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51화 (51/151)

#51. 서바이벌(1)

이제 각자 손에는 두 장의 패만 남았다. 그리고 아직 단풍은 나오지 않았다.

툭.

보조를 맞춰주던 할머니가 의도적으로 쌍피 하나를 버렸다.

모 아니면 도.

어차피 더 크게 날 점수라면 윗집 할머니에게 피를 양보하고 독박을 노려보겠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그 전략은 금방 수포가 되었다. 상대방이 쌍피를 먹을 패를 가지고 있어야만 통하는 작전이었다.

윗집 할머니 역시 먹을 게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아, 화투 치는 사람 어데 갔노? 빨리 치소.”

두 장의 패를 쥐고 답지 않게 고민하는 모습에 조동욱 회장이 다그쳤다.

툭.

윗집 할머니가 한참 만에 던진 패는 국화 쌍피. 바닥에 국화는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든 피박만은 면해 보려 쌍피 두 장을 최후까지 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바닥에는 쌍피 두 장과 단풍 세 장이 깔렸다. 대형사고가 터진 셈이다.

승기를 확실하게 잡은 조동욱 회장이 드디어 포커페이스를 풀고 씨익 웃었다.

짝.

국화 쌍피는 조동욱 회장이 가져갔다. 그리고 쌓여 있던 패를 천천히 뒤집었다.

‘단풍이 아이다…….’

이미 쓰리고까지 간 마당이다. 지금 스톱을 해도 점수는 최소 백 단위. 이젠 확률을 논할 때가 아니었다.

스톱을 외치고 달콤한 승리를 쟁취할 순간. 하지만 스톱이라는 말은 쉽사리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저 할마시가 점수가 날라믄 단풍을 먹고 바닥에 쌍피까지 먹어야 한데이. 확률적으로도 희박한기라.’

어차피 단풍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손에 쥔 한 장의 패를 던지기 전까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조동욱 회장이 마지막 차례이기에 굶을 일은 없었다.

도박 수는 자신에게 유리하고 할머니들에게 불리했다.

“포고!”

“시상에 얼마나 크게 먹을라는 겨.”

“하! 10원짜리 판에 머 물끼 있다고 여서 멈추겠는 교.”

승기는 거의 손에 쥔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뒤패가 잘 붙어 피박을 면할까 걱정될 뿐이었다.

“후회는 언제 해도 늦는 거여.”

톡톡 하고 패를 때리던 소리가 멈췄다. 윗집 할머니의 굳은 얼굴이 펴지며 다시 눈빛이 살아났다.

‘뭐, 뭐꼬?’

윗집 할머니는 구태여 바닥에 패를 던져 짝 소리를 내지도 않았다.

그저 손에 들린 마지막 패를 무심한 듯 바닥에 툭 하고 던졌다.

단풍이다.

첫뻑을 했을 때부터 할머니는 계속 손에 단풍을 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걸 들고 있었으믄서 지금껏 안 내고 버틴기라 말인교!”

믿기지 않았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그 미묘하게 불안감을 내비치던 표정과 들릴 듯 말 듯 미세하게 패를 손톱으로 건드는 소리가 모두 이 순간을 위한 함정이었다니!

“내가 그냥 스톱했으면 우얄라고!”

“그짝은 절대 스톱을 할 수가 없제. 사람 욕심이 그리 쉽게 조절이 되믄 다 성불해 불지. 겨, 안 겨?”

“허허…….”

“자, 인자 똥쌍피만 먹으면 나제?”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

뒤집은 패는 여지없이 붉은 닭 머리가 그려진 똥광. 피박에서 단번에 3점짜리 점수가 나버렸다.

“딸 거라 동전 안 꺼낸다는 양반 어디 간 거여? 홀홀홀.”

포고에서 당한 역전, 독박이었다.

‘이 할마시들 손에 놀아난기란 말이가?’

어쩌면 처음부터 설계한 판일지도 몰랐다.

자신의 손에 꽤 좋은 패가 있음을 알고 큰 점수를 유도해 눈을 멀게 한 것이다. 옆에서 존재감 없이 앉아 있던 다른 할머니 역시 키 메이커로서 역할을 충실히 해줬다.

일장춘몽.

잠시 꿈을 꾼 것일까?

조동욱 회장의 앞에는 몇 겹으로 나열된 패들이 가득했다. 점수로 치면 족히 수백 점을 넘을 무수히 많은 훈장은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저 잠시 크게 이긴 꿈을 꾼 것이리라.

