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추억이 찾아준 또 다른 행복
일사천리.
한 번에 쏟아져 천 리를 간다는 말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최 사장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젠 직원 한 명도 쓸 수 없는 낡은 공장이었다. 동년배들끼리 대폿집에 앉아 소주 댓 병 마시고 나오는 왕년의 이야기를 하자면, 한 달에 나가는 직원들 월급만 수천에 남부럽지 않은 사장님 소리를 듣고 다녔다.
하지만 과거의 영광은 너무도 짧았다. 원청업체의 발주가 끊기면서 공장은 급속도로 기울었다.
가족 같던 직원들을 하나둘 내보내고 인제 그만 포기하라는 주변의 만류에도 모아둔 돈을 야금야금 까먹어가며 공장을 지킨 것은 평생 기름밥을 먹다 죽을 팔자를 입버릇처럼 달고 다녔던 탓이었다.
“이쪽 라인도 나쁘지 않네요. 사장님이 관리를 잘해주셔서 금방 가동이 되겠습니다.”
“그, 그럼! 내가 때 안 놓치고 다 닦아놨다니까!”
삼정유통에서 나온 그 햇병아리 같던 여직원의 간절한 제안에 홀린 듯 사인을 해준 바로 그날 저녁. 갑자기 사람이 가득 찬 버스와 화물트럭이 공장 앞에 서더니 청소부터 예전 생산 라인의 정비까지 모두 도맡아 해주고 있었다.
필요한 설비를 모두 지원하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깟 아이스크림이 뭐라고 원청업체에서 라이센스까지 양도받아오는 바람에 새벽부터 이런저런 서류에 사인하느라 반나절을 꼬박 의자에 앉아 있다 점심때가 되어서야 겨우 공장에 나와볼 수 있었다.
“그런데 어딜 납품하려고 이렇게까지 하는 거요?”
나이는 딸뻘 정도로 한참 어리지만, 전처럼 퉁명스럽게 대할 위치가 아닌지라 다소 공손해진 어투로 최 사장이 물었다.
“저희도 지시만 받아서 잘 몰라요. 이 아이스크림을 꼭 만들어오라고 했거든요.”
“허 참, 그래, 몇 개나 필요하신데?”
“20개요! 우선 20개만 있으면 돼요!”
“그러니까 지금 그쪽, 아니, 신…….”
“신소영 대리입니다.”
“그래, 신소영 대리님 말은 고작 이 아이스크림 20개를 만들려고 지금 공장을 새로 짓다시피 한단 말이요?”
계약금 명목으로 이미 차고 넘치는 금액을 받기로 약속한 터라 얼마를 찍어내든 관계는 없었다. 하지만 20개라니? 생산단가, 마진, 인건비에 자재비도 깡그리 무시된 어이없는 숫자였다.
“한 판에 들어가는 개수만 해도 백 개가 넘는데 금액 차이도 안 나고 차라리 많이 찍어서 나눠 먹으시든가. 이거 만들어서 20개만 가져가고 다 버릴 건가?”
“아! 그럴까요?”
신소영 대리는 애매한 일에 판단을 하려 하지 않았다. 이번 업무의 특성상 직급보다 과한 권한을 받았기에 잘못했다간 감당키 어려운 사고를 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해야 하나 하는 일은 해야 하고 해도 되나 하는 일은 하지 마라.’
모든 직장인에게 통용되는 교과서 같은 말이다.
이 일은 명백히 해도 되나에 속했다. 최 사장의 말대로 찍어내기만 하면 되는데 그대로 버려두긴 투자한 인력과 자금이 아까웠다. 하지만 굳이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할 필요는 없었다.
고민은 일개 대리인 자신의 몫이 아니었다. 신소영 대리는 폰을 꺼내 확답을 내려줄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과장님!”
(바쁜데 또 왜?)
“여기 공장 사장님이 이왕 만드는 거 많이 만들어서 그냥 나눠 먹는 게 어떠냐고 하시는데 어떻게 할까요? 조금 아깝기도 하고요…….”
(그쪽도야?)
“네?”
(아니다. 그래, 몇 개나 만들 수 있는데?)
“사장님! 얼마나 만들 수 있어요?”
“원료 오는 대로 찍어내면 만 개, 이만 개도 가능하지!”
“라시는데요?”
(이만 개를 누가 다 먹어! 정신 안 차릴래!)
