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대리운전(1)
아이들은 변덕스럽다.
어떤 놀이는 한 달이고 일 년이고 유행이 이어지지만, 또 어떤 놀이는 일주일도 되지 않아 금세 질려 한다.
여기서 질려 한다 함은 지루해서 아무것도 하기 싫다라는 어른들의 사정이 아니었다.
더 재미있는 걸 찾았다는 뜻이었다.
「상진: 이거 보세요. 너튜브 링크(제목: 탄피까지 나오는 고무줄총.)
철진: 탄피까지 나온다고?
지환: 개틀링도 있음. 너튜브 링크(제목: 모터로 분당 500발 발사 고무줄총.)
민호: 야 마개조 좀 그만해. ㅋㅋ」
시작은 철진이의 5연발 총이었다.
고무줄 총을 연발로 쏘는 방식은 의외로 쉽게 구현이 가능했다. 한 발씩 쏘는 총 두 개를 합치면 2연발, 세 개를 합치면 3연발이다.
하지만 철진이는 어디서 배워온 하이테크놀로지인지 같은 방아쇠로 5연발을 쏘는 고무줄 총을 완성해 온 것이다.
이날을 기점으로 더 이상 총싸움은 하지 않았다. 총싸움이 질려서가 아니라 다들 총을 쏴서 사람을 맞추는 재미보다 총 자체를 개조하는 재미에 푹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미니카는 어느 정도 기본 틀이 있는 상태에서 범퍼나 타이어를 바꾸는 수준이었다면 고무줄 총은 무궁무진한 개조가 가능했다.
젓가락만 덧붙이고 고무줄로 감아두면 두껍고 길게 연장이 가능했다.
상상력이 그대로 드러나는 각자의 고무줄 총은 처음 만들었던 조잡한 권총이 아니었다. SF영화에나 나올 법한 미래지향적인 모습으로 변한 덩어리들은 이제 총이라 부르기도 뭣한 크기와 디자인이었으니까 말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그저 비비탄 총이 오기 전까지 총싸움에 재미나 좀 붙여줄까 싶은 불순한 의도였으나 내 권총도 그 디테일이 사뭇 달라져 있었다.
부지런히 자르고 붙이길 반복했더니 어느덧 황야의 무법자에 나오는 콜튼의 디테일을 살리고 있었다. 회전하는 약실까지 구현해놓고 어떻게 연발을 쏠지 고민하는 와중에 탄피까지 나오는 너튜브 영상을 봐버렸으니 일거리가 또 늘어나 버렸다.
“김 과장, 또 이상한 거 하고 있지?”
“제가 또 뭘 이상한 걸 했다고 그러세요?”
“저번 딱지도 그렇고 폰으로 이상한 너튜브만 보잖아. 이번엔 뭔데 그래?”
“팀장님, 이거 사생활침해 아닙니까?”
나는 씨익 웃으며 폰을 감췄다.
“아니, 우리 사이에 사생활침해가 어디 있어!”
천성이 모난 구석 없는 사람이다.
같이 일한 지는 얼마 안 되었지만, 나이 차이도 그리 크지 않았고 술자리를 좋아하는 성격 탓에 반강제적으로 끌려다닌 회식으로 친해지지 않을려야 않을 수 없었다.
비공식 농땡이 타임을 즐기던 차에 팀장님은 모바일게임이 질렸는지 슬며시 내 옆으로 다가와 자리를 잡았다.
“요즘엔 뭐 하는데?”
“이거 만들고 있어요.”
나는 조금 전에 상진이에게 받았던 너튜브 영상을 틀어 팀장님께 보여드렸다.
“고무줄 총이네? 푸핫! 뭐 취미 생활도 없다더니 김 과장이 제일 재미있게 사는 것 같아.”
“동생들이랑 같이 하니까 또 재미있더라고요.”
“부럽네. 난 결혼하고 애까지 있으니까 뭐 나가서 모임 같은 건 안 나가게 되더라고. 친구들끼리 모이는 것도 힘들고 말이야.”
“저도 그래요. 어릴 때 친구들은 일 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니까요.”
“그렇지? 그렇게 만나도 이젠 다 자기들 사는 일 바쁘니까 뭐 애 크는 거 말고는 할 이야기도 없고 말이야. 나도 차라리 회식이 편해. 그나마 회사 욕이라도 같이 할 수 있으니까.”