“패 돌리소…….”

이제 막 첫 번째 판이 끝났을 뿐이다. 기회는 아직 많았다.

* * *

조동욱 회장님이 직접 데리러 오신다는 연락을 받고서 너무 놀라 술기운이 다 날아가 버렸다.

같이 낡은 트럭을 타고 오는 시간이 불편하고 어색할 줄 알았으나 그래도 얼굴을 몇 번 보고 같이 밥까지 먹은 사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편하게 왔다. 이럴 때 보면 삼정그룹의 회장이 아니라 그저 친구의 아버지처럼 느껴진다.

참,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나는 누렁이에게 밥을 주고 얼른 트럭으로 돌아왔다. 짐칸에는 잘 포장된 박스들 속에 온갖 장난감과 먹거리가 가득했다.

사실 별다른 기대는 하지 않았다.

문방구에서 팔던 물건들은 단종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 인터넷을 찾아봐도 ‘이거 요즘 안 보이던데?’라는 추측성 댓글만 가득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이미지와 이름만 적었을 뿐인데 이렇게 하나도 빠짐없이 구해주시다니. 역시 삼정그룹이다.

발주서를 넣으면 이렇게 바로 물건이 도착하니 앞으로도 재고로 걱정할 일은 없을 것 같다.

지난 설날에 팔렸던 장난감들과 우리가 부지런히 샀던 미니카 부품들, 딱지, 불량식품, 그리고 낡아서 도저히 돈을 주고 팔지 못할 물건들도 다시 빼곡하게 쌓을 수 있었다.

그중에서 목이 빠져라 기다리게 한 녀석은 바로 비비탄 총이다.

옛날 모습 그대로 출시되었으면 좋으련만 법적인 문제로 컬러파츠가 추가되었고 파괴력도 훨씬 줄어들었지만, 어찌 되었건 나무젓가락으로 만든 고무줄 총보다 훨씬 압도적인 성능을 낼 것이 분명했다.

케톡방에서도 저번 주부터 가지고 싶던 비비탄 총 모델을 각자 링크로 띄우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결과만 먼저 말하자면 모두 헛수고였다.

우선 법적으로 비비탄 총에는 모두 탄속제한장치가 의무적으로 부착되었다. 파괴력은 똑같다는 뜻이었다.

다른 나라에 비해 턱없이 약한 성능이었으나 0.2J을 넘어서는 성능은 불법으로 명시되어 있었다. 옛날처럼 실린더에 물 묻힌 휴지를 넣거나 스프링을 늘리는 개조는 시작해 보기도 전에 차단되었다.

이제 남은 건 얼마나 정확도가 높으냐로 갈리는데 이 부분 역시 각종 동호회에 교과서적인 정보가 나와 있었다.

김이 빠지는 건 사실이다. 어떤 총이 더 세고 정확도가 높은지 이미 답이 있었으니까.

라고 쉽게 생각할 뻔했다.

사나이의 로망은 그리 쉽게 단정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당장에 나조차도 래밍턴에 대한 환상으로 녀석들에게 고무줄 총부터 만들도록 유도했으니 말이다.

세 녀석 모두 그냥 아무거나 살게요라는 말을 꺼내지 않을 터였다. 뭐 알아서 사고 싶은 걸 사겠지.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내일이면 고무줄 총이 아니라 진짜 비비탄 총으로 총싸움을 해볼 수 있다.

그 사실만으로도 서른을 훌쩍 넘은 나이에 두근거려 잠이 잘 오지 않았다.

* * *

“형, 빨리!”

“안녕하세요!”

“안녕하시므니까.”

“어서 와.”

내가 퇴근하고 얼마 안 되어서 세 녀석이 나란히 문방구 안으로 들어왔다. 예상대로 세 녀석은 나에게 인사를 하는 건지 총에게 인사를 하는 건지 눈도 한 번 마주치지 않고 새로 들어온 비비탄 총들을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거의 한 달을 넘게 기다린 물건이다.

그동안 애가 타다 못해 열정이 식진 않을까 걱정할 정도로 오래 걸렸으니 빨리 사고 싶은 마음이 이해된다.

“이걸로 할까?”

“손잡이가 좀 불편하지 않아?”

“그런가?”

다들 처음부터 점찍어둔 총들이 있어 금방 선택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고민이 길었다.

“그냥 상자 열어서 봐. 어차피 스티커도 안 붙어 있으니까.”

