상권침해라는 오명을 벗어나지 못한 작은 계열사 중 하나로 조금만 사업을 벌이려 해도 사회적 반발이 심했기에 이름과는 다르게 도소매업 유통을 담당하는 업무를 맡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진작 공중분해가 됐어야 할 삼정유통은 어째서인지 계열사 구조에서 당당히 한 칸을 차지하고 있었다.

정상적인 유통 업무를 하질 못하니 그 업무는 조금 변질이 되었다. 판매하는 대상이 외부가 아닌 내부로 바뀌었다. 그룹 내 수많은 계열사에서 필요한 물품을 발주하면 그 수량과 종류가 어찌 되었건 최선을 다해 구해준다. 이것이 바로 삼정유통의 주된 업무였다.

물론 업무와 관련된 자재나 비품들은 각 그룹, 부서별로 구하는 루트가 따로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세상일이 그렇게 틀에 박힌 액자처럼 딱딱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삼정전자에서 냉장고 테스트를 위해 필요한 세계 각지의 조미료, 삼정건설에서 난데없이 급하게 요청했던 아직 미출시된 신형 VR기기 등등. 시일이 급박하고 어디서 어떻게 구해야 할지 막막한 물건들을 찾아주는 일은 삼정유통이 유일한 대안이었다.

그래서 붙은 별칭은 삼정만물상.

하는 업무만 놓고 본다면 허드렛일이나 하는 한직으로 오해하기 딱 좋은 곳이다. 실제로도 종종 하청업체 다루듯 하대하는 전화를 받기도 했으나 실상은 완전히 달랐다.

‘안 구해주면 어쩔 건데?’라는 이른바 을질이 가능한 부서가 바로 삼정유통이었다.

진급에 실적이 필요한 곳도 아니고 딱히 업무 성과가 중요한 곳은 더더욱 아니었다. 필사적으로 구하기 위해 노력해 봤지만 아쉽게도 실패했다는 변명을 해버린다면 눈 뜨고 당하는 쪽은 되려 발주를 요청한 부서가 된다.

심지어 시일이 급박하고 어디서 구해야 할지 막막한 물건들이 요청의 대부분인데 머리가 정말 나쁘지 않고서야 삼정만물상을 우습게 아는 계열사는 아무도 없었다.

일단 들어가고 나면 웬만해선 정년이 보장되는 든든한 철밥통들이 프로젝트 사활이 걸린 물건을 구해준다. 오히려 넙죽 엎드려 절을 해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 콧대 높은 삼정만물상도 결국 회사. 상사가 까라면 까야 했다.

사무실은 그 한 통의 전화로 때 아닌 대청소 시즌이 되어 버렸다.

“진짜래? 회장님이?”

“저도 몰라요. 하필 막내가 전화를 받아서…….”

진위 여부를 따지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수군대지만 정작 진실을 말해줄 사람은 회의실에 가져다 놓을 과자와 음료를 사러 나간 뒤였다.

사태의 심각성을 실감하지 못한 직원들이 느릿느릿 청소를 마무리할 무렵.

벌컥.

사무실 문이 거칠게 열리고 전 이사가 진땀을 흘리며 달려 들어왔다.

“야, 회장님 도착하셨다! 청소도구 다 집어넣어!”

한바탕 소란이 또 일었다.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멀리서 들리고 도각거리는 구두 굽 소리가 조용해진 사무실에 점점 가까워졌다.

“다들 일하그라. 뭘 이리 다 나와가 서 있노. 허허. 월급 아깝구로.”

과한 경상도 사투리로 친근하게 건넨 조동욱 회장의 농담에 어정쩡하게 서 있던 직원들이 자리에 다시 앉았다.

“들어가시죠. 회의실은 이쪽입니다.”

“내사마 이래 무심해가 계열사 사무실도 처음 와보는구마. 잘해놨네.”

빈말이 아니었다.

내부를 둘러본 조동욱 회장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비싼 사무용품들로 채워 그럴싸하게 꾸민 본사 건물보다 이렇게 궁색하지만 일하는 티가 나는 사무실이 더 마음에 들었다.

