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50화 (50/151)

#50. 대리운전(2)

“누군데 그래?”

“아, 아는 동생 아버지인데 오늘 저희 가게에 물건 좀 전해 주신다고 하셔서요. 지금 데리러 온다고 하시네요.”

누구냐는 질문에 술기운이 올라 삼정그룹 회장님이라 답할 뻔했다. 말해줘도 믿지 않겠지만…….

“아! 김 과장, 문방구 한다고 그랬지, 참!”

“네, 장사는 거의 안 되지만요.”

“어휴. 피곤한데 집에 가서 또 장사 준비를 한다고? 난 몸 축날까 봐 그렇게 못 하겠어.”

회사에는 비밀이 없다. 문방구 영업을 위해 사업자등록증을 등록하면서 인사관리팀에 따로 처리해야 하거나 내규상 문제가 될 만한 사항이 있는지 확인했는데, 그 전에 이미 팀장님과 주변 동료들에게 말을 해놓은 상태였다.

직속 상관은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하는 내용이었다. 낡은 시골 문방구를 운영하는 데 보고라인을 어겨가며 비밀로 할 이유는 조금도 없었으니까.

회사의 분위기는 이전과 너무나 달랐다. 애초에 뒷말이 나올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전 직장이었다면 ‘투잡을 뛰니 돈을 많이 벌어서 좋겠네.’ 따위의 농담을 가장한 싸구려 비아냥을 숨 쉬듯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선 할아버지의 옛 문방구를 이어받았다는 말에 매출이 걱정이면 종종 들러주겠다는 응원이 마치 스몰토크의 레퍼토리처럼 굳어져 버렸다.

“아니, 그런데 이 시간이면 식사는 안 하신 거 아니야?”

“그렇겠네요. 시장하실 텐데.”

배가 적당히 불러 어중간하게 남아버린 돼지껍데기가 불판 한구석에서 딱딱하게 굳어가고 있다. 내 배가 어느 정도 차고 나니 끼니를 걸렀을지도 모를 두 형제의 아버지가 걱정되었다.

“고기 좀 구워서 식사하고 가시라 그래!”

“아닙니다. 따로 가서 먹죠, 뭐.”

“아니, 그래도!”

술기운이 적당히 올라 자꾸만 불편한 자리를 만들려는 팀장님을 떼놓고 나오는데 제법 애를 먹었다.

아버지뻘 되시는 분의 식사를 챙겨드리려는 의도는 좋았으나 생판 처음 보는 남의 술자리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밥을 먹고 갈 정도로 얼굴이 두꺼운 분이 아니셨다.

그렇게 도망치듯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와 대로변에 섰다.

삐리리리.

“여보세요?”

(문방구, 어데고? 내 여 도착했다.)

“여기 역 앞 큰길입니다. 적당한 곳에 차를 세우시면 제가…….”

(저 비네!)

뚝.

찾았다는 말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

하지만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조동욱 회장의 차는 보이지 않았다. 누굴 나로 잘못 보신 걸까?

끼익.

그 걱정은 눈앞에 낡은 트럭 한 대가 서면서 다른 의미의 걱정으로 변했다.

“여 타라!”

“아니, 회장님. 이걸 직접 몰고 오셨습니까?”

예전에 문방구에 타고 오신 차도 물론 고급이긴 했지만, 삼정그룹의 회장이 탄다고 하기엔 상당히 검소한 차였다. 삼정자동차의 가장 상위 모델로 다른 브랜드에 한참 인지도가 모자라는, 아무리 풀옵션으로 때려 넣어도 사천이 안 되는 가성비 중형 세단이었다.

차라리 철진이와 상진이가 타는 차가 오히려 몇 배는 더 비싼 차였으니 그 당시에도 인지부조화가 왔었는데, 이젠 아예 어디 영업소에서나 구를 법한 트럭을 타고 계셨다.

“와? 모시로 온다 캐놓고 트럭 타고 와서 실망했드나?”

“하하… 아닙니다.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하죠.”

“잠깐만!”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차에 타려는 순간, 멀리서 팀장님이 소리를 지르며 전력 질주로 달려오셨다.

“팀장님?”

“헉헉. 이거, 삼겹살 포장한 건데 가서 드시라고.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이소.”

팀장님의 인사에 운전석에서 회장님이 민망하신 듯 살짝 고개를 숙이셨다.

“어디서 뵌 분 같은데…….”

“허허. 그런 말 마이 듣습니더.”