* * *
직장인들이 퇴근 다음으로 가장 기다리는 순간은 단연 점심시간이다. 지루한, 혹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정에 숨통을 틔워줄 소중한 한 시간은 오전 업무를 버티게 해주는 희망이었다.
그런데 오늘 삼정그룹 본사의 점심시간은 조금 더 특별했다.
“어? 디저트로 아이스크림이 나오네? 아직 겨울인데 센스 없긴.”
“잠깐! 이거!”
어제 과하게 달린 회식으로 아직 속이 니글거려 밥을 푸는 둥 마는 둥 하던 중년의 남자가 눈을 번쩍 뜨며 소리쳤다.
“차장님, 뭔데 그래요? 저는 처음 보는 건데…….”
“빠빠우다! 빠빠우야!”
“빠빠우요? 유명한 거예요?”
아무리 봐도 조잡하게 생긴 정체 모를 아이스크림으로 호들갑을 떠는 차장님이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젊은 사원이 다시 물었지만, 차장은 사진을 찍어 인터넷에 올리느라 듣지 못했다.
토도도독.
흥분해서 연이어 터지는 오타를 수정하는 시간이 더 길었으나 기어코 사진을 첨부한 글 하나가 커뮤니티 게시판에 올라갔다.
「미친 우리 회사 구내식당에 빠빠우 나왔음.
지금 눈물 흘리며 먹는 중. 이게 진짜 얼마 만이냐? 다들 사진 찍고 난리 남. ㅋㅋ
초딩 때 학교 앞에서 먹던 건데 이걸 다시 먹게 될 줄이야!
플라스틱 숟가락도 그때 그대로임!」
└진짜 빠빠우네.
└이걸 회사 구내식당에서 줬다고?
└역시 대기업인가? 이거 단종됐을 텐데 어디서 구한 거지? ㅋㅋㅋ
└빠빠우가 뭔데?
그리고 그 모습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시선이 있었다.
“이게 뭔데 저 난리들이고?”
“빠빠우라는 음료로 20년 전에 단종된 제품입니다. 이번에 회장님이 삼정유통에 발주를 맡기신 제품 중 하나라고 합니다. 아마 이번에 시제품으로 나온 것 같습니다.”
“이기 문방구가 구해달라 칸 기라고?”
그저 눈대중으로 훑어보고 던져준 발주서였다. 그 세세한 항목까지 알 리가 없었던 조동욱 회장은 아이스크림을 이리저리 돌려보느라 밥이 식는 것도 잊은 듯했다.
찌익.
얇은 비닐로 된 뚜껑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니 꽝꽝 언 오렌지색 얼음이 나왔다. 그 얼음을 손톱만 한 숟가락을 들고 몇 번 긁으니 눈곱만큼 먹을 양이 생겼다. 입에 넣으니 싸구려 단맛이 미세하게 올라오다 사라졌다. 양이 지극히 적었던 탓이다.
“이기 감질나가 먹겠나 어데!”
숟가락을 빼 들고 다시 얼음을 박박 긁기를 반복하다 드디어 급한 성질머리가 견디지 못하고 터져 나왔다.
“하하. 그래도 다들 어릴 때 추억이 생각났는지 사진을 찍고 난립니다.”
조동욱 회장은 박 상무의 대답에 아이스크림을 든 채 다시 문을 빼꼼히 열고 밖을 둘러봤다. 구내식당에는 박 상무의 말대로 밥을 다 먹은 사원들이 일어나지 않고 작은 수저를 부지런히 놀리고 있었다. 사진을 찍고, 바로 먹기 아까웠는지 소중하게 품고 나가는 사원도 있었다.
“박 상무야. 이거 지금 유통아들이 담당하고 있다 켔제?”
“그렇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저도 따로 알아보질 않았습니다. 지금 보고를 올리라 전할까요?”
“어데. 계열사 통해서 이거 납품할 곳 좀 알아봐라 캐라. 그래도 명색에 유통업인데 한 다리 건너서라도 뭘 팔아야 안 되긋나?”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쯧. 아이다. 아직 아무 말 하지 말고 있어봐라. 이거 하자고 들고 오는 아가 있는지 어디 한번 보자.”
돈 되는 일은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는 조동욱 회장의 눈에 이렇게 확실한 반응이 있는 제품을 그냥 썩히는 꼴은 용납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다 늙은 자기 눈에도 보이는 돈벌이를 놓친 임원들이 있다면 호되게 꾸지람을 할 작정이었다.