“다른 기 아이라 부탁할 기 있어서 왔다. 이거 좀 읽어보그라.”

회의실 상석에 앉은 조동욱 회장이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손수 가져온 파일 하나가 탁상 위에 올려졌다.

파일에는 나름 깔끔하게 정리된 물품들이 수량과 함께 빼곡히 적혀 있었다.

“거 있는 거 좀 구해줄 수 있겠나?”

겁박이나 다름없는 질문이었다. 너희들이 감히 내 요청까지 거들먹거리며 경우를 따질 수 있냐는 뜻이 숨어 있었다.

회장실에 홀로 앉아 결재판만 만지는 늙은이가 아니었다. 여전히 비서실은 회사 내부에 도는 은밀한 이야기까지 모두 보고서로 작성해 올리고 있었고 그 보고서의 내용들은 어디서 어떻게 알았는지 예상도 안 될 만큼 정확하고 상세했다.

임원진들이 이따금 회장실로 불려가 호된 꾸지람을 듣게 되는데 그때마다 정작 본인은 하나도 모르는 내용으로 혼나느라 변명도 하지 못하고 꿀 먹은 벙어리 신세를 면치 못했다.

‘목에 깁스 좀 풀고 다니라는 경고인가? 아니면 실력 한번 보자는 뜻인가?’

메일 한 통, 그것도 비서실을 시키면 될 하찮은 일이다. 하지만 친히 이 초라한 4층짜리 사무실에 직접 방문했다. 회의실에 앉아 있는 누구도 이번 방문이 순수한 의도가 아니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최대한 구해보겠습니다.”

두루뭉술한 대답. 삼정유통 대표이사의 입에서 나온 적절한 발언이었다. 뒤로 도망칠 활로를 열어둔 처세술로 지금껏 적을 만들지 않고 큰 문제를 넘겨왔으나 이번에는 대답을 듣는 대상이 달랐다.

“내가 아침 댓바람부터 와도 최대한 구해보겠다 카는데 다른 아들은 뭐 말도 못 꺼내겠구마. 동네 구멍가게 장사도 그래 하믄 망하는데 우째 용케 버티고 있었드노?”

“죄송합니다. 제가 책임지고 모두 준비하겠습니다.”

이제야 본뜻을 뒤늦게 알아챈 대표이사가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준비되모 연락 주그라.”

“따로 보낼 곳이 있으면 저희가 직접…….”

“내가 가지고 갈 끼다. 그라이 연락만 주모 된다. 내 간다. 다 나오지 말고 일해라.”

‘한 번 더 오시겠다는 건가?’

이젠 진짜 사활을 건 임무가 되어버렸다. 파일에 적힌 물품 중 하나라도 빠진다면 ‘없는데요 캐뿌믄 말짱 꽝인데 만다고 여 앉아 있노?’라며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 자명했다.

급작스러운 회장님의 방문.

아직도 직원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지금 가용할 수 있는 인력들 다 동원해서 여기 적혀 있는 것들 싹 찾아와.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콧대 높던 삼정만물상은 하루아침에 시험대에 올랐다. 그것도 대표이사의 목을 건 시험대에 말이다.

그 원인이 다름 아닌 시골 작은 문방구였음을 아는 사람은 오직 조동욱 회장뿐이었다.

* * *

“다들 방으로 들어와 봐.”

여전히 킨오파를 하느라 여념이 없던 두 형제와 지환이를 방으로 불렀다. 이대로 둔다면 오락기에 매일 천 원을 탕진하는 일상이 반복된다. 나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비비탄 총싸움을 한 번 더 해보고 싶다는 내 사적인 욕심을 위해서는 이 녀석들도 어느 정도 저축이 필요했다.

그리고 때가 되기도 했다.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아이들이 자라며 흥미를 느끼는 분야는 모두 비슷해서일까? 지금껏 문방구에서 즐겼던 놀이는 하나도 빠짐없이 내가 어린 시절에 즐겼던 것들이었다.

미니카, 딱지, 오락기까지.