“이거 포장용으로 가게에서 따로 구운 거니까 김 과장도 가서 같이 먹어. 그럼 간다!”

“회사 사람이가?”

크게 손을 흔들더니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다시 껍데기집으로 돌아가는 팀장을 보며 회장님이 물었다.

“네. 안 줘도 되는데.”

“그래도 지 사람 챙기는 거 보이 아가 됐꼬마.”

“그런데 철진이나 상진이 시키시지 직접 오셨습니까?”

“그기…….”

“고스톱 치시려고요?”

“니 알고 있었나?”

모를 리가 있나? 두 형제의 아버지가 마을회관에서 윗집 할머니께 탈탈 털렸다는 이야기는 이미 동네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하길 좋아하는 어르신들이다. 하물며 외지인이 마을회관에서 할머니들께 고스톱으로 대패를 했으니 이보다 더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또 있을까?

이미 회장님은 우리 마을에서 나름 유명 인사로 통했다.

“윗집 할머니 잘 치시죠? 저희 할아버지도 곧잘 잃으셨거든요.”

“맞제? 그 할마시 보통이 아닌기라. 패를 그냥 다 읽는다 카이.”

“그래도 저희 할아버지는 나중에 꽤 승률이 높으셨어요. 윗집 할머니가 피해 다닐 정도셨으니까요.”

“뭐 별다른 비법이 있드나?”

“저도 잘 기억은 안 나는데, ‘눈’이 아니라 ‘귀’라고 하셨어요.”

“귀?”

“눈을 보면 들키니까 귀로 들어야 한다던데요? 그런데 저도 화투는 잘 몰라서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귀라…….”

할아버지께서도 아이들의 등하교 시간에 맞춰 자리만 지키고 있으면 되기에 티비 보는 것도 지겨우실 때면 마을회관이나 당산나무 아래 펼쳐둔 평상에서 곧잘 화투를 치셨다.

내색을 잘 안 하는 성격이시라 얼마나 많이 패하셨는지는 모르지만 이기기 시작한 날은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어찌나 기분이 좋으셨던지 머리를 자르는 날도 아닌데 돈가스를 먹으러 갔으니 말이다. 돈가스를 써느라 여념이 없던 와중에도 할아버지답지않게 자랑을 늘어놓으시던 모습이 바로 어젯밤처럼 떠올라 조금 기분이 이상했다.

“회장님, 파란불.”

“어? 어.”

급하게 밟은 엑셀로 트럭이 꿀렁이며 힘겹게 출발했다. 하지만 신호등에 설 때마다 ‘귀로 듣는다라…….’는 혼잣말을 하는 회장님을 몇 번이나 다그쳐야 했다.

* * *

“물건 정리는 저 혼자 하면 되니까 먼저 들어가 보세요.”

“그라까?”

조동욱 회장은 듣던 중 반가운 소리에 곧장 가방을 챙겨 차에서 내렸다. 필요한 물건을 직접 가져온 것도 모자라 술을 마신 자신을 집까지 데려다준 목적을 잘 알고 있던 민호는 조동욱 회장이 가장 듣고 싶은 말을 들려주었다.

“참, 끝나면 들르세요. 삼겹살 데워놓을게요.”

“어데! 내 마을회관 들리따가 바로 갈 끼다. 닌 자라.”

고심 끝에 패배의 원인을 찾았는데 그 원인을 또다시 안고 게임을 할 순 없었다. 손사래를 치며 한사코 가지 않을 것이니 들어가 자라 민호에게 당부하곤 마을회관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오늘은 따야 한데이. 내사마 물먹는 건 두 번이 끝인기라!’

체면이라는 게 있었다.

마을 노인들은 이 작은 시골 마을에 삼정그룹의 회장인 자신이 온 것을 꿈에도 모르는 눈치였다.

수행원을 줄줄이 데려온 것도 아니고 홀로 이런 외딴 마을에 나타날 위인이라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처음에는 그 홀가분함이 좋았다.

긴장한 얼굴로 자신을 마주하는 직원들의 부담스러움도, 사업상 어쩔 수 없이 만나는 인사들과 나눠야 하는 가식적인 대화들도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멀쩡한 슈퍼 하나 없는 이 시골 마을에서 자신은 그저 가끔 문방구에 들르는 중년 아저씨,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이 존댓말을 써야 할 노인들이 반기는 마을회관은 오랜만에 느껴보는 편안한 장소였다.

하지만 화투판에서 일어나는 일은 별개였다.

전패.