* * *
“그럼, 저희는 가보겠습니다. 나중에 연락드리면 스무 개는 따로 꼭 신경 써서 보내주세요.”
“아, 당연하지! 내 직접 다 확인하고 보낼 테니까 걱정하지 말게.”
최 사장은 하루가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르게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기술자들이 잔뜩 달라붙어 기계를 정비했지만 결국 자식처럼 돌봤던 설비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자신이었다.
하나하나 지시해야 직성이 풀렸고 새로 설치된 자동화 설비에 컴퓨터 설정을 배우느라 밤잠을 설쳤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첫 아이스크림이 냉동차에 실려 떠났다.
늦은 일과가 그렇게 끝났음에도 최 사장은 홀로 공장을 지켰다.
“다시 움직이니 좋지?”
커다란 설비들을 하나하나 손으로 다독이며 공장을 거닐었다. 바닥에 쌓여 있던 먼지와 기름 얼룩들은 깨끗하게 지워지고 공장 내부도 멀끔하게 수리되었다.
사실 최 사장은 되지 않을 일이라 여겼었다.
이 낡은 공장을 깨끗하게 정비하고 음식을 다시 찍어낸다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없었다.
어디서 왔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 수백 명의 인력이 몰려와 눈 깜짝 한 사이에 공장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식품제조 관련 시설 등록과 법적 절차도 알아서 다 마무리해 주다 보니 질색하던 서류 작업도 사인 몇 번으로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그리고 드디어 기다리던 계약금이 입금되었다.
공장이 새것처럼 변한 것보다, 오랜만에 북적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기계를 돌린 것보다, 훨씬 더 기쁜 순간이었다.
최 사장은 서둘러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퇴근 시간, 막히는 도로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도착한 곳은 한 병원이었다.
“어휴, 돈이 어디 있다고 이 비싼 걸 다 사 왔어요.”
“아, 마누라가 좋아하는 건데 이깟 과일이야 매일 사 올 수도 있지!”
최 사장의 손에는 처음 보는 외국 과일이 가득 찬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아내가 평소 과일을 좋아했지만, 형편이 어려워 다른 환자들처럼 과일바구니를 사다 줄 생각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었다.
바구니는 아내가 잘 볼 수 있도록 침상 곁에 올려졌다. 쏟아질 듯 넘치게 담긴 과일 때문에 자세가 잘 나오지 않아 몇 번 쓰러진 바구니를 다시 세우는 그 작은 흔들림만으로 달콤한 향기가 병실을 가득 채웠다.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나 봐요?”
“마누라, 오늘 우리 공장에 오늘 큰 주문이 들어왔다니까! 이제 병실도 2인실, 아니, 특실로 옮기고 수술비 걱정하지 말고 몸조리만 잘하면 돼.”
“또 금방 들통날 허풍이에요?”
“이번엔 진짜라니까! 봐봐!”
최 사장은 통장을 펼쳐 아내의 눈앞에 가져다 댔다.
“어휴. 이 많은 돈이 대체…….”
그동안 마음고생을 시켜 아내가 아픈 것이라 스스로를 책망했었다.
공장이 제법 잘되던 시절에는 이럴 때일수록 아껴야 한다며 아내에게 빠듯한 생활비를 던져준 것이 전부였다. 공장은 주말도 없이 바삐 돌아갔고 남들 다 가는 여행이라곤 신혼여행 삼아 잠깐 다녀왔던 경주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마저도 공장일이 바쁘다며 아침 일찍 돌아왔었다.
남편이라는 이름으로 해주지 못한 섭섭한 일들은 그것 말고도 차고 넘쳤다.
아내의 수척한 몰골은 무심한 남편이 키운 마음의 병 때문이었으리라.
바깥일을 한다는 핑계로 공장에 틀어박혀 있는 동안 홀로 자식을 키워내고 병까지 얻은 아내에게 사과의 말을 꺼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그저 일이 잘 풀렸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 한마디가 그 구구절절한 사연을 대신했다.
“킁. 이거 꽃이 좀 싸구려라 그런가? 눈에 자꾸 꽃가루가 들어가네.”
궁색한 변명을 하고 밖으로 나온 최 사장은 흐르는 눈물을 닦느라 한동안 병실로 돌아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