뒤집어 이야기하면 그때 재미있게 했던 것들은 지금도 그 재미가 보장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비비탄 총은 분명 선풍적인 인기를 또 한 번 불러올 것이다. 하지만 가격대가 문제였다. 저렴한 제품은 만 원 남짓에 구매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입문용과 실전용을 가려서 구매할 정도로 우리 용돈은 풍족하지 않다.

가장 저렴한 만 원짜리를 사도 열흘 동안 꼬박 문방구에 와서 손가락만 빨아야 하는데 그 유혹을 견딜만한 계기가 필요했다.

그 계기 또한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서 찾았다.

촤르르륵.

방바닥에 난데없이 나무젓가락이 한가득 깔렸다. 어제 인터넷으로 최저가에 주문한 것들이다.

“뭐야? 밥 먹게?”

나는 말 없이 주머니에서 나무젓가락으로 만든 권총을 꺼냈다. 급하게 만드느라 조금 조악하긴 했지만, 방아쇠도 구현된 제법 권총다운 모양새였다.

딱.

방아쇠를 당기자 장전된 고무줄이 발사되어 티비 브라운관에 맞았다.

“우와!”

약간 약장수 같은데…….

아무렴 어떤가? 흥미를 끌었으면 대성공이다.

“어떻게 만들었어요?”

고무줄 총.

그나마 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들로 만드는 기초적인 장난감으로, 우리 문방구에서도 잠깐 유행했었다.

여기서 잠깐이란 비비탄 총을 사기 위해 용돈을 모았던 시즌을 이야기한다.

그 시절 아이들의 유행은 꽤 까다로운 조건을 만족해야지만 비로소 퍼져나갔다. 기껏해야 옆 동네, 아랫동네와의 교류가 전부. 지금처럼 인터넷으로 다양한 장난감을 접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마음만 독하게 먹으면 살 수 있는 가격대, 그리고 선구자 몇몇이 유행을 일으키면 취향이 아니더라도 따라야 한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필요했다.

왕따나 따돌림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던 시절이다. 술래잡기나 경찰과 도둑을 해도 기어코 깍두기라는 말로 무리에 끼워 넣어야 직성이 풀리던 아이들이 비싼 비비탄 총을 아직 사지 못했다 해서 그냥 둘 리가 없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나온 물건이 바로 이 고무줄 총이다.

멀쩡한 나무젓가락을 못 쓰게 한 대가로 부모님께 등짝 맞을 각오만 되어 있다면 누구나 쉽게 도전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 단순한 장난감이 또 디테일을 하나하나 살리기 위해서는 꽤 복잡한 구조가 되었다. 연발 사격, 어설픈 조준경도 달아 정확도를 높이기까지. 마치 블록처럼 젓가락 개수만 어느 정도 확보된다면 무궁무진한 개조가 가능했다.

그렇게 고무줄 총은 용돈을 모아 혹은 부모님과의 협상을 통해 비비탄 총을 사기 전까지 훌륭한 대체재가 되었다.

나는 이 고무줄 총으로 녀석들의 마음을 홀린 다음 비비탄 총을 살 시간을 벌 작정이었다.

그리고 작전은 의외로 쉽게 먹혀들었다.

예상외로 가장 관심을 보인 건 상진이였다. 출장을 다녀와 뒤늦게 킨오파의 매력에 빠져 있었던 터라 심드렁할 줄 알았는데 벌써 고무줄을 묶어 틀을 만들기 시작했다. 머리를 써서 무언가 만든다는 부분이 흥미를 자극한 듯했다.

“자, 이 방아쇠만 비슷하게 만들면 나머지는 외형이야.”

오늘 이왕 약장수가 되기로 한 몸이다.

미술 선생님처럼 세 명 사이를 오가며, 틀어놓은 비디오 두 편이 끝날 시간이 흐른 뒤 모두의 손에는 권총이 하나씩 들려 있었다.

“이제 쏘러 가자.”

“따로 과녁도 있어요?”

딱.

“악!”

나는 철진이의 손에 고무줄 총을 발사했다. 그리고 원래 안경을 쓰는 상진이를 제외한 두 사람에게 안전 고글을 던지고 밖으로 내달렸다.

사냥을 시작할 시간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