직장을 다니는 모두가 비슷한 마음이다. 물론 나는 아직 결혼하지 않아서 자연스럽게 미혼 그룹에 속했지만, 나이는 기혼 그룹이라 양쪽 술자리에 고루 불려가는 처지다. 그렇게 모여 술이 들어가면 나오는 말은 비슷비슷했다. 바쁜 일상에 치여, 혹은 타지에 흩어진 바람에 옛 친구들과는 멀어지고 아쉬운 술자리는 직장동료들과 대신했다.
“그래서 오늘 껍데기집?”
“가시죠.”
왜 그 말이 안 나오시나 했다. 목요일 저녁. 직장인들에게 가장 술이 당길 시간이다. 다음 날은 금요일이라 혹시나 숙취가 생기더라도 하루만 견디면 되고 일주일 단위로 끊어지는 업무는 대략 마무리가 되는 날이다. 부담은 없고 술만 고픈 날. 퇴근 시간이 되면 여기저기 숨어 부장님과 팀장님을 팔아가며 집에 필사적으로 변명을 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곤 했다.
회삿돈으로 마시는 술은 나도 마다하지 않았다.
참, 그러고 보니 녀석들과는 술을 마신 적이 없다. 설날에 잔치한다고 막걸리를 마신 것도 마을 어르신들과 함께였지 따로 4명만 술을 마신 기억이 없었다.
한번 마셔야 하나?
돼지국밥집이 좋을까 아니면 서울에서 마셔야 하나 잠시 고민을 하다 이내 생각을 접었다.
다 큰 성인들이 같이 술 한잔하지 않은 게 오히려 이상하게 보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문방구에 놀러 온 동생들에게 굳이 술을 마시자 하려니 어딘가 어색했다. 어쩐지 학생들에게 술, 담배를 권하는 나쁜 선배가 된 것만 같다.
지금은 같이 미니카를 달리고 딱지를 치는 것만 해도 즐겁다. 술에 취하는 것보다 훨씬.
* * *
“회장님, 유통 쪽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주문하신 물건을 모두 구했다고 합니다.”
“그래? 허허. 소문대로고마. 빨리 구했네. 내 지금 간다 전하그라.”
“지금 말씀입니까? 직접 받으러 가시겠습니까?”
“카모. 상벌은 확실하게 해야지.”
직원을 시키면 간단하게 끝날 일에 이번에도 직접 간다 하시니 만류해야 함이 옳았으나 박 상무는 조동욱 회장의 의중을 파악해 옷걸이에 걸린 외투를 대신 들고 나섰다.
“그런데 유통에서 끌어다 쓴 돈이 단위가 너무 큽니다. 단종된 제품의 라이센스 구입과 직접 생산까지 진행해서 새로 지어진 생산라인만 다섯 개입니다.”
“와? 그라믄 안 되나?”
“당장에 수익성이 있는 제품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이스크림은 어찌어찌 구내식당에 나눠주고 인기몰이를 했다. 하지만 다른 제품들까지 그러리란 보장은 아무도 하지 못했다. 앞뒤 없이 웃돈을 주고 찍어낸 물품이 재고로 쌓인다면 난감해할 사람이 여럿 있었다.
“문방구 글마가 얼마나 벌어다 준 거 같드노?”
“…….”
박 상무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삼정자동차의 판매 실적과 홍보 효과, 그리고 사우디 뉴시티 사업까지 성사된다면 천문학적인 금액을 벌게 된다. 이 모든 게 문방구 주인 덕분이라고 하기엔 지나친 확대해석이지만 분명한 건 두 전무를 변화시킨 장본인이라는 점이었다.
“욕심이라도 있으면 돈으로 꼬시낄 텐데 다 늙은 노인네한테 이 고생을 시키니 기가 찬 기라.”
조동욱 회장은 혀를 한 번 쯧 차더니 차를 몰고 삼정유통 본사로 향했다.
회장의 차가 건물 입구에 나타난 시각은 물건이 모두 구해졌다는 보고를 올린 지 30분 만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그래. 노망난 늙은이 억지 들어주느라 욕봤다.”
“아닙니다.”
“물건은 이기 다가?”
“네. 양이 조금 많습니다. 아이스박스에 들어간 것들도 있습니다.”
눈대중으로만 봐도 회장의 세단에 다 실리지 않을 양이었다.
“주소를 주시면 저희가 지금 트럭으로 바로 보내겠습니다.”
“어데. 트럭 있드나?”
“네?”
“오늘 하루 내가 좀 쓰자. 이거 다 거기 실어도고.”
‘맙소사. 설마 회장님이 직접 트럭을 몰고 가신단 말씀이신가?’