확률적으로도 말이 안 되는 수치다. 네 명이 화투를 치면 광 파는 사람을 빼고도 계산상으로 33%의 승률이 나온다. 이 승률을 보장한 상태로 얼마나 크게 따고 적게 잃느냐로 그날 성과가 나와야 하는데 조동욱 회장은 그 한 판을 이기는 것도 매번 실패하고 있었다.

더 이상의 패배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크게 숨을 들이쉰 조동욱 회장이 결의에 찬 표정으로 마을회관의 문을 열자 뜨끈한 공기가 열린 문의 압력으로 온몸에 확 들이쳤다.

“여 고스톱 칠 자리 있는교?”

“하이고. 오랜만에 왔구먼.”

인자한 노인의 반김이었으나 조동욱 회장의 눈에 비친 모습은 간교한 뱀. 혹은 먹이를 노리는 야수였다.

그렇게 세 번째 결전이 시작되었다.

“오늘은 새 동전 안 꺼내 놓을 건가배?”

“딸 낀데 말라고요. 고마 패나 돌리소.”

도발에 가볍게 응수한 뒤 화투패를 잡은 조동욱 회장은 조심스럽게 패를 뒤집어 품으로 가져왔다.

‘똥쌍피가 하나, 비광 하나, 고도리 둘.’

썩 나쁘지 않은 패였다.

굶지만 않는다면 무난하게 광박 피박을 면하고 고도리 비상까지 걸 수도 있었다.

‘문제는 저 할마시가 내 손에 고도리가 있는 걸 아느냐인데…….’

생각 없이 바닥에 뿌려 놓은 패들을 주워 먹다간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모양새로 패하고 만다.

짝.

“아이고, 첫 뻑이네. 백 원슥!”

첫 패부터 단풍 세 개가 바닥에 보기 좋게 나란히 깔렸다.

‘들고 있나? 어째 표정이 저래 여유롭노?’

만약 본인이 단풍을 들고 있다면 큰 낭패였다. 본인이 싼 패를 먹으면 피가 두 개씩 빠지니 피박을 면하기 어려울 터였다. 게다가 그 와중에 피를 먹지 않고 버티면 고도리를 노리는 전략이 금세 들통날 수 있었다.

‘손에 이 좋은 패를 쥐고도 판이 흔들리뿌네.’

허장성세인지 아니면 정말 풍을 들고 있는지 도무지 판단되질 않았다. 곁눈질로 봐도 그저 사람 좋은 웃음만 짓고 있으니 정작 마음이 급해지는 쪽은 조동욱 회장이었다.

‘눈이 아니라 귀…….’

밑져야 본전이었다. 문방구 주인의 조언대로 조동욱 회장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톡톡톡.

미세하지만 일정한 간격으로 들리는 소리가 그제야 느껴졌다.

‘손톱으로 손에 쥔 패를 두들기는 소리다. 초초한기라! 할마시는 지금 풍이 읎다!’

짝!

일말의 불안함이 사라지자 거칠 게 없었다.

화투패가 깨질 듯 힘차게 내려친 조동욱 회장은 번번이 뒷패까지 깔끔하게 가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고도리가 뒤집힌 패에 나오면서 5점짜리 깔끔한 승기를 잡게 되었다.

“시상에 운 좋은 사람은 못 이긴다더니 벌써 난 겨?”

“원고.”

“뭐여? 간다고라?”

아직 바닥에 풍이 그대로 있었다. 만약 그 풍을 조동욱 회장이 아닌 다른 사람이 먹게 된다면 독박의 위기다.

아직 세 바퀴밖에 돌지 않은 게임에 뒤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기에 이성적인 판단이라면 스톱을 외치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수십 판 만에 귀한 첫 승기를 잡았음에도 조동욱 회장은 고를 외쳤다.

‘이대로 흐름만 타믄 된다. 이 할마시들 바닥에 깔린 패 중에 묵을 게 읎다. 그라이 저래 불안한 소리를 내는 기라.’

그간 모진 수모(?)를 당하고 고작 5점짜리 승리를 취하기엔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다. 물론 승기를 잡았다 확신할 순 없었다.

뒤집은 패에서 단풍이 나올 확률은 3분의 1. 승부수를 띄우기에 그리 높은 확률이 아님은 분명했다.

말 그대로 진짜 도박 수가 되어버린 것이다.

독박을 쓰느냐? 아니면 최소 포고 이상 되는 큰 판을 쓸어 담느냐?

모든 것을 얻을 수도, 잃을 수도 있는 최후의 한 판이 지금 막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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