내가 주문한 총들은 대부분 1, 2만 원대의 저렴한 권총들이다. 지금까지 착실하게 모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가격들로만 모아 놨다.

비비탄 총의 가격은 내가 알던 그 시절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단순하게 크기별로 금액이 올라가는 게 아니라 외관의 디테일이 가격을 결정했다.

막상 상자를 열어보고 상상했던 것보다 실물의 괴리감이 크다 보니 선택은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형은 뭐 샀어요?”

“난 래밍턴.”

“에이. 못생겼는데.”

“야, 나 때는 이거 부잣집 애들만 가질 수 있었어.”

“조준도 힘들어 보이므니다.”

“나중에 맞고 울지나 마라.”

이 녀석들은 한 번도 비비탄 총싸움을 해본 적이 없다.

한두 번이야 손으로 당겨 장전한다지만, 한번 전투가 일어나면 수백 발을 난사해야 하는 화력전으로 양상이 바뀐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팔이 저리고 손이 떨려 제대로 조준조차 할 수 없다.

그런 전투에서 펌프 액션 방식의 장전과 발사가 얼마나 편하고 유리한지 모르고 그저 외형에만 집중하는 모습이 가소로웠다.

그러나 조언을 해주진 않을 작정이다.

2:2 전투.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일지 모른다. 세 사람 중 두 명을 적으로 만나는데 적에게 유리한 정보를 줄 순 없지.

골목대장의 권위를 가장 크게 떨어뜨리는 일이 바로 패배였다. 아이들은 그저 나이가 많다고 해서 따르지 않는다. 같은 나이라 하더라도 자신보다 뭐든 잘하는 사람을 동경하고 따른다.

그래서 골목대장의 길은 외롭고 힘들었다.

딱지, 구슬치기, 미니카.

아이들이 한 번쯤 유행을 타고 해봄 직한 놀이 중에 하나라도 최고의 자리를 놓치면 안 됐다.

대장직은 그 시절 누구나 원하는 자리였다. 실제로 정당한 계승이 아닌 철저한 실력으로 그 자리를 찬탈하려 한 아이도 있었다. 멀리 갈 필요 없이 당장 상진이 이놈도 술에 취한 빈틈을 노려 도전했으니 말이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한 번도 내 왕좌에서 끌려 내려온 적이 없었다. 이번 서바이벌도 마찬가지다. 정정당당한 승부를 들먹이기엔 이미 너무 먼 길을 와버렸다.

그래도 나름 탄창에 들어가는 비비탄 숫자를 확인하거나 가늠자에 눈을 대보며 제법 진지한 모습이었다. 그저 그럴싸한 외관만 보고 결정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전 이걸로 할래요.”

“난 이거.”

“저도 골랐스므니다.”

각자 고심 끝에 고른 총들은 제각각이었다.

혹시나 같은 총을 고를까 봐 4개씩 사놨는데 나머지 총들은 또 기약 없는 악성 재고가 되었다. 하나씩만 사 놓을걸.

세 사람은 달력에 그간 모아둔 돈들을 찍 긋고 남은 돈을 갱신했다.

“그래. 오늘은 적당히 과녁이나 쏘고 내일 점심때 본격적으로 하자. 어때?”

“내일 어디서 하게?”

“학교. 저 학교, 삼정그룹에서 샀지? 저기 내일 하루 빌리자. 저번처럼 길에서 하면 어르신들 다칠 수도 있으니까.”

나는 문방구 앞에 군데군데 유리창이 깨지고 페인트칠이 벗겨진 낡은 폐교를 가리켰다. 내가 다니고 졸업했던 작은 분교였다.

견물생심.

문방구에서 살다 보니 문만 열고 나오면 정면에 이 폐교가 보였다. 그때마다 옛 추억이 떠올라 한번 들어가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굳이 남의 사유지를 허락도 없이 침입할 정도로 간절하진 않았다.

총싸움을 핑계 삼아 돌아다니며 혹시나 잊고 있었던 추억을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건넨 제안이었다.

“그렇게 하죠.”

“너튜브 영상 보니까 저런 데서 서바이벌하더라. 재미있겠네.”

서바이벌이라는 거창한 명칭을 붙이니 다 큰 어른들이 비비탄 총을 가지고 논다는 낙인이 조금 벗겨진 기분이다.

“그런데 과녁은 어디 있어? 빨리 한번 쏴보고 싶은데.”

나는 두리번거리는 철진을 말없이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 또 그러기만 해봐! 진짜 가만 안 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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