회장님의 지시사항이니 일단 트럭을 몰고 와 짐은 싣고 있었으나 삼정유통의 대표이사는 얼굴이 점점 흙빛이 되어 갔다.
회장님이 손수 짐을 가지러 오셨는데 트럭을 태워 보내드렸다는 이야기가 이사진에 퍼지면 뒷수습이 감당키 어려울 것임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저희가 책임지고 전달하겠습니다.”
“내 허튼소리 하는 거 아이다. 키만 도고. 이 트럭 오늘 필요하드나?”
“아, 아닙니다.”
회장의 손짓에 눈치 없는 직원이 키까지 건네주자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니 욕봤다.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있었고마. 그 자리에 사람 잘 찾아가 앉았네.”
선언이다. 앞으로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한 삼정유통의 대표이사는 그 자리를 보전한다는 선언. 보는 눈과 듣는 귀가 많은 자리에서 삼정그룹 회장이 직접 내뱉은 말은 무게가 남달랐다.
말이 좋아 대표이사지 결국 계약직이다. 구실을 갖다 붙여 당장 내일이라도 옷을 벗으라는 전화가 오면 명패를 챙겨 나와야 한다.
하지만 회장님이 직접 이야기를 꺼내셨으니 없다시피 한 매출을 트집 잡아 자리를 끌어내리려는 사람은 한동안 나오지 않을 터였다.
말도 안 되는 물건들을 구하느라 몇 가닥 없는 머리를 쥐어뜯었던 지난날의 보상치고는 너무나 후했다.
“실망하지 않으시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뻣뻣했던 허리가 90도로 꺾였다.
“오야. 간다.”
작은 1톤 트럭이 털털거리는 엔진음을 내며 건물을 빠져나가도록 꺾인 허리는 펴질 줄 몰랐다.
“자.”
그렇게 한참 만에 고개를 든 대표이사는 트럭 키를 건넸던 직원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오늘 전 직원 다 회식이야. 이 카드로 지금 빨리 빌릴 수 있는 고깃집 알아봐. 2차, 3차도 이걸로 다 결제해!”
들뜬 기분에 취해 자신이 카드를 쥐여준 사람이 삼정그룹 회장에게 직접 트럭을 몰고 가시라 키를 건넨 전적이 있는 직원임을 잠시 잊은 대표이사는 그날 저녁 천만 원 가까이 찍힌 고급 참치전문점 영수증을 문자로 받았다.
* * *
삐리리리.
조동욱 회장은 급한 마음에 스피커폰으로 통화를 걸었다. 이미 도심을 빠져나와 달리는 와중에 더듬더듬 문자를 할 여유가 없었다.
(여보세요?)
“어! 문방구, 내다! 어데고?”
스피커로 반가운 목소리가 들리자 절로 목소리가 커졌다.
(저는 지금 회사 앞에서 술 한잔하고 있습니다.)
“회사 앞? 거가 어덴데?”
(여기가 망우역 앞 껍데기집입니다.)
“어차피 가는 길이고마. 데리로 가꾸마.”
(네? 데리러 오신다고요?)
“아, 니 발주서 물건들 다 구해가 지금 가지고 가는 길이다.”
(아닙니다. 제가 가지러 가겠습니다. 직접 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차 출발했다. 도착하면 전화한다.”
할 말을 마친 조동욱 회장은 전화를 끊었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이번에는 꼭 따고 말 기라.’
지난번 방문 때도 그 많은 동전을 모조리 털렸었다.
처음엔 얕은 심리전에 말려서 진 것이라 판단했었다. 그래서 두 번째 방문에는 어깨가 뻐근할 정도로 많은 동전을 가져갔었다.
하지만 그것도 정답이 아니었다.
문제는 초조함이었다.
문방구 주인이 오면 판을 접고 일어나 나가야 한다는 그 초조함 때문에 다잡은 승기를 놓친 것이다.
철저하게 분석하고 확실한 조건이 아니면 손을 뻗지 않는 조동욱 회장의 신중함이 시골의 한 마을회관에 들어설 때면 말끔히 사라지고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는 승부사로 바뀌었다.
트럭에 실린 짐을 얼른 넘겨주고 화투판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 문방구 주인을 데려가야 한다.
직접 트럭을 몰고 나온 것도 모자라 대리운전기사까지 자처하게 된 기구한 처지는 안중에도 없었다. 십 분이라도 일찍 마을회관으로 들어가는 것만이 지금 조동욱 회장의 유일